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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재신' 아시아 최고 부자, 리카싱 청쿵그룹회장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를 중퇴한 가난한 소년. 찻집 종업원, 시곗줄 외판원 하며 華商의 꿈을 키운 노력파. 22세에 창업해 54개국의 500여개 기업을 거느린 천재적 기업인. 개인 재산 33%, 6조원을 내놓은 그가 말한다. “진정한 부귀는 금전을 사회 봉사에 쓰려는 참된 마음에 있습니다”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개인 재산만 188억달러(약 18조원). 아시아 최고이자 세계 10위의 부자인 리카싱(78·李嘉誠의 캔토니즈식 발음·이하 모두 홍콩 캔토니즈 표기법 사용) 청쿵(長江)그룹 회장이 직접 운전대를 붙잡고 차를 몰다니! 지난 10월 20일 오전 6시50분 홍콩섬 남쪽 풍광 좋은 딥 워터베이(Deep Water Bay)의 홍콩골프클럽 입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7~8년쯤 됨직한 곤색 BMW 500의 운전석에서 내리는 이는 분명 리카싱 회장이었다. 경호원 한 명이 미리 주변을 지키는 가운데 바로 뒤따라온 차에서 2명의 경호원이 이어 내려 그의 곁에 밀착했다. 하지만 삼엄한 분위기는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옷차림새. 170㎝쯤 되는 적당한 키에 창이 달린 흰색 모자를 쓰고 있다. 흰 반팔 티셔츠에 연한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다. 양말과 신발·승용차 모두 허름하다. 명품 브랜드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찾을 수 없었고, 트레이드 마크인 커다란 까만 뿔테 안경도 여전했다.
부자 중의 부자, 그래도 직접 운전
한쪽 손에 아이언 골프채 하나 달랑 들고 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도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매일 아침 골프를 치세요? 얼마나 운동하세요?”고 묻자 반가운 듯 편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건강 관리를 위해 이만한 게 없지요. 파3짜리 9홀 구장이잖아요. 두 번 도는데(그러니까 18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15분 만에 다 마쳐요.”
환한 웃음과 함께 울려 나오는 경쾌한 목소리가 상대방 마음을 짜릿하게 만든다. 첫 느낌은 두 가지. 먼저 리 회장의 영어 발음과 표현. 고령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고 완벽했다. 그룹 관계자들을 추가 취재해보니 “리 회장은 지금도 퇴근 후 자택에서 TV 프로그램의 영어 자막 등을 보며 큰소리로 읽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두 번째는 빠른 걸음걸이. 1940년 고향(광둥성 차오저우·潮州)을 떠나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온 그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학교(중학 1년)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위해 철물점, 시계, 플라스틱 혁대 가게 등에서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홍콩섬과 카우룽(九龍)반도 등을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걸었다고 한다. 중대 결단을 내릴 때는 홍콩섬 센트랄(中環) 사무실에서 자택이 있는 리펄스 베이까지 10㎞ 거리를 걸어 다닌 적도 부지기수다. 속보(速步) 습관은 그래서 생겼다.
그는 홍콩섬 청쿵센터빌딩 맨 꼭대기인 70층에서 홍콩과 아시아를 호령한다. ‘재신(財神)’ ‘상신(商神)’ ‘초인(超人)’이라는 극존칭으로 불리는 그는 재산·학력·혈연 등 모든 면에서 제로(zero·無)였지만 아시아 최고의 기업군을 일궈낸,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런 마력의 비밀이 궁금했다.
※리카싱 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과 25일 두 차례 홍콩골프클럽 앞에서 이뤄졌다. 모두 오전 6시30분과 6시50분 등 이른 아침. 리 회장은 홍콩은 물론 세계 각국 수많은 기자들의 취재 표적이 돼 왔지만 언론과 인터뷰를 극력 사양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직까지 그 흔한 자서전 한 권 낸 적이 없다. 하지만 리 회장은 두 차례의 현장 인터뷰를 파격적으로 허용했다. 또 비서진에 그날 한 구두(口頭) 인터뷰 내용을 직접 구술해 기자에게 전달토록 직접 지시하는가 하면, 서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신속하게 전해오는 등 각별한 정성과 관심을 쏟았다. ‘정확한 워딩(wording)을 위해서’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가령 그는 평생에 걸친 자신의 비즈니스 모토(motto)와 관련해서는 “꼭 기사에 넣어달라”고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업에서 성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열심히 일하고 인내력과 강한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아요. 더 중요한 것은 지식(knowledge)입니다. 특히 자신의 비즈니즈 분야에서 가장 업데이트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현재를 넘어 미래 자기 비즈니스가 어떻게 발전할지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세 번째는 정직과 신뢰로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reputation)을 쌓는 것입니다.”
