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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후서 1장 1-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베드로전서에 이어 베드로후서를 계속해서 살피겠는데, 베드로후서 3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베드로전서가 첫 번째 편지이고 베드로후서가 두 번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와는 달리 베드로후서의 경우 수신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경우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분명한 대상을 기록하고 있지만 베드로후서의 경우는 그런 구체적인 대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편지를 다른 대상에게 쓰되 베드로전서가 아닌 다른 편지를 먼저 쓰고 두 번째로 베드로후서의 편지를 쓴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전서에 이어 같은 대상에게 두 번째로 쓴 편지가 베드로후서일 수 있고, 아니면 베드로전서와 상관없이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를 향하여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편지에 이어 두 번째로 쓴 편지가 베드로후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수신자에 대해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수신자가 베드로전서에서 밝힌 바가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딤후3:16) 이 말씀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어떤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향해 편지 형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지역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베드로 당시 어떤 특정한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말씀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은 베드로전서와 동일하게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수신자에게 보내는 인사 내용입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발신자가 시몬 베드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본 서신의 기록자와 권위가 의심받기도 했다고 합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왜냐하면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의 문체 차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 다른 주제로 글을 쓸 때 다소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은 결코 이상하다고 볼 내용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참된 저자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는 방식으로 베드로를 사용할 수 없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유기적 영감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록자를 단지 기계적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기록자의 개성이나 성격, 은사나 재능, 교육과 문화, 어법과 문체 등을 적용하여 기록하게 하셨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선물이라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문체 차이라고 말하는 그런 부분조차 베드로후서를 기록할 때 선물로 주실 수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베드로후서 자체를 통해서도 베드로가 기록자임을 분명히 하는데, 오늘 본문 1절과 16절 이하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에 대한 기록이 그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경험한 자는 12제자 중 세 명인데, 세 명 중 오늘 본문 1절은 사도 베드로로 자신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본 서신의 기록자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소개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도 말합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말은 주인과 대조되는 말로 주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복종해야 될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종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에게 의지가 없는가? 있습니다. 의지가 있다는 것은 결코 기계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주의 뜻만을 따르며 주님의 것으로만 교회를 섬기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일뿐 아니라 사도라고도 하는데,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한다는 뜻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너희에게 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말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기록하여 편지를 쓰고 있지만 자신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편지를 써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리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간단히 말하면 그가 주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말씀 사역자가 주체, 봉사를 한다고 해서 봉사하는 그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를 할 때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정한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입니다.
다만 종이라고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별히 교회의 공적 직무와 관련해서는 말씀 사역자에게 돌아가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약간 비교를 하자면 로마서 13장에서 위정자에 대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란 표현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아닙니다. 종이란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정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정자는 교회의 공적인 직분은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맡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 사역자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돌려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말씀 사역을 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종이지만 이때 종이란 의미는 말씀 사역과 관련된 공적 직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그런 의미에서 종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베드로가 자신을 종이라고 할 때는 공적 직무와 관련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으로만 자신을 소개하고 있지 않고 사도로 소개하는데, 사도는 항존직이 아니라 비상직입니다. 비상 시대에 제한적으로 있었던 직분으로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면 더 이상 없는 직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길 원하셨고(엡2:20)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기록된 성경 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직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사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사역자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종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여기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만이 아니라 목사와 교사까지 말하면서 말씀으로 교회를 섬기는 직분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앞에 세 직분은 비상직분이고 뒤에 나오는 목사와 교사는 항존직분입니다. 왜 그들을 세우셨는가? 비상직분으로서 그들을 세우신 목적, 또 항존직분으로 그들을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비상직분으로서의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만이 아니라 항존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도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오늘날 없는 직분이지만,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할 때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그들이 교회의 공적 직분으로 받아 세워진 이유가 무엇인가? 비상직분자들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함으로 세우는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 세웁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리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을 가르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인지, 아니면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인지를 확인하도록 한다고 할 때 결국 사라질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 그리스도의 말씀과 잘 어울리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칠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신자에 이어 수신자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구체적인 어떤 지역, 어떤 교회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 어느 교회를 향해 말하든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설명하는데,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받아보는 수신자들, 다시 말해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로 하자면 어떤 특정한 대상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에게 들려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교회를 향해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교회는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일단 사도 베드로는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소위 교회를 정의할 때 택자의 모임이라고 표현하는데,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하자면 교회는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을 통해서만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동일하다는 표현은 믿음의 분량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량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연약한 믿음이면 교회라 할 수 없고 믿음이 성숙해야지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칼빈 주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및 구원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분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한 믿음의 내용, 적어도 갖춰야 할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지식과 중보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라는 겁니다. 이 지식 없이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이 지식과 관련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라는 말로 수식합니다. 쉽게 말해 너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믿음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받은 것이라는 겁니다.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했습니다. 죄의 결과 죽음이고,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 안에서 함께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죽음이라는 결과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금 살아나게 하심으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의를 받게 하셨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그의 의로움을 믿음을 통하여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7장에 광야 교회란 표현이 있지만 교회는 신약에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있어왔습니다. 