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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조의 주제의식
# 서정적 自我와 詩精神
김준오 교수의 이론을 빌리면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정신(詩精神), 또는 시적 세계관이나 비전에서 찾아야 한다. 서사(서사시, 소설 등)나 극과 구분되는 시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있다. 여기서의 동일성이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말한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의 '나무'
이 시의 화자(話者)는 유성에서 조치원, 공주, 온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여러 나무들을 만났다. 그 나무들은 화자의 의식 지향에 의해서 수도승과 과객과 파수병으로 이미지화되어 화자의 가슴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마지막 연에 와서 어느새 화자와 일체가 되어 버린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의 이미지들은 화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뽑아 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 곧 그의 인격이 된 것이다.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존재양식이라고 할 때, 시인의 경우 이 반응은 단순한 수동적이 아니라, 그 외부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세계로 변용시키기 마련이다. 자아(自我·시적 話者)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시의 세계는 환상의 세계요, 가정의 세계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인 것이다.
시에서 자아와 세계의 만남을 흔히 동일성으로서의 만남을 지칭하게 되는데 철학자 존 두이는 이를 '미적 체험'이라고 정의한다. 즉 자아와 세계가 각각 특수한 성격을 '상실'하고 하나의 새로운 동일성의 차원에서 승화되었을 때 미적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객일체의 경지,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 현대 과학 철학자)의 이론을 빌리면 "몽상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누가 말하는 것인가, 그인가, 세계인가?"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곧 시의 고유성이 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밤이 자기의 心情처럼
켜고 있는 街燈
붉고 따뜻한 街燈의 情感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
-정현종의 '交感'
이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 곧 인간과 사물의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자아와 세계는 서로 동화되어 어떤 것이 인간이고 어떤 것이 사물이라는 구별 없이 미적 전체로 통일되어 있다. 또한 핵심 이미지인 안개와 가로등의 사물들 사이의 관계도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親和)'의 관계로 인간화된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극과 서사와 달리 자아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두지 않는다. 자아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동화되어 있듯이 서정시에 있어서 대상(세계)은 자립적 의의를 갖지 못하고 주관(자아)에 종속된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가 사용한 '자아의 세계화'나 '내면화' 혹은 '화감(回感)' 등의 용어들은 모두 이런 시적 비전을 제시한 말들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시의 원래의 모습이자 시인이 몽상하고 갈망하는 고향이다. 이런 자아를 우리는 서정적 자아라 부른다. 시조문학도 이와 동일선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주제의식도 서정시의 특징인 시정신, 혹은 시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그 작품의 '중심 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 문제 제기
한 때 문단(文壇) 일각에서 시조에 대한 부정론(否定論)이 파다하게 나돈 적이 있었다. 이야기인즉 원래 시조 명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영조 때의 문신(文臣) 신광수(申光洙, 호는 石北, 저서 '浮海錄' 등)의 '석북집(石北集)'에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당대의 유행가조(流行歌調) 즉 시절가조(時節歌調)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엄격하게 따져서 시조란 음악곡조의 명칭이기 때문에 문학의 범주 속에 포함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시조는 문학 장르 속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이른바 '시조 부정론'이 한 때 나돌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한 명징한 답변은 과연 무엇인가.
시조란 우리 고유의 전통적 정형시다, 3·4조 내지 3·5조가 우리말의 기본 패턴이자 기본 율조다, 따라서 시조란 어쩐지 우리 체질(혹은 호흡)에 알맞기 때문에 창작을 계속한다는 등 지극히 구차스런 시조 옹호론이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시조부정론에 대한 전폭적이고 확고부동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현대시조가 봉착하고 있는 당면과제이자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고민이 아닌가 생각된다.
