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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길 4코스: 5일장터길 & 세종대왕릉 걸어가는 길
일시: 2019년4월12일 금요일
동행: 김헌영 원의연
스친곳
신륵사 앞→ 연인교→ 한글시장(5일장터)→ 大老祠→ 남한강변→ 양섬→ 세
종대왕삼림욕장→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세종대왕역 13.90Km
☀ 5일정터길
• 無情歲月은 약속하다
할 일은 많은데 잔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여강길 3코스를 트레깅 하고 어
영부영으로 세월은 지나갔고 여주터미널에 20일만에 또 왔다 택시로 신륵사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침 9시- 곧 바로 걷기 시작하여 “여주여행과 장터
길” 안내도를 참고하려니 곁에 元豪장군임진왜란전승비가 있다
• 원호장군임진왜란정승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원씨 마을에 원두표 신도비와 함께 세워져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 원호장군(1533~1592)의 신도비로 동행중에 원 선생이 있어서 “어이~ 원 선생 여기 당신 할아버지 신도비가 있으니 와서 참배하소” 소리 지르고 생각하니 삼남길에서는 元均 장균 묘소를 참배하고 문화원에서 발행한 원균에 대한 책도 받아서 읽었다
원호의 본관은 원주이며 여주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仲英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원부사로 있을 떄에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직 중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인책, 유배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하여 여주 신륵사에서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강원방어사겸 여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적의 복병을 맞아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다.
또 원호 장군은 1592년(선조 25) 6월 10일경 원호는 왜군의 일부가 구미포(현 이포대교 아래쪽)에서 노략질을 하며 군량과 말을 조달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포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 시키는 등 여강 일대 전투 중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들을 육지전투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으로 국위를 선양함과 동시에 실추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 시키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황포돛대 선착장 갈림길을 지나서 도자기 미술관 여주박물관과 도서관 표식을 보면서 강변을 걸으려니 뚝방에서 나물뜯는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민들레(포공영) 샛노란 꽃이 앙증스럽고 연인교로 올라 다리를 건느려니 강물이 햇빛에 반짝 반짝 나를 따라 오고 11시 방향으로 영월루와 마암이 주변 풍경이 어우러진 모습이 절경이다 곁에서 걷는 김 총무가 “풍경이 좋군요” 라고 들려준 다
여주도자기 축제 4월27일~5월12일 프랑카트를 보면서 여주석재 앞에서 여주시청방향으로 길을 잡으니 여주중학교와 세종고등학교 있었고 Y자 삼거리에서 좌측은 여흥로이고 우측은 청심루로 우리들은 오른쪽으로 진행하여 여주교육지원청을 지나서 세종로를 직진하니 장터길1구역이 시작되는데 장터길에는 세종대왕의 황금색 동상이 2개 있다 그리고 장터시장은 한글시장이다
장터는 5개 구역으로 끝나지만 진행해야 할 알림이나 안내도가 없다 여주농협 앞아서 김 총무와 원 선생이 열심히 검색을 하고 아낙네에게 대로사 방향을 묻고 진행하니 아스팔트로 포장된 2차선 도로가 나왔고 우틀하니 여주시보훈회관과 장애인복지관 앞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로서원이 나오면서 트레킹 안내도가 있다 한마디씩 하기를 안내도의 설치 위치가 잘못 되었다고 투덜 거렸다
※ 여주5일 장터는 매월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30일 날에 열리는데 정 선 장터의 홍보 보다 밀리는 것 같다 내 마음속에는 정선장터를 가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여주장터는 아직까지 생각이 들지 않았고 장터를 지나려니 고구마 빵이 있다고 하니 하나 사먹고 싶어도 동행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여주 고구마도 품질이 좋은 것 같은데 교동도 고구마를 한 자루 사온적이 있다
• 착각
대로사를 절로 생각했다 그런데 절이 아니고 우암 선생의 大老書院과 “大老祠碑”와 秋陽齋가 있는 곳이다 추양재 안으로 들어가서 “大老祠秋陽齋祈實碑”부터 차아보고 대로사비각도 들려 추양재를 지나서 안내도가 있는쪽으로 나왔다
※ 참고자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大老祠는 1785년(정조 9)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한 정조가 숙종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수행한 김양행에게 짓게 하고 곧 바로 사액을 내렸다.
