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대해산
조선의 외교와 군사는 일본이 맡아 보게 됨으로 조선군대는 쓸데없다 하여 이것을 해산하려하는데 먼저 양위한지 2일 곧 7월 14일에 또 몇 가지 협약을 맺으니
1.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2. 한국정부는 법령 급 행정의 중요한 자는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3. 사법과 행정은 서로 구분할 것,
4. 고등관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5. 통감의 추천한 일본 사람을 한국 관리로 쓸 것,
6.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쓰지 못할 것 등이다.
이 결과로 7월 31일에 군대해산식을 거행하니 그때 군대 수는 시위 보병 2대인데 합 3,600명이라. 기병 포병 공병 치중 병합 4백 명과 지방에 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해주 평양 북청 진위보병 8대대 합 4800명 총계 9000여명을 해산하고 이 해산식을 훈련원에서 거행할 새 서소문 대에 있던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에는 그날 아침 대대장 박성환(朴星煥)이 자재로 죽고 그 군대는 난을 일으켜 그 인접 제2연대와 연합하여 종일토록 일병과 교전하다가 저녁에야 진정되었으며 지방에서 강화 분견대가 한참 반항하고 원주의 진위대는 그대로 도주하여 버렸다.
각처의 해산 도주병이 전일 의병과 합하여 각처의 일인을 사살하며 5개년이나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 굴지한 자는 여무하다. 강원도에 민긍호(閔肯鎬) 이인영(李寅榮) 경북에 이강년(李康年) 변학규(卞鶴圭) 신돌석 경기도에 조인환(曺仁煥) 허위(許蔿) 이은찬(李殷贊) 전라도 김동식(金東植) 이학사(李學士) 김해산(金海山) 함경도 차도선(車道善) 홍범도(洪範圖) 황해도 민효식(閔孝植) 이진용(李鎭踊) 경남 유명국(柳明國) 평안도 양혁진(梁赫鎭) 함북 이범윤(李範允) 등이 꽤 오랫동안 견디매 일인과 싸워 그치지 않았다.
그때 군대 해산 책임자는 이병무(李秉武)인데 그 집에 일인 보호병이 파수를 보고 기타 이완용이하 각 대신들의 문간에 반듯이 일병과 조선 순사가 파수하여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금 자유가 있는 국의 각처에는 항일군이 각처에 일어나 혹은 중국 항일군과 합류하여 가지고 전 만주 방면에 싸움이 쉬일 날이 없고 혹은 노서아 공산당과 합하여 외지에 있는 일인을 살해하는 등 조선 사람의 심리는 누를 수 없이 폭발되었다.
일인들의 좁은 생각이 조선의 구천 명의 군인이 큰 걱정거리로 알았다. 이것을 해산하여 안심을 얻으려 하던 것이 도리어 해산 당한 군인들이 각처로 흩어져 크게 소요를 일으켰으니 조선 백성을 무마할 아량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