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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9장 7-9절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부패하도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너희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6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6:24 참조). 골로새서에 의하면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도 말씀하는데(골3:5), 재물이 곧 저들의 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식주의 풍성함을 기뻐하였고, 반대로 그것이 없으면 염려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형식적으로만 부를 뿐 그들이 의지했던 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도 공급하시는 분이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하나님 지식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신들이 그런 것들을 공급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이방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호2:8).
한편 저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제사,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기뻐하시는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드리는 제물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자 역시 정결하고 성결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수없이 많은 절기들이 있는데, 그런 날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한 제물, 부정한 사람이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기뻐 받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저들을 향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저들이 의지하는 것을 끊을 것이라고 알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까지 형벌의 날, 보응의 날이 이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기로 하셨고 그 날은 정해진바 되었기 때문에 형벌의 날이 이르렀다, 보응의 날이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형벌과 보응의 날이 이제 너희 앞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많이 말씀한 바 있는 것처럼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형벌과 보응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알리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여전히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들의 형편은 어느 시대보다 풍성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외적인 복을 허락하신 그런 시대입니다. 저들이 잘 나서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죄악 가운데 있으며 그 죄악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그런 복을 받았던 겁니다. 이런 복 가운데 있다 보니 형벌의 날, 보응의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막는 자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선지자와는 달리 계속해서 평안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를 보내셔서 회개해야 한다,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것이 번창할 것이라고 약속함으로 저들의 시각을 가렸던 겁니다.
미가 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언어적으로 하자면 예언하는 자, 말을 하는 자입니다. 무엇을 예언하고 무엇을 말하는 자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가 활동할 때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삼기를 원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를 선지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의식주 문제에 있어 걱정해야 하느냐, 아니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냐의 문제를 예언하는 사람, 그를 사람들은 선지자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백성들의 관심은 의식주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의식주와 관련해 예언하는 자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이 외적인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외적인 삶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보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말하는 선지자를 더 좋아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보다는 지금의 삶으로도 충분히 복을 유지할 수 있고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더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형벌이 날이 이르렀다, 보응의 날이 이미 왔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형벌과 보응의 날이 있는가? 그것은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죄, 너희 원한 즉 너희의 증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너희는 벌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선지자가 어리석고 신에 감동된 자가 미쳤다고 하면서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크다고 말씀하시는데, 형벌의 날과 보응의 날 하나님께서는 누가 참된 선지자인지 그리고 누가 거짓된 선지자인지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뜻, 자신의 말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혹은 듣는 자들의 취향을 따라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듣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에 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벌의 날, 보응의 날 거짓 선지자들의 실체를 밝히시는데, 그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요, 미친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어리석은 말을 하고 미친 말을 할지라도 지금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듣는 자들의 귀가 가려졌고, 듣는 자들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귀에 달콤한 말을 하니까 그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형벌과 보응하시는 날에는 저들의 말이 어리석은 말이요, 미친 말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선지자를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 신에 감동되었다고 말하는 미친 자에 불과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내버려두시는가? 참된 선지자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미혹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내버려두시는가?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요, 저들의 참된 선지자를 향한 원한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저들을 거짓과 미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들의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신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내버려두시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참된 교사보다 거짓된 교사가 많은가?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더 크게 성장하는 외형을 띄고 있는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요, 사람의 본성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지막 때는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는 다름 아닌 목사의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말씀도 전하고 목사로서 여러 은사와 능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에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즉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는 가르침,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는 은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지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참된 것을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특히 은사와 능력과 관련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많은데,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도들이 행했다고 해서 오늘날 목사가 다 행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에게 제한해서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 시대 이후 사도들에게만 주셨던 은사가 오늘날에는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의 역사를 매우 좋아합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보면 종종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역사들이 오늘날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방언이나 표적과 기사와 희한한 능력들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것은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역사들은 말씀을 섬기는 것으로 있는 것이지, 말씀과 동떨어져 있거나 말씀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4장 3절에서는 “두 사도가(사도라는 말은 원문에 없음)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이적들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오직 말씀을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이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은 사탄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2:9-10)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 66권을 우리에게 주셨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충만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모든 이적이 말씀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있다고 할 때,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시대 때 비상직분을 가진 자들에게 그런 역사가 있도록 하셨다고 할 때, 다시 말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의 표라고 할 때(고후12:12) 오늘날 말씀을 섬기기 위한 이적의 역사가 필요한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하고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에 대하여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 8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할) 에브라임이 파수꾼, 곧 선지자는 그의 모든 길에서 새 사냥꾼의 그물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북이스라엘의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 사냥꾼이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놓는 것처럼 북이스라엘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을 놓는 사냥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파수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높은 망대 위에 서서 잠을 자지 않고 적이 침략하지 않을까 경계를 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은 북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파수꾼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세상의 원리가 저들 마음 가운데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했습니다. 저들의 안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파수꾼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사냥꾼이 되어 그물을 치고 덫을 놔서 백성으로 하여금 그물에 걸리고 덫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앞서 선지자가 어리석고 미쳤다고 말할 때 왜 그들이 그러한가? 백성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다면, 여기서는 선지자들 역시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7절은 선지자의 죄악도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백성의 죄로 말미암아 벌하시는 성격을 말하고 있다면, 8절은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들이 핑계할 수 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 즉 증오가 있다는 것인데, 누구를 향한 원한이냐?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으로 하여금 그물을 치고 덫을 놔서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참된 선지자를 향한 원한과 증오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두었는데, 바로 그곳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거짓 성전에서 거짓 선지자가 무엇으로 백성을 미혹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거짓된 말로 저들을 미혹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백성들은 참된 선지자로부터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거짓된 말씀, 그러나 결코 거짓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 말을 좋아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 상반부는 바로 이런 저들이 기브아 시대의 모습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기서 말하는 기브아의 시대란 사사기 19장에 기록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우선 1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삿19:1-3)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라는 것은 아직 왕정 시대가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17장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는 말씀이 나오고 있고, 사사기의 맨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으로 있습니다(삿21:25).
