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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81세 회고 김진호 목사
1953년 1월 1일 진해에서
우리 청풍(淸風)김씨는 모든 씨족(氏族) 중 가장 당화(黨禍)의 침해(侵害)를 많이 받은 족속(族屬)이다. 식암(息菴) 김진위(金鎭胃) 상공(相公)과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 상공(相公)이 다 오인(午人)으로 더불어 대오(大忤)하여 세부양립(勢不兩立)이 되었고 그 후에도 당화(黨禍)가 있을 때 피해가 부소(不小)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직장(直長) 선조(先祖)가 설가유령(挈家踰嶺)하여 우리 김(金)이 조남(鳥南)에 전거(轉居)하기 시작함은 그런 당화(黨禍)에 침입을 받지 않으려 함이요, 그 후에 처사공(處士公) 검사제(儉沙齊) 양위(兩位)의 정훈(庭訓)이 있어 나의 자손은 성리(聲利)의 세상을 멀리하고 임천(林泉)에 살며 도의(道義)를 배우고 시례(詩禮)를 강하여 구명(軀命)을 보전하라는 유훈(遺訓)이 계시였다.
나는 그런 가정에서 출생하여 부조(父祖) 양위(兩位)의 깊은 사랑으로 어릴 때 종 조부(從祖父) 율제공(栗齊公)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서는 종증조(從曾祖) 진사공(進士公)에게 글을 배워 약간의 천인(天人)의 오의(奧義)를 듣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종교와 철학과 시문과 역사이었다. 일찍 국사를 읽고 한탄하기를 우리 국사는 혈(血)의 사(史)라 곧 사람을 죽이는 역사요 당화(黨禍)로 인하여 황실(皇室)을 짊어지고 사류(士類)를 참살하는 외에 다른 역사가 없음을 개탄하였다.
그러다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전국이 소요(騷擾)함에 문경군(聞慶郡) 휘양산이라는 깊은 산중에 수년간 은거하였다. 그러다 친환(親患)이 급중(急重)하여 가친(家親)을 모시고 도로 고향인 함창(咸昌) 가장리(佳庄里)에 환고(還故) 하여 불행하게도 가친은 병신년(丙申年)(1896) 12월 초 8일에 별세하시고 자친(慈親) 진주(晉州) 강(姜) 씨는 기미년(己未年)(1919) 11월 16일에 별세하시니 이로부터 애통은 말할 수 없는 중 경험이 없는 살림 맡아보게 되어 가산은 점차 빈곤에 들었다.
시국에 대하여 항상 비분하던 중 그 후에 또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 일병(日兵)이 조수(潮水)같이 밀려 상주(尙州) 함창(咸昌)을 지나는 지나는지라 그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던 동학이 별안간 일군(日軍)에 가담하여 군수품을 운반하여 협력하는 것을 나는 목도하였다. 저 동학이 우리의 원수인 일병을 불러 들였다 생각하고 나는 단연 동도(東徒)를 배척할 것이라 생각하고 비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몸이 상인(喪人)으로 시국에 망령 되여 참가할 수 없다 생각하고 농사에 종사하며 여가(餘暇)에는 족숙(族叔) 규평(奎衡) 씨와 글 읽기를 힘쓰다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정훈(庭訓)만 지키고 있을 수 없어 보호조약 6년 전(1899) 봄에 경성에 올라와 있으며 시국을 관찰하였다.
이때에 소위 사자(士子)의 처신을 어찌하여야 옳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 마침 송연제(宋淵齊) 장문인(丈門人)인 김유(金鍮)형을 만났다. 김형은 학식이 초월하고 가장 애국사상에 불타는 지사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 바른 길을 찾으려고 김형과 같이 정부 참찬인 허위(許蔿)선생을 가보고 또 판서(判書) 이용태(李容泰) 씨를 가보고 하였으나 다 토론하여 의사를 교환할 수 없었다.
