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1-08
뒷 담 화(談話) 그 리 고 아 전 인 수(我田引水)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오늘은 아침과 저녁으로 테레비에서 두 가지의 말을 배웠다. 아침에는 선생님 방에 들렸다가 테레비에서 어떤 여자 분을 모셔놓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여자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직설적인 부분이 있어서 뒷다마가 아닌뒷 담화(談話)를 하지 않는다는그런 말이었다. 그간에 “뒷다마”로 그러니까? 일본말을 끌어다가 쓴 가볍고 얄궂은 표현으로 알고 있었던 말이 그것이 아니라, 바른 말은 사람 뒤에서 수군수군 “뒤 담화”를 하는 그런 것이란다. 몇 사람이 접어들여서 두런두런 하는 말이 아니어야겠다. 그 대신에 펼쳐지듯 입에서 서슴없는 말들이 확 확 나와 모든 사람의 귓가에 뿌려져야 하겠다. 모여있는 우리들은 어느 사람의 귀를 가렵게 해서는 아니 된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때 지난 뒷 얘기들을 아쉬움과 함께 말한다. 뒷북치는 수선스레 보다는 앞을 셈해보는 계획(計劃)의 언성(言聲)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토론회를 열고있는 것을 내내 봤는데, 그 속에서 “아전인수”라는 알듯 모를 듯 한 말을 들었다. 그 뜻을 찾아 책을 펼쳐보아 가면서 이제야 거지반 알아간다. 아전인수(我田引水)는 제 논에 물 끌어다 대기라는 얘기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뜻하는 말이다. 한두 달 여전 방송에서 비쳐졌듯, 서로가 갈급한 물들을 제 논으로 돌려대려고 안간힘을 써대는 모습들을, 곧 우리는 불볕에 타 가는 한낮의 모습들을 구경하듯 보아왔다. 이럴 즈음에 인쇄소 일을 하시는 여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시골마을에서 연세 많으신 아버님께서 논밭농사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 마을 분들이 제일 어른이신 그 분의 논에부터 먼저 물을 대라고 요즈음 들어서는 매년마다 그렇게 대접(待接)하는 기다림 들이 있으시단다. 그 분이 들려주시는 다른 재미 섞인 아버님에 관한 말씀은, “저의 아버님은 주변의 자식들이 찾았을 때에 다른 여타의 것은 다 손에 들려줄지라도 농사일에 들어가는 밑거름만은 주지 않으신다”는 농삿일을 천하의 대본(大本)으로 삼고 계시는 듯한, 좋은 얘기도 해주셨다. 농사를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아전인수보다는 타전인수(他田引水)라고나 할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순리(順理)가 필요하리라 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물가는 대로 사용하고 흘려보내는 흘리는마음가짐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하겠다. 들어 닥친 물은 이제 내 물이 되었다고 해서 가두어 놓고만 있어도 농사가 아니 된다. 물 빼어주기를 하여야 될 때는 여는 일을 하여야되고, 흘러들어 온 물은 나갈 때가되면 내보내어야 한다. 더 나아가지 않고 갇혀서 고여진 물로만 있으면 그 물은 썩게된다.
몇이서 접어들이는 뒷담화나, 제 논만을 여기는 아전인수는 공동체의 저해요소(沮害要素)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아래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2-45)
공동체 이야기
동 정(同情)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전서 3:8)
우리에게 어느 교회의 사모님께서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 사모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사모님께서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체휼(體恤)하는 생활을 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체휼은 동정(同情)이다. 동정이란 말이 “동정 받기 싫다”는 등의 말로 인하여, 공연(公然)한 말로 쓰여지지를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렇지만 동정은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동정은 예사로이 말하듯이, 하고 그리고 받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한마음을 품고 서로 정겨움을 갖는 것이다. 동정(同情)은 개체(個體)라고 여기는 중에 상대에게 가할 때 상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오히려 동정(同情)은 집합체(集合體) 안에서 발휘될 때에 치솟아 오르는 역동(力動)이 된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는 것은 서로 마주보기보다는 함께 앞을 보는 것이다. 그럴 때에 서로라는 말보다는 같이 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은 우리네들 넷이서 함께 일들을 위하여 집에서 나섰다. 다른 일도 있지만 주된 한가지의 일은 머리를 자르고 손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밥상 위의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있듯이 나란히 함께 걸었다. 밥상에 둘러앉아 상대하며 숟가락 젓가락질을 할 때에는 먹는데 성급하여 그런지? 묵묵하던 우리들이 한 길에서 앞을 보고 걸을 때에는 이말, 저말 말들이 많아져서 좋다. 밭 녘을 걸을 때에는 심겨서 헌칠하게 자라 주렁주렁 달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 큰길로 나서서는 여기가 어느 곳이냐?는 등, 내가 오게된 곳은 저곳으로부터라는 등 길과 방향을 묻고 나누는 이야기들, 하나가 묻고 다른 한 명이 그저 대답만 해주는 그런 우리들이 아니라, 서로 저마다의 말들을 내어놓고 나누며 갈 수 있어서 걸음걸음이 가볍다. 한가지를 이루며 뜻을 가지고 가는 동정(同情)은 날아갈 듯 한 가벼움을 가져다 준다.
함께 뜻을 이루어 가는 동정하는 일들이 한번은 예수님 앞에서 이루어졌다. 듣고 배우기 위하여 집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기에 몸 들여 밀 틈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예수에게 보이려고 네 사람이 메워 왔으나, 그들은 문을 통하여 걸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지붕 위로 올려가 그곳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방안에 예수님과 함께 모여있는 사람들 앞으로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사랑스러운 믿음을 보고 그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셨다(마가복음 2:1-12)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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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터 공동체 가족
차현선
김귀숙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2000년 8월 9일에 오신 문창수 선생님이 대전 집에 가셔서, 오랫동안 이 곳에 오지 않으시기에 우리들 이름에서 빼었습니다.
☻ 새터 공동체에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자 합나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성남교회안수집사회.김규복(황선업).한삼천교회.주식회사EG(최기남).왕지교회영운교회.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8인).성남교회안수집사회(박정훈.박영민외여러분).김태준.어귀녀.박종만.이정애목동교회(조정래).채윤기(박현실).진수정.박정도.예수마을.대덕교회.대전서노회.한삼천교회.찬미교회.옥천동부교회.김영창.임찬양.그리스도의집.판암제일교회.대전베데스다선교회(박경애).이원교회.헤어스케치미용실.이종국.유인숙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