어쨌든 여기 보면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어떤 레위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내가 있지만 아내 외 다른 여자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내가 있으면서도 또 다른 아내를 맞거나 첩을 들이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구약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맨 처음 아담과 하와를 짝 지워 주실 때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자 한 사람 그리고 여자 한 사람,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이 아내 외에 첩을 취했다는 것부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레위인의 첩은 어떤 짓을 하는가? 레위인이 자신의 남편이 되었는데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행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남편을 떠나 자기가 살던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됩니다. 레위인도 문제고, 첩도 문제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넉 달 만에 레위인은 첩을 되찾기 위해 다시금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장인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장인이 레위인을 보고 기뻐하면서 계속해서 머물기를 권하게 됩니다.
여러 날을 머물고 난 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레위인은 첩을 데리고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브아라는 곳에 머물게 되는데, 한 노인의 집에 유숙하면서 좋지 못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사사기 19장 22절부터 보시면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삿19:22-25) 정확하게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의 죄악과 비슷합니다. 천사가 롯을 살리기 위해 소돔에 있던 롯을 찾아갔을 때 소돔 백성들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롯에게로 들어간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적으로 좋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훈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인 양 사사기 시대 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 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레위인의 첩은 그 일로 인하여 죽은 채 발견이 됩니다. 레위인은 첩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죽은 첩을 열 두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방에 있던 이스라엘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레위인은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하게 되는데, 사사기 20장 12절 이하를 보시면 처음에는 잘못을 한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만 내놓으라고 했지만 기브아 지역에 속한 베냐민 지파가 반대를 하자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베냐민을 제외한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게 되는데, 전쟁으로 인해 베냐민 지파의 피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삿21:2-3) 즉 베냐민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피해가 심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기를 우리 중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기로 한 상태입니다. 맹세는 했기 때문에 지켜야 하고, 그러나 그냥 두면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어떤 꾀를 내느냐? 베냐민의 남은 남자를 위하여 열 두 토막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모일 때 모이지 않은 자, 즉 야베스 길르앗 쳐서 남자를 알지 아니한 여자 외에 모든 자를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여자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래도 베냐민 지파의 남은 남자 수보다 적어서 또 다른 꾀를 내는데, 실로 지역에서 매년 여호와의 명절 날 여자들이 춤추러 나오는데, 그들을 부족한 숫자에 맞춰 취하여 가라고 말합니다.
좀 길지만 사사기 19장에서부터 시작된 사건이 21장까지 이어지는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바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했지만 이 모든 사건에 대하여 사사기 맨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절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 그리고 첩이 음행한 것, 그리고 기브아의 불량배가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것, 나아가 그것으로 인해 첩이 죽은 것, 그리고 첩이 죽은 것을 통해 열 두 토막을 낸 것,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모여 공의를 행하고자 하였지만 베냐민 지파가 불량배를 두둔한 것,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 베냐민 지파가 몰살하게 되었을 때 남은 남자를 위해 행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의 모습이 지금 북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어지는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행합니다. 오로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양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악을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 하반부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호세아 8장 13절의 내용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알려줘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있다는 증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참되게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기억조차 않으시는 분이신데, 저들의 악을 기억한다는 것은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더 이상 회개의 기회조차 박탈하겠다는 그런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11:8)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북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떠한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하다는 것이고, 때문에 그들의 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사기 19장부터 21장까지만 봤지만 사사기 21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말씀이 사사기 17장에도 동일하게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사기 17장과 18장은 어떤 내용인가? 미가와 그의 집의 제사장, 그리고 단 지파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에브라임 지파에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돈을 훔치게 됨으로 가정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돈을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돈으로 우상을 만들어 신당을 세우게 되는데, 이 신당을 위하여 자기 아들 중 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 중의 한 사람도 제사장으로 세우는데, 본래는 아론의 자녀들만 감당할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레위인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지파의 경우는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고 있던 때인데, 미가라는 집에서 유숙하게 되면서 그 집의 제사장을 만나게 되고 거기에 신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복할 라이스 땅을 취하기에 앞서 그들은 전에 유숙했던 미가의 집에 가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 등을 탈취하고 레위인 제사장까지 데리고 가 버리는데, 여기에 대해 미가는 격분하여 동족을 데리고 추격하지만 단 지파의 강력한 힘을 보고는 돌아오고 맙니다. 그 이후 단 지파는 라이스 땅을 취하고 정착하여 미가에게서 탈취한 것을 섬기게 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가? 부릅니다. 부르면서도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웁니다. 그것도 무엇을 위해 제사장을 세우는가? 자신의 집의 복을 위해서입니다. 단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 집에 있던 레위인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있는 것도 문제지만 단 지파가 한 가정의 제사장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할 때 거기에 수긍하여 그들을 따라 갑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입니다.
기브아의 시대와 같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 북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수없이 많은 교회가 있고 수없이 많은 목사가 있고 또 수없이 많은 성도가 있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말씀대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정말 그러한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부패함은 예수님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자기 뜻대로 할 뿐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악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목사가 아니라 능력은 없지만 그저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선포만을 위하여 애쓰는 목사를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목사에 대하여 그렇다면 성도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참으로 부패함 가운데 있지만, 그래서 말씀을 패하고자 하는 그런 시대 속에 있지만,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이 말씀이라고 할 때 유일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삶을 오직 말씀에만 비춰보면서 점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 시대가 우리 시대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