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1 13:27:33
*월 *일
오늘은 우리 할머니 생일
내 생일 케잌에는 후~하고
불었던 촛불이 한개였는데
우리 할머니 생일에는
큰 것 5개 작은 것 4개
하지만 신나는 촛불 끄기
할머니 보다 잘 하는
내가 끈다고 했다
초가 많아서 더 신이 났다!
*월 *일
우리 할머니 나 돌볼 때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화장대에 쓰지 않아
오래 된 화장품을 휴지통에 버리셨다
할머니 얼굴에
요플레가 묻은 줄 알았다
로숀을 거울도 안보고 대충 발라서
군데 군데 하얗게 뭉쳐 있어
내가 골고루 펴 발라 드렸다
고모 시집 갈 때 우리 할머니 화장하니 훨씬 예뻐져서 다른 사람 같아
"준우야" 부르는데도 할머니가 낮설어
고개를 돌렸어 부끄럽잖아
*월 *일
우리 할머니에게 '애기 보다가 늙는다' 라고 말한 그 할머니가 밉다
그런 말을 들은 후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시더니
안되겠는지 할머니가
새빨간 황토팩을 얼굴에 발랐다
빨간 얼굴...기겁을 해서 으앙~! 나는 목청껏 소리쳐 울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빨간 얼굴 괴물이 우리 할머니라니
마침 아빠가 돌아와 날 구해주고 달래주었지만 너무 놀라고 무서워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른 세수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요사이는 하얀색 가면 쓴 것 같은 팩으로 바꾸었다
빨간 얼굴 보다는 나아서 안 울지만 못 마땅해 기어코 나는 할머니 하얀 가면을 벗겨내고 말았다
*월 *일
우리 할머니가 나라면 꼼짝도 못하는 걸 잘 안다
내가 할머니 대장이다
산보하다가 걷기 싫으면 그 자리에 서서 할머니에게 안아달라 떼를 쓴다
걸음마 해야 한다고 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도리도리 하면서 끝까지 버틴다
그러면 항복하고 "에이~ 요녀석" 하면서 날 안아주신다
오늘도 산보시간에
안아 주지 않으시려다
결국 내게 지고 말았다
할머니가 날 안아 주실 때 신음소리
"에이~"를 내가 대신해드렸다
할머니가 고마웠는지 막 웃었다
*월 *일
할머니와 공원에 산책을 갔다
공원 운동기구 있는 곳에서 쉬는데
어느 노할머니가 내가 튼튼하다며
우리 할머니에게 묻는다
"애기 모유 먹이유 우유 먹이유?"
우유 먹인다니까
왜 모유를 먹이지 우유를 먹이냐고
우리 할머니를 나무라신다
"제가 할머니예요.."
노할머니가
"어짠일여..." 그러신다
그나저나 나는 우리 엄마 찌찌도 안먹는데 할머니 찌찌를 먹나?
안나오는데
*월 *일
내가 입원해야 한다
우리 할머니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실 때
할머니 눈이 빨개진 것을 보고
어른은 소리 안 내고 운다는 걸 알았다
집에서 놀다가 조용해
까꿍놀이 하는 줄 알고 찾으면
할머니가 구석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밥 맛이 없는지 먹다 말고는
재미있는 TV 보고도 웃지 않으신다
"괜찮다 걱정 마라 "
할머니가 위로하며 힘을 주신다
난 알지
누구보다 제일 걱정하시면서
안그런 척 하신다는 걸
*월 *일
나는 할머니와 있을 때는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다
하지만 엄마가 오면 마음이 달라진다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엄마 냄새는 편안하고 행복해
혹시라도 할머니가 끼어들까봐
나는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 있다
할머니는 날 보고 '배신자'라고 하면서
화를 안내고 자꾸 웃으신다
날 하루 종일 돌봐 주는 할머니 보다
왜 엄마가 더 좋지?
엄마가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