대로사라는 명칭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며 맹자에 그 용례가 보인다. 또, 실록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大老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대로사라는 명칭이 붙게 된 연유가 기록돼 있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대왕릉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대로사비각을 들려 추양재 앞으로 지나려니 秋陽齋에는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天高海闊之心”이 눈에 띄었고 대로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았고 대로사는 고종임금이 江漢祠로 개명했으며 秋陽이나 江漢의 용어는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대로사를 살펴보고 장애인복지관 앞에서 강변으로 나왔다 맑은 바람을 마시면서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니 가슴이 시원했고 강변에 시 표석이 보였다 홍은숙의 “행복이란...” 시였다
행복이란-홍은숙
잘나서 부담스런 그대보다
사사건건 까칠스런 그대보다
내 슬픔 어려움 하소연할 때
그대의 눈가에 젖어 오는
공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멋진 저녁 약속에
배고픔 참고 달달 떨고 서 있는 나를
모른 척 눈앞의 포장마차로 끌고 가
뜨거운 오뎅 국물을 건네주는 그대의
따뜻한 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대의 셈 없는 편안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대의 조용한 다정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3시 방향으로 대교가 보였지만 이름이 궁금하여 지나는 노인이 마침 있어
서 다리 이름을 물었더니 다리 이름외에도 많은 것을 들려줬는데 “저다리는
세종대교이며 강 아래를 北涆舠” 라고 하면서 만주벌에 북간도, 서간도가 있
지만 여주에도 북간도가 있으며 도(舠)자는 거룻배도자라 한 다 나는 “북간
도”를 한자로 표기해주는데 또박또박 쓰면서 설명도 곁들였다
표석에 여주의 노래가 있는데 유달영 작사 김동진 작곡인데 김동진이 친일
파여서 금년부터 이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지만 가사를 소개한 다
봉마다 푸른 솔에 싱싱히 어린
북벌의 칼을 갈던 우람한 뜻과
정음을 지어 펴신 어진 슬기가
봄하늘 태양으로 우릴 기른다
(후렴)굽이쳐 흘러가는 무궁한 강물강물처럼 무궁한 여주의 마음
명화에 그림 같은 여주팔경에
포은도 찾아와서 시를 읊었네
역사에 피고 진 허다한 인걸
유서깊은 고적마다 신운이 돈다
맑은 강 넓은 들에 검은 멧부리
흥겨운 농부가는 메아리 친다
천 만대 살아 나갈 우리 복지를
자유의 깃발 아래 이룩해 가자
남한강가의 풍경은 절경으로 “아~하 좋구나” 절로 탄식이 흐르면서 표석에
조선 후기의 문신인 박준원(1739~1807)의 청림루와 서산대사의 여강의 시
가 있다
淸心樓-박준원(조선 후기 문신 1739~1807)
月漾遙波鏡面奇: 달이 먼 물결에 일렁이니 그 모습 기이하고
孤舟點着細如眉: 외로운 배에 불을 켜니 가녀린 눈썹 같아라
篙工棹此將何去: 사공은 노를 저어 이제 어디로 가려나
杳杳煙洲未可知: 물가에 안개가 자욱하여 알 수 없어라
해질무렵 여강에 배를 대다-서산대사(1520~1604)
落雁下長沙: 낙안이 장사에 내리고
樓中人起舞: 루 가운데 사람이 춤을 추네
淸秋一葉飛: 청추에 한 잎 낙엽이 날리는데
客宿西江雨: 객숙 서가엔 비가 내리네
여주 원불교 앞에 청심루 표석이 있는데 선비들은 청심루와 월영루 신륵사
에 많은 시를 남겼는데 특히 청심루에는 200여편의 시가 있고 청심루에는
40여편의 시판이 있었다 청심루는 여주관아의 동헌 강가에 있었다는데 8.15
광북후 원한에 사무친 민초들이 여주군수 관사를 태울 때 함께 탔거니 아직
도 복원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으나 남한강에서 제일절경으로 바람이 머는
곳으로 주열(?~1287)이 시를 남겼는데-
동그랗게 밝은 달이 구름 가에 나타나니