그가 의미하는 지식은 단순한 기술이나 석사 박사 같은 학위가 아니다. “더 넓은 비전과 비판적 사고 능력, 건설적 진보를 위한 논리적 귀납 같은 것”(2003년 12월 베이징 이공대 강연)으로 세상을 보는 더 높은 안목을 뜻한다.
외판원 시절 그는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바쁜 와중에도 영어 단어장을 만들어 틈날 때마다 외우곤 했다. 또 번 돈을 아껴 동년배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산 다음 퇴근 후 집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과서를 읽고 또 읽는 ‘자수자학(自修自學)’을 했다고 했다. 그의 독서 습관은 6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쉴 줄 모른다.
여든 가까운 고령임에도 세계 변화와 정세에 정통하고 최첨단 IT 분야까지 소상하게 꿰뚫고 있는 것은 취침 전 최소 30분 이상은 책을 읽는 평생의 불문율 덕분이라 한다.
사업 모토는 ‘안정 속 전진, 전진 속 안정’
-지금까지 비즈니스 모토(motto)는 무엇입니까?
“안정을 유지하면서 전진하고, 전진하면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發展中不忘穩健, 穩健中不忘發展)이라는 말을 평생 새겨 왔습니다.”
그렇다. 리 회장이 지금도 매우 보수적인 회계방식을 적용하고, 그룹 전체의 현금 흐름을 극도로 중시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는 1956년 이후 빚을 거의 지지 않는 ‘무(無)부채, 안정 경영’을 반(半)세기에 걸쳐 실천 중이다
“아무리 늦게 취침해도 오전 5시59분쯤 일어나요.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기온이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골프장에 갑니다. 전문 레슨을 받은 적은 없어요. 골프를 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전략을 잘 짜는 것이라고 봐요”.
그는 골프 수준을 묻는 기자에게 “싱글이나 보기 플레이어 정도는 못된다. 하이 핸드캐퍼(high handicapper)인데, 동반자(partner)로서 즐겹게 어울려 칠 만한 수준”이라고 겸손해 했다.
건강 관리술도 골프를 제외하면 특별한 게 없다. 술은 와인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담배, 춤 등은 아예 문외한이다. 저녁 약속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일찍 퇴근한다. 고기보다는 야채와 두부 등을 즐기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1967년부터 지금까지 65~68㎏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 리카싱 회장의 자선사업은 단순히 돈을 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직접 학교 등을 찾아 어려운 이들을 격려한다. 중국 소수민족의 초등학교를 찾은 리 회장.
“업무중 90% 5~10년후 고민… 은퇴 생각 안해봤어요”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매일 세계 각국 유명 신문들의 제목을 훑어본다. 관심있는 글로벌 경제 관련 기사 몇 개는 탐독한다. 출근 후 집무실에서 받는 각종 보고는 15분을 넘기지 않는 게 철칙(鐵則)이다.
―퇴근 후나 주말 남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시나요?
“주로 미래를 생각한다고나 할까요…. 업무시간 중에도 90% 이상은 내년이나 5년, 10년 후의 일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데 모두 바칩니다.”
리 회장은 지금도 자신이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를 8분 빠르게 맞춰놓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한 발 앞서 준비하는 철저한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어로 ‘8(八·빠로 발음)’은 돈을 번다는 뜻인 ‘發(파)’와 발음이 비슷하다. 중국인들이 8이란 숫자를 좋아하는 이유다. 사무실 전화번호 끝자리 4개도 모두 ‘8’이다.〉
미래를 대비하고 연구하는 그의 노력은 1970~1980년대 고속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22세 때(1950년) 청쿵(長江)플라스틱을 창업한 데 이어 1971년에는 청쿵실업(부동산)을 만들어 주력사로 키웠다. 1979년에 또 다른 주력사인 허치슨왐포아(항만·전화·에너지·호텔 등 종합재벌), 그리고 1985년에 홍콩전력…. 사업 확장 때마다 그는 대성공을 거뒀다. 타이밍을 제대로 살리는 발군의 비즈니스 감각 때문이었다. 2003년부터는 3G(3세대이동통신)사업에 총매진 중이다.
