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고구려-의주 검산령 평양 高句麗 (義州 劔山嶺 平壤) 5
句麗錯料下句麗
駐蹕山靑老六師
爲問西京紅拂妓
虯髥客是莫離支
句麗를 그릇 下句麗로 料함이여.
駐蹕山이 푸른 六師를 老하게 하였도다.
為하여 西京紅払妓에 묻노니
虬髯客은 이首離支러라.
下句麗는 後漢書에 말하되 王莽이 高句麗王을고쳐 이름으로 下句麗侯라 하고 尤侗外国竹枝詞에는 高句麗가 下句麗에게 降하였다 하니 다
잘못된 말이다. 駐蹕山은 唐太宗이 스스로 高句麗를 犯할 때 安市에 次하니 北部 傉薩(官名)高延寿와 南部傳薩 高恵鎮이 무리를 들어 항복하니 唐帝가 因하여 幸한바 山을 駐蹕 (皇帝의 馬匹을 駐함) 山이라 하고 石을 勒하여 功을 紀하고 다시 安市를 치다가 能히 빼지 못하였다.
城中에 唐帝의 기를 보고 문득 성위에 올라 소리치는데 唐帝 王道宗으로 하여금 흙을 쌓어 城에 怒하여 江夏 迫하되 数丈이 되지 못하였다.
果毅都尉伝伏愛로 하여금 지키거늘 城主 우으로부터 그 城을 무너트리니 城이 넘어지고 伏愛는 스스로 도망하였다.
城主 무너진 城으로부터 나와 웅거하고 塹을 쌓아 끊고 불을 놓아 돌아다니며 지키니 唐帝가 伏愛를 버리고 詔하여 師를 돌리니 城主城에 올나 사례하니 其時 城主는 場万春이었다.
老는 파리라고 힘없는 모양이니 唐帝의 六師를 파리로 하였다. 西京은 平壌의 一名이다. 紅払은 妓의 総名이라.
莫離支는 句麗의 官名이니 高句麗泉蓋蘇文 称함이라. 蓋蘇文(麗語에 이리갓쇠)은 高句麗 宝藏王 時 人이니 或云 蓋金이라 姓은 泉氏니 自云水 中에서 生하였다 하여 衆을 惑하여 莫離支가 되어 国政을 전념 하니 唐의 兵部尙書와 같았다.
虬髯은 虬의 角과 같은 髯이니 秀美한 수염이다. 蓋蘇文이 모양이 괴결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冠服은 다 金으로 꾸미고 五刀를 차니 左右가 敢히 仰視치 못하였다.
貴人들로 하여금 地에 伏하고 밟으며 馬를 타고 出入에 兵을 陳하고 禁을 呼하니 行人이 두려워 숨다가 坑谷에 떨어지는 者 있었다.
海東神乘虬髯客伝은 唐人이 다 奇異히 여기는 글이니 이로써 그 사람의 為人을 想像할 수 있었다.
대개 夫余의 地가 다夫余氏의 統한바 되였더니 隋唐 때에는 夫余가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때에 海船千艘와 用兵十万이 夫余国에 入하였다고 伝하는 이가 있으니 夫余는 高句麗인데 이때 蓋蘇文이 東部大人의 子로 意気豪逸하여 隋末의 乱을 타셔 中国을 遊歴하여 장차 도모할 뜻을 품었다가 차차 隋交皇의 異表를 보고 드디어 東返하여 王을 廃立하고 스스로 莫離支가 되었다 하였다.
- 한글
고구려를 낮추어 하구려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촉산이 푸른 군사를 허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경(평양)의 기생에게 묻노니
모리체(고구려 관직명)는 이번에는 떠나갑니다.
하구려는 후한서에 왕망이 고구려왕의 이름을 하구려후라 고쳤다고 하고, 외국어록에는 고구려가 하고구려에게 항복했다고 하니 잘못된 말입니다. 주촉산은 당 태종이 스스로 고구려를 침략할 때 안시에 진을 치니 북부 관직 고연수와 남부 관직 고혜진이 군대를 이끌고 항복하여, 당제가 그 산에 행차하여 주촉산이라 부르고 돌에 공을 기록했으나 다시 안시를 치다가 빼내지 못했습니다.
성 안에서 당제의 기치를 보고 문득 성벽에 올라가 소리치니, 당 왕도종이 흙을 쌓아 성을 공격하여 강하로 압박하였으나 수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과의도위 복애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더니 성주 우로부터 그 성을 무너뜨려 성이 무너지고 복애는 스스로 도망쳤습니다.
성주가 무너진 성에서 나와 웅거하며 해자를 쌓아 끊고 불을 놓아 돌아다니며 지키니, 당제가 복애를 버리고 군사를 돌렸습니다. 성주가 성에 올라가 사례하였을 때 그때 성주는 장만춘이었습니다.
'노'는 파리라는 뜻으로 힘없는 모습을 나타내니, 당의 육군사를 파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서경은 평양의 다른 이름입니다. 홍파는 기생들의 총칭입니다.
막리지는 고구려의 관직명으로, 고구려의 개소문이라고 불렸습니다. 개소문은 고구려 보장왕 때 사람으로, 어떤 이는 개금이라고도 했는데 천씨 성으로 물 속에서 났다고 하여 무리를 현혹했습니다. 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니 당의 병부상서와 같은 자리였습니다.
곰머리 같은 수염은 아름다운 수염을 뜻합니다. 개소문의 용모가 기이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관복은 온통 금으로 꾸몄고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귀인들에게 땅에 엎드리고 밟게 하며, 말을 타고 출입할 때 군사를 배치하고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행인들이 두려워 숨다가 구덩이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해동신승곰머리손님전은 당나라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기던 글이어서,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행실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부여 땅이 부여씨의 통치지였는데, 수당 때에는 부여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때 바다에 배 천 척과 군사 10만이 부여국에 들어갔다는 전해지는데, 부여는 고구려인들이었습니다. 이때 개소문이 동부 대인의 아들로 기개가 뛰어나 수말의 난을 기회 삼아 중국을 유력하다가 차차 수양제의 이표를 보고 마침내 동귀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