거울 속에서 예부터 친한 얼굴을 만나네
쌍으로선 나무는 보개의 글림자가 드리운 것이고
사화산은 수미의 무리가 드러누운 듯 하네
길손의 목적지는 세종대왕산림욕장인데 하리보도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세
종대교 밑으로 양섬이 있고 왼쪽으로 분뇨처리장이 있다
• 洋島落雁(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모습)
양도는 여주읍 하리의 아랫동네 북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조선시대
가축방목지로 이용되엇던 섬으로 훗날 양을 길렀다고 하여 양섬이라고 한
다 원래는 벌섬인데 벋은 섬으로 변하고 다시 버들섬으로 변하여 일시 楊島
이라 하다가 현지 이름 羊島로 쓰이게 되었다
• 양섬 이야기
양섬은 여주팔경중에 제5경인 “洋島落雁”으로 양섬에 기러기 떼가 내리는
모습이라고 했는데 풍광이 좋아서 한국관광공사에서 5월(2014년)의 가족과
나들이 10개 추천 코스로 선정되기도 하였지만 코스는 슬픈 이야기 들이
많다
1. 천주교 박해시절 순교자들을 처벌하였기에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 비가 있고
2. 소설 장길산에서 주인공인 여옥이의 이별장면 배경이 되려니 이별하려면
양섬에서 하는 것이 어떨 가지만 이별은 말아야제~
3.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이 여섯 번째로 양섬과 능서면 학살지
에 원혼비(冤魂碑)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냈다
“擊錚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하리-“
• 격쟁(擊錚)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왕이 거동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왕에게 호소하는 일인데 순례단은 꽹가리 대신 알림 글을 사각
천에 만들었다
양섬에서 학살되었거나 순교인들의 후손 들은 그후 “남한강변에서 솟아난 새싹들은 무럭무럭 자라나서” 잘 살고 있거나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 민
초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양섬지구소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양섬야구장, 보
트선착장 한강자전거길 야영장 외에 낚시를 즐기려는 강태공들도 모여들고
있다 세종산람욕장 입구는 소공원으로서 크기는 손바닥만하니 매우 허술한
것 같았다 입구부터 가파르게 통나무계단을 치고 올라야 하는데 방향지시
표기에 (→ 대로사 (Daeloso Temple) 이렇게 표하니 역시 템플이 들어
가 있으니 우리 일행들이 대로사를 찾을 때 절간으로 착각 했던 것이다
세종산림욕장 입구에서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통나무계단이 갈지자로 설
치 되어 있고 표찰에 화살표로 방향지시도 많아서 갈림 길에서는 전망대 방
향만 잡으면 된 다 전망대는 이층 팔각정자로 양섬 방향이다 그리고 시조시
인 정기명의 “여강에 돛을 달고” 시조가 오석에 있는데 여강의 풍광을 노래
하고 있다
눈부신 햇살로 온 몸을 적시는/여강의 도도한 흐름속에/ 우리는 금당천의 슬
기를 받아/넉넉한 마음이 된 다/ 푸른 하늘을 닮은 맑은 눈동자/여강의 웅기를 타고/넓은 초원을 달린 다/구겨진 마음/푸른 물이 씻어버리고/여강에 돛을 달고/맑고 넓는 푸른바다/마음껓 헤쳐나간 다
정자에서 내리막길을 잡고 갈림길이 더러 있지만 효종대왕릉 가는 길로만
진행하면 된 다 운동 시설도 지나고 시판도 있다 금사와 흥천 방향으로 가
는 333번 도로 곁으로 1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면 작은 세종교가 나오
고 여주시청양궁장도 보인 다 효종대왕릉 주차장에는 만차가 되었고 학생들
이 바글바글 거렸지만 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조선 17대 효종대왕의 능은 상.하 분으로 위쪽이 대왕릉이고 아래쪽은 인선
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효종대왕의 북벌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무쇠도령 李