이 판서(判書)는 호(號)가 노암(魯菴)이다. 몇 번 면담한 후 김형과 나를 보고 같이 그 집에 와 있기를 청하였다. 그 집에 다니는 인사는 다 벼슬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요 보기는 다 지사인 듯하나 모두 엽관운동(獵官運動)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암장(魯菴丈)은 조용한 시간을 얻어 김형과 나를 불러 시대상을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노암장은 우리나라의 잃은 땅 서북(西北) 추도에 관리를 파송하여 그 땅을 찾으려는 의사가 있었다. 김형과 나는 그 좋은 뜻을 찬성하면서 그러나 국내가 이렇게 소요하니 먼저 국정을 바로 잡고 인재를 등용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노암장도 그 말이 옳다 한다. 이렇게 탐관오리들이 후민 고강하여 백성이 살 수 없으니 먼저 이것부터 엄금하고 그리고 정부에서 일절 매관(賣官)하는 숙폐(宿弊)를 상매엄금(上賣嚴禁)하고 그리고 신교육을 시행하여 시대에 맞는 행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대략 논의하였으나 노암장 역시 듣고만 있을 뿐이요 어이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노암장이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임명이 되어 김형은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고 그 후에 나는 세무(稅務)로 인하여 각각 분리가 되었다. 나는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에 주재(駐在)하여 있었는데 그 때에 탁지부 고문(顧問)인 목하전(目賀田)이 세정(稅政)을 주장하고 조선 관리는 아무 힘이 없을 때라. 나는 단연 세무의 직을 사하고 고향인 함창으로 돌아와 있으며 처신의 길을 강구하였던 중 다시 상경하여 노암장 택사(宅舍)에 있으며 김형도 사직하고 노암장도 내부대신(內部大臣)이 체임(遞任)이 되어 비교적 종용(從容)한 시간이 있었다.
그때 5대신(五大臣) 암살 사건이 있어 노암장은 그 일에 혐의가 있다하여 목포(木浦)로 유배 되였다. 그러나 보호조약문제가 일어나 보국(輔國) 민영환(閔泳煥) 씨가 백도자절(白刀自截) 하였다. 나의 친우인 오준영(吳준泳)군이 새벽에 찾아와 민보국(閔輔國) 의 자절(自截)의 소식을 전하여 준다. 거리에 같이 나와 전동(典洞)고개를 넘어 가보니 길가 전문(專門)에 크게 민보국 백도자절이란 광고가 붙었다.
그날은 온 장안(長安)이 울음소리로 가득 찾고 사람마다 얼굴에 눈물이 젖었다. 그 날에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社長) 장지연선생(張志淵先生)이 기록한 시일야(是日也)에 방성대곡(放聲大哭)이란 신문이 첫 새벽부터 전달 되여 이 소식을 전국이 다 들었다. 그리하여 전국이 다 눈물로 화하였다. 그 때에 나는 마음이 돌변하였다. 무슨 법으로 일인(日人)들의 독아(毒牙)를 면할까. 조선인의 하는 일은 한 가지도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
오준영군이 찾아와서 기독교에 다녀보자고 권한다. 첫 번 승동장로교(丞洞長老敎)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기로 정하고 몇 주일 다니고 어느 주일저녁에 예배 본 후에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니 노인 서장로(徐長老)를 만나 성경도리(聖經道理)를 묻고 나는 교인들의 사상을 알기 위하여 민보국의 자절 하여 죽은 일을 교회에서는 어찌 생각하느냐 물었다. 서장로는 별안간 답하기를 민보국은 역적 이지요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에 몹시 자극을 받었다. 내 생각에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모르는 썩은 놈들이라고 생각 되여 다시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이 궁금하여 그 때 명성이 높은 전덕기목사(全德基牧師)를 찾아가서 장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전목사는 듣고 깜짝 놀라며 그 말은 옳은 말이지만 잘못 들으면 낙심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인데 민보국이 자의로 죽었으니 하나님을 거스림이란 말이요 나라의 역적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민보국 양심으로 죽었으면 하나님이 죄로 아시지 않습니다.