왜냐하면 택자의 모임이 구약에서부터 있었고, 그런 택자에게 동일한 믿음이 구약에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하십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공생애를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은 신약 시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는 이 모든 것을 예언의 말씀과 여러 의식들을 통해 예표 방식으로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동일한데,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할 때 사도 베드로의 믿음, 그리고 수신자인 교회의 믿음이 동일할 뿐 아니라 구약 성도들의 믿음 또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며, 나아가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는데, 4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신구약의 통일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한 분 하나님, 한 주, 한 성령, 에베소서에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 그리스도, 한 몸 등의 표현은 다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신구약 통일성을 거절하고 구약은 신약의 것보다 매우 다른 신학의 전형과 구원의 방도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말시온). 종교개혁 시대 재세례파의 경우는 구약 성도들이 신뢰한 약속들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또한 약속된 혜택들은 영적이기보다는 육체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런 내용들은 신구약 통일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입니다. 코케이우스라는 신학자 역시 로마서 3장 25절에 나오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부분을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 용서는 죄들을 못 본 체 간과하는 정도라면,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죄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용서로 이해하기도 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기독교강요 1539년판에서 분명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유사점과 차이점은 한마디로 서둘러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옛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그 본질과 진실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너무 같아 서로 동일하며, 다만 분배된 순서에서만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1541, 프랑스어 초판 p.504) 다시 말해 모든 언약은 실체에 있어서와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전적으로 하나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에 있어서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경영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들에 적응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외형적 형식과 방식들을 바꾸신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머리가 다양하고 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것을 적응하여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마다 다른 교리가 아니라 같은 교리를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칼빈의 갈라디아서 4장 1절 이하 5절의 내용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훈을 받았으며, 저들은 또한 우리와 더불어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와 수신자인 당시 교회에게 말한 것이지만, 이 편지를 받아보는 모든 신약 교회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구약 교회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주신 분이 동일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시도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성도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는 믿음의 내용을 가졌다는 것으로 아벨을, 에녹을, 노아를, 아브라함을, 모세를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이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의 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믿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어지는 2절을 보시면 수신자에게 보내는 인사 내용을 기록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라고 했다면,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기를 소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은혜와 평강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은혜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1절에서 믿음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믿음만 선물로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이 선물로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 자녀로 삼으심, 거룩하게 하심, 심지어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은혜이기에 평강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평강에 대하여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세상 삶에 있어서 마음에 근심할 만한 일이 있지만, 또한 두려워할 만한 일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을 빼앗아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할 때 무엇을 통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 감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쳐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지식에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따라 그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풍성함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그런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에 합당한 믿음은 반드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영생이 있으며, 거기에 은혜와 평강이 자리하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이 말씀 앞에 사도 바울은 내게 유익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 베냐민 지파라는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것,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세상 관점에서 볼 때 혈통이나 학식, 그리고 열심이나 선함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얻는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참된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1절에서 말한 믿음 역시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조차 이 지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지식 때문에 내게 유익하던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욱 붙들 뿐입니다. 이 지식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특별히 주일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바가 너무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을 쌓기 위해, 외적인 어떤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이 지식을 버리는 일까지 있게 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혹 이렇게 반문하고자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할 때 그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의 내용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단지 생명을 얻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얻은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은혜와 평강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많아지기를 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부르심을 받았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 앎이 더욱 굳어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최소한의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이 나타내신 뜻이 무엇인지 알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십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잊으시겠습니까? 만약 잊으신다면 그는 영원 전에 작정하기를 택자가 아니라 유기자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유기자이기에 하나님 지식을 버린 것이고, 유기자이기에 하나님 지식을 버린 결과 유대인이지만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택자는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버림받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지식이 없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로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지식과 관련된 일입니다. 하나님 지식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하나님 지식이 없으면 은혜도 헛되며, 하나님 지식이 없으면 평강 역시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지식이 없을 때 믿노라, 믿노라 하더라도 그 믿음이 가짜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도,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지식이 없는 은혜가 진짜 은혜인가? 거짓된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 없는 평강이 진짜 평강인가? 거짓된 평강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후서는 2장에서 거짓 교사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런 거짓 가르침 아래 그 믿음이 참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믿음과 은혜와 평강을 굳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어떻게 부름을 받았고, 어떻게 택함을 받았는지 하나님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런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이 지식에 대하여 종종 언급하게 되는데, 다음 주에 보게 될 베드로후서 1장 3절만 하더라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후서 1장 8절에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베드로후서 3장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때문에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수신자인 교회를 향하여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소망하면서 무엇을 통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라고 할 때 이 목적을 이루는 방편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호세아의 이 말씀을 반드시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찾고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구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때문에 더욱 우리는 여호와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힘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은혜와 평강의 풍성함을 맛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