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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ARF에서 열린 6자 외무장관 회동에 참석한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박의춘 북한 외무상(왼쪽). | 7월24일 발표된 아세안 안보포럼(ARF) 의장 성명은, 이것이 과연 모호함을 생명으로 하는 국제 외교무대 의장 성명인지 의심케 했다. 금강산 피격 사건을 이슈화한 한국의 처지에 대해서는 간단히 형식적으로만 소개하고, 느닷없이 “10·4 선언에 기초한 남북 대화의 지속적 발전에 강한 지지를 표한다”라는 내용이 들어갔다(61쪽 전문기자 칼럼 참조). 맥락상으로 보면 문제를 제기한 한국보다는 북한의 주장을 더욱 비중 있게 반영한 것이다. 이번 ARF의 성격에 비춰볼 때 단순히 싱가포르 외무장관 선에서 작성되었다기보다는 미국·중국 등 ‘큰손’의 입김이 느껴진다.
남북 현안인 금강산 피격 사건을 이번 ARF에 끌고 간 것이야말로 국제 정세에 대한 기본 판단조차 못한 결과라 할 것이다. 물론 외교부만의 잘못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금강산 피격 사건 이래 청와대-통일부-외교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난맥상이 결과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국가 위신의 추락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무대책
금강산 피격 사건이 터진 뒤 청와대가 보인 모습은 한마디로 무대책이었다. 금강산 사건은 이명박 정부가 등장한 이래 대북 문제를 과연 어떻게 다뤄왔고, 현재 어느 정도 실력인지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부터 대북 문제를 우선순위가 아닌 후순위 문제로 자리매김했다. 한·미 동맹 복원, 경제 살리기 등 현안에 비해, ‘시간은 우리 편이고 급한 것은 북한’이므로 천천히 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해왔다. 심지어 앞으로 1~2년 정도 이대로 문닫고 가도 상관없다는 얘기가 서슴없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북한은 언제든 호응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오만한 자신감 같은 것도 작용했다. 정권 초기에 “베이징에만 가면 널린 게 대북 채널이다”라는 이동관 대변인 발언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물론 그 사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말에만 해도,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참여정부 시절 북한에 약속했던 옥수수 5만t을 주자는 외교안보장관 회의 의견에 면박을 줄 정도로 강성이었다. 그러나 6월 말에 열린 같은 회의에서, 남북 대화를 위해 6·15와 10·4 선언에 대한 방침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자, 전보다는 훨씬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같은 대통령의 인식 변화가 7월11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비록 다른 남북 간 합의와 뒤섞이기는 했지만 6·15, 10·4 합의 사항을 언급하는 수준으로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정부 주변에서는 “원래 8·15 광복절에 대북 정책 전환을 선언할 계획이었으나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이번 국회 개원 연설에서 1단계로 조금 바꾸고, 8·15에 2단계로 대폭 바꿀 생각이었다”라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거론된다. 대통령의 인식이 바뀐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북한과 대화 채널이 없는 ‘홀로 아리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위기 관리를 위한 기본 대화 채널조차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베이징에만 나가면 널린 게 대북 채널이라던 초기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북한에 대해 ‘노(No) 채널, 노 라인’이라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허둥지둥했다.
