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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5장 1-18절
자비와 선을 위한 안식(38년 된 병자)
요한복음 1장에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를 설명 드린 바 있지만 제네바 성경개론에 있는 내용으로 다시금 이 부분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공관복음의 경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풍성하기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데 더욱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직무와 동시에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이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설명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태어나심, 그의 죽으심,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을 아는 것이 전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앞의 세 명의 복음서 기록자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고 가끔 역사적 설명을 끼워 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주로 이러한 설명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복음서 기록자들은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몸을 기술하였다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우리 눈 앞에 그 영혼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의 권위가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공관복음서 역시 마태와 마가, 누가로 하여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권위로 기록되었고, 이런 점에서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에게 각자 쓸 부분을 받아쓰게 하심으로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몸을 형성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을 보면 사건 중심보다는 사건이 나오더라도 사건과 관련해서 무엇을 설명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오늘부터 보게 되는 요한복음 5장이 그러하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사건도 그렇습니다. 특히 오병이어 사건의 경우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복음서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의 경우 사건만 기록하고 있다면 그 사건과 관련해 설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6장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은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건 이후 사건과 관련해서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참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지만 요한복음 6장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살피게 되는 요한복음 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5장은 1절 이하 9절을 통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리고 사건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사건 이후의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사건을 기억하지만 그 사건과 관련해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덜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이런 점에서 말씀보다 기적, 이적과 같은 것에 우리의 마음이 더 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건 이후 내용이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주로 1절 이하 9절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것이지만, 본문으로 정한 것은 18절까지로 후반부 내용을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고서 사건 자체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 9절 뒷부분에 보면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언제 고치셨는가? 안식일입니다. 공관복음서에도 보면 안식일 논쟁이라고 해서 안식일에 행한 일로 인해 유대인들과 시비가 붙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10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자리를 들고 가는 것, 이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 일종의 노동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는 일에 대해서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시비를 거는데, 유대인들에게 이삭을 잘라 먹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자신의 자리를 들고 가는 것 등은 노동에 해당하는 일로 안식일에는 금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병에서 나음 받은 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11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러자 12절에서 그 사람이 누구냐 묻게 되고, 13절에서 답하길 누군지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병에서 나음 받은 자는 이후 예수님을 알게 되는데, 14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리고는 15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가서 자신을 고친 이가 예수라고 고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하여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14절의 시각으로 보십니다. 저가 병든 것이 무엇을 원인으로 하는가? 죄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죄 때문인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 때문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고침을 받았다면 더 심하게 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은 자의 경우 이런 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15절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 고침 받았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이때 고침 받았다는 것은 외적으로는 38년 된 병에서 자유롭게 된 것인데, 14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을 근거로 하자면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된 것까지를 포함하지만 이 사람의 말에서 이런 의미까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주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다는 점에서 택자로 이해할 수 있고, 택자라면 그의 인생 속에서 외적 질병에 대한 고침보다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 더욱 큰 의미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각은 어떠한가? 16절 이하를 보시면 전혀 다른 시각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6-18) 요한복음 5장의 핵심은 어떤 면에서 17절을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동일한 측면에서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런 내용은 이후 말씀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 단순히 외적인 육체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영적인 부분까지 고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자 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도 아버지의 뜻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만 아들은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유대인들은 박해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죽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함으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율법의 기준,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신이 만든 율법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아가 예수님 당시 기록된 성경이 저들에게 주어졌지만 성경을 통해 진리의 지식을 전혀 배우지 않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자 한 것이고, 나아가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말은 저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저들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믿는다고는 하지만 자기 기준에 근거한 믿음은 아닌가?
