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가족
(하상욱의 “튜브, 힘 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를 읽고)
2020. 06. 11 그래도
하상욱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예요?
저에게 가족은 ‘영어’ 같아요.
왜?
마음에 있는 게 표현이 잘 안되니까.
근데 때로는 ‘한국어’ 같기도 하다.
잘 안다고 생각 했는데 가끔은 참 어렵다.
조리학교에서 일식과 브런치 과정을 수강 한지도 한 달이 지났다. 과정이 끝나가는 즈음이 되니 다들 자격증 시험대비로 분주한데 나만 생각이 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보다 못한 원장님이 제발 필기시험이라도 신청이라도 좀 하란다.
치-
자격증 없이도 배운 거 활용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 불러 만들어 먹이면 된 거지. 그냥 좋아서 배우는 건데 굳이 뭐 자격증까지야 싶었다.
유월 쯤에나 필기시험 치고, 7월쯤에는 순천 가서 실기시험 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조카의 전화가 왔다.
“큰 이모, 새통영병원에서 엄마 대장내시경 결과 대장암 3기쯤으로 보인다고 얼른 서울 큰 병원을 알아보래요.”
정신이 아득했다.
자격증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 치고 당장 짐을 쌌다.
제일 빠른 시간에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그건 제부와 동생이 알아 볼 일이다. 조카는 어린이 집 다니는 애가 둘이나 있고, 조카사위도 사량도에 파견근무 기간이라 언니 곁에 있을 사람은 나 밖이다. 남편의 동의를 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언니 간뼝은 무조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 뿐.
제부가 새통영 병원에서 찍은 영상자료들을 보내라 해서 보냈다. 집도 할 교수님이 대장에서 발견된 혹이 상당히 크기가 커서 그쪽 병원에서 더 할 건 없고, 폐에서 발견된 종양도 예후가 좋지 않은 걸로 이야기 한다고 제부도 울먹이고 동생도 운다. 동생은 폐에서 발견 된 종양 건은 조카들에게 어찌 말 하겠냐고 아빠도 어릴 때 그렇게 잃고 엄마마저 저러면 가엾어서 어쩌냐고 한다.
딱 하루만 울었다.
우는 건 하루로 족했다. 짐을 싸들고 언니랑 고대 안암병원으로 갔다. 아버지 때도 그랬지만 언니도 제부의 후배 교수를 집도의로 했다.
대장에서 발견된 암의 크기로 봐서는 3기에 가까운데 어디까지 전이 된 것인지를 알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제발 전이만 안되기를.
폐에서 발견 된 것도 그냥 용종 정도이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이런 것 쯤은 거뜬히 이겨 낼 거라고.
새벽 여섯 시, 밤 11시. 하루에 두 가지 검사를 병행하며 초 스피드로 검사를 받았다.
담당 교수는 일단 수술은 해 봐야 알겠지만 항암치료는 기본이라고 강경하게 말을 한다.
언니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이다.
직장의 일로 서류를 내다보니 이곳저곳에서 알고 언니에게 연락이 온다.
사람들은 대장암 3기라도 요즘은 의술이 좋으니 괜찮을 거라고 말을 한다.
언니는 “괜찮으면 좋고, 또 안 괜찮아도 할 수 없는 일이고.”천연덕스럽게 남의 일보다 못하게 말한다.
입원한 6인 병실에는 환자의 통증으로 인한 비명과 사연보다 조선인 간병인 아줌마들의 수다가 잠들 상황을 안준다. 환자 보호자용 간이침대는 몸부림 심한 나에게는 벼랑이었다. 바로 누워도, 모로 누워도 안 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나마 경상대학병원과는 달리 병실도, 샤워실도 깨끗해서 그나마 역하지는 않았다. 밤이면 목욕 바구니 들고 느긋하게 샤워하고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언니는 계속되는 검사로 물도 한 모금 못 마시는 날이 많은데 나는 꼬박꼬박 삼시 세끼 병원 밥에다가 3층의 롤링핀과 할리스 커피, 2층의 공차와 CU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먹었다.
