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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과 악령 역사의 한 끗 차이>의 줄거리: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여호와의 영이 임한 다윗과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 임한 사울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날 때,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오직 한끗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한끗 차이로 인해 절대적인 차이의 결과가 초래 됩니다. 한끝 차이로 시작해서 한 쪽은 축복의 완결로, 다른 한쪽은 저주의 완결로 끝맺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한끗 차이는 지극히 일상적으로 우리에게서 경험 되고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 역사의 한 끗 차이
(사무엘상 16:14~23)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16.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17.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19. 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20.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과 악령 역사의 한 끗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과 악령 역사의 한 끗 차이’
성령의 역사는 은혜와 축복의 역사이고 악령의 역사는 저주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의 역사의 완결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고 저주의 역사의 완결은 영원히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토록 성령과 악령의 역사는 일상생활을 하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경험하는 한 끗 차이에서 시작이 되고 엄청난 차이로 귀결됩니다.
그러면 저주란 무엇이고 축복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가 아닌 우리가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참고로 욥기 3장 25절을 보면 욥이 자녀와 재산과 건강을 잃고 아내가 도망가고 친구와 명예와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하는데 저주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주’란 내가 상실할까 몹시 두려워할 만큼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잃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너무 좋아해서 잃을까 두렵고, 현재 돈이 없더라도 돈 없이 지내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저주는 돈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고 돈을 벌 가능성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건강 가족 직장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축복’은 내 마음에 두렵게 여겨질 만큼 좋게 생각되는 것이 주어지고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순교가 일어났습니다. 순교하게 되면 목숨을 잃는 것이므로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을 잃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상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순교는 저주입니까 저주가 아닙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 잃는데도 순교가 왜 저주가 아닌 것일까요? 순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로 보이는데 그들이 잃고 싶지 않은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다 잃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교하는 기독교인들 중에 순교를 저주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또한 순교를 하지는 않더라도 선진들의 순교를 저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목숨 가족 재산을 다 잃더라도 순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상실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실감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잃을까 두려워한 것이 목숨 돈 가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잃을까 두려워 한 것은 하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순교를 맞이하게 되어도 그들은 상실감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리면 두려울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저주이고 주어지면 축복인데,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를 벗어버리는 죽음은 지금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축복을 제자들에게 변화산의 경험을 통해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막9:5~6절에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황홀경의 고백과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라는 고백이 병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한 번 보면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너무 좋아서 한 순간이라도 이 하늘나라를 놓칠까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산 아래에서 이루고 싶었던 기가 막히게 좋아했던 꿈과 이상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다 망각하면서 여기가 좋다고 하는데 한 순간이라도 이 상황을 놓치는 것을 무서워할 만큼 좋았다는 것인데 천국이 그런 곳입니다. 이 땅에서 그러한 천국을 좋아하여 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반대로 악령 역사의 완결인 지옥의 삶의 특징에 대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으로 가서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봅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천국에서 이쪽으로 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처럼 돈 좋아하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육체를 벗으면 나타나는 놀라운 변화 중의 하나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볼 수는 있지만 갈 수 없는데 이것이 저주의 완성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경험했던 것이 하늘나라인데 놓칠까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한 것이지, 육체를 벗고 부활해서 천국에 올라간 후에는 놓칠 염려가 없어집니다. 지옥에 따로 불이 있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좋은 천국을 보면서도 가질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내 속에 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경험에서처럼 하나님이 무섭도록 좋은 분인데 그곳으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변화 중의 하나는 부자가 이 땅을 생각합니다. 육체를 벗자마자 좋게 여겼던 이 땅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고 안개인 것을 알게 됩니다. 평생 마음을 쏟으면서 돈을 모았지만 지옥에서 보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마음에서 열불이 나는 것입니다. 지옥은 불에 의해서 괴롭힘을 받는 곳입니다. 