어쨌든 오늘 본문의 사건으로 말씀하시는 바가 19절 이하의 내용인데, 1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 아들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30절을 보시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는 말씀까지 하심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런 분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셨다면, 유일하신 아들로 말미암아 양자가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유일하신 아들의 본을 그대로 받아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우리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은 그 뜻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같은 기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뜻의 일부는 버리고 자신의 뜻을 넣어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안식일 논쟁과 관련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마12:12)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자비와 선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해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안식일에도 자비와 선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셨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자비와 선을 베푸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양자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이해를 가지고 사건 자체를 다루고 있는 1절 이하 9절을 보시면, 우선 1절에서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유대인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유월절로 생각하지만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내용을 통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중 한 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는데, 사도 요한은 거기에 가끔씩 신기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고 증거 합니다. 2절 이하 4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어떤 사본의 경우 대괄호로 되어 있는 부분이 사도적 원본이 아닐 것이라고 해서 생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을 비롯하여 개혁자들은 본문 그대로를 받습니다. 특히 칼빈은 종교가 전성기에 있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읽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선지자의 시대에까지 기사가 보통 행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패하고 거의 황폐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기사와 표적을 통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조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선지자들이 있을 때는 그들 안에 내재하시던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증거 해 주셨기 때문에 그때는 종교에 대한 다른 확증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출현했을 때는 그들에게 선지자가 없었고 그들의 상태는 참으로 처참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렸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낙심하여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취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말라기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대략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고, 이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하여 침묵기라고도 합니다. 말씀이 없었던 시대이기에 그만큼 어두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400년 동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적의 역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언제부터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의 주석 내용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가 있었다고 해서 오늘날도 동일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비상 시대에 비상적인 역사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기적 혹은 표적과 같은 역사가 있는가?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셨던 하나님의 이전 계시 방식들은 지금 중단되었다(히1:1-2).” 이전 계시 방식들 안에는 이적과 표적의 역사도 있는데, 오늘날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이런 기적과 표적의 역사로 계시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계시 자체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조명의 역사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으로 미혹하는 일이 있다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런 이해를 가능한데, 계시로서 기적의 역사를 멈추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기도의 응답으로 모든 기적이 멈추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섭리에 대한 부분에서도 고백하는 것처럼 통상적으로는 그의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래서 병이 걸렸을 때 의술을 사용하여 낫는 것이 알반적으로 있지만, 그의 섭리는 그가 기뻐하실 때에는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하셔야 하는데, 선지자들의 기적 또 사도들의 기적과 같은 계시 방식으로서의 기적은 멈추었습니다. 은사로서의 기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으로까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시 4절을 보시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음을 받는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사 ‘가끔’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하는데, 한번 이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병자가 그 사실을 알고 모여 들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가끔이라는 말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기적으로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 년 중 어느날 정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그가 원하실 때 천사를 보내셔서 치유의 역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때 물 자체도 치유의 주체가 아닙니다. 또한 천사도 치유의 주체가 아닙니다. 누가 치유의 주체시냐? 하나님이십니다.
혹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를 받기 때문에 치유는 하나님께 있고,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공로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올바른 이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듯이 수고하게 하시는 분도 사실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즉 하나님께서 치유하고자 하실 때 치유하고자 하시는 대상까지 그의 섭리로 역사하여 그가 주고자 하는 자가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달음박질 잘 하는 자가 1등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실제로 많이 아파서 불편한 사람보다는 덜 불편한 사람이 항상 먼저 들어가서 낫게 되는 외형을 띠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는 역사로 있을 뿐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방식으로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영적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통해 병이 나았지만 오직 한 사람에게만 구원의 선포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은 구원과 치유 역사가 병행되지만 치유 역사가 무조건 구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내려가 가끔 물이 동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게 된다고 할 때 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병이 낫지 못하면 구원이 없는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양문 곁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이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38년 된 이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병에 걸렸는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그 병으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인간의 힘이나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거의 고칠 수 없는 병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기적의 장소라고 하는 이곳에서 기적만 바라고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인성을 취하여 계시지만 예수님은 인성으로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참 사람이 되셨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지, 그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낫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적의 장소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에 낫고자 하는 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냐하면 7절의 답을 얻어내기 위함입니다. 7절을 보시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즉 낫고자 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38년이나 된 자신의 병이 자신의 몸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 옆에 누가 있어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오랜 기간 동안 병을 앓아오면서 주변에 있던 가족 혹은 지인들도 다 떠나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남아 있다면 기적의 장소가 있다는 것으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겠지만 그조차 없어 현재 자신의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능력한 상태요, 그만큼 비참함의 상태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분명 육적인 것이지만 이후 죄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 전체 내용은 결코 육적인 것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영적인 문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무능력과 비참함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 무능력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전히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곳에서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인간의 공로를 말하면서 어떻게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내 주는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종종 언급하지만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런데 수고한 것도 돌아보니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더라.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란 표현입니다. 수고한 것은 ‘나’지만 그것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적 부정, 여기에 은혜라는 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고린도전서 3장에도 똑같이 표현됩니다. 