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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가치의 삶
마가복음10:35-45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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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표어를 오늘 성경말씀 마가복음 10장 45절로 정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청지기 삶의 기본적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예수께서 하시게 된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거의 끝날 무렵에 되어진 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이 두 사람을 그 어머니가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요청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입니다.
아버지는 세베대라고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고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직업은 어부였는데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종을 두고 살았다고 했으니까 조금은 부유층에 속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똑같이 제자가 된 사람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있고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는 이 대목 때문에 성경에 기록으로 남은 것입니다.
전체 내용을 보면 이 사건은 제자들의 관계가 나빠지게 되는 불쾌한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이 이들의 요청을 무시하셨습니다.
또 요청과는 정 반대의 답변을 하신 것으로 오늘 말씀이 끝나고 있습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그러니까 야고보, 요한 대 열 제자의 분열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때 순간적으로 썰렁해지는 분위기를 수습하셔야 되는 당황스러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뭘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
여기서 우리는 유대 민족의 메시야관에 대해 그들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요한과 야고보가 이런 요청을 했는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수백 년 동안 전해오는 메시야 탄생 예언을 갖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러한 민족의 기대감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 이유가 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오랜 역사를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특별 권한이 있는 자이며 그 혈통적 후손들은 영광스러운 택한 백성의 아름다운 민족 열망이 가득한데, 지금의 나라와 민족 형편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굴욕적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 빌라도가 와서 총독 정치를 합니다.
이때 유대 나라 사람들은 로마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하고 심하면 생명까지 위협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기가 언제이냐?
메시야 탄생이라고 믿고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바로 이분이 메시야라고 충분히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체험한 사건들이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1만 명 되는 사람들을 현장에서 배불리 먹여주는 기적 사건에 자신들이 동참했습니다. “이가 그다! 이는 메시야다.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민족 역사에 기다려왔던 메시야는 바로 이다! 이것 봐라. 지금 이런 일은 하나님이나 하지 않느냐?”
과학이나 의학의 힘으로 도저히 가능치 아니한 절대 부지의 환자들을 다 현장 치료하는 현장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보라! 누가 이런 일을 하느냐? 하나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하지 않느냐? 이는 메시야다.”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말씀 한마디로 다 평안케 하는 메시야의 능력을 보고 그들은 믿음이 아주 확실해 졌습니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서 지금 썩어 부패해 냄새가 나는 지경에 있는 나사로를 말씀 한마디로 살려내는 이 엄연한 현장 사실 앞에 “이가 누구인가? 메시야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는 바로 이다.”라고 제자들이 아주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이 놀랐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남은 일은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뭐냐? ‘이 마귀 같은 로마를 때려 부수고 영광스러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게 언제인가? 지금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예루살렘 군중들이 저마다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는 소리로 뭐라고 말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 왕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니 이제는 우리의 고난이 다 끝났다.” 그렇게 예수님을 왕이 되라고 환영한 것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자리에서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말하잖아요?
지금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 뭡니까? “남은 일은 이제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빨리 왕으로 등극하셔서 저 로마를 내어 쫓고 아브라함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 왕이 되실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 왕이 되실 때 충성한 우리 형제가 왕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출세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미리 예약하는 겁니다.” 확실한 공천을 해버리는 겁니다.
살로메와 두 아들이 이렇게 당돌하게 예수님 앞에 와서 다른 제자들을 무시할 만큼 행동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특별한 몇 가지 관계가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 요한의 가까운 친척, 이종사촌 형제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자매지간입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친분이 넉넉히 두텁습니다.
또, 살로메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든 공로가 있는데다가 예수님을 위해 돈을 제일 많이 쓴 사람입니다.
선교사 후원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또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을 제일 편애하셨습니다.
제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그 현장에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많은 제자 가운데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유언을 십자가에서 남기셨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 심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확실한 판단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러한 요청은 금방 다른 제자들에게 반감을 사게 했음이 말씀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를 보고 분히 여겼다는 반응은 다른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제자들이 모두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답! 제자들의 요청 배경을 설명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린 줄을 네가 알거니와”
“이것 때문에 그렇지? 내 맘대로 권세를 부리고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런 거지?” 이렇게 예수님이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인류 역사에 어느 때나 있었던 가장 큰 민중의 관심! “누가 권력자가 되느냐? 그리고 그 주변에 누가 있느냐?” 이것이 항상 가장 큰 관심입니다.
왜 권력자가 되고 싶은가?
왜 그 주변에 있고 싶어 하는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겁니다.
누리고 싶은 겁니다.
오늘날은 인권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권력자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러나 옛날의 임금님은 “짐은 곧 나라다.”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말하는 것은 틀렸어도 법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온 나라 백성은 임금님 하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문화입니다.
가끔 TV에서 평양 방송을 소개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 드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에는 아나운서가 그 여자 하나 밖에 없나봅니다.