나는 전목사의 말을 듣고 분연(憤然) 깨닫고 그때부터 전목사 교회인 상동(尙洞) 예배당(禮拜堂)에 다니며 전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보호조약된 후 3년인 정미년(丁未年) 12월 25일이다.
나는 전목사의 소개로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 교원으로 채용되고 동시에 청년학원(靑年學院) 역사교원으로 피임(被任)되여 교회 내 주택에 유숙하며 전목사의 일을 도와주었다. 같이 유숙한 선생은 곧 이동녕(李東寧) 씨이고 학교 일을 같이 보는 선생은 이광(李光) 씨이다. 이동녕(李東寧) 씨의 호(號)는 석오(石吾)라 부르고 이광(李光)씨는 성암(醒菴)이라 부른다. 석오(石吾)는 우락불패(宇諾不覇)의 특성이 있고 또한 애국에 불타는 열사이다.
조용한 시간에 석오와 전목사는 나를 불러 우리 단체에 참가하기를 권한다. 나는 두 분 선생의 사상과 신앙을 무조건 숭배하는 중이라. 무엇이든 두 분 선생의 말을 순종할 터이니 바른 길로 인도하여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루 저녁에 두 분을 따라 서소문(西小門) 외 임치정(林蚩正)씨 댁에 같이 갔었다. 그 자리에는 운강(雲岡) 양기탁(梁起鐸) 씨가 있어 입회식을 주장하고 사상 문답이 있었고 서약하는 몇 조(條) 중요문답이 있었다. 나는 그 후로부터 가슴이 선뜩하고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요 하나님께 바친 몸으로 생각되었다.
그 회의 이름은 신민회(新民會)인데 절대 비밀이요 그 간부가 종종 교회 지하실에 모여 방침을 협의 하였는데 신민회의 형식은 상동교회(尙洞敎會) 청년회(靑年會)이고, 선전기관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고, 교육으로는 청년학원(靑年學院)이다. 그때에 지하실에 모인 사람은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이회영(李會榮), 이승훈(李承薰) 씨 등이다. 그 회의 집회는 매주 목요 하오 7시에 교회에 모여 잠깐 예배보고 난 후에는 여러 지사들의 열렬한 강설(講說)이 있었고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씨도 자주 와서 강설하였는데 예전 독립협회 후신들이다.
그 후 보호국이 된 후로는 그 회를 중심하고 모였던 애국지사들이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전에 들어오지 못하던 순경들이 함부로 교회 내에 침입하는 고로 석오(石吾)와 우당(友堂)은 임의 만주(滿洲)에 들어가고, 운강(雲岡)도 신문은 총독부(總督府)에 압수가 되고 피신할 곳이 없는 고로 역시 만주로 들어가고 청년회는 칙령으로 폐쇄를 당하고 청년학원도 폐지되었다.
남은 사람은 나와 전목사뿐이었다. 퇴세(頹勢)를 만회할 수 없는 고로 어느 때는 양인이 마주 앉아 음엄(飮淹)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다 전목사는 병으로 신음하다가 1914년 3월 23일 필경 별세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나는 퍽 고독을 느끼며 교회를 도와주고 있었다.
마침 배재학교(培材學校)에서 교장 신흥우(申興雨) 씨의 청이 있었다. 나를 그 학교의 성경교수와 한문을 담임하여 달라는 것이다. 나는 부족을 이유로 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신흥우 교장은 강청(强請)을 마지않았다. 그 이튿날부터 출석하기를 요하였다. 때는 1916년 4월이다.