―승승장구하신 사업 역정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1950년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였어요. 5만 홍콩달러(약 600만원)가 가진 돈의 전부였는데 너무 적었어요. ‘가진 것은 지혜와 학습과 노력뿐’이라는 각오로 최신 흐름을 쫓는 데 매진했어요. 1950년대 후반 ‘플라스틱’이라는 영어 잡지에서 플라스틱 조화(造花)가 히트할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어요. 성공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죠.”
그는 그러나 조화 생산기술을 배워야 했다. 즉시 이탈리아로 날아가 선진 제조 현장을 둘러봤고, 이후 에너지를 연구 개발에 쏟아 부었다. 결국 7년 만에 플라스틱 조화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 사업장을 만들어냈다. ‘조화 대왕(大王)’ 별명은 이래서 생겼다.
―본인이 일구신 사업에 대해 자랑스럽겠지요. 스스로도 ‘나는 훌륭한 비즈니스맨’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정반대인데…. 나는 훌륭한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첫째, 다른 사람 접대에 능하지 못해요. 둘째, 비즈니스관계를 맺는 데도 서툴고…. 마지막으로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감정에 너무 쉽게 이끌려요.”
―사업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사업가로서 약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배우고 혁신하고 열심히 일하자고 맘 먹었어요. 그리고 그것들을 좋아했어요. 이런 것들이 내 사업이 계속 클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봐요. 핵심 사업 영역에 초점을 맞추면서 확장을 위해 다른 영역을 늘 모색해 왔습니다. 또 여느 사업가들처럼 상대방을 접대하고 사업 파트너들과 어울리는 데 쓰는 시간을 최소화했어요. 대신 스스로 공부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힘을 키운 게 사업 성공의 핵심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업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은 아니겠지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이런 것이 인생에서 궁극적인 의미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것을 기꺼이 내 필생의 사업이라고 여깁니다.”
1980년 ‘리카싱기금회’를 만든 것도 이런 맥락 때문. 그는 리카싱기금회를 ‘셋째 아들’이라고 부른다. 기금회에 투입한 개인 재산만 80억홍콩달러(약 1조원)를 넘는다. “하루 10시간의 업무시간 중 6시간은 청쿵그룹 일에, 나머지 4시간은 기금회 활동에 쏟고 있어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좋은 책을 읽거나 골프에서 나이스 샷 할 때, 자선활동을 할 때, 가까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친구들을 사귀는 순간…. 이런 것들이 내가 감사하는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가장 즐기는 것은 내 시간과 에너지를 (리카싱기금회가 벌이는) 교육과 의료건강사업에 쏟아 부을 때입니다.”
리 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기금회에 낼) 수표에 그냥 서명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과정에 직접 몸 담는 걸 좋아합니다. 봉사활동의 효율성을 평가하고 직접 찾아가봄으로써 돈의 진정한 가치와 내 사업의 의미를 새삼 발견하는 것이지요. 이런 때가 가장 큰 즐거움(the greatest joy)이에요.”
리 회장은 올 8월 총재산의 3분의 1(63억 달러·6조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 사고는 재산을 아들이나 손자에게 물려주는 것이지만, 이런 구습을 바꿔 사회로 돌려주는 즐거움과 보람이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부(富)는 무엇입니까?
“부(富)는 많아도 귀(貴)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요. 진정한 부는 자기가 번 금전을 사회를 위해 쓰려는 속마음(內心)에 있다고 봐요.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바른 뜻(志氣)’이 없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最窮) 사람입니다.”
좌우명은 ‘의롭지 못한 채 부귀를 누림은 뜬구름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논어의 한 구절이다. 집무실에 걸려 있는 대형 동양화도 그의 맘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림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구 ‘山中問答(산중문답)’이 쓰여 있었다. (나에게 ‘무슨 뜻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가니, 별천지요 인간 세상 아니라네.)
―한국에 대한 인상이 궁금합니다.
“나는 한국인들에게 감탄(admiration)합니다. 한국인들은 애국적이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애쓰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때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라를 살리려 한 데 큰 감명을 받았어요. 한국인들은 산업과 연구·개발(R&D)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GDP 대비 R&D투자 성과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년 후면 80세다. 때문에 그의 건강문제는 세계적인 뉴스다. 작년 8월 중순 리 회장의 건강 악화설이 나돌자 홍콩 항셍(恒生)지수는 하루 만에 300포인트 넘게 빠지며 폭락했다.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안 하시나요? 은퇴 계획은? 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몸이 건강하고 아무 이상이 없는데 나이가 무슨…. 은퇴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다만 2008년부터는 리카싱기금회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작정입니다. 하루 8시간 정도는 자선활동을 해야지요.”
