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목완문 해석문
[계목완문]
형조에서 아뢰는 일입니다. 이번에 형조에 내려주신 계목(啓目)은 금년(1893년) 8월28일 전하의 행차시에 호위대 바깥에서 격쟁(擊錚)을 한 사람들의 진정은 정해진 법식에 의거하여 기록 하겠습니다만 진정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남포(藍浦 : 현재의 보령 인근)의 유생(儒生) 김노신(金魯臣), 김정주(金鼎柱), 김욱희(金郁喜), 김상신(金商信) 등은 모두 경순왕(敬順王)의 후예(後裔)들로 벼슬길이 끊이지 않았슴니다. 그리고 후손들 가운데 오류로 인해 향역(鄕役)이 된 자들은 모두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일은 이미 판하정식(判下定式 : 임금의 윤허를 받은 공문서)에 있슴니다.
정식(定式)에서는 오류로 인해 향리(鄕吏)가 된 자들은 정식에 의거하여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하고, 향교(鄕校)와 문묘(文廟)의 임원(任員)등은 새로 임명한다고 하였슴니다. 이는 정식(定式)에 분명하게 실려 있는데도 지금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니 원망을 호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슴니다.
지금 해당 도(道)에서 특별히 향교의 임원으로 임명하는 것을 허락(許諾)하는 것이 어떻겠슴니까?
광서(光緖)19년(서기1893년) 9월 8일 동부승지(同副承旨) 송종억(宋鐘億)이 아룁니다.
“계(啓)를 올린대로 윤허(允許)한다” 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명(命)을 내린 글의 내용을 받들고 살펴서 시행하라.
해당 원정(原情 : 격쟁을 통해 올린 진정서)은 관문(關文 : 조선때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서)의 뒤편에 가록하여 두니 관문(關文)을 받는 즉시 여러 읍(邑)에 공문을 보내 시행하라.
진정서에 의하면 이 내용처럼 만약 그릇되어 향역(鄕役)에 들어간 자들이 있으면 즉시 책임을 면(免)해주고 향교와 문묘의 임원들은 특별히 보충(補充)하기를 허락하니 이후(以後) 일의 전말(顚末)을 낱낱이 회신함이 마땅하다.
남포(藍浦)에 사는 유학(幼學) 김노신(金魯臣) 등의 진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들은 장차 지극한 원통한 일로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님의 수레앞에서 격쟁(擊錚)을 합니다.
저희들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후예들로 벼슬과 고관직을 대대로 이어왔슴니다. 우리 조선에 들어서는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대(玳), 원종공신(原從功臣 : 왕을 수행한공신)이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었던 한(漢),
성균관 제주(成均館祭酒) 자돈(子惇), 이조정랑(吏曹正郎) 윤형(允衡), 함안군수(咸安郡守) 호생(虎生), 보사공신(保社功臣) 영돈녕(領敦寧) 수강(守剛), 낙안군수(樂安郡守) 전(銓) 등은 5-6대 이상의 조상들입니다.
예전에 태종(太宗) 때 김백련(金百鍊)이 상소를 올려 말 했습니다. “ 경순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 실로 이는 우리나라의 밝은 임금이십니다. 오랑캐들을 모두 멸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깨끗이 쓸어버렸기에 백성들이 귀의할 곳이 있게 되었고 상하의 귀신들과 영령들이 모두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슴니다.
대개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운 이래로 어질고 밝은 군주들의 정치를 논할 때면 반드시 경순왕(敬順王) 때를 칭송합니다. 후세에서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함이 어찌 경순왕(敬順王)의 영령이 두텁게 보살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종(成宗) 때에도 후손들을 후하게 보살펴 주라는 말씀이 재삼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슴니다.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도 그 후손들의 생계를 돌봐주고 자손들을 등용하라는 말씀을 하셨슴니다. 이는 모두 역사책에 해와 별과 같이 명백하게 실려 있슴니다. 이는 주(周)나라 왕실에서 보여준 삼각(三恪)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에 드러난 것입니다. 자손들이 남포(藍浦)로 흘러들어와 한결같이 한 곳애 살며 향교와 문묘에서 종사하면서 선비들 앞에서 읍양(揖讓)의 예절을 가르친지 이미 백여년이나 오래 되었슴니다. (사정이 이런데) 동료들이 법도를 벗어나 쉼없이 다툼을 벌이니 책을 읽고 의(義)를 사모하는 선비가 그간 이욕에 구질구질 했던 모습들을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저 안(安)씨, 황(黃)씨, 윤(尹)씨, 최(崔)씨 등 여러 사람들입니다.
*삼각(三恪) : 주 무왕(周武王)이 우(虞).하(夏).은(殷)의 후예를 봉(封)한 것을 삼각(三恪)이라 한다. 앞 시대 국왕들의 후손을 후(厚)하게 대우해준 근거로 사용했다.
저들 족속(族屬) 가운데 한 두 사람이 나중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향소(鄕所)의 임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경신년(1860년,철종11년)에 여러 종친들이 모인 회의에서 태종, 성종, 효종 세 임금들이 저희들을 돌봐주시기로 한 뜻을 낱낱이 진술하여 임금 앞에서 격쟁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 하였습니다.
아, 우리 철종대왈께서는 두터운 후의를 내리시어 (저희들이 맡은) 향리의 역할을 (다른 이들이) 침범하지 말라라고 하셨고 형조(刑曹)에 명(命)하여 과련되는 모든 도(道)에서 그리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 향교의 임원이 된 자들도 계목(啓目)에 의거하여
알맞은 법률을 적용하고, 죄인을 잡으러 갈 때 좌수(座首 : 조선때 향청의 우두머리) 역시 법률에 따라 처리 하도록 하였슴니다. 무인년(戊寅, 서기1878년, 고종15년)과 기묘년(己卯, 서기1879년, 고종16년)에 이르러서는 현재 거주하는 향교의 임원 무리들을 내보낸후, 구유(舊儒)들이 의논한 것이 비로소 청금록(靑衿錄, 유생명부)의 말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일을 부추긴 자들 가운데 향교의 임원을 막은 자들은 종중(宗中)으로부터 의
(義 )를 떨쳐 소장(訴狀)을 내어 해당 현(縣)에서는 낱낱이 조사하여 매우 엄하게 처리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재임(齋任)으로 머물며 물러나지 않으니 지극히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숙청(肅淸)의 날을 맞아 또한 서로 도울 뜻이 없고 그저 일만 점점 어그러지니 이와 같이 계속된다면 반드시 시끄러운 싸움을 끝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천지가 부모와 같이 이 세상을 비추어 살피듯 서둘러 담당 관리에게 명(命)하여 해당 도(道)에 공문을 내서 관할하는 여러 현(縣)의 향교 임원들의 명단에는 반드시 김(金)씨 성(姓)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재주와 지혜가 있고 덕망을 갗추고 효도와 우애를
실행한자를 택하여, 향교 임원의 장(長)이나 우두머리로 삼아주시고 구유(舊儒)들에게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규범(規範)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만약 완강히 거부하거나 적절하지 않는 자는 이름을 거론하고 학행(學行)을 낱낱이 조사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람니디. 계문(啓文)이 내려가는 곳마다 축복받게 하소서.
지금 임금의 명령(命令)에 의거하여 진정서에 대한 답변서를 공문서로 작성하여 김(金 )씨의 여러 친족들에게 배부하라.
진정서(陳情書)에 의거하여 진정의 내용을 영구토록 적법(適法)하게 행하여 바뀌지 않토록 하고 제대로 살펴서 마땅히 처리할 것.
계사년(1893년) 9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