그 학교에 먼저 시무 하는 강매선생(姜邁先生)은 나의 친우이다. 그의 협조를 많이 얻어 위안을 받고 생도들에게 성경도 가르치고 한문도 가르치고 또 조선역사도 교수하였다. 생도를 대할 때마다 ‘제군(諸君)들은 자기 몸만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요 나라 위하여 민족 위하여 하나님이 내 몸을 주시고 나를 교육하시는 줄 믿으라 가르치고 나의 한 몸의 성패가 곧 나라의 흥망이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라고 가르쳤다. 뜻밖에도 생도들이 동정(同情)하여 잘 받아들여 사상이 견고하여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1919년 2월 고종황제(高宗皇帝) 인산(因山)이 임박하여 13도 유지들이 경성에 모인 때이다. 뜻 밖에도 생도들이 누구의 주최인지 모르게 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저녁 7시에 정동교당(貞洞敎堂)에 모여 기도회를 열고 배재생 다수가 참집하였다. 나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믿지 않는 학생까지 참석하여 생도들의 기도는 자못 열렬하였는데 그 기도는 나라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다. 모두 땅을 치며 울고 하는 기도이다. 누가 시킨 것 아니요 그들의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다.
그러자 그 이튿날 3월 1일 경성에 만세(萬歲)소리가 일어났다. 천지 움직이였다. 조선 13 도내가 온통 만세소리로 움직였다. 그때 배재생 다수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돌리고 다수가 검거 되였다. 그런고로 당국에서 배재학교는 배일(排日) 소굴(巢窟)이라 지목하고 김모(金某)는 그 학교의 불온분자(不穩分子)라 하여 배재교의 시무를 허락지 않았다. 교원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학교는 저절로 휴업중이고 교장 신흥우(申興雨) 씨는 머리를 싸어 잡아매고 집에 있으며 출석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나는 3월 3일에 검거되고 가아(家兒) 택영(澤永)도 며칠 후에 검거되어 부자가 같이 서대문 감옥에 구금 되었다. 그 때 검사로부터 준엄한 문초가 있었다. 각국 공관에 선언서 전한 것을 책임지고 독립선언서를 네가 기초하였다는데 하고 고문이 심하였다. 이것은 지은 사람이 따로 있으니 조금 기다리라 하여도 듣지 않고 고문을 계속하다가 급기야 최남선(崔南善) 씨가 검거된 후에 그쳤다.
거진 일 년이 되어 가매 재판장이 어찌 생각하였던지 집행유예 3년에 처하는 선고로 보석을 허락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가인(家人)은 나의 옥바라지 하느라 대쇠약하였고 택영은 재차 검거되어 거꾸로 매여 달고 때려 맞은 상처가 남아 있고 나는 말할 것 없이 귀는 중청이 되고 눈은 어두워졌다.
정동교회(貞洞敎會) 주택에서 조리하고 있는 중 인천지방(仁川地方) 감리사(監理師) 오기선(吳基善) 씨가 찾아와서 문병하고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로 오라고 부탁한다. 이왕 배재학교에 있지 못하게 되니 인천에 와서 나와 같이 있자고 권한다. 건강이 회복된 후에 보자고 상약(相約)하였다. 인천 내리교회는 김영섭 목사가 담임하였는데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고 며칠 후에 떠난다고 떠나기 전이라도 우선 왕래하여 교회를 살펴 달라는 것이다. 때는 1920년 3월이다.
부임하던 달 첫 주일 저녁예배 후에 직원회로 모이게 되었는데 직원 중 알력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교회에 전도의 중임을 맡아 가지고 왔고 그런 재판은 판결할 수 없으니 할 말씀이 있으면 사석에 찾아와서 말씀하시고 공석에서는 일절 그런 불평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기도하고 교회 일을 의논하였다.
일 년을 지나는 동안은 직원들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진보가 없었고 그 이듬해 지방회에서 분쟁의 장본인 연로한 전도사 두 분은 교회원로로 모시고 교직을 쉬게 하고 새 청년전도사로 바꾸어 시무하게 하고 직원회를 일절 개혁하여 전도에 전력한 결과 교회가 부흥되어 처음 50-60명 모이던 교회가 별안간 3-4백명 가량 모여 예배하였고 성탄(聖誕) 때 믿지 않는 사람까지 성탄비(聖誕費) 일백원을 보내주어 받었다.