‘청쿵(長江)’이라는 회사 이름은 ‘크고 작은 시냇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정과 사회·기업에서 성공을 넘어 더 넓은 인류 봉사와 헌신의 무대에 몰입하려는 그의 말년은 여전히 20대 청년의 기백으로 충만한 거인의 활보(闊步) 바로 그것이다.
■ 리카싱 회장이 살아온 길
˝의롭지 못한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 … 리카싱의 좌우명
1928년 중국 광둥(廣東)성 차오저우(潮州) 출생
40년 중·일전쟁으로 부모 따라 홍콩 이주
43년 부친 사망. 시계점 종업원으로 취업
45년 플라스틱 혁대 가게 등 외판원 생활
50년 청쿵(長江) 플라스틱 창업
72년 청쿵실업으로 개명. 홍콩 증시 상장(1호)
79년 영국계 허치슨왐포아 인수
80년 리카싱 기금회 설립
85년 홍콩전력 인수
90년 부인 총위엣밍(莊月明) 여사와 사별
92~99년 베이징(北京)대, 홍콩대, 홍콩과기대, 홍콩중문대, 영국 캠브리지대 등에서 명예박사학위
2005년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
2006년 포브스지 선정‘종신 성취상(Lifetime Achievement Award)3 수상
리카싱 은퇴, 아시아 화교 타이쿤의 시대 저물다
자료출처 : (서울=뉴스1) 박형기 중국 전문위원 2017. 06. 21.
홍콩의 재신이자 중화권 최고의 부호인 리카싱(李嘉誠)이 내년 은퇴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아시아 화교 타이쿤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SJ은 리카싱이 내년 7월 자신의 90세 생일에 맞춰 은퇴식을 가질 것 같다며 큰아들 빅터 리 청콩그룹 부회장이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전했다.
리카싱은 화교 인맥의 총본산인 중국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대륙의 전란을 피해 일찍이 홍콩으로 건너왔다. 그는 처음 플라스틱 조화 제조업을 해 돈을 모은 뒤 부동산, 항만 개발 등으로 차차 사업을 확장해 갔으며, 결정적으로 거부가 된 것은 중국과의 거래를 통해서다.
리카싱은 대륙의 항만 인프라 개발에 뛰어듦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주위에서 "중국 공산당에게 돈을 뜯길 수도 있다"며 말렸지만 그는 "돈을 뜯긴다 해도 결국 내 고향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 아닌가"라며 중국 투자에 적극 나섰다. 중국 공산당은 그의 진심을 알아 주었고, 이후 중국 주요 항만 개발은 리카싱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는 중국과의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홍콩의 식민 종주국인 영국의 기업 허치슨 등을 인수함으로써 세계적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 리카싱 뿐만 아니라 중국과 사업을 벌였던 화교 1세대 타이쿤들이 모두 은퇴하고 있다. 설탕 재벌인 말레이시아의 로버트 쿽 , 태국 가축 시장의 왕인 다닌 사라바농트, 필리핀의 신발 재벌 헨리 시 등이 모두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이들은 모두 중국 출신의 화교들로 동남아 상권을 주름잡았다. 이들이 모두 80~90대의 연령에 접어들며 후계자를 선정하고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이들은 중국과의 사업을 통해 세계적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이들은 중국에서 사업기회를 잡았고, 화교라는 특수신분을 이용, 중국의 권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재산을 불렸다. 이들의 후손들이 조상의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이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과의 ‘꽌시’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들이 선대의 재산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WSJ은 평가했다.
청쿵(長江)그룹
전체 길이가 6,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긴 강 '창장(長江)'. 이 강 이름을 광둥어로 읽으면 '청콩'이 된다. 홍콩 최대 부호이자 동아시아 최대 갑부, 「포브스」 기준 세계 아홉 번째 부자인 리카싱(李嘉誠, 1928년~ )이 자신의 기업 이름을 '청콩실업'으로 지은 것은 모든 지류를 수용하는 큰 강과 같은 기업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 줄의 기사에서 돈맥을 발견한 청년 사업가
리카싱은 192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1940년 가족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했으나 아버지가 결핵으로 세상을 뜨자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화학제품 공장에 취직했다. 이 때 익힌 기술과 공장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청콩실업이라는 화학업체를 창업했다.
