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이태희
주말 더위를 피해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미적거리다 집에 눌러 앉았다. 거실 중앙을 비워두고 하루 종일 남편과 함께였다.
무료함을 깨우는데 낚시만한 것이 없다. 남편은 낚시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신혼의 주말마다 낚시를 즐겼다. 나와 동행하기를 바랐던 남편과 함께 지방의 저수지를 찾아 다녔다. 밤낚시는 우리에게 신세계를 선물했다. 고요와 적막이 베푸는 까만 밤에 낚싯대의 연둣빛 찌를 함께 바라보고 있으면 둘만의 우주로 가득했다.
낚시는 미끼가 중요하다. 낚시꾼들은 지렁이 미끼를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지렁이가 싫었다. 구분없이 긴 몸통, 거기다 번들거리는 피부는 만지지 않고 눈으로 보아도 소름이 끼칠만큼 혐오스럽고 징그러웠다. 지렁이를 보면 나의 몸을 웅크러지고 소름이 돋았다. 지령이 통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지나치게 민감한 나의 반응에 남편은 특별한 미끼를 제조했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의 깻묵과 볶은 콩가루의 양를 비슷하게 그릇에 붓고 물과 섞었다. 몇 번을 뒤적거리다 섞은걸 한 움큼 손안에 넣고 야구공처럼 손이 아프도록 뭉쳤다. 수제비 반죽보다 더 찰지고 쫀득한 반죽으로 만든 미끼 덩어리는 물고기들이 먹을 정성스런 밥 같기도 했다. 그릇에 남은 찌꺼기까지 싹싹 긁어서 낚시대 주변의 물가에 던진다. 바람을 따라 고소한 향이 날아 다닌다. 물고기들이 남편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주기를 기원한다.
옛일을 떠오른다. 이십대의 남편과 난 헤어지는 순간까지 손을 놓지 못했다. 통금을 눈앞에 둔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미끼는 달콤하고 고소했다. 눈은 보이지 않았고 시계의 초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까만밤 세상은 환하게 빛나고 주위는 봄햇살처럼 따뜻했다.
거실은 무언의 낚시터다. 혼자의 시간을 잘 쓰고 있는 남편을 보니 은근히 심통이 난다. 음악을 듣는 것 같더니 어느새 웹툰을 본다. 누운 체로 몸을 이리저리 굴리다 어느 샌가 게임의 총격전을 벌인다.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배기는 게 통 집중이 되질 않는다. 날짜가 지난 신문을 가져와 뒤적거렸다. 신문의 작은 활자가 눈앞에 아롱거리며 하나도 읽히질 않는다.
남편을 향해 미끼를 던졌다. 예전의 나처럼 미끼를 덥석 물어준다면 한낮의 무료함이 싹 달아날 것 같다. 오래전 함께 알던 여직원의 근황을 전했다. 쉰 살도 넘은 여직원은 아직도 미혼이란다. 남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반응에 나도 허리를 펴고 앉았다. 그녀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고향집에 황토방을 지었단다. 덕분에 한 달에 한번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와 지내다 간다고 한다. 그녀의 경제적 여유나 전원속의 황토방 여유가 부럽다. 그러나 나와 너무나 다른 생각을 늘어놓는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다. 쉰도 넘은 나이에 아직껏 직장생활하며 혼자 사는 게 얼마나 외롭겠냐는 생각은 안 해봤냐며 남편이 나를 노려본다. 나는 속물이 되었다. 물질만 좋아하고 인정머리 없는 여자가 된것이다. 나는 그동안 무디어졌던 서운한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거실은 적막이 흐른다. 결혼한 여자의 본능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낚시가 가당하기나 한걸까? 나의 눈빛과 몸짓에서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나의 욕구를 알아차린게 분명하다. 그에게 위로 받고 싶었던게 아주 큰 것도 아닌데 서운함이 자꾸 커진다. 거실의 적막을 깨고 남편이 일어섰다.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내눈에 들어온다. 멀어지는 그의 어깨는 내려앉았고 야위었으며 걸음걸이는 소심하다.
낚시는 추억이다. 낚시터에서 찌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은 깊은밤속으로 빠져들었다.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밤은 가장 맛있는 거피의 향을 마셨고 많은 대화를 나눈 밤이었다. 고소하고 달콤함은 없어도 우리들의 미래로 가득했다. 꿈을 향한 열정을 갖게 될거란 믿음을 하나씩 쌓던 시간이었다.
배워서 익히기보단 스스로 알아 가는게 삶의 묘미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가 나를 당황하게 한다. 나는 종종걸음 치고 불안해 하며 조급하게 사는게 삶의 답인줄 알았다. 젊은날 추억의 달콤한 미끼를 지나쳤다. 추억과 여유를 즐기며 혼자의 시간을 잘쓰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당긴 팔에 손맛을 느낀걸까? 순간 남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늘도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만나 식당
이태희
오랜만이다. 친구에게서 안부를 묻는 짧은 문자가 왔다. 난 가계부의 메모들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찾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올해의 봄인지 작년 가을인지 기억 속에서 묻혀 가물가물하다. 만난장소만 또렷하게 기억된다.
