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소개 : 멘델스존(Mendelssohn,1809~1847독일)
■ 꿈과 같은 부유한 환경에서 탄생 멘델스존은 음악가 가운데 가장 독특한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멘델스존은 유복한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1809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고,그의 가족은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철학자,아버지는 성공한 은행가,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가문의 딸이었습니다.멘델스존의 집안은 귀족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진 셈이었지요.궁궐 같았던 멘델스존의 집에는 실제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당이 있었고,개인 교향악단까지 있었다. 부모님의 교육열 또한 대단하였다.멘델스존의 아버지는 각 분야에서 우수한 교수들을 아들의 가정교사로 초청해서 학교가 아닌 모든 수업을 집에서 진행하도록 했다.멘델스존에게는 영어,불어,이탈리아어를 비롯해 문학,미술,승마 등 모든 과목의 개인 선생님이 있었습니다.멘델스존은 정서 교육의 일종으로 어린 나이에서부터 작곡,피아노,성악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특히 피아노는 어머니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한다.이 많은 수업들을 모두 듣기 위해 멘델스존 형제들은새벽5시에 일어나야만했습니다. 아버지는 멘델스존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은행가가 되기를 바라면서도,음악은 그저 교양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음악에 천재성을 보인 멘델스존은10세 때에 본인이 작곡한 작품을 자신의 음악당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15세 때에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고 연주했으며,야외음악당이 있는 집에서 매주 큰 음악회를 열었다고 합니다.이 음악회에는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명사들이 참석했고,어린 멘델스존은 자연스럽게 이런 유명한 명사들과 친분을 쌓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조언들을 얻었다 한다. 20세에 그는 할머니가 그에게 준 보물인 바흐의<마태수난곡>의 악보를 새로 기획하여,베를린 징아카데미에 올리기로 하고, 1829년 본인이 직접 지휘봉을 들고 바흐의 음악을 새롭게 알리는 작업을 시작하여,부르주아 도련님이 아닌‘젊은 천재 지휘자 멘델스존’으로 변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음악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훗날 말러나 바그너와 그의 아내,리스트의 부인까지도 멘델스존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하물며 바그너 자신도 멘델스존에게 대놓고 망신을 주곤 했을 정도지요. ▲ 작품의 성향과 음악감독 멘델스존의 대표작으로는<한여름 밤의 꿈>이나<바이올린 협주곡>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고전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그가 선보이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은 개인의 감정이나 과장된 음악적 기교를 구사하는 쇼팽,리스트,베를리오즈 등의 작품과는 확실히 달라,점잖고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선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멘델스존은1835년 스물 여섯의 나이로 독일의 저명한 오케스트라 게반트 하우스 관현 악단의 종신 음악 감독으로 부임합니다.그리고 그의 박식한 재능으로 오케스트라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단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등 자신의 악단을 순식간에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노후를 대비하는 새로운 연금 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 결혼 멘델스존이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프랑크푸르트를 방문 한 멘델스존은 자신보다 여덟 살 연하의 세실 장르노라는 아가씨를 소개 받았습니다.목사의 딸이었던 세실은 어린 나이 에 부모님을 일찍 여윈 뒤 유복한 부인의 집에서 소중한 보살 핌을 받으며 자랐다.세실을 소개 받은 멘델스존은 그녀를 무척 좋아하게 되어서, 1837년3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신부측에 불만을 가진 부모와 그렇듯 각별했던 누나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같은 도시에 살던 먼 친척 한 사람만 참석하였다. 불참 원인은 바로 시누이에 대한 화니의 질투 때문 이었습니다.화니는 결혼을 혼자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소식을 알려온 남동생을 아주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내 허락도 없이 촌뜨기 같은 여자랑 결혼을 해!”라고 분해서 씩씩거렸다.멘델스존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그러나 멘델스존과 결혼한 그녀는3남2녀의 자식을 낳고 성실하게 멘델스존을 내조하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낀 누나 화니는 도리어 세실을 무척 예뻐하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좋은 남편이었던 멘델스존이 진짜 사랑한 여인은 네 살 위의 누나 화니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화니는 동생 멘델스존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지요.아마추어였지만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여성 음악가로 유명할 만큼500곡이 넘은 곡을 작곡했고,또 지휘자로도 활동했습니다.화니가 아마추어 음악가로 남은 이유는 단지 여자였기 때문입니다.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좋은 혼처에 시집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자로서 최고의 인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화니가 음악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도 외면했습니다.그래서인지 화니는 어려서부터 멘델스존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했다고 합니다.멘델스존의 대표작<무언가>도 사실화니의 발상이었다고 합니다.화니가 남긴 곡 중에서도 같은 제목의 곡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누나 화니의 동생 사랑 여자라는 이유로 일찍부터 음악가의 꿈을 버려야 했던 화니는,남동생에게 음악을 지도하고 그녀의 풍부한 음악적 지식으로 동생을 격려했습니다.또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고 멘델스존이 음악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뒤에서 노력한 것이 분명 합니다.나중에 그녀는 빌렘 헨델이라는 궁정 화가와 결혼했는데,사실 그는 멘델스존의 가문에 썩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하지만 화니는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그리고 그가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와 결혼을 선택합니다.그리고 남편의 권유와 지지로1846년 평생 그녀가 원했던<자작곡집>을 출판했지요.출판 이듬해 그녀는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41년이 라는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 멘델스존의 과로사 사람들은 멘델스존의 삶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그저‘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마냥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 고단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새벽5시부터 시작하는 수많은 공부와 멘델스존 가문의 장남이라는 압박감은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쉴 틈 없이 가문에 흠이 되지 않도록 공부와 일을 병행했던 멘델스존은 결국 과로사로38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너무나 올바르고 정직하게 산 것이 이유였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풍요 이면에서 참으로 괴로운 삶을 살았던 멘델스존입니다.
● 무언가(Song without Word) 中 <봄의 노래> 하단에 이 곡은 멘델스존의 누나 화니(Fanny)의 발상으로 작곡. * Fanny의 편지(1828년) 내 생일은 아주 근사하게 축복받았다. .........펠릭스는 내 앨범을 위해 내게 ‘무언가’를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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