너무너무 무섭도록 좋은 하나님을 보면서도 못 가기에 열불이 나고, 내가 평생 진땀을 흘려 모으려 애썼던 세상의 가치들이 헛된 것들이며 나를 더럽혔다는 사실에 더블 열불이 나서 타는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임한 사울과 성령이 임한 다윗이 한 공간에 있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악령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명한 구분과 확증을 가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청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악령과 성령의 역사 차이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악령이 사울에게 내려서 무슨 대단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 ‘번뇌하게 한지라’고 합니다. 반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타자 일시적으로 사울이 상쾌해집니다. 이 차이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역사하는 가운데 믿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번뇌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며,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교리적으로 고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번뇌’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아트’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가진 뜻 가운데 ‘놀라게 하다 / 두렵게 하다 / 압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개별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번뇌케 한다.’는 말로서 바로 악령과 성령 역사의 한 끗 차이를 만드는 과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먼저 놀라게 합니다. 사울이 놀란 이유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왕위로부터 사울의 집안이 끊길 것을 예언하게 하시고 사무엘도 사울과 결별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사무엘의 옷을 찢을 정도로 매달려서 백성들과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억지로 사무엘을 대동하여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형식적으로는 왕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왕위를 잃을 위기에서 지켜낸 것인데 사울이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왕위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비어있는 내 마음이 그것만 있으면 채워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옷을 찢으면서까지 지켜낸 왕위가 내 마음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기대 밖의 일이 일어나서 놀라게 되고 당황하고 무서워지게 됩니다. 돈을 좋아해서 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고 많이 벌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대 밖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성취 될 때에 기쁨을 느끼게 되지만 잠시 후면 하나도 채워지지 않았음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두렵게 됩니다. 왕위만 있으면 채워질 것이라고 믿었기에 왕위를 붙잡고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음에 놀라게 되고 그 다음 단계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돌아봐도 왕위보다 좋게 느껴지는 것이 없어서, 가장 좋게 여겨지는 왕위를 지켜냈는데도 내 마음이 채워지지 않기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마음이 비워질까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고독이 두려운 이유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도 내 마음이 비워질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쥐었는데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무엇으로 마음을 채워할지 모르기에 두려움이 생기고 깜깜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과정은 성령의 역사에서도 일어나는 사필귀정의 과정이지만 마지막에서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악령의 역사에서는 마지막으로 압박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채워도 만족할 수가 없고 채워질 수가 없기에 놀라고 두렵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 단계가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기(압박) 때문입니다. 왕위를 좋아해서 가졌는데 채워지지 못해서 놀랐고, 더 이상 채울 것을 찾지 못해서 두려워집니다. 이때에 악령이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가져서 채워지지 않았으면 버려야 할 텐데 왕위의 마음을 더욱 더 밀어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왕위를 가진 것으로 만족이 안 되고 두려워지자 누군가 자신의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이 생기게 됩니다. 왕위에 집착하고 지키기 위해 안 해도 될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실제로는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어 번뇌로 나타나게 됩니다. 소용없는 것에 밀어붙임으로서 집착하도록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 집착은 내가 붙잡는다기보다는 악령이 나를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밤에도 생각나고 길을 가면서도 생각나서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집착의 내용을 보면 악령이 우리 마음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소원하던 것을 성취하여도 더 강하게 집착하고 몰입하면서 번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煩惱)’라는 단어의 번(煩)자를 보면 불 화(火)에 머리 혈(頁)을 씁니다. 생각하느라고 머리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악령이 몰아붙여서 압박을 가해서 집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 자리를 그렇게 좋아하고 그 자리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서 더욱 붙잡도록 압박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도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놀라게 됩니다. 돈이 다인 줄로만 알았던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하늘의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압박 대신에 최고로 좋게 여겼던 이 세상 것들에 대해 죽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갖게 하십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면 악령이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 좋게 여겨지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상쾌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베드로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개인의 말이 아닌 기독교가 표방하는 진리의 총체입니다. 교리를 몰라도 직분이 없어도 예배당이 크지 않더라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그곳에 기독교가 약속하는 모든 복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악령과 성령 역사의 한 끗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게 하시고, 성령의 역사인 십자가 생활화가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