사역자와 관련해서인데,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7절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심는 이로, 아볼로를 물 주는 이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때 너희가 믿어 교회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곳에 머물면서 사역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무엇보다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처럼(롬11:13)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 자로 있었습니다. 이때 고린도 교회를 누가 돌보았는가? 아볼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나 목사인 아볼로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심는 자로, 아볼로는 물 주는 자로 있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라고 할 때 도구가 있으면 좀 더 쉽게 일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가지지만, 하나님께 도구란 반드시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그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하신다는 그런 개념입니다. 도구가 있어서 더 쉽고, 도구가 없으면 어렵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도구가 있든, 도구가 없든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르게 이해하면 도구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방해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은 바로 도구로 사용된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세우셔서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까지 표현합니까?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심는 것이 헛되고 물 주는 것이 헛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 않고 물 주지 않고 어떻게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표현을 씁니다. 심었지만, 물을 주었지만, 달리 말하면 인간의 수고가 분명 있었지만, 그것조차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바로 여기에 은혜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은혜라는 말은 100% 하나님이 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인간의 자리가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을 통해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를 통해 말씀이 들려질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한 자나 설교한 자나 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이기에 그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공로를 말하고 상을 말하지만, 성경의 정확한 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사실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고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분명 수고는 있지만,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하자면 그런 수고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런 은혜이기 때문에 은혜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인식은 인간의 무능력, 인간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구원과 관련하여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또 인간이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육적 질병으로 인해 자신의 현재 상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만큼 자신이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7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육적 질병에서 나을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7절과 같이 말하는 38년 된 병자의 소망이라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병이 낫는 것이지만, 일단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있는 것입니다. 돕는 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병이 나을 수 있는 소망이 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절망 외에는 그에게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있게 되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인성을 취하셨지만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구별되지만 성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말씀하시면 말씀하신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누워 있던 병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고, 그것을 병자는 알았을 것입니다.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힘이 없던 다리가 힘이 생기는 등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 것이고, 병자는 자신의 몸의 변화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본문 9절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그러나 1절 이하 9절에 앞서 살폈지만 바로 이 일로 문제가 됩니다. 10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노동이고, 안식일에 노동은 불법이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11절 이하 13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이런 내용으로 봐서는 38년 된 병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적어도 그의 인식 가운데 영혼의 구원과 관련된 이해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육체만 나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이 사람 앞에 나타나시는데, 이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왜 38년이나 병을 앓았는가?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만 속한 말씀인가?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는 영적인 죽음만 낳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생애에서의 모든 비참함도 낳습니다. 여기에 질병과 같은 고통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죄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통이든 자신을 돌아보되 혹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욥의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욥기 1장 4절과 5절에 보면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런 욥의 자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38년이나 병을 가지고 있다가 나은 자를 찾아가셔서 왜 그런 병을 앓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병이 죄와 연관되었다고 할 때 병을 치료하신 것은 단지 병만이 아니라 죄 문제도 치료하고자 하신 뜻을 내비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는 단지 육체만 치료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구원하고자 함임을 이렇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병든 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나아가 병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죄까지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는 공관복음에서도 증거하는데,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9:5)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아니라 일어나 걸아가라고 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불치병도 있지만 의술을 통해 많은 질병을 고치는데, 이런 점에서 죄보다 병을 고치는 게 사람에게는 쉽습니다. 죄 문제는 결코 사람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6) 예수님은 단지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죄 사함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도 고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창조하신 분으로 영혼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사실과 더불어 무엇까지 드러내시는가? 앞서 마태복음 12장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진정한 안식은 자비와 선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비와 선이 본문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외적으로는 육신의 병에서 자유함을 얻도록 하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병,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진노와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도록 하신 것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외적인 자비와 선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적인 자비와 선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합니다. 율법을 운운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으로서의 율법인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참된 율법의 의미를 가진다면 자비와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바와 선을 베푸는 그 일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엇으로 따집니까?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법으로 자비와 선을 비판할 뿐입니다.
안식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안식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비와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6일 동안 하던 일, 형벌의 일종인 그 일을 멈추게 하시는 것이고,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겁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과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영생을 더욱 소망하게 하고,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안식일, 오늘날 우리는 주일로 지키고 있는데, 주일을 이런 내용으로 보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와 선의 풍성함으로 보내고 계시느냐는 겁니다.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선을 비판하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까?
15절 이하 18절을 보시면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본문에 대해서는 다시 살피겠지만 우리의 자리는 17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그대로는 하는 것, 달리 말하면 그의 말씀만을 따르는 거기에 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아버지의 일하심 그대로 동일하게 일하시는 분으로 계시는데, 양자 된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와 상관없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가 하라는 것을 하고, 그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말씀을 통해 내가 싫다고 해서 빼 버리고, 말씀에 없는데도 내가 좋다고 해서 넣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의 비판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자, 우리가 택자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라면, 그리고 그의 은혜로 양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 길만을 걸어 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