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까지 합해 3일 연휴이다 날씨는 여름을 방불케하는 뙤약볕이다
오후 느즈막 옥천으로 향했다 먼저 옥천 구읍 정지용 문학관에 도착했다
한국 현대시 사상 기념비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정지용(鄭芝溶, 1903~?)은 1903년 충북 옥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약상을 경영하며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밀어닥친 홍수로 가세가 기울면서 어린 시인은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이 때 4년 가까이 산천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겪은 고향의 갖가지 풍습은 감수성 짙은 그의 소년기에 깊이 각인되어 문학에 대한 꿈으로 익어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鄕愁)」 서두, 『조선지광』 통권 65호(1927. 3.)
정지용은 1918년 4월 휘문고보에 입학하는데, 당시만 해도 웬만큼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서울 유학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지용의 서울 유학은 그의 뛰어난 재기를 눈여겨본 가까운 친지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실현된 것이다.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 동인을 결성해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 부장을 맡는다. 이어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한다. 홍사용 · 박종화 · 김영랑 · 이태준 등은 뒷날까지 그와 가까이 지낸 이 시절의 문우들이다.
정지용 생가 앞 황국신민서사비로 개울 상판을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감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와 간결하면서도 상징성 있는 언어로 시단의 눈길을 끈 정지용은 1933년 김기림 ·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에 가담한다. 송몽규, 윤동주와의 인연도 이 때쯤 있었으려니 한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납북됐다가, 1950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보도연맹원으로 전쟁을 맞아 빨갱이란 누명으로 이름없이 죽어갔을 가능성이 뇌리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