浣 대장을 아꼈는데 대장의 능도 지척에 있다 하니 찾아보고 싶다
• 효종대왕의 시
靑石嶺 지나거나 草河口는 어드메오
胡風도 참도찰사 구즌비는 무슨일고
아무나 내 行色 그려내여 님 계신데 드리고저
효종대왕은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봉림대군으로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잡혀갈 때 만주 요령성 동북쪽에 있는 고개인 청석령을 넘으면서 볼모인 신세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고 그 후 봉림대군(1619~1659)은 귀국하여 효종이 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이완대장과 북벌계획을 진행하다 왕이 된지 10년만에 죽어서 북벌계획이 중단 되었다
• 효종대왕의 북벌의지
효종이 재위 6년(1655)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는 술을 좋아해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세자가 된 뒤로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 매일 마시던 술을 단번에 끊었으니 북벌 의지의 강도를 알 수 있다.
※ 李浣대장의 Story
• 어려서는 무쇠도령으로 뒷간(화장실)에서 개를 세우 놓고 볼일을 보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서 개를 물어가려니 집안에 소동이 벌어졌지만 이완은 태연하게 앉아서 볼 일을 처리하니 “어찌 된 것이야~”하니 “호랑이는 잡아 간 개를 먹는 동안은 다시 안 올겨...” 라고 말대답을 했거니 일화가 더 있는데 음성군에 전해지는 이야기이고 용인시의 이야기는 대장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효종대왕릉을 참배하고 되내려오다가 500m 떨어진 세종대왕릉 길로 접어드니 “왕의 숲길” 이다 정조대왕은 英陵(세종대왕)과 寧陵(정조대왕) 사이를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반백년 전에 나는 답사팀을 따라 고인이 되신 노모와 함께 왕의 숲길을 걸으면서 노송들을 바라 보았으련만 二陵의 모습은 기억이 바랬고 다만 이릉들려 신륵사에서 숙식하던 생각은 어렴픗이 떠오르는데 이릉의 두견새 우는 소리 “二陵杜鵑”은 여주팔경에 들어간다
11시44분
세종대왕의 영릉(英陵)도착하니 릉 앞에는 공사 중이고 한글 “영릉”이면 누구의 릉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한문 표기로 英陵(세종대왕) 寧陵(효종대왕) 永陵(진종과 효순왕후)의 능은 파주에 있고 고려 제28대 충혜왕의 永陵은 개성시에 있다 능 참배를 마치고 걸었던 길을 되돌아 200m쯤 걸으면 고개가 나오고 고개에서 효종대왕릉으로 행선을 잡지 말고 사잇길로 빠져 2Km쯤 걸으면 세종대왕 역사관이 있고 세종교가 나온 다
☺ 독도유의 지역(세종교 앞)
여주시에 만든 여강길 자료에는 4코스 5일 장터길의 날머리는 경강선 세종대왕역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깜빡하고 세종교를 건너 여주방향으로 걷다가 대왕2리 마을회관 앞에서 다시 독도를 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여주역이 나온 다 하여 세종교로 돌아오니 방향지시 표찰이 있고 세종대왕역은 5.2Km로 햇빛이 강하고 그늘도 없는 도로따라 걸으려니 맥이 팍 풀렸지만 어쪄랴~ 걸어야제...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새로 조성한 도로인 모양으로 아스팔트가 산듯하다 터덜터덜 고개를 넘으려니 마주 오는 장년과 마주치면서 그는 이릉으로 세종역에서 Bus 배차시간을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걷는단 다 작별하고 고개를 넘어 내리막 끝지점에서 2차선 포장도로와 접속하니 방향지시 표찰이 있고 도로를 버리고 “↖” 방향으로 진입하면 마을이 나온 다
☀ 세종대왕릉 걸어가는 길
걷는 길 이름으로 새로이 만들었는지 리본의 색깔이 산뜻하고 방향과 거리 표찰을 부착한 기둥꼭대기에는 바람개비를 달아 쉽게 눈에 띄게 만들었다 “잘 만들었군...”
