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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부러움 없는 예수 믿음>의 줄거리:
몇 십억 손에 쥔 로또 당첨자가 부럽고, 평소에는 잊고 있던 대통령 취임식을 보고 있노라면 대통령이 부럽고, 카페에서 멋진 피아노 연주에 능숙한 피아니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또한 부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듯 이 사람 저 사람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문일까요? 예수 믿은지 참 오래 되었어도 온 세상 사람들이 마땅히 나를 부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 부러움 없는 예수 믿음
(에스겔 23:1~49)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부러움 없는 예수 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부러움 없는 예수 믿음’
어떤 집사님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피아노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으나 잘 연주하는 곡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곡은 전혀 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봤더니 언젠가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를 보면서 마음이 무척 부러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전공하거나 체계적으로 배워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악보를 가져다 놓고 혼자 곡 하나만을 연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몇 년간 틈틈이 시도해서 결국 그 곡 하나를 완전히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가 볼 때에는 곡의 해석과 연주의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본인은 부러웠던 마음을 이 곡으로 해소하고 만족하게 연주를 했습니다.
부러움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도 어려서 성악가들이 노래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소리를 질러본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이 영부인과 가족을 대동하고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부러워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믿은 지는 오래 되었는데 정작 예수님을 부러워해본 적은 없었던 같습니다.
로또 당첨자는 매주 나오지만 우리는 특별히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주변에서 로또 당첨자가 나오게 되면 마음은 전혀 달라집니다.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녀가 수험생인 부모라면 서울대 만점 합격자의 인터뷰를 볼 때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러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취직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하다못해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진 사람은 합격한 사람을 마냥 부러워합니다. 외모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연예인들의 외모를 부러워합니다. 목사님들도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는 분들에 대해 부러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속적인 가치에 대해 부러움을 갖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곧 부러움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러움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가 믿음을 증거 합니다.
또 바울은 사도행전 26장 29절에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법정에서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재판관과 고관대작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높은 직위의 사람들을 전혀 부러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처지는 거지 나사로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한 대로 몸에는 질병을 가지고 있었고, 생업이 없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바울에게 재산이 있을 리도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형 로펌의 변호사나 재벌 총수들 앞에서 항변을 하게 되었다면 무척 떨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당당하게 이들이 자신을 부러워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온 세상이 나를 부러워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증명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로 믿고 있다면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를 만나든 그들이 여러분을 부러워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4절을 보면 바울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라고 의아해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부러움을 갖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바울 지신을 부러워하길 바란 이유는 남들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러워하다가 예수님이 가지신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부럽다는 개념입니다.
부러움이란 타인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나 물건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그것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상대가 좋게 여기는 것을 나도 좋게 여길 때에 부러움은 발생합니다. 지난 주일설교에서 마태복음 7장을 통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때에 11절에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것이란 결국 가졌을 때에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게 하는 대상입니다. 이 좋음의 대상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십계명의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에서 다른 신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한 신이신 이유도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음을 찾고 부러워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50억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부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마음은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은 돈이지만 예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러워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완벽하게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가지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좋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도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부러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좋게 여기고 그 일이 나에게서도 일어나면 좋겠다고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속적인 다른 가치들을 좋아하며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돈, 일류대학 합격, 자녀의 형통 같은 것들을 좋은 가치로 여기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삼성의 이재용 씨처럼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고3 자녀를 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옆집 학생이 서울대학에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부러운 마음이 들어서 우리 아이도 서울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자녀에게 고급과외를 받게 합니다. 부모가 정말로 부러워하는 대상은 서울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아니라 서울 대학에 들어간 자녀를 가진 부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좋다고 여기는 대상을 가장 많이 가진 대상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삶에서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 되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가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갖게 해주시기에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하나님 대신 세상의 다른 대상을 좋아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의 메시아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은 나에게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의 지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는 음행하는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비유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행은 다른 장에서처럼 우상숭배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과의 동맹관계입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을 의지해서 나라의 발전과 안정을 꾀했던 정치적 선택을 음행으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으려 하다 먼저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았던 남 왕국 유다는 오히려 북 왕국 이스라엘보다 더 심하게 동맹에 의지합니다. 남 왕국 유다는 처음에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고 이후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또 이후에는 애굽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언니의 음행을 본 동생이 더 많은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유다가 동맹을 맺은 나라들의 모습이 5~6절에서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고 비유됩니다. 선민에게 앗수르는 마치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은 아가씨 눈에 권력과 재력을 갖춘 잘생긴 청년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만 좋은 줄로 알았더니 바벨론도 멋진 청년이었고 그 옛날에 알고 있었던 애굽도 멋진 청년입니다. 이는 곧 유다가 이방나라의 선진국과 강대국에 대한 부러움을 의미합니다. 이 부러움이 신뢰의 근거가 되어서 동맹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러움이 긍정적으로 표현되면 신뢰가 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되면 질투와 시기가 됩니다. 유다는 이방나라들에 대해 긍정적인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신뢰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가능한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들과 동맹을 맺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민들의 이러한 마음은 신앙적 음행이었습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두 이름은 모두 천막을 뜻하는 ‘오헬’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견고한 성을 가지고 사는 강대국인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애굽 앞에서 선민들 자신은 천막이나 치고 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부러움이란 남의 좋은 일이나 좋은 물건을 보고 그것이 자기에게도 일어나거나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민들이 좋게 여기는 것이 이방나라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것과 동일해진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좋음이란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입니다. 