십년이 지나도 그 여자만 계속 나와서 방송하는데 김정일에 대해 방송할 때는 얼마나 감동스런 음성으로 표현하는지 성령 충만한 여자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감격스럽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권세를 부리는 삶을 매력 포인트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데, 지금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리를 주문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가 생각하는 길과 내가 생각하는 길은 정 반대의 길이다.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섬김을 받으려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우리가 청지기로 선서했는데 청지기란 말의 의미를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Guardian,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란 남이 잠들어있는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인가를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교회 파수꾼으로 교회를 해치는 어떤 방해꾼이라도 대항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항상 보초를 서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지 않았나?’
권세자들이 물리적 힘을 동원해서 교회를 핍박할 때 파수꾼으로 나섰기 때문에 순교를 당한 겁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는 Steward, 급사를 말합니다.
주인이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이 필요를 말할 때 재빠르게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급사입니다.
청지기들은 하나님교회의 급사 역할을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문화에 순장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24시간 임금님 곁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임금님의 필요를 24시간 채워드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임금님이 죽잖아요?
그러면 같이 죽습니다.
산 사람을 같이 무덤에 묻는 게 순장 제도였습니다.
급사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주님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어떻게 정하시는가?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었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섬겨주셨잖아요?
그래서 청지기들은 이러한 섬김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나도 주님을 위해 섬기며 살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Captain, 장, 책임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의 장이 된 사람을 책임자라고 말입니다.
교회에서 청지기들은 책임자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어떤 사역을 목표로 정했으면 “저 책임은 나다.” 뭐가 또 잘못 되었으면 “그 책임은 곧 나다.”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 어느 단체나 교회를 보면 세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방관자가 있고, 방해자가 있고, 책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잘못되면 내 책임이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계획이 있으면 그것도 내 책임입니다.
이런 의미가 청지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Son, 아들 개념입니다.
청지기는 단순한 종개념을 넘어 아들의 위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업체의 일반 사원이 아닌 후계자입니다. 성도들은 하늘나라 기업의 상속적 권리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가치를 깨달을 때 우리는 바로 주님과 같이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인생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로 ‘시중을 든다.’는 뜻입니다.
종이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주인의 요청이 있을 때는 그 필요 부분을 즉시 채워주는 것이 우리 봉사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싸맨다’라는 뜻으로 마치 옷이 찢어져서 살결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잘 싸매어서 흉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역할입니다.
주님은 어떡하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안보이게 다 싸매주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형제들을 향해 그렇게 봉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노 젓는 사공의 뜻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를 저어서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데 가장 힘든 역할을 내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의 종류를 보면 생업이라는 것이 있고, 직업이라는 말이 있고, 천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일 중에는 나 자신만을 위하는 일이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웃을 향한 일을 봉사라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더욱 귀하기 때문에 거룩성이 부여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성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평신도 봉사 역사를 살펴보면 1898년 2월 20일 평양의 널다리꼴 교회에서 그 교회에 출석하는 이신행, 신반석, 박관선, 김성신 네 여신도가 모여 “우리 여자들이 교회에서 봉사할 것이 뭐 없을까?” 토론하다가 여신도들만의 모임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선교회, 옛날에는 여전도회라고 봉사회를 조직해서 몇 가지 조건을 채택했습니다.
언제 봉사하느냐 하는 시간, 100년 전 한국의 여인들은 가정 밖의 일을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벽 시간과 일을 마친 저녁 시간을 이용해 교회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어떤 봉사가 필요한데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엽전 한 닢씩을 매월 회비로 네 사람이 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봉사할 것인가? 고난당하는 신자를 심방하자.”
환자 중심으로 누가 아프면 경비가 좀 필요하잖아요?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환자 중심으로 심방하기로 하자. 그리고 교회에 행사가 있을 때 우리들이 식사를 제공하자.”
회비를 가지고 식사를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전도의 대상을 찾아 여인들의 안방을 통해 전도하는 일, 그 다음에 목회자의 목회에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는 일 이렇게 네 가지를 정해 열심히 하니까 교회가 생기가 나고 부흥이 되고 칭찬을 듣게 되고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하니까 이웃 교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서로 더 잘하려고 노력해서 일 년 동안 회비가 수백 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봉사하던 것을 교회 밖으로 영역을 확장시켰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여신도 가운데 비교적 믿음이 좋고 대인관계를 잘하는 김성신, 고선중 두 사람을 전도부인이라는 이름을 주어 한 달에 교통비와 식사비로 30전씩 비용을 주면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숙천골, 갈산, 오리동, 송천 등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여전도사의 시초입니다.
1908년에는 각 교회마다 여선교회가 많이 부흥해 연합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것이 평양성 장로교회 연합 부인 전도회라고 조직으로 최초의 연합회장에 이신애, 서기에 박진성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년이 넘게 대한민국 교회의 여신도들이 아주 활발하게 봉사, 디아코니아를 함으로 말미암아 남을 섬기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대한민국 교회는 이렇게 굉장한 부흥을 가져왔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했던 문화입니다. 남을 섬기는 인간이란 저주받은 인간이요 천한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너희들은 이런 것이나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을 자청해서 나서 전부 해버리니까 세상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을 맡아 저렇게 열심히 해? 뭐하는 사람들이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왜 노예 일을 해?”