그리고 1920년에 웰취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22년에 다시 배재학교의 교목으로 피임(被任)되고 1924년에 와러트 감독(에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22년에 배재학교 교장 아펜셀라 목사가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배재에 와서 같이 시무하자는 말로 부탁하였다. 나는 허락하고 그 해 3월에 다시 배재로 왔다. 그간 여러 교원들이 변동되어도 강매선생(姜邁先生)은 그저 있어 시무하는 고로 또 같이 있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인천에 있을 때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윤응념(尹應念)군이 찾아와서 무슨 사령서(辭令書)가 있었고 의사(義士) 안태국(安泰國) 씨의 장례식 사진까지 가지고 왔다. 받기는 하였으나 사진은 어느 마루 밑에 감추어 두고 서류는 없애 버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회장 김마리아(金瑪利亞) 씨가 보석 중 탈주하여 상해로 건너가는 선편을 얻어 주느라고 몹시 고민하였다. 그 역할은 동지 김기창(金基昌) 선생의 주선이 많았다.
그러다 배재로 올라와 있게 됨으로 서대문 경찰서 명부(名付)에 이름이 실리여 순사가 거의 날마다 향촌동(香村洞) 주택에 오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순사보고 말하기를 나는 무슨 죄로 경관이 이렇게 자주오니 이웃사람 보기에 부끄럽다고 항의하였더니 그 순사 말이 선생이 요시찰(要視察)에 이름이 있는 고로 순사가 오게 되나 잘하면 얼마 후에는 없어지리라 한다.
학생에게 글을 가르치기보다 학생들과 같이 전도하는 것이 퍽 재미가 있었다. 이태원(梨泰院)에 전도하여 없어졌던 교회가 새로 일어나게 되어 학생청년회(學生靑年會) 회금(會金)으로 교회를 새로 건축하고 홍제원(弘濟院)에도 전도하여 그 곳도 회금(會金)으로 교회 집을 새로 건축하고 전도하여 또 야학(夜學)을 시작하여 학생들이 밤마다 나아가 가르치고 전도하여 교회가 울흥(蔚興)되였다. 믿지 않는 학생들은 이것을 원치 않으나 믿는 학생들은 가장 흥미가 있어 한다. 그런 고로 생도들이 나를 가명 하여 예수 독갑이(도깨비)라 부르며 은근히 반대하지만 다 이기고 나아갔다. 이렇게 배재에서 전후 시무한지 19년 6개월인 1935년 4월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너무 연로하여 교편을 들기 어려운 고로 사직하였고 그보다 큰 원인은 당국의 주의가 너무 심한 고로 사직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와서는 궁정동교회(宮井洞敎會)와 삼청동교회(三淸洞敎會)를 맡아보게 되었다.(1937년 4월) 두 교회가 말도 못되게 빈약하였다. 봉급은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데 자미(滋味)가 더 많았다. 삼청동은 거의 문을 닫게 되었는데 다시 부흥되고 궁정동도 자미가 있게 모이기 시작하였다. 교우들이 모두 목사로가 아니라 모두 아버지와 같이 사랑하고 영접하였다.
그러다 1940년 6월에 청진(淸津) 지방에 개척전도로 파송되었다. 교회가 아니고 새로 모이기 시작하는 교회로 첫날 청진에 하차하던 때부터 두 파(가 나뉘어 한파는 이리 가자 하고 한파는 저리 가자고 한다. 그런 파쟁)이 있다는 말을 감독 정춘수(鄭春洙) 씨에게 들은지라 내 맘대로 어느 믿는 교우의 여관으로 가겠다 하고 자동차를 불러 타고 성결교인(聖潔敎人) 박성희(朴聖希) 씨 여관으로 가서 여장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믿음으로 모인 것 아니요 당파적으로 모인 것인데 하나는 최주경(崔柱景) 씨의 인솔자이요 하나는 안흥석(安興錫) 씨의 인솔자인데 교회는 근본 안흥석(安興錫) 씨의 설립인데 거기서 안을 내쫓고 최파에서 주장하자는 것인데 다시 살펴보니 그 사이 교회가 갈라져서 안은 경실학교(景實學校) 교실을 빌어 그전 예배 보던 곳에서 예배 보게 되었다.
