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계랑(贈癸娘)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劉希慶>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서야 그녀의 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선계(三淸)에서 내려온 듯하여라.
이 시(詩)는 유희경(劉希慶)이 부안(扶安) 기생(妓生) 이매창(李梅)을 처음 만나서 준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경통(庚統) 운족(韻族)중 명(名), 성(城), 청(淸), 한 운통(韻統) 근체시(近體詩)로 정확(正確)하게 작시(作詩)를 했다. 유희경(劉希慶) 본관은 강화이고, 자는 응길(應吉)이고 호는 촌은(村隱)이다. 그는 노비(奴婢) 천인(賤人) 출신이라고 전한다. 슬하에 아들은 다섯을 두었고 효자(孝子)로 알려졌다. 유희경(劉希慶)은 13살 때 부친(父親) 유몽인(柳夢寅)의 상(喪)을 당하여 외가(外家) 근처인 수락산에 부친을 묻으려고 하자 청원위(淸原尉) 한공(韓公)의 묘를 지키는 노비가 세력을 믿고 쫓아내자 유희경은 사헌부(司憲府)에 고소장을 내어 부친묘를 쓰고 무덤 묘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 사리를 지극정성으로 하자 남언경(南彦經)이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와 만나게 된다. 남언경이 보니, 종놈이 어린 나이인데도 참 기특도 하다 해서 자신이 입고 있던 두터운 옷까지 벗어주고 근처 암자 스님에게 부탁을 하여 3년 시묘살이를 돕도록 하고 시묘가 끝나자 유희경에게 상례(喪禮)에 관한 글을 가르쳐서 유희경(劉希慶)은 상례(喪禮) 전문가(專門家)가 되어서 양반가(兩班家) 상례(喪禮)를 도맡아서 처리를 했다. 출신은 노비(奴婢)였지만 아흔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다섯 번이나 임금님이 벼슬자리를 주었다. 처음 벼슬길에 나간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임금이 몽진(蒙塵)을 떠나자 의병을 일으켜 명나라 원군을 돕는 일을 하였다.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교지(敎旨)를 내려 포상(褒賞) 했다고 한다. 유희경이 살던 때는 격동시기(激動時期)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국내정치는 광햬군(光海君) 폭정(暴政)과 인조반정(仁祖反正)까지 겪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고 하자 유희경(劉希慶)이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로 인해서 옥(獄)에 갇히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절의(節義)를 인정(認定)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80세가 되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유희경(劉希慶)은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다고 한다.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를 “천인으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던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이런 유희경(劉希慶)이 서울을 떠나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부안(扶安)까지 내려와서 만난 것이, 명기(名妓) 이매창(李梅窓)이다. 조선명기(朝鮮名妓) 중에 개성 송도(松都)에는 황진이(黃眞伊)가 부안(扶安)에는 계랑(癸娘) 매창(梅窓)이 이름을 남겼다. 황진이와 매창과는 50년의 시대 차가 난다. 옛날, 이름을 날리는 명기(名妓)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에 가무(歌舞)까지 다섯 가지가 능(能)해야 했다. 유희경(劉希慶)과 이매창(李梅窓)과의 나이 차이는 28세 차이지만 매창에게 준 위의 증계랑(贈癸娘) 시(詩)는 매창을 무산에 신녀(神女)로 극찬(極讚)을 한다. 신녀(神女)는 초회왕(楚懷王)이 무산(巫山)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속에서 신녀(神女) 요희(瑤姬)를 만나 교합(交合)을 했다는 신녀(神女)인데,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恨)을 풀기 위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도가(道家)에서는 신선(神仙)이 사는 삼청(三淸)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말한다. 유희경(劉希慶)은 매창(梅窓)과 하룻밤 자고 나서 준 시(詩)가 희증계랑(戲贈癸娘) 시(詩)다. 이번 시도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운우(雲雨)의 정(情)이 깨가 쏟아진다. 시구를 보자,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무산의 운우지정을 자주 내리네,<桃花紅艶暫時春 撻髓難醫玉頰嚬 神女下堪孤枕冷 巫山雲雨下來頻> 매창(梅窓)과 헤어진 유희경(劉希慶)은 그리운 한을 담는 수십 편의 시(詩)를 남겼다.