홍콩의 300여 개 화학 공장 중 중간 정도 규모의 회사에 불과했던 청콩실업이 대 성공을 거둔 것은 '조화(造花)'를 만들면서였다. 어느 날 청년 리카싱은 영문판 화학 전문지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한 화학회사가 플라스틱 조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회사는 조화를 대량생산하여 유럽과 미국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라고 했다.
리카싱은 조화가 대히트할 것이라는 점은 물론, 한발 더 나아가 생명력이 없는 조화의 인기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상했다. 이 경우 처음에 크게 벌고 재빨리 빠지는 전술이 중요하다. 리카싱은 곧장 이탈리아로 날아가 직접 조화 생산 과정과 시장을 돌아봤다. 바이어로 위장해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제조 비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아예 그 회사의 공장에 일용직 직원으로 취직했다. 또 휴일이면 공장 친구들을 초대해서 시내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기술 노하우를 얻어냈다.
얼마 후 리카싱은 홍콩으로 돌아와 곧바로 조화를 개발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조화를 내놓았다. 동시에 '치고 빠지기' 전술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업사원을 최대한 많이 모집해 홍콩의 유명 백화점과 꽃가게, 길거리 리어카에까지 조화를 진열할 수 있도록 했다. 시장은 그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꽃을 좋아하는 홍콩 사람들이 가족에게 조화를 선물하는 일은 유행이 되었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다
이를 통해 청콩실업은 아시아에서 조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화학 업체가 되었다. 그러나 청콩실업이 실제로 크게 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부동산 투자였다.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1967년 봉기 "반영폭동(反英暴動)이라고도 한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홍콩의 좌파노동자들이 주도한 반식민지 운동이다. 홍콩 곳곳에서 경찰과 노동자들의 무력충돌이 잇따랐고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공산당이 싫어 남하했던 사람들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고, 많은 사람과 자본이 홍콩을 빠져나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홍콩을 떠났고, 토지와 집값이 급락했다. 하지만 리카싱은 정치적 혼란이 일시적일 것으로 보고 저가에 부동산을 매입했다.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청콩실업은 지속적으로 부동산 투자와 개발사업을 벌여 1972년 홍콩 증시에 1번 기업으로 상장하게 된다.
리카싱은 1979년 영국계 항만 물류기업인 허치슨 왐포아를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갑부로 발돋움한다. 허치슨 왐포아는 1828년 닥터 왓슨(Dr. Thomas Boswell Watson)이 중국 광저우에 설립한 조그만 조제약국이 기원이다. 한국에도 진출해 있는 '왓슨'이라는 드럭스토어(화장품과 기초 의약품 등을 판매하는 약국 겸 편의점)의 '원조'인 셈이다.
1960년대 영국계 허치슨 인터내셔널은 항만회사 왐포아독과 왓슨을 인수하고 부동산 개발사업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대주주였던 홍콩은행은 추가 지분을 인수하고 허치슨 인터내셔널을 1978년 왐포아독과 합병했다. 리카싱은 이듬해 홍콩은행으로부터 허치슨 왐포아의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가 되었다.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을 털어낸 허치슨 왐포아는 승승장구한다. 홍콩항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항만회사에서 유럽, 중앙아메리카, 아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항만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현재 허치슨 왐포아는 전 세계 컨테이너항 업계 점유율 13%를 차지하고 있다.
리카싱이 허치슨 왐포아를 인수할 당시 영국계 자본의 대기업을 식민지의 화교기업인이 처음으로 인수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도 리카싱은 영국계 기업을 여럿 인수했으며, 최근에는 영국의 전기, 수도, 가스 등 기간산업에까지 인수 기업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2011년 8월 리카싱은 자신이 보유한 청콩기건(CKI)을 통해 24억 1,000만 파운드(약 4조 1,524억 원)를 주고 영국 최대 규모의 상하수도 회사 중 하나인 노덤브리언 워터를 인수하기로 합의하는 등 1년 반 동안 영국 기간산업에 세 건의 묵직한 투자를 단행했다. 영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기간산업에 대한 외국인 소유를 허용했다. 여기에 리카싱이 적극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의롭지 못한 채 부귀를 누림은 뜬구름 같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이후 오랫동안 갑부들의 검약과 기부가 미덕이 되어 온 미국과 달리, 아시아의 갑부들은 본인과 가족들은 사치스럽게 살면서도 자선사업이나 기부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리카싱은 아시아 갑부로서는 드물게 검소하게 살 뿐 아니라, 자선사업에도 열정을 보이고 있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소탈한 이미지의 리카싱은 손수 자동차를 운전하며, 값싼 시계를 차고 다닌다. 홍콩 사람들은 이런 리카싱을 단순한 갑부로 여기지 않고 '초인'이라고 부른다.