나는 어느 편에 치우칠 수 없는 고로 첫날은 최의 교회에 가보니 불과 삼인이 모일 뿐인데 여자 1인 남자 2인 뿐이다. 그리고 저녁예배는 최에게 부탁하고 안의 교회에 가 보니 30여인이 모였다.
그 다음 주일은 안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저녁에는 최의 교회로 왔다. 교우 중 손영춘(孫榮春)이 말하기를 목사가 본 교회에 있지 않고 안의 교회로 가는 것이 불가라 한다. 나는 두 교회를 다 버릴 수 없고 언제든 합동을 시킬 터이니 기다리라 부탁하고 그 다음 주일 저녁에 안의 교회에 가서 설교하기 전에 말하였다. 여러분이 나를 목사로 영접하면 목사의 말을 쫓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니 오늘 저녁부터 최의 교회로 가자고 발론하니 조홍기(趙鴻基)군의 역설(力說)로 목사를 따라 가기로 가결 되여 30여인 교우가 일제히 최의 교회로 들어가 합 예배를 보고 주님의 단일주의를 역설였다.
최의 일파가 안을 내여 쫓고 저들이 주장하려던 것이 다 허사가 되었다. 그 후로는 목사가 편벽되어 안만 옹호한다는 이유로 최파로부터 비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런 비난이 있을 줄 아는 고로 안을 옹호하지 않고 가장 냉정하게 지내였다.
그러다 그 해 겨울에 청진에서 한 40여리 외에 있는 경성(鏡城)에서 8인이 연명(聯名)으로 교회설립을 원하는 청원이 왔다. 대표자 1인이 왔다. 주일 저녁 예배는 직원에게 맡기고 안흥석(安興錫) 전도사와 같이 경성에 갔더니 그 교회에 모인 사람이 30-40명이다.
대표의 성명은 곧 신종악(申鍾嶽) 씨인데 근본 대음(大飮)인 주도(酒徒)로서 그 부인 조종숙(趙鍾淑)씨의 믿음으로 회개하고 건축비를 모아 자기 주택 구내에 예배당을 따로 지어놓고 그날 저녁에 봉헌식을 행하여 달라는 것이다. 열왕기상 8:22-끝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문을 읽고 신종악씨의 드린 열쇠를 받고 확실히 하나님께 바치는 식을 행하였다. 교회가 설립 되였으니 감리교 명패를 달아 달라하나 장로교에 알아보고 하자고 상약(相約)하고 그 이튿날 첫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곳 장로교 당회장에게 대표를 보내여 교회 설립 청원의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없고 그 후에 내가 직접가도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공함(公函)을 보내어도 답이 없었다. 그 교회의 무례(함을 끝까지 받을 길이 없는 고로 그 이듬해 1월 나는 직접 경성에 가서 20여인에게 세례를 주고 감리교식으로 신종악 씨는 전도사로 정하고 전도부인을 두고 회령(會寧)에 있는 한국보(韓國補) 씨를 청하여 담임하였다.
그 해 가을에 가서 청진교회는 한국보 목사에게 맡기고 내가 직접 경성에 와서 주재하였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주을(朱乙)에 교회를 설립하여 김태옥(金泰玉) 장로로 하여금 살피게 하고 교우들의 헌금으로 건물까지 구입하고 생기령(生氣嶺)에도 교회를 설립하여 노춘섭(盧春燮) 전도사로 주임(主任)을 정하고 1941년과 42년 양년(兩年) 사이에 청진지방(淸津地方)에 임의 사처(四處)의 교회가 설립된 것은 참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곧 1943년 봄에 와서 청진과 경성 사이의 어항(漁港)에 교회가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여러번 가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곳에 마침 정고송(鄭孤松)이란 청년의 집을 세로 얻어 1층은 정(鄭)이 있고 2층은 주택 겸 예배처소로 정하고 매삭(每朔) 25원씩 세로 정하고 경성교회는 신종악 전도사에게 맡기고 나는 어항으로 반이(搬移)하였다.