# 주제의식과 상황파악
현대시조의 주제의식과 형상화(形象化) 문제란 정말 거창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우리가 평생 두고 탐색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학 개론적인 주석을 빌리지 않고 비유로 말하면 문학작품의 주제란 건축공학에 있어서 기초 파일(pile)과 같은 것이다. 주제의식이란 예술 작품에 작자(시조시인)가 나타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사상, 즉 테마(thema)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골격이 드러나도 천박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그 꼬리(상징성 및 암시)가 감추어져 있어도 싱겁고 밍밍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알고 있다.
가령 전봉건(全鳳健) 선생의 작품 '노래'와 서정춘 선생의 작품 '난'을 보자.
저고리
하이얀
가슴에
나부낀
장미빛
고름.
- 전봉건의 '노래'
난을 기르듯
여자를 기른다면
오지게 귀 밝은
요즘 여자가 와서
내 뺨을 치고서
파르르 떨겠지
- 서정춘의 '난'
이렇듯 단 여섯 마디의 스탠저(시의 절. 일정한 운율 구성을 갖는 詩行의 한 무리)를 동원하여 완결 구조를 이룬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시가 갖추어야 할 제반 요소를 모조리 검출해낼 수 있다. 말하자면 상징과 압축, 생략과 비약, 음악성과 회화성(繪畵性), 그러면서도 된장 냄새 풍기는 한국적 그 무엇이 우리들 가슴에 뿌듯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전봉건 선생의 작품 '노래'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떠올릴 수 있다. <저고리>(한국 여인의 옷) <하이얀>(순결·순수) <가슴에>(울렁거림·두근거림) <나부낀>(멋이나 운치) <장미빛>(정열) <고름>(맺음. 시의 완결까지를 포함하여) 이런 연상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또 김구용(金丘庸) 교수나 정공채(鄭孔采) 선생의 작품은 어떤가.
<어떤 주의를 위해서/ 유방이 생겨난 건 아니다.>로 시작되는 김구용 교수의 장시(長詩) 「삼곡(三曲)」을 보면 <그런데 술집 처녀가/ 손을 넣어보더니 웃는다./ "당신 것 참 크네요"/ 수줍은 사나이가 묻는다./ "얼마면 될까"/ "훌륭한 체 마세요, 그러다간 타락해요/ 난 서(署)에서도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걸요. 안심하세요."
이렇듯 이미 허물어져버린 현대 성모럴의 한 단면을 간결하면서도 리얼하게 표출해낸 것이라든지, 정공채 선생의 장시 '美8軍의 車'를 보면 <이국의 나비를 싣고 흘러가는 침대./ 눈에 비극을 흘리우며/ 오늘밤도 공주들은 대개/ 부끄러운 점포를 조그맣게 벌렸다.>는 식으로 동두천이나 파주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한국적 극한상황 - 전쟁이 할퀴고 간 우리 민족의 비극을 이토록 담담하게 표현한 것이다.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 김용택의 '이 바쁜 때 웬 설사'
인간의 극한상황을 이렇게 극명하게 극화(劇化)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긴장의 순간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희화화(戱畵化)할 수 있을까. 김용택의 '이 바쁜 때 웬 설사'는 시 읽는 즐거움을 한껏 안겨 주는 작품이다.
머나먼 남태평양 바닷바람 묻어 있는
육질 고운 참다랭이 배밑살도 놓인 식탁
우리네 잡식성 야망, 목젖을 자극한다.
물덤벙술덤벙으로 흘러온 지난 세월
말자, 생각 말자. 저만큼 밀쳐둔 세상 읽기
한 접시 굴 껍질 위엔
의문부만 쌓인다.
성에 낀 저 창 밖은 바람 또한 흉흉해라.
입에 달던 푸성귀도 어느덧 씁쓰름하고
사는 일 젓가락질이 이리도 망설여지나.
산은 산들끼리 둘러앉아 호연지기 나누는가.
굴뚝새 내려앉은 영하 깊이 잠든 마을, 日出口 잃은 사직의 아침을 더듬으면
아득한 박명의 하늘
성긴 눈발 내린다.
