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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뛰는 놈, 나는 놈, 그 위에 갓난아기>의 줄거리:
영화 '어벤져스'에서 지구를 위협하는 절대 강자인 인공지능 로봇에 맞서기 위해 슈퍼히어로들이 모여 드림팀을 구성합니다. 이들이 실재하는 팀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그래도 이 팀이 전혀 별것 아닌 궁극의 팀이 있습니다. 바로 갓난아기와 하나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팀입니다. 다윗으로 예표되었다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어 진짜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킨 이 팀 구성은, 오늘날에도 갓난아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능성입니다.
뛰는 놈, 나는 놈, 그 위에 갓난아기
(시편 22:1~31)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뛰는 놈, 나는 놈, 그 위에 갓난아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뛰는 놈, 나는 놈, 그 위에 갓난아기’
제목을 풀어서 보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그 나는 놈 위에 갓난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 전에 장쩌민 주석이 있었습니다. 장쩌민 주석의 조카를 사칭해서 사기 행각을 벌이던 중국교포 김모씨가 한국에서 붙잡혔습니다. 사기로 모은 돈이 무려 10억 정도나 되는 성공적 사기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살지 않고 한국에서 붙잡힌 이유가 참 복잡합니다. 내연녀가 있었는데 이 사기꾼의 재산 10억 원을 몽땅 들고 한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던 피의자 김모씨가 내연녀를 잡기위해 한국으로 입국하여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신고하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 내용을 알아야만 합니다. 경찰이 그 피해 내용을 조사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자신도 조사를 받던 중 결국 사기가 발각되어 검거되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女가 있는 격입니다.
“어벤져스(The Avengers)”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볼 때에 옆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지구를 위협하는 인공지능 로봇 울트론에 맞서서 지구를 지키기 위하여 히어로들이 슈퍼 드림팀을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아이언맨도 있고 천둥의 신 토르도 있고, 인크레더블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등이 있었습니다. 절대 강자인 인공지능 로봇 울트론에 맞서 싸워 이겼겠지요. 저는 끝까지 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만화나 영화가 아니라 실재한다고 칩시다. 이들도 못 당하는 궁극의 슈퍼 드림팀에 내가 실제 소속될 수도 있습니다. 슈퍼 드림팀은 히어로 여러 명이 뭉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조합입니다. 내가 갓난아기가 될 수 있다면 어벤져스가 별것 아니게 여길 수 있는 드림팀이 구성되어 살 수 있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화로 예를 든 것은 슈퍼 드림팀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모습이 인간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갓난아기의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과의 조합을 이루셨던 예수님은 실제로 인류를 구원해내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갓난아기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과의 조합을 이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조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이루실 모습의 예표였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은 서른세 살에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내면적으로는 한 번도 성인이셨던 적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갓난아기의 상태를 유지하심으로 하늘 아버지와의 조합을 이루셔서, 이 드림팀으로 모든 영화나 만화에서 꿈꾸는 지구 지키기나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해 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할 일은 없습니다. 이미 메시아께서 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때에 이루신 팀 자체는 우리각자가 구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장 3절과 19장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9~11절입니다. 9절을 보면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는데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누가 누구를 의지했다는 것입니까? 다윗이 정말로 어머니의 젖을 빨 때에 하나님께 감사했을 리는 없습니다. 10절에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나를 백성 삼으시더라도 나의 인격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모태에서 나왔던 그 갓난아기의 인격적 상태를 평생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핵심부분과 연결해서 1절을 살펴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외치셨던 절규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18절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즉 시 속에는 메시아 예언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메시아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메시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구원은 갓난아기 상태를 유지함으로서 하나님과 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영생의 확신보다 영생의 느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의 확신은 자기최면이고 자기기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의 느낌은 정확하게 객관화시킬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아 영생을 얻은 자라면 영생의 느낌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생을 허락 받은 구원이 바로 갓난아기 상태에서 하나님과 조합을 이룬 것입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갖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이 갓난아기와 하나님과의 슈퍼 드림팀 조합은 다윗으로 예표 되었고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도 그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드림팀의 조합을 갖출 수가 있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어느 때에 드는 것일까요? 12절부터 보면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라는 표현이 있고 13절에서는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같으니이다’라고 하고 16절에서는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하는 급박한 위기 상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란의 상황이나 급박한 위기가 곧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적인 어려움이 주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을 보면 돌로 침을 당해서 머리가 깨지고 몸통이 깨져서 피범벅이 되는 환경적으로는 다윗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한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낌을 갖게 하는 직접적 원인은 아님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버림받은 것 같은 이 느낌은 육체가 놓인 위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갖게 되는 느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에 육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사자밥이 되어 죽을 때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찬송을 불렀습니다. 마음의 문제가 위기입니다. 다윗은 이 마음의 문제를 갓난아기의 상태가 하나님과 조합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갓난아기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과 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한 것은 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들이 겉옷을 나누며 속옷까지 제비뽑아 가져갈 정도가 되었어도 속수무책임을 뜻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라며 철이 들면서 ‘나’라는 의식이 생기고 세상을 향해 책임감을 가지게 되고 얻고 싶은 것을 계획해서 추진해 갈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시점에서 갓난아기로 역행해버린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았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갖겠다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가지려는 생각을 못하는 갓난아기로서 살아왔음을 뜻합니다.