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다행
이내빈
2003년 11월 20일 목요일 나에게는 악마의 날이었다. 그때 나는 김제 교육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11:00시 교육청 바로 옆에 위치한 중앙교회 노인대학에서 ‘행복한 노후생활’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나는 전문 강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노인관련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 당시 중앙교회에서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었고 김제시 관내 각 기관에 의뢰하여 특강을 요청하는 형태로 교육일정을 편성 운영하였다. 그 해 6월에 1차로 특강 요청이 들어와 극구 사양을 했으나 교회 관계자는 막무가내였다. 어쩔수 없이 특강에 응하게 되었고, 그시절 여러가지 직무수행에 바빴던 나로서는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경험한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과 부모님께 효도를 못해서 후회가 되었던 통한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나의 성장과정에서 부터 지금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과 슬프고 기뻤던 이야기를 해드렸던 것 같다. 세상을 오래 살아오신 분들이라 나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해 주시었고 60여 명의 어르신들은 우렁찬 박수로 화답하게 된 것이다. 나는 준비해간 금일봉과 강사료를 합쳐서 어르신들의 간식비로 헌금을 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1월초 중앙교회 장로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다시 한번 특강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양하였지만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특강을 수락하고 이번에는 철저한 준비를 해서 정말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 드려야 겠다고 마음 먹고 틈틈이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주제를 노후생활에 있어서의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으로 정하고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주로 건강과 행복을 주제로 강의를 해드렸던 것 같다. 강의가 끝나자 도로까지 배웅을 나온 장로님께서 양복 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쑥 집어 넣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이번에야 말로 강의료를 꼭 챙겨 드려야 겠다고 작정 하신 것 같았다.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었다.
얼마 전이었다. 팀장 한분이 티켓 2장을 챙겨 내 책상위에 올려 놓으며 공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마음 합창단’의 합창공연이었다. 그 팀장님은 단원의 한 사람으로써 그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 저녁 오후 7시 ‘한국 소리의 전당’ 모악당이었다. 난감하였다. 상사로써 참석하여 축하와 격려를 전달하여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10시 부안에 소재하고 있는 ‘전북해양수련원’에서 행사가 있고 그 행사에서 ‘조직의 갈등관리’라는 주제로 특강이 예정되어 있어 그와 관련된 준비는 물론 여타의 처리해야 할 현안들이 기다리고 있어 직무형편상 참석여부에 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회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그 당시 군산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부담이 되었다. 결국 나는 얼굴만이라도 보고 오자 그렇게 생각하고 퇴근하자마자 소리의 전당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7시에 시작한 공연은 논스톱으로 9시 15분까지 공연 되었고 앵콜까지 받아들이다 보니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공연에 참석한 여러명의 직원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10시 30분이 넘어서야 출발하게 되었다.
체면 치례를 하기는 하였지만 피곤이 몰려왔다. 집에 가서 바로 내일 특강 자료를 검토해야 할 입장이라 휴식을 갖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차를 몰고 군산으로 향했다. 송천역 삼거리를 지나 동부대로를 타고 동산역을 지날 무렵 아뿔싸 깜빡 졸고 말았던 것 같다. 동산 육교를 300여미터 앞두고 중앙선을 넘어 반대 방향으로 직진하던 차량을 들이받고 만 것이다. 나는 기절을 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119에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사고로 인하여 통행이 원활치 못했던 그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앙 분리대가 없었고 조명도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육교 입구 직전에 삼례로 빠지는 길이 있어 운전에 조심을 요하는 길이었다. 구급대가 왔을 때 나는 어렴풋이 깨어났고 전북대학교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길에 구급대원이 집으로 전화를 하면서 “사장님이 교통사고로 전북대학교병원 응급실로 가는 길입니다“ 라고 전달 하였으나 남편이 한 번도 사장님으로 불리어 본적이 없는 터라 잘못 걸려온 전화로 알고 전화를 끊게 되었다. 그뒤로 구급대원의 자세한 설명을 인지한 아내는 기절초풍을 하였다는 얘기를 후에 듣게 되었다. 얼굴에선 피가 흐르고 콧등은 포를 뜬 것 처럼 찢어진 상태였다고 했다. 오른쪽 무릅이 문제였다. 너덜너덜 넝마처럼 헤져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사고의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눈만 뜬채 구급차에 누워 실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마자 각종 검사에 들어갔고 우선 교육청 팀장 한분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사실을 연락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다음날 간부회의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밤중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부산을 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한에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가족들이 당도하였으나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수술 스케줄이 잡혔다. 응급처치를 한 다음 진통제와 수면제를 주사하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대퇴 직근 파열 봉합 수술이었다. 다행인 것은 오른쪽 무릅의 슬개골이 온전하였다는 것이다. 4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전신은 몽롱하였고 상처 부위는 깊은 통증으로 욱신거렸다. 3일 후 나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고 비로소 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제일 먼저 피해 차량의 상태와 피해자가 염려되었다. 젊은 신혼 부부라 했다. 남자는 그리 큰 부상은 없었으나 여자의 왼쪽 가슴부위에 심한 상처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날 즉시 응급처치는 되었으나 여자의 친정이 서울인 관계로 서울 보라매 병원으로 이송되기를 원하고 있어 즉시 처리하여 주었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내차는 원형을 복원하기 어려워 폐차를 결정했다고 들었다
나는 3주 정도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증상의 호전을 보이자 퇴원을 요구 받았고 송천동의 모 정형외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염증치료와 재활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계미년 크리스마스는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해 나는 놀랍고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인편을 통하여 피해자의 치료나 보상에 관하여 최선을 다하도록 조치를 부탁한 바 있었지만 항상 염려되었다. “저희들은 완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관심과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빠른 시간내에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그들 부부가 보낸 카드에 적혀있는 문구였다. 다소나마 죄의식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고 세상 모두가 정말 감사한 순간이었다. 5주 후 나는 퇴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3일 정도 집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출근하게 되었고 정상적인 집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개월만에 출근하는 날 교육청 마당에 도열해서 환영해 주던 50여명의 직원들에게 15년이 지난 오늘 엎드려 감사의 말을 올린다. 또한 나의 잘못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해 고생했던 두 부부의 앞날에 항상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린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와 생각하니 정말 천만다행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고맙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