- 윤금초의 '아침 식탁'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조는 어떤가. 역사의식이 전혀 없다. 18세기나 19세기의 방법론을 벗어나지 못한 '음풍농월의 시조'가 지금도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 혹은 자연을 탐미한 시조라는 미명 아래 시조창작이라는 '집'을 지을 때 흙벽돌을 짓이겨 토담을 쌓고 있는 고답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시조시인이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다.
수밀도 고운 꽃이 비바람에 지는구나
덧없이 가는 청춘 너를 보여 서러워라
터질듯 눈물 채워서 쏟아놓을 아픔이여
- 무명씨의 '수밀도'
예로 든 시조 '수밀도'는 차마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기성 시조시인의 작품이다. 앞에서 보았던 무명씨의 '불감증'이나 '개 8', 그리고 '수밀도' 등은 고답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T S 엘리엇은 그의 문학론에서 '시란 살아서 발전하고 있는 전통의 발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러나 그 전통은 과거의 죽은 유물이 아니고, 후대(後代)의 시인과 작가를 통해서 이적(異蹟)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시인의 역사의식을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요, 그 역사의식은 과거를 과거로서만이 아니라 현대에 살아있는 과거로서 의식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극단적인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현대에 사는 몇몇 시조시인은 21세기의 물을 먹고살면서도, 그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갓'을 그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시조의 병폐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문학사적으로) 고시조 작가와 마주앉아서 마치 지상 백일장을 벌이듯 여인의 한(恨), 남녀간의 연정(戀情), 자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등등 지극히 고루하고 안이한 창작 방법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식이 박약하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고시조에 흔히 나타난 주제의식이란 대체로 당쟁(黨爭)에서 패배한 벼슬아치가 초야에 묻혀 충의사상(忠義思想)·은둔사상(隱遁思想)을 회고조(懷古調)·영탄조로 읊은 관념적 유교 이념이나, 황진이(黃眞伊)·한우(寒雨)·홍랑(洪娘) 등 몇몇 기녀(妓女)들이 남녀간 사랑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연시(戀詩) 등 이원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그 예를 다음 인용한 기녀(妓女)의 시조에서 엿볼 수 있다.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쟈랑 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오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수어간들 엇더리.
- 黃眞伊
北窓이 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 林 悌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鴛鴦枕 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니 녹아 잘까 하노라.
- 寒 雨
묏버들 갈히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窓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 洪 娘
사위가 짙푸른데 당돌하게 붉은 사연
꽃보다 더 진한 연정 골짜기에 몸 숨겨도
솔바람 교향악 속에 죄 드러난 속마음.
- 김선자의 '단풍연가'
김선자의 '단풍연가'는 온 산을 불사를 듯 붉게 타는 단풍을 통해 자신의 연정을 표출한, 시적 상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대 연인들이 부르는 세레나드가 아닌가 싶다.
수줍게 웃음 짓는 가을날의 女心이여
빠알간 속마음을 세상 향해 열어놓고
허공에 흩어져버린 그리움을 찾는가.
- 최혜옥의 '석류'
이 작품은 폴 발레리의 '석류'를 연상하게 한다. 석류를 가을날의 여심으로, 빨갛게 익은 석류 알을 세상을 향해 속마음을 열어 놓은 모습으로 본 대목이 그러하다.
여기서 말하는 정한(情恨)이나 남녀간의 연정(戀情), 그리고 시(시조)의 영원한 주제인 서정성(抒情性)의 탐구가 오늘의 시조문학을 이루는 기둥 줄거리로 삼아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한이나 연정을 다루되 그 격조와 문학적 성취도를 한층 높여야 한다는 얘기다.
신은 석양을 그리다가 망쳐 버렸다
앞뒷산 붓자락에
먹물 반쯤
잠겨 버린
이런 날
이른 별빛은
목메이는 설움이다
아니, 서러운 건
별도 아닌
눈물도 아닌
시드는 꽃이다
팽팽한
자존이다
처절한 이 포복에도 까딱 않는 님이다.