• 세종대왕릉 걸어서 가는 길이라 하니 세종대왕의 음주 금지 계주문을 찾아보면-세종 은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음주를 경계하는 교지문을 반포했다
"대개 들으니 술자리를 베푸는 것은 술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신명을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며, 나이 많은 이를 부양(扶養)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시작해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중국의 여러 사례를 들었다. 예를 들면 “후한(後漢)의 사예교위(司隷校尉) 정충(丁沖)이 자주 여러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술을 먹다가 창자가 썩어서 죽었다”는 사례 등이다. 세종은 이를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게 했다
그러나 교지문은 소용이 없었고 음주 풍습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세종 후손들인 세조 예종 성종도 술을 즐겼으며 역대 왕들의 연회(술자리)는 1위가 세조로 467회 2위는 태종으로서 167회 이고 세종도 91회 연회를 열었다
마을길과 농로 길로 언덕을 오르지만 유도표식으로 리본과 표찰들이 곳곳에 있어서 삼거리나 갈림길에서 조금만 유의하면 방향을 잃을 수는 없다 농사철이 시작되었고 밭에는 파란색으로 덮였다 봉추사는 전통절 모습이 아니고 절 앞은 삼거리로 산 옆과 농로 사이로 언덕을 향하다가 중간에 좌측으로 꺾이면 가파르게 언덕을 올라 우측으로 틀다가 다시 소로를 만나면 입산이다 다시 산자락에서 벗어나 소로를 만나서 내려오면 폐품을 수집하는 곳이 있다 그리고 마을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팍 틀어야 하는데 진행 방향의 표찰은 파손되어 땅에 떨어졌지만 마을 청년이 방향을 제시해주면서 표찰은 손질한 다
42번 지하보도를 지나면 또 지하보도가 있고 잠시 후에 지하보도가 또 나오면 보도벽에 세종대왕님 벽화가 있고 “여민동락” 이라는 글씨가 있다 세종대왕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박연을 시켜 악학궤범을 정리하였고 궁중음악에도 “與民樂”이라는 곡이 있는데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음악이고 그리고 시도 있다
“六飛로 크나큰 밭머리를 순행하면서
이 백성들에게 풍년들기를 기다렸다네
빗줄이 드리워서 흠뿍 젖어 만족하니
얼굴에 웃음이 가득 하 걱정이 없네
龍蛇 같은 글씨에 꽃무니 종이가 젖고
국직한 우애에 즐김이 또한 끝이 없어
夕陽이 물가로 지는 줄 깜빡 몰랐네“
이 시는 세종 7년(1425.4) 효령대군이 농사짓는 합강정을 찾았다가 한달 뒤인 1425년5월13일 날에 다시 합강정에 올랐 때 가물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려니 세종은 너무 기뻐서 시를 짓고 합강정을 喜雨亭으로 바꾸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 후 희우정은 망원정이 되었다
다시 언덕을 오르면 아스팔트 포장 소로로 인삼밭이 있고 조금 진행하면 테니스장이 나오는데 능서레포츠공원이다 이후 방향유도 표식만 따라가면 세종대왕역이 나오는데 13시50분이 되었고 우리는 이천으로 와서 청목한정식 집을 찾아가서 이천쌀밥 맛을 봤다 끝으로 최선화의 여주팔경 노래로 끝을 맺는 다
가세 가세 구경가세 아름다운 여주로
별미 천지 경기도 여주 여주팔경 구경가세