형부는 수술 하자마자 전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손도 못쓰고 그냥 도로 닫았는데 반해 언니는 수술이 잘 되고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의사 얼굴도 밝았다.
수술 하는 날은 조카내외가 같이 올라 왔다. 조카는 언니 곁에서 며칠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어도 그건 언니나 조카에게 필요한 시간인 것 같아 나는 통영으로 내려왔다.
집에 내려 온 나는 남편에게 때마다 생선구이와 찌개를 해줬다. 술상도 차려 주었다. 형부 제사때는 한 번도 안 빠지고 혼자 참석하는 남편은 언니를 무척 측은하게 여긴다. 그러기에 남편은 나의 상경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고마운 일이다.
수술 후 통증이 심한 몇 날은 조카가 언니 곁에 있었다.
동생은 영재고를 입학하고도 코로나로 원격수업을 하는 큰애와 천방지축 둘째 중1의 넘쳐나는 수행평가와 과제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반 넘게 버스를 타고 병원을 왔다. 언니와 나와는 다르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일처리로 언니 둘을 바짝 긴장시키는 동생은 챙겨 오는 것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고양에서 병원을 하는 제부도 진료를 마치고 사흘에 한 번씩 찾아온다. 중간중간 후배교수가 일러주는 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준다.
없는 집 맏이인 언니는 배움이 짧다. 그것을 자격지심으로 여기며 섭섭하고 부끄러워하는 언니는 늘 나를 보고 아마 자기는 주워 온 딸인 것 같다고 했다. 언니가 첫째인데도 엄마 친구들은 꼭 ‘귀옥이 네’라고 부르지 않고 둘째인 내 이름인 ‘미옥이 네’로 부르는 것도 이상하다고 했다. 어릴 때도 엄마에게 사촌들 대신 자기만 많이 혼나고 맞고. 집안일을 결정할 때도 맏이인 자기를 두고 늘 아버지나 엄마는 나를 불러 의논하고 결정하면서 심부름을 시키거나 일을 할 때는 자기만 시킨다고. 억지로라도 나는 교대를 보내 줬으면서 자기는 돈벌이 하는 직장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고.
터울 진 동생이 아플 때도 통중, 통고학생 등교 시간에 여고 교복을 입고 동생을 처네로 업고, 중학생인 나는 언니가방을 들고 용화사에서 시내 병원까지 걸어가게 했다고.
사춘기 때는 그게 얼마나 쪽 팔리는 일인지 모른다고,
그러고 보니 언니나 나는 일찍부터 소녀 가장이었다.
오죽했으면 남편도 “나는 너거 집 같은 딸 셋 놓고 싶다. 너거 영감 할매는 무슨 복에 너거 같은 딸들은 둬서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제일 좋은 거 입고 이날 이적지 걱정 없이 잘 살고”
언니가 아팠다.
모든 가족이 하나가 되었다. 언니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조카들도 큰이모만 편애하고 자기 엄말 서운하게 한다는 느낌을 말끔히 지우게 되었다.
손자들에게 등록금 한 번,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백만 원을 주셨다. 형부 돌아가시고 언니가 그렇게 어려워도 꼬박꼬박 생활비를 받으셨던 부모님이.
나보고도 수고하라고, 니가 고생이 많것다고 하신다.
아픈 일 잊기를
좋은 일 있기를
잊고 싶은 오늘이 아닌
잇고 싶은 오늘로 남길.
아픈 일 잊기를
아니다. 잊지 않기를. 비로소 중요한 것을 알게 된 기회를 잊어서는 않된다.
좋은 일 있기를
비록 아프기는 했어도 이번 일은 좋은 일이다.
언니가 잊고 싶은 오늘이 아닌 잇고 싶은 오늘로 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