그의 좌우명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의롭지 못한 채 부귀를 누림은 뜬구름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는 구절이다. 1980년 리카싱기금회를 세워 지금까지 다양한 곳에 우리 돈으로 1조 6,000억 원 이상을 기부했다. 2006년에는 살아 있는 동안 전 재산의 3분의 1을 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리카싱이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교육과 의료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관둬야 했지만 항상 책을 읽으며 독학해 온 그는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 가장 많은 기부를 했다. 특히 1981년 고향에 설립한 산토우대학에 쏟는 열정은 대단하다. 매년 운영자금의 70%를 대고 있으며 대학 운영위원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다.
결핵으로 숨진 아버지 때문인지 의학이나 약학 분야에 대한 기부도 많다. 이 분야에서 좋은 연구성과를 내고 있는 학교라면 홍콩이나 중국뿐 아니라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나라의 학교에도 거액을 기부하고 있다.
수신(修身)에는 성공했으나 제가(齊家)에는 실패
그러나 근면과 검소함, 자선으로 명망을 누리는 리카싱에게도 이면은 있다. 그는 홍콩의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1960년대에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했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캐나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산혁명을 겪고 중국 본토를 탈출했던 화교 부호들의 공통점 중 하나다.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한 결과다.
2012년 3월에는 홍콩 행정장관 선거를 앞두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지원요청을 거부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부주석은 베이징에서 리카싱을 만나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한 렁춘잉(梁振英) 후보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카싱은 헨리 탕(唐英年) 후보에 대한 지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초 중국 정부도 헨리 탕을 지지했다. 그러나 헨리 탕이 대저택 지하에 일본식 사우나, 고급 와인셀러, 극장 등 호화시설을 불법으로 지은 것이 발각되는 등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중국 정부는 홍콩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렁춘잉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리카싱은 재계와 좋은 관계였던 헨리 탕을 끝까지 지지했다. 결과는 렁춘잉의 당선이었다. 고결한 인품으로 칭송 받는 그가 부패한 관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리카싱은 중국 본토에 위치한 공장에서 '악덕 자본가'의 면모를 보여 비난을 산 적도 있다. 그가 소유한 충칭 시의 바이먀오 유한공사의 노동자 264명이 2011년 회사측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자, 회사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당시 농성중인 한 노동자는 "한 달 꼬박 일해도 1,100~1,200위안(약 18만~20만 원) 밖에 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아들과 관련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장남 빅터가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로 낙점을 받아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아 온 반면, 차남 리처드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편애에 반발해 미디어사업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다. 리처드는 스탠퍼드대학 컴퓨터공학과를 3년 동안 다니다가 중퇴한 후 캐나다 투자은행인 고든캐피탈에서 일하기도 했다.
야심만만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리처드는 '홍콩의 슈퍼 보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스타TV를 설립해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에게 매각하고 이 자금으로 인터넷·정보통신 기업 PCCW를 설립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2009년에는 세계 금융위기로 파산한 보험사 AIG의 자산운용 부문을 인수하기도 했다.
자기 힘으로 부를 일궈 존재감을 증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리처드는 다른 방면에서 가문의 명예에 금을 냈다. 리처드는 스물두 살 연하의 여배우 이사벨라 룽(梁洛施)과 사실혼 관계에서 세 자녀를 얻었다. 룽과의 교제를 강력히 반대했던 리카싱은 2009년 4월 룽이 첫 아들을 낳자 경호원, 보모, 영양사 등으로 십여 명을 고용할 정도로 돈을 아낌없이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쌍둥이를 낳고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던 두 사람은, 2011년 3월 전격 결별을 발표했다. 이후 '룽은 결혼을 원했지만 리처드가 끝까지 반대했다', '처음부터 아이를 얻기 위한 계약관계였다', '위자료가 40억 홍콩달러(5,800억원)에 달한다' 등등. 두 사람의 결별을 놓고 확인되지 않는 루머가 양산되었다.
2세가 타블로이드 신문의 단골 주인공이 되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시아 갑부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체로 '수신'에는 성공하지만, '제가'에는 실패한다. 『논어』의 한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는 리카싱도 예외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