역사의 고장 문화재 고장 시옥사로 명성황후 생가로
세종대왕 효종대왕 영릉 영릉으로 가보세
전통문화유산의 고장 도자기 고장 여주로
조상혼이 담긴 도예 여주 도자기 구경가세
팔경 절경 구경가세 아름다운 여주로
별미 천지 경기도 여주 여주팔경 구경가
세문화의 고장 예술의 고장
경원루로 여주팔경 명소로
남한강의 추포나루 이포 이포나루 가보세
우리문화 문화재 고장 도자기 고장 여주로
백번천번 구워만든 여주 도자기 구경가세
• 餘談
나는 한 때 이포에서 2년 정도 근무한바 있는데 결혼 전으로 여주시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이포로 가려고 여주대교를 건너 모래밭(땅콩)을 걷고 이포나루에서 나룻배로 건넜고 서울에 오려면 이천에서 환승하거나 나룻배를 타고 천서리로 건너가 양평을 경유하였는데 지금은 4대깅 개발 사업으로 이포대교도 생겼거니와 모래밭이 없어져서 남한강의 절경들이 많이 훼손되었다 하여 여강길은 이포까지와 명성황후 집까지 그리고 파사성과 고달사지까지 가는 길이 생겼으면 싶고 되도록 옛길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이완장군과 작은마누라 이야기
이완장군이 애처와 곤한 잠에 빠졌는데 효종대왕이 급히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한 밤중에 호출을 당하였으니 무심코 대충 옷을 걸치려니 애처-曰 “속에다 갑옷을 입으시라 간곡히 애원하여... ”이 대장도 느낀바 있어 겉 옷속에 갑옷을 입고 대궐문을 들어서려니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효종대왕에게 인사를 올렸더니 효종대왕 曰 “과연 믿을만한 장수로다” 하면서 부상으로 붓을 한 자루 주어서 공손히 받고 귀가하니 애처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서방님을 기다렸다가 “임금님 무엇을 주셨오”하니 이 대장이 깜짝 놀라면서 “시시하게 붓 한 자루 받아 왔오” 라 하니 지혜로운 부인이 “붓을 확 꺾었다 이에 이 대장은 기절초풍하면서 “당신 미쳤오 감히 임금님이 주신 붓을 어찌...” 라 했지만 붓 통속에는 목화씨가 아니라 지도였다 북벌계획에 참고하라는 지도였던 것이다 애처는 지혜로운 京妻였다 하~하~하 부럽도다.
여강길 4코스를 마치면서
4코스는
신륵사를 들머리로
원호장군
임진왜란 전승비를 지나
연인교를 건너
여주 5일장터
한글시장 구경하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로서원 들려
남한강를 걸으면
세심정 표석 다음에
여주팔경중에
양섬은 “洋島落雁” 이라
二陵(세종과 효종릉)
소나무 숲의
왕의 숲길에서
두견새 울음 찾으면
진달래꽃
방실방실 거리고
마을길 농로 따라
경강선
세종대왕역이
뗑땡 거린 다 2019년4월12일 금요일
남한강
전망대에서
여주시내를 조망하면
남한강 물
유유히 흐르고
선비들은
한양에서 나룻타고
여주관아
세심정에 올라
吟風弄月로
시를 남긴 다
길손은
천복을 받아
여강길 걸으면서
여주팔경
풍광을 가슴에 담는 다
二陵 참배하면서
세종님금의
與民樂과
효종님금
北伐計劃- 고맙고요
봄날
동산엔 진달래꽃이 함빡 피었습니다 2019년4월12일 금요일
여강길 마침표
남한강의 여주 땅
여강길은
버스터미널을 들머리로
경강선
세종대왕역까지
4코스로 62Km를 걷는 다
남한강 남쪽 강변을 동진하다가
남한강대교를 건너
갯치나루터에서
연인교까지
북쪽 강가를 걷다가
양섬과 이릉으로 돌아오면
자연환경 살아 숨쉬는
천년의 숨결의
여주팔경 풍광
시야를 넓혀서
아름다운
금수강산 길손 되고 싶지만
불청객
병마의 공격은 사납고
할 일은 많건만
日暮途遠이지만
殘日만 줄어든 다 2019년4월12일 금요일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