- 홍성란의 '황진이 별곡'
저 산 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 넘어 가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벚꽃은
웬 꽃이다요
저 물 끝에 그대 있다면
저 물을 따라가보것는디
저 물은 꽃 보다가 소리 놓치고
저 물소리 저 산허리를 쳐
꽃잎만 하얗게 날리어
흐르는 저기 저 물에 싣네.
- 김용택의 '산벚꽃'
홍성란의 '황진이 별곡'과 김용택의 '산벚꽃'은 격조 높은 시와 시조가 어떤 것인가를 넌지시 귀띔해 줄 것이다.
별떨기 튀밥같이 어지러이 흩어질 때
어둑새벽 등 떠밀며 달려오는 먼 산줄기
풍경이 풍경을 포개어 굴렁쇠 굴려 간다.
자궁 훤히 드러낸 회임(懷妊)의 연못 하나
제각기 펼친 만큼 내려앉은 햇살 속으로
염소떼 주인을 몰고 질라래비, 질라래비….
이 땅의 잔가지들 손잡고 살 비비는가.
질라래비 훨훨, 질라래비 훨훨, 활개 치는 풀빛 아이들
봄날도 향기로 와서 생금 가루 흩뿌린다.
- 윤금초의 '질라래비 훨훨'
# 시대정신의 형상화
거듭 강조하지만 현대에 와서 남녀의 연정, 자연을 관조하는 리리시즘이 시조의 기초 파일(Pile)로 동원될 수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기생 홍랑이나 한우의 작품이 우리 문학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가치기준, 그것은 곧 그들의 작품과 시대적인 배경을 결부시켜 고찰하기 때문이고, 당시의 첨예한 현대성을 너무나 민감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을 평가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 작품은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흘러간 옛 노래도 마찬가지로 '굳세어라 금순아' 하면 1·4 후퇴를 연상할 수 있고, '미아리 눈물고개' 하면 6·25 동란을 상기하게 되는데 문학작품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주제의식 역시 이와 흡사하지 않나 생각된다.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갈파했듯이 '작가(시인)는 시대가 요구하는 상황에 따라 변모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가장 진실한 충실'이라고 했듯, 문학이란 당대의 정서를 아우르는 예술이요, 시인이나 작가는 시대정신을 기록하는 증인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두 편의 작품을 감상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가자.
인제를 넘어 북쪽 한계령 고개턱에서
보았다. 국경으로 몰리어가는 눈, 눈, 눈
순백의 고요한 화해 그 눈부심을 보았다
바위는 바위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의 가슴으로 서로를 묻으며
우리의 동토를 향해 소리 없이 전진했다
용서하라, 끝없이 이어지는 흰 깃발의 행렬
살과 살이 서로 부딪고 뼈와 뼈가 서로 부딪쳐
힘없이 허물어지는 저 국경을 넘어서
달려왔다. 나부꼈다. 그리고 조용히
얼어붙은 우리의 냉기를 어루만졌다
숨겨진 불씨가 일 듯 환한 세상이 열리고
이 땅에 빛나는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울려
싱싱한 화해의 꽃송이로 춤출 때
우리도 하나가 되어 희디희게 쌓여갔다
- 박권숙의 '初雪'
문학평론가 심선옥은 박권숙의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시인은 휴전선 이북을 향해 거침없이 몰려가는 첫눈의 행렬을 통해, 오랜 장벽을 허물고 얼어붙은 냉기를 녹이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시행(詩行)의 서두에 '용서하라, 달려왔다, 나부꼈다' 등의 동사를 앞세우고 "보았다. 국경으로 몰리어가는 눈, 눈, 눈"과 같이 문장을 도치시켜 탄력 있는 리듬과 정서적인 긴박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잦은 쉼표와 마침표의 사용은 짧고 강한 호흡을 형성하여 시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처럼 힘찬 운율과 강건한 문체, 팽팽한 시적 긴장을 통해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침없이 돌파해 나가는 감동을 창조한다'고 역설한다.