두해전이다. 제 둥지를 놔두고 혼자 대구에 왔다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행?”
“아니 살아보려고.”
며칠 전 집 앞 공원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셨던 것처럼 낯설지 않게 말을 늘어놓는다.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친구는 신혼 때부터 수도 없이 이사를 다녔다. 강원도 태백에 사는 줄 알고 있는데, 어느 날 경북 포항에 살고 있다며 기별을 했다. 또 몇 해만에 연락해 인천에 살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대구에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신에게 고마웠던 친구가 부탁하는걸, 거절하지 못해 내린 결정이라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남편과 갈등을 겪었다. 남편은 가정에 성실하지 못했다. 남편의 무책임과 방탕한 생활은 그녀의 심신을 지치게 했다. 신혼부터 혼자서 아이의 양육과 생활비를 벌었다. 백기를 들고 내린 결정은 이혼이었다. 자신이 정말 힘이 들 때 그녀의 고향친구가 선뜻 빌려준 돈은 평생 잊지 못한단다. 4대보험이 다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창업한 음식점의 일을 도우러 대구에 내려오는 의리를 지켰다. 난 친구의 선택에 한숨이 절로 나와 박수쳐주진 못했다.
그녀가 대구를 떠난단다. 고마움을 계산없이 표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본다. 그녀는 늘 없는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그 길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연에 몸을 맡기듯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방랑자처럼 때론 수도자의 모 습으로 나보다 몇 살이나 위처럼 커 보인다.
음식솜씨가 좋은 친구를 위해 맛집을 찾았다. 나는 ‘맛나’와 ‘만나’의 이름을 두고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얼핏 본 식당 간판이 뇌리에서 혼돈을 일으켰다. 그녀와 금호강이 바라다 보이는 허름한 식당 창쪽에 마주 앉았다. 이 식당은 오래전부터 이곳 유원지에 오면 돈을 내고 구름다리를 건너던 것처럼 유명세를 탔다. 코다리찜은 이집의 간판요리다. 뻘건 양념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치장한 코다리 두 마리가 하얀 플라스틱 길쭉한 접시에 얌전히 담겨져 나왔다. 친구의 삶이 식탁위에 놓인 코다리처럼 보였다. 매운맛을 알면서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혀끝에 침이 고인다.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친구에게 맛있다며 몇 번이나 권했다. 청량고추를 썰어 넣었는지 매콤한 뒷맛이 입안이 얼얼하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르게 나는 훌쩍거리며 친구를 본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 친구도 입안에 불타는 여운을 남겼다.
지난밤 나는 금호강변을 걸었다. 오래되지 않은 친구와의 기억 하나가 내 발밑에서 으스러진다. 밟힌 잔디를 일으켜 세우는 선선해진 바람이 몸을 감싼다. 옷깃을 세운다. 식당 안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손님들의 홍조띤 얼굴을 보자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다. 식당의 요리냄새가 불에 타는지 매콤함이 강둑까지 전해진다. 속이 아파 매운걸 못 먹겠다고 하지 않은 그녀의 미련함이 발밑에서 꿈틀거린다. 타는 양념냄새가 뻘건 양념 발린 코다리찜 양념인 듯 머릿속 기억의 매운맛이 가득하다. 그날 혀끝의 매운맛을 달래주던 라떼의 부드럽고 달싹한 맛으로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삶의 맛은 때때로 달라진다. 결혼해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고 생활에 지친 무기력이 내삶을 짓누르기도 했다. 남편의 투병을 지킬 때 나는 맛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정신없이 세월이 가버렸고 난 추억속에서 건진 묘한맛을 기억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매운맛, 만나 식당의 코다리찜은 맵기만 한게 아니다. 이 맛도 조금씩 입안에서 익숙해져 그맛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어 이집의 맛은 단골이 되고 만다.
그녀가 웃는다. 습관처럼 시치미를 떼고 느긋한 척을 했다. 전화선 너머 뱃속 깊이 힘을 실어 목소리를 키운 친구의 경직된 얼굴이 그려진다. 제아픔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위로하려 마련한 시간일까? 나는 그녀에게 신이 주는 쉬는 시간이라며 어설픈 위로를 했다. 암도 친구가 될 수 있단다. 지금은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 되고 있다고 했다. 위암 말기가 그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지 장담하지 못하면서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친구가 함암치료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금호강 풍경 사진을 전송했다. 바람을 따라 억새가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부른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매운맛을 느낀 혀를 입안 이리저리 굴려가며 함께 눈을 맞추고 깔깔댈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한다. 삶의 맛은 세월속에서 숙성되어진다. 매운맛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 “만나 식당”앞은 쉽게 지나치질 못한다. 오래된 풍경들이 가을처럼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