“저 사람들은 저것을 즐거워해.”
이렇게 해서 소문이 나 기독교가 발전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봉사 문화를 통해 완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엎은 겁니다.
노예나 하던 일을 가장 거룩한 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로마 교황청이 왜 로마에 있습니까?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잖아요?
로마가 기독교를 얼마나 탄압했습니까?
기독교인들을 원형 극장에 가두고 사자들 갖다가 풀어놓아서 다 뜯어 먹게 만들고, 네로 황제는 로마 성에다 불 질러 버리고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다 잡아 죽이고….
그렇게 지독했던 로마가 어떻게 뒤집어져서 교황청이 생기는 전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겁니까?
로마에서는 군대들을 풀어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군인들이 칼을 들고 기독교인들 집에 들어가서 재산을 몰수하고 말을 안 들으면 죽이고 정부에서 하라는 거라며 기독교인들 잡아다 죽이는데 기독교인들 집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 당시에 로마 군인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성폭행 때문에 사생아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고아들을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 아이들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봉사하자.”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면 그 당시에 로마에서 고아들 하나, 둘씩은 다 데려다 길렀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그 기독교인들 핍박하려고 들어가 보니까 자기들이 뿌린 불의의 씨앗들을 그들이 다 보호하고 길러주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마음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죄 짓고 기독교인들이 우리 죗값을 다 감당하고 있으니 왜 이렇게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을 왜 우리가 핍박하고 곤란하게 만들어야 되는가?’
그래서 군인들이 반감을 갖고 돌아섰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크리스찬 가정에 가보십시오. 우리가 저질러 생긴 모든 고아들을 그들이 지금 다 맡아 기르고 있는데 그렇게 선하게 사는 사람들을 왜 우리가 핍박해야 합니까? 우리 군인들 이런 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군인 세계에서부터 뒤집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군인들, 힘 있는 자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로마가 뒤집혀 버린 겁니다. 그래서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국교 선언을 하고 그래서 로마 교황청이 생긴 것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권세를 가지고 누리고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부리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그렇지 아니하니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 반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호텔업계 최고 권위자 스타트라시는 13살에 밥을 얻어먹으려고 여관에 청소부로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일하다 보니까 여행자들의 필요가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부 목록을 적어 여행자들이 오면 그 필요를 서비스 하는 겁니다. 그게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모두 조그만 호텔에 모이는 겁니다.
“거기 가면 소년 하나가 있는데 이 소년이 얼마나 여행자들을 위해 봉사를 잘하는지 구두 닦는 것에서부터 전부 서비스해주며 하나도 불편한 거 없이 해준다.”
‘내가 이 다음에 호텔 주인이 되면 이런 서비스 호텔을 내가 하겠다.’ 생각한 것이 1921년 미국에서 세계 최대인 7700개의 객실을 갖는 호텔 왕이 되었잖아요?
그는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남기고 죽었습니다.
“Life is service! 인생은 봉사다.”
이것이 가장 행복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봉사하면 망하느냐?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워십)”이라고 말하는데‘worship’이라고만 말하면 안 됩니다. ‘worship service(워십 서비스)’라고 해야 합니다.
서비스 없이 예배가 안 됩니다.
서비스가 있을 때에만 예배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교회는 십자가 지러 오는 겁니다.
섬김 받으러 오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오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선진국은 봉사가 많은 나라이고 후진국은 왕이 많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건강을 주셨다면 무엇인가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시간을 주셨다면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물질을 주셨다면 어디엔가 쓰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직 젊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라는 뜻이요, 나이가 많아 늙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더하라는 뜻입니다.
봉사는 말짱 헛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말짱 헛사람들입니다.
봉사 같이 세상에 거룩한 삶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존재합니다. 돌려받지 아니한 봉사일수록 더 가치가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 위에서 들려준 두 마디 기억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내가 온 인류를 섬기기 위해 세상에 왔는데 마지막에 하나있는 내 목숨까지 주면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끝났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마지막에 피 한 방울까지 인류를 위해서 다 봉사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것을 다 배우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룬 자는 찾아갈 곳이 아버지 품이지요?
오늘 주보에 보셨듯이 갈보리 교회는 파송 선교사 34개국에 817명, 협력 선교사 128곳, 합계 945곳입니다. 섬김과 나눔입니다.
요즘에 선교지에서 저한테 계속 전화가 옵니다.
한결 같습니다.
“환율 비상사태라서 IMF와 같이 선교비 다 끊어지는 줄 알고 우리가 마음을 졸였는데 갈보리교회에서 날짜도 어기지 않고 계속 보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그러실 거죠?” 섬김과 나눔!
남을 섬기는 것은 어떤 면에서 희생이죠?
그러면 나는 못살게 되는가? 아닙니다.
이것을 패러독스 진리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지금 배우는 것입니다.
섬김은 가장 거룩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피차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이 주신 201 년 새 역사를 또 다시 시작하고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