쉽사리 야생의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빗물만 마시며 키운
그대 깡마른 反骨의 뼈
식민지 풀죽은 토양에
혼자 죽창을 깎고 있다.
- 고정국의 '엉겅퀴'
고정국의 '엉겅퀴' 전문이다. 신경림 선생은 이 작품을 '엉겅퀴는 엉거시과의 여러해살이풀, 민영 시인이 "난리통에 서방 잃고 홀로 사는"('엉겅퀴꽃') 전쟁 과부로 노래한 뻣뻣하니 깡마른 그 모습에서, 고정국 시인은 식민지의 메마른 땅에서 죽창 깎는 반골의 사나이를 떠올린 것이다. "빗물만 마시며 키운"이라는 수식도 엉겅퀴나 식민지 땅의 초라하고 메마른 사나이를 떠올리는 데 아주 적절하다는 느낌이다'고 내다보고 있다.
# 시조의 주제의식과 발상의 전환
<…시의 근본은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며, 항상 무력한 사람들을 들어 올려 주고 무산자(無産者)를 구휼하고 싶어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그냥 두지 못하는 그런 간절한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를 아파하고 피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며,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또한 정약용은 전남 해남 대둔사의 혜장(蕙藏) 스님을 앉혀놓고 "시라고 하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지. 시를 지으려고 할 때는 사상(철학)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얻어내려는 것과 같아서 평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야"라고 꾸짖었다.
경기대 김제현 교수는 "문학은 시대의 반영이요 인생의 표현이다. 신라의 향가에는 신라인의 삶이, 고려가요에는 고려인의 삶이, 조선의 시조에는 조선인의 삶과 그 시대의 상황이 깃들어 있으며 또한 그 시대는 그들의 특유한 문학형식을 이루었다"며 "오늘날 한국의 시문학에는 한국인의 삶과 현실이 표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이 결코 인간의 삶과 그가 숨쉬고 있는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나는 늘 주장해왔다. 이 말을 부연해서 설명하면 시조문학의 궁극적 가치는 당대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면서,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성을 아우르는 '詩로 쓴 사회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구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아예 담을 쌓고 마치 골방에 숨어서 자위행위(自慰行爲)나 하듯 오늘의 시조가 '마스터베이션 문학'으로 타락해가고 있다는 현상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시(漢詩)의 직역 같은 서정시, 과거지향의 복고주의가 팽만해 있는 '멍텅구리 시조'가 아직도 활개치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이 마당에 아직도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시조가 버젓이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착한 시인들 모두 여기 모여 사네
말채나무, 팔손이나무, 졸참나무, 노린재나무, 배롱나무, 편백, 정금나무, 서어나무, 종가시나무, 은목서, 층층나무, 작살나무, 비목나무, 측백나무, 젓나무, 감태나무, 삼나무?
선암사 찾아가는 길에 처음 만난 서정시인들.
- 정일근의 '선암사 가는 길에'
'선암사 가는 길에'라는 사설시조는 아주 간명한 구조를 보여준다'고 전제한 이지엽 교수는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중장에 우리나라 나무들을 열거하고 이를 '시인'에 비유했다. 같은 나무라도 멀대같고 못 생기고 꺾어지고 비틀어진 각각의 형상이 있을 법한데 이런 사족을 다 집어치우고 나무 이름만 열거한 것이다. 여기에 그다운 특색이 있다. 잔 기교나 말 장난의 유희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꼭 챙겨 필요한 부위에다 콱 박아 놓는다. 이 시에서도 역시 그러한데 초장의 '착한 시인들'과 종장의 '서정시인들'이란 대목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다 시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착한 시인들'이 곧 '서정시인들'이란 것을 힘주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잔 기교나 사족을 다 걷어 내고 '간명한 구조'로 이루어진 '선암사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발상의 변화'를 배워야 할 것이다.