내가 총리원 보조 40원을 받는 중 25원을 제하고 나니 남는 것 15원이다. 아무 동정자 없는 곳에 와서 생활의 곤란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도에 취미를 붙이고 가인(家人)은 남의 빨래도 해주고 바느질품도 팔고 해서 겨우 죽을 끓여 먹고 지내였다. 예배 보기로 된 후에 감리교인 황영재(黃英在) 씨의 부자를 만나 교회출석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장로교에 다니였다. 단연 장로교를 나와 우리 교회로 출석하게 되었다.
3개월 후에 교회는 30여명이 모여 예배하던 중 그때 청진교회는 홍종숙(洪鍾肅) 목사가 담임 하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일 년이 못 되여 80여명 모이던 교회가 12월 그믐께 와서 3-4인 밖에 남지 않고 다 흩어졌다. 홍 목사는 부득이 사임하고 상경하고 그 교회 제직들이 어항을 나와서 다시 청진에 와서 교회를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다.
어항은 다시 한국보(韓國補) 씨에게 위탁하고 곧 다시 청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교회가 안흥석(安興錫) 씨 고아원에서 예배 보는 고로 교회가 잘되지 못한 원인이 고아원에 부속된 까닭이다. 나는 교회를 끌고 다른 곳에 집을 얻어 나아가기로 작정하고 화원정(花園町)에 배석현(裵錫賢) 씨의 집 2층을 얻어 매삭(每朔) 40원씩 세로 얻고 목사 주택 겸하여 쓰게 되었다. 안흥석 씨는 교회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고 반대하여 고아원 직원들은 예배를 금지하였으나 다 흩어졌던 교회는 다시 80여명 예배하고 전에 받지 못하던 목사 봉급도 받게 되고 신생(新生) 기분이 있었다.
어느 삼일기도회에 예배당을 사기로 제의하였더니 다 찬성하여 즉석에서 헌금하니 합 사천여원이다. 그 다음 주일에 광고하였더니 뜻밖에도 동정이 많다. 칠천여원이 되었다. 다행히 배석현(裵錫賢) 씨가 현금 예배하는 집을 만원에 사라한다. 돈이 부족하다 하였더니 그러면 구천원에 사라한다. 총리원에 보고하였더니 일천원을 보조하여 합 팔천원 가지고 그 집을 구입하게 되어 그 다음 주일예배에 집산 것을 광고하고 총리원 재단법인에 편입케 하였다.
이 때는 청진지방에 감리교회가 합 오처가 설립 되여 독립된 교회가 셋이니 청진(淸津), 경성(鏡城), 주을(朱乙) 3처 교회는 다 담임자를 두고 전도할 수 있고 어항(漁港)과 생기령(生氣嶺)은 쇠약하여 어항은 청진교회 지교회가 되고, 생기령은 주을교회 지교회가 되어 목사 김득수(金得洙) 씨가 담임하였다.
그간에 일인(日人)들과 싸워가며 거의 날마다 호출을 만나 교회를 장로교와 합하라고 위협을 하였으나 나는 끝까지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었다.
그러다 8.15해방이 되었다. 공산정부 핍박은 일제시보다 막심하다. 나는 필경 공산경찰에 검거 되여 무수한 고문을 받았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권총을 휘두르며 위협한다. 무슨 죄목이 없이 고문한다.