이것이 제1계명에서 나온 다른 신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선민들에게 생겨난 이방나라에 대한 부러움은 곧 다른 신을 섬기는 마음이었고 신앙적인 음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을 좋음의 대상으로 주고 싶으셔서 이들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십계명의 제1계명으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끝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왕으로부터 백성들까지 하나님 갖기를 바랐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전성기를 재현시키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이방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을 많이 가진 강대국들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깨닫기를 바라시며 국력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정말로 천막에 머무는 것 같은 상황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전했지만 선민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초라한 천막으로 여기며 견고하고 웅장한 성을 가진 이방나라들을 부러워하기를 계속했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 갖기를 소원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라지 않던 복까지도 연달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이방나라들을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성취와 혁신이 마음에서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를 부러워합니다. 또 돈을 마음에서 신으로 섬기게 된 자들은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이나 삼성의 이재용 씨를 부러워합니다. 외모를 마음에서 신으로 섬기게 된 자들은 연예인들을 부러워합니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청년들은 메시나 호날두나 손흥민을 부러워합니다. 목사님들은 거대한 예배당과 많은 교인들을 가진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부러움은 그야말로 다른 신을 마음에 품은 채로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을 찾는 것은 본문에 비유로 나타난 두 자매가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적으로 부러움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부정적으로 질투나 시기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부러움은 곧 다른 신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바로 부러움입니다. 아직도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면 여전히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부러움의 사각지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전혀 생기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또 이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없어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부러워할 수 있게 됩니다.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잔뜩 가지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가 되셔서 지금 이 순간도 서로 교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러워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세상에 대한 사각지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각지대가 구약에서는 번제단과 지성소였습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고, 번제단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이 바쳐졌습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은 세상을 부러워하는 음행을 저지르는 선민들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선민들은 어린양과 같이 자신의 마음이 죽었음을 인정함을 통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번제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완성되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시로 부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친척이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이웃의 자녀가 서울대학에 합격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러움이 생기는 이때에 우리는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좋음의 대상이신지 세상의 가치가 좋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믿음의 순간입니다. 세상에 대한 부러움은 참는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친척의 로또 당첨을 부러워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웃의 자녀가 서울대학에 입학한 것을 부러워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함은 곧 다른 신을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와서 부활이라는 사각지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간 지상에서 머무시며 제자들을 모으시고 식사까지 함께 하셨지만 실상 주님이 속한 세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에 속해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터널을 통해 이 세상을 빠져나와서 세상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몸은 살아있으나 마음은 죽음의 터널을 지나 예수님의 부활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어떠한 부러움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난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빼놓으면 믿음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고 곧 세상에 대한 부러움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부러움의 사각지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은 부러움이 아닌 당당함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의미 있는 일이 됩니다. 내가 가난하든 부자든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병이 들었든 건강하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만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려 하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그것은 마치 밀가루로 만든 도넛과 같습니다. 모양이 어떻든 결국 도넛인 것처럼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그것은 완벽하신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죽어 부활한 마음은 하늘을 가지신 예수님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모든 은혜를 함께 받을 수 있는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대상을 나도 좋다고 여기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늘에 앉힌 마음이 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때에도 하나님을 마음 가득히 가지고 계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인데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앉힌 마음이 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승천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로마를 무찌르고 독립시키셨다면 어땠을까요? 또 기세를 타고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해버리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감기 한 번 안 걸리시고 천년을 사셨다면 어땠을까요? 건강을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혁신과 창조 작업을 일으키셨다면 스티브 잡스 백 명이 모여도 못 얻을 부러움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러워함에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나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이나 혁신의 상징이 되는 것도 천년을 사는 것도 좋게 여겨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좋으셨기에 승천하신 것입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을 부러워할 수 없다면 믿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러워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좋아하신 것을 나도 좋아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원죄의 체질은 자꾸만 세상의 가치를 좋은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어제까지는 믿음을 유지해서 하나님을 좋게 여겼을지라도 오늘 아침에 깜빡 기도를 잊고 세상에 나가서 살다보니 세상의 가치들이 금세 마음을 침범합니다. 회사에 가보니 승진을 해야 기쁠 것 같고 보너스를 받아야 만족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을 부러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준다고 믿어지는 가짜 기쁨과 만족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승진과 보너스를 좋다고 여기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승진과 보너스가 없이도 이미 기쁨과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설령 승진하고 보너스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 누리는 기쁨과 만족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승진과 보너스가 좋다지만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를 갖는 것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좋다는 거짓말은 하나님의 좋음 속에 파묻혀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웃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중에 세상적인 좋은 일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안 좋은 일이 생길지라도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기에 슬픔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좋다 안 좋다 멋대로 판단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좋으신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결코 세상 일로 인해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사람들을 부러워한 것의 백분의 일만 예수님을 부러워했더라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못했기에 저나 여러분이나 바보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러워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좋은 것이 내게도 좋은 것이 될 때에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반드시 많은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들려오는 소식과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러움이나 시기나 질투를 유발하는 대상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세상을 부러워하는 것이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을 반복하는 체질입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아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이라는 세상의 사각지대에 서시길 바랍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체되신 주님을 부러워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던 삶이 뿌리째 뽑혀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부러워하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부러워해본 적이 없었으니 참 바보로 살았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을 부러워하는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마음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한 부활의 자리에서 예수님만을 부러워함으로써 예수님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것이 내 것이 되는 기적 같은 기쁨의 자리에 우뚝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전심으로 주님만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죽고 또 죽어 하나님으로만 채우며 살기를 바라지만 다시금 세상이 마음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언제나 주님과같이 살수있을까? 를 반복하는 제 자신이 밉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로원님.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