# 주제의식의 확대
이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기존의 문학관,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송두리째 벗어 던지는 그런 아픔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눈 높이'를 상향 조정하여 사물(시적 대상 및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자연주의 탐구 방법'을 뛰어넘어 시조의 주제를 확대·심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시조는 대체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시조가 어떤 충동이나 계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조를 창작하고 싶다는 충동(시추에이션)을 불러일으킨 체험적 사실이나 작자의 생각 또는 감정을 바탕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고정시켜야 비로소 한 편의 시조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경기대 김재현 교수는 시조의 주제 설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제를 설정하는 기준이나 요령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첫째, 독창적인 주제여야 한다. 독창적이란 곧 새로움을 뜻하며 새롭지 못한 주제는 신선한 감동(새로운 서정)과 깨달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구체적인 주제여야 한다. 강렬한 주제 의식에 따라 주제의 범위를 구체화하고 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집약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줄 수 있으며 선명한 의미(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재가 풍부한 주제여야 한다. 아무리 놀랍고 훌륭한 주제라도 그것을 형상화(구현)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재료가 없을 땐 그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주제가 되는 시적 상념은 모든 사물에 대한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프랑스 비평가 베르그송이 말한 시적 정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실재나 실존을 직접 접촉하면서 느끼는 고조된 감정이어야 한다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바와 일맥 상통한다. 깨끗한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아야 시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한 편의 시조를 잉태하게 되는 소재- 즉 제재란 작자(시인)에게 감동을 준 사물의 이미지인 것이다. 시상이나 시정이나 시흥도 사실 시인이 현실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겪은 여러 가지 사물들이나 현상들 가운데서 얻어진 것이다. 그 어떤 충격적인 감동이나 영향으로 인하여 시작의 동기가 마련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란 그대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그 무엇'을 탐구하려는 사람에게만 새롭고 무한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러므로 시조를 쓰고자 하는 이들은 통념적인 생각과 평면적인 지각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눈으로 모든 대상(자연, 인간, 현실, 세계)을 관찰하고 투시하는 감성 훈련을 꾸준히 쌓아 나가야 하며, 서정성을 위주로 하는 주제의식을 사회적·역사적·사상적 방면으로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에겐 절박한 시추에이션(상황)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녹슨 칼로 무디어질대로 무디어진 현대 인간의 감동을 이끌어내기란,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조지훈 선생의 말처럼 시(시조)란 것은 진실한 생각, 진실한 느낌, 진실한 표현을 통하여 나오는 그 자신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체험의 산물(産物)이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이제 시조의 주제의식 설정도 일대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김재현 교수의 말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영탄적 정서를 지양하고 실존의 의미와 현실적 삶의 정서를 노래해야 한다. 현실의식(역사의식)과 현대적 감각이 없는 시조란 현대시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김광균의 '秋日抒情'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 김제현의 '風磬'
한국 주지주의(主知主義) 시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광균 선생. 서구(西歐)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즘 시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그의 시는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 보인다. 이미지 형상화가 회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말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이 얼마나 충격적인 시적 발견인가. 폴란드 정부는 붕괴되었고, 낙엽은 그 붕괴된 폴란드 정부의 지폐처럼 아무 쓸모 없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는 진술은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는가.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같은 대목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절창(絶唱)인 것이다.
김제현 교수의 '풍경' 역시 우리에게 '경이로운 충격'을 안겨 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뎅그렁 바람 따라 우는 그 풍경 소리를 들을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라고 토로한 대목에 이르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달관(達觀)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풍경'은 바로 시적 화자의 전인격적 체험의 산물임을 입증하고, 시인이 몽상하고 갈망하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극명하게 이루어낸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강상희 경기대 교수는 '비어서 넘친다는 이 형용모순을 감당케 하는 사유의 힘은 바로 시인 김제현이 지속해온 시적 탐구의 본령'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