3일 후에 소련 사회부로 넘어가 일광(日光)이 없는 지하실에 가두어 두고 사흘에 한 번씩 불러 문초하는데 이제야 죄목을 알았다. 세 가지이다. 첫째는 이승만 박사와 연결이 있다는 것과 둘째는 미국 선교사와 교통하였다는 것과 셋째는 학생 선동하였다는 죄이다. 세 가지가 다 증거 없는 고로 끝에 가서도 다시 신앙문제로 심문하였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는다. 꼭 믿는가. 꼭 믿는다. 거짓 없이 믿는가. 거짓 없이 믿는다. 어찌 그렇게 믿는가. 신구약성서가 있어 믿고 또 나의 40여년 신앙경험으로 믿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독일 이태리 일본은 다 믿는 나라이라 싸움 이겨 달라 기도하고 예배하고 구하였으나 싸움에 패하고 나라가 없어지고 소련은 하나님이 없다하여 예배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싸움은 이겼으니 어디 하나님이 있는가.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서는 찾지 못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지라 믿어도 죄를 벌하고 그 뜻을 어기면 하나님이 떠나시고 믿지 않아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나는 대답하였더니 사령관도 그 말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떡인다.
나의 무죄한 줄 아는 소련사령관은 3 개월 후에 그 지하실에서 석방 되여 집에 오니 집이 지하실보다 더 편리하건만 누우면 집이 다 지하실이 되고 만다. 지하실에 있을 때 조선어를 아는 중국사람 한명과 조선청년 한명이 같이 있으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자미를 많이 보았는데 내가 나오게 되자 그들이 우리는 어떻게 하오리까 한다. 힘써 기도하라 부탁하고 나온 후 그들이 늘 마음에 생각난다.
집에 나온 후에도 소련 군인이 늘 찾아오고 나의 동정을 살핀다. 내가 이 교회에 있는 것이 도리어 불리한 줄 깨닫고 직원들에게 말하고 유득신(劉得信)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청진을 떠나게 될 때 본 교회 장로 황종우(黃鍾宇)군이 같이 동행 되여 원산(元山)은 더 위험하다 하여 평양(平壤)을 거쳐, 해주(海州)에 오니 하차 즉시로 공산당에 피검 되여 3일간 구금되여 있다가 어느 아는 여생(女生)의 소개로 나와서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용당포(龍塘浦)로 밀선(密船)을 타고 올라왔다.
황군(黃君)은 돌아서 청진으로 갔다. 호구(虎口)를 벗어난 듯이 마음이 안심이 된다. 오래간만에 집 식구를 만나고 교우를 만나니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 같다. 청진( 떠나던 날은 1947년 6월이다. 만 8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두고 간 교우도 반갑지만 8년 동안 고생하며 가꾸어 놓은 청진교우가 늘 생각난다. 왕사(往事)를 생각하니 꿈인가 싶다.
궁정교회(宮井敎會) 직원들의 청에 의하여 이 해(1947년) 9월부터 다시 궁정교회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간 교회는 친일파(親日派,복흥파), 배일파(排日派,재건파)로 서로 갈라져 반목이 심하였다가 다시 합하게 되고 1949 년에 합동총회로 모여 김유순(金裕淳) 씨를 감독(으로 선정하고 자미가 있게 진행 되여 나아가다가 뜻밖에 6.25사변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 1월 4일에 중공군이 경성(서울)을 점령하는 고로 교역 일동은 중공군 입성 전 12월 25일에 경성을 떠나 부산(釜山)에 와 있다 다시 가덕도(加德島) 목사 수용소에 와서 일년을 지내고 다행히 가손(家孫) 상철(相哲)이 해군 고문으로 진해(鎭海)에 주재함으로 1952년 3월에 다시 진해에 와 있게 되었다.
그간 생활은 서울 떠날 때 이렇게 오래될 줄 모르고 의복 침물(針物)은 전부 교회에 두고 왔더니 궁정교회는 불타 버리고 나의 물품을 전부 소실 되였다. 빈손만 가지고 이곳에 있으며 전부 총리원 보조로 살아왔고 의복도 주어 입었다. 이 쓸데없고 늙고 병든 종을 지난 연회에서 너무 나이 많은 이유로 파송 하지 않고 원로목사(元老牧師)라는 명의로 선교회와 총리원의 보조로 살아 온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눈물로 느끼여 감사하였다.
1953년 1월 1일 81세 노복병기
병중쇄록 중에서 애산 김진호(1873-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