통일부는 무라인
청와대에는 대북 전문가가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출신이고, 그 밑의 비서관급 역시 일반 국제정치 전공일 뿐, 북한 전문가는 없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일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주무 부서라 할 통일부가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기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 초기부터 ‘남북 관계 주무 부서’인 통일부가 시종일관 강성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하도 강성이어서, 통일부 폐지를 반대했던 인사가 그때 그냥 놔둘걸 그랬다면서 후회할 정도다. 북한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금강산 관광 중단, 대북 물자 지원 및 인도적 지원 중단, 방북 불허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치밀하게 압박해 나가겠다”라며 대책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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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7월16일 국무회의에 앞서 김하중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금강산 피격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개성관광 중단 카드다. 7월17일 홍양호 차관이 민주당 대책단에게 발언함으로써 불거진 이 내용은 같은 날 통일부 대변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7월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식 언급함으로써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발언은, 김하중 장관이 NSC 회의 전 약 15분간 이 대통령과 단독 면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명박-김하중 커넥션’의 작품, 즉 ‘강성 통일부’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남북 관계 주무 부서인 통일부가 왜 이토록 강성일까. 여권의 한 인사는 “통일부 관료가 청와대와 여당의 눈치를 너무 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눈치 없는 짓이다. 국방부가 해야 할 얘기를 통일부가 하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냐”라고 꼬집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 ‘폐지론’의 악몽에 시달리던 통일부 관료에게 소신을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눈치 보기 수준을 넘어 대북 대화 채널이 차단된 통일부 스스로 정략적으로 강경 노선을 걷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3월19일 김하중 장관이 “핵문제 해결 없이 개성공단 2단계 공사는 곤란하다”라고 발언한 데 이어, 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여태까지 통일부가 주도했던 대북 정책에 대해 반성을 표하는 듯한 발언을 한 뒤부터 북한은 ‘김하중 통일부’에 대해 ‘대화 불능’ 낙인을 찍어버렸다. 통일부로서는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상황이고, 따라서 강경 노선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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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이 탄 관광버스 등이 7월18일 오전 개성으로 향하고 있다. | 그러나 정부 내부에서 급제동이 걸렸다. 통일부가 꺼내든 개성관광 중단 카드에 대해서는 7월20일께부터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염려가 제기됐다.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로 맞받을 경우 과연 누가 책임질 거냐는 의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통일부에 끌려가던 청와대 일각에서 ‘아차’ 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고 한다. 통일부의 강경 드라이브에 급제동을 건 인물은 다름 아닌 한승수 총리다. 7월21일 한 총리는 국회에서 황진하 의원 질의에 답하는 형식으로 금강산 피격 사건과 개성관광 문제 등 남북 관계 전반을 분리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서둘러 밝혀 ‘무데뽀’ 강경론에 대해 진화에 나섰다. 이제 정부에 남은 카드는 ARF에서 유명환 장관이 활약해주기를 기대하는 것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금강산 피격 사건을 ARF에 상정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정부가 쥔 ‘유일한 대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판을 잘못 읽었다. 이번 ARF의 성격부터 먼저 알았어야 한다.
외교부는 무외교
우선 이번 ARF에서 6자 외무장관 간 비공식 회동을 적극 제의한 것은 바로 북한이었고, 미국이 여기에 손발을 맞추었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 때 의장국인 중국은 6자 외무장관 회담을 8월 말 베이징에서 열기를 원했다. 그러나 힐 차관보와 숙의를 거듭한 김계관 부상이 7월 ARF 회의 기간에 회동할 것을 강력 주장했다고 한다. 6자 외무장관 회담은 라이스 장관 방북을 위해 필요한 요식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8월 말까지 기다리기보다는 7월로 앞당겨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북한 측은 최근 올림픽이 끝난 뒤 9월에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흘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김 위원장의 중국·베트남 방문 이전에 라이스가 평양에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올브라이트 장관처럼 10월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향과 관련해서는 지난 7월16일자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넷판에서 보도한 ‘경천동지’할 기사를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이란이 다음 달 중 상호 이익대표부 개설을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다. 부시 행정부에서 북한 문제와 이란 문제는 동전의 앞뒤처럼 맞물려서 진행해왔다. 8월에 이란에 이익대표부가 들어간다는 것은 곧, 평양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짐을 뜻한다. 따라서 미국에 이번 ARF는 부시 행정부 임기 말 ‘역사적 거사’를 앞두고, 시작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한국이 자기들 ‘내부 문제’를 들고 와 분위기를 망치려 했으니 얼마나 눈치 없어 보였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