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바람에게
모든 잎사귀는 떨어지고 난 나무들은 춥고 배고프고 불쌍하게 겨울을 난다
그 음산한 겨울산을 어김없이 지키고 있는 바람이 있다
눈보라를 휘날리며 겨울산을 휘젓고 다니는 황량한 바람은
산정과 계곡을 넘어 몇 날인지 몇 천년인지 알수도 없는
오랜 세월의 언덕을 차례대로 넘어왔다
나무들이 무성한 숲속에서
목마른 갈증을 풀어 내느라 돌아 앉았던 바람은
고요 가득한 겨울산의 호흡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얘기들
해묵은 나무들과 부러진 가지들이 밤새 하는 얘기를 들어보라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할말 누가 더 많지 않겠는가
대지는 우리가 모르는 신화의 광장
신들의 올림픽이 열리는 제우스의 신전에서부터
말미잘처럼 웅크린 아드리아해안을 배회하는 물방울의 요정들까지
자신들만의 전설을 안고 이제는 완전히 건너가버린 세월의 뒤안길에서
빈약한 현대인들의 역사의식이 자신들을 버린 것이라고 하지
간사하고 속좁은 인간들은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지 않지
사실 신들이 지배하던 그때와는 모든것이 다 변했지
그시절엔 제우스나 헤라가 아니더라도 신들이 모든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신들 조차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심지어 인간들에게 물어가며 뒷방에서 조용히 살아야 할 지경이지
현대는 인간이든 신이든 뭘 알아야 말 이라도 한마디 거들수가 있지
겨울밤 숲속에서 들리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모든 세상의 지식과 역사속에 몰아친
산자들과 죽은자들의 한맷힌 넋두리이며
이 겨울을 지나서 봄이 오기 까지는 그누구도
바람과 수많은 나무들이 투덜대거나 날카로운 소리로
자기가 누구인지도 왜 사는지도 모른채 살아가는
속물같은 인생들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 겨울 어쨌거나 계곡에서부터 산 능성을 휘저으며
바람은 독재자처럼 폭력적으로 산을 지배한다
바람이 화를 낸것처럼 니뭇가지들을 부러트리며
새차게 나무를 흔들어 댈때마다
성가시다는 듯 신경질적인 몸부림을 하지만
어린 나무와 이제 막 자라난 풀잎들과
혹은 양지비른 경사면에서
꽃망울을 피워 올렸거나 꽃잎을 열고
겨울 경치를 구경하던 꽃이라도 있다면
이 겨울 바람의 휘몰이질을 견디느라
겨울밤은 길기만 한 것이다
이 겨울 바람이 불어대는 밤을
뜬 눈으로 목격한 청춘을 생각한다
지리산 이었다 그리고 구름위에 있는 집 장터목산장이었다
기괴하거나 신비롭거나 충격적이었던
높은 산정에서 일대일로 만난 바람과의 조우
나는 청춘이었고 바람은 매서웠다
몇몇의 산꾼들과 함께 나누던 산행 얘기와
지리산의 전설을 베게삼아 늦은 잠을 청할때였다
조용하던 낮의 고요는 밤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괴팍하고 앙칼진 마귀할멈같은 산바람이 휘파람을 불며
지리산의 준봉들을 차례대로 휘돌아 지금은
잠을 청하는 나에게 군림하러 온 것 처럼 굴고 있었다
세상에나 그렇게 앙칼진 바람을 만난 것은 악몽이었다
하루 종일 산행으로 지친 내 몸을 다스리기도 힘드는 나에게
지리산 장터목 산장을 찾아 온 바람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밤새 끊임없이 왱왱대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침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산장으로 들어오는 전깃줄을
지리산 칼바람이 마치 전기톱을 귓전에 대고 울리듯이
쉬임없는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불면의 시간은 해가 훤히 밝아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천하를 주름잡는 바람이 그렇다고 나쁜 역할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하늘과 대지를 이어주는 전령의 역할은 바람이 하는 중요한 일이다
바람이 아니면 무었이 허공을 가로질러 와서
대지에 뿌리를 내린채 오직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꽃들과 나무들과 온갖 식물들에게
자기들의 키에도 닿지 않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머나먼 하늘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미운정도 고운정도 다 겪어 낸 우정의 사이라고 하겠다
청춘이 청춘에게
그대는 마른 꽃대궁에서 솟아나는 새순처럼 상기로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