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과 사자와 개들에게 둘러싸이고, 겉옷과 속옷을 다 벗겨가도 아무 방비책이 없는 갓난아기처럼 된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갓난아기 상태로 살아왔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에서 그 답이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다윗은 위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의 갓난아기였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손이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책상태의 갓난아기가 되었지만 마음에서는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사람인 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좌충우돌하며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다윗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며 평강을 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오직 마음에 하나님을 불러들여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님이 죽는 순간에 마음은 하늘로 배부르고 하늘로 충만했던 것처럼 다윗은 위기상황 때마다 마음으로 하나님만 찾았고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과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을 찾았습니다. 외부 환경이 위기에 몰리자 마음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 두려움을 싸워 이기는 방법을 찾는데 어른답게 책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며 평강과 만족을 구했던 것입니다. 외부 환경의 영향력을 이기고 내 마음이 평강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적인 환경과 사건과 문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의 갓난아기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있으면서 다만 마음의 평강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심을 느낄 수 없자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과 사자와 개들이 둘러싸고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위기 때마다 평강을 구하여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나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위기를 극복해 내시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을 때에는 위기를 맞이하여 갓난아기로 있음에도 마음에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이 주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서 먹힐 수밖에 없고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아 가져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갓난아기와 같이 속수무책으로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이 갓난아기 됨의 고백이 그대로 메시아 사건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님을 버리셨다는 것일까요? 이는 십자가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직전에도 빌라도가 재판하고 로마 군인들이 침을 뱉고 갈대로 때리고 조롱하고 채찍질 당하셔서 온 몸에 피가 철철 흐르는 모든 과정을 갓난아기와 같이 당하셨습니다.
요즘 보육시설에서의 일부 교사들의 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때리면 저항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통기한이 다 지난 썩은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그대로 먹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죄질이 더욱 악한 것입니다.
다윗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의 삶이 갓난아기와 같은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셨고 오히려 예수님이 어른처럼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는 요14장 10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갓난아기가 되어서 하나님과 드림팀을 구성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그렇게 두려워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호연지기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음에 하나님이 가득차서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나셨음을 두려워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상태의 마음의 모습이 저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저주의 자리로 떨어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문제 앞에서 갓난아기가 되기 위해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붙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노릇하려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려 하고 문제를 받아들여서 고민합니다. 괴로워하고 방도를 구하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어른 된 책임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환경과 조건을 책임지려하는 나의 어른 됨을 이미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안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을 수밖에 없고 살려주시면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면 성취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않으시면 성취하지 못하는 갓난아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할 일은 이 세상에서 많은 황소가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두르고 사자와 개들이 달려들고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아 가져가도 십자가에서 죽은 갓난아기로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당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자밥으로 죽어갔던 것처럼 마음에서는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갖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 결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세상을 향해서는 갓난아기 됨이 강해집니다. 갓난아기 됨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속수무책은 강해지는 것이고 나의 속수무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하나님께서 전면에 나타나심은 강화될 것입니다.
완전한 갓난아기로 살았던 다윗을 골리앗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골리앗 앞에 나서는 다윗을 용맹하다고 생각하지만 다윗은 속수무책인 갓난아기였습니다. 골리앗이 위협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한 갓난아기가 되었기 때문에 골리앗이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만큼은 하나님으로 평강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서 갓난아기였더니 갓난아기였던 것만큼 소년 목동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전면에 나서심으로 조약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이 세상을 향해서 갓난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설령 죽게 하시고 망하게 하신다면 죽고 망하는 것입니다. 단 망할 때 망하고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의 마음만큼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면서 이 땅에서 죽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이 땅에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갓난아기가 되어서 하나님과 조합을 이룬 슈퍼 드림팀 상태가 바로 구원이고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뛰는 사람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뛰는 사람 위에는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은 경이롭지만 그 위에는 갓난아기가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속수무책의 갓난아기가 되게 하셔서 어떤 일이 세상에서 벌어지더라도 마음만큼은 하늘의 하나님으로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전 생애를 걸고 살아가는 괴상한 갓난아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