매창(梅窓)의 시제(詩題) 자한(自恨) 시(詩)는 구구절절(句句節節)이 그리움으로 찼다. 봄날이 추워 겨울옷 꿰매고 사창에 햇살이 비치는구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옥루(玉淚)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 운통(韻統)은 상평성(上平聲) 지통(支統) 운족(韻族) 중에 시(時) 사(絲)로 한 운통(韻統)으로 근체시(近體詩)에 맞게 작시(作詩)를 했다. 기생(妓生)이지만 사대부(士大夫) 양반가(兩班家)를 상대(相對)하려면 시재(詩才)가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매창은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이른 봄에 추워서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바느질을 하는데 그리운 마음에 눈물이 바늘과 실을 적신다고 읊고 있다. 매창(梅窓)의 자한(自恨) 시(詩)를 접한 유희경(劉希慶)은 회계랑((懷癸娘) 시로 화답(和答)을 한다.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회계랑((懷癸娘) 회답(回答)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상평성(上平聲) 유통(有統) 운족(韻族) 중(中)에 구(口)와 거성(去聲) 운족(韻族) 중(中)에 우통(遇統) 운족(韻族)에 우(雨)로 작시(作詩)를 했다. 스물여덟 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연정시(戀情詩)가 15년 후에 환갑을 지나 다시 만난 63세의 노인이 되어 칠언절구(七言絶句) 중봉계랑重逢桂娘) 시(詩)다. 예로부터 꽃 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번천(唐詩人 杜牧)은 어인일로 이리도 더딘고 내가 가는 것은 꽃 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쫓음이라오.<從古尋芳自有時 樊川何事太遲遲 吾行不爲尋芳意 吾行不爲尋芳意>
환갑이 넘은 노인이 매창을 다시 찾는 것은 육체적 사랑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헤어질 때 약속한 시(詩)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처자식을 둔 남정네가 할 소리일까? 매창(梅窓)은 유희경과 헤어진 후에 병이 들어 눕자, 병중(病中)이란 시(詩)를 남긴다. 이것은 봄을 슬퍼하는 병이 아니요, 다만, 님을 그리는 탓일 뿐이네,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도 하도 많아 외로운 학이 못 떠나는 심정이네, 어쩌다가 그릇된 소문이 돌아 도리어 여러 입에 오르내리네< 不是傷春病 只因憶玉郞 塵寰多苦累 孤鶴未歸情 誤被浮虛說 還爲衆口喧 空將愁與恨 抱病掩紫門> 매창(梅窓)의 병중시(病中詩)는 오언율시(五言律詩)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양통(陽統)에서 낭(郞) 경통(庚統)에서 정(情), 상평성(上平聲) 원통(元統)에서 훤(喧), 문(門)으로 작시(作詩)를 했다. 근체시(近體詩)는 한 운통(韻統) 운족(韻族)으로 작시(作詩)를 하지만 글자가 없을 때는 다른 운통(韻統)으로 시를 짓는 것을 본다. 매창도 병중(病中) 시에 그랬을 것 같다. 기녀(妓女)로서 가정(家庭)이 있는 아버지뻘 남자와 사랑을 한다는 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기녀(妓女)로서 한계(限界)의 벽을 느끼게 하는 애처로운 시정(詩情)이 흐른다. 유희경도 매창과 헤어져 서울에 온 뒤로 시제(詩題) 기계랑(寄癸娘) 시를 지어 보낸다. 헤어진 뒤로 다시 만날 기약 아직 없으니, 멀리 있는 그대 꿈에서나 그리워할 뿐, 어느 때 우리 함께 동쪽 누각에 기대어 달을 보며 전주에서 술 취해 시 읊던 일 이야기 하려나< (別後重逢未有期 楚雲秦樹夢想思 何當共倚東樓月 却話完山醉賦詩> 매창(梅窓)은 유희경과 헤어진 뒤 3년 만에 38세로 죽으면서 마지막 시(詩)를 남긴다.
도원에서 맹세할 때는 신선 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까?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풍진세상 시비 많은 괴로움의 바다인가? 깊은 규방 밤은 길어 몇 해인 듯하구나!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구름 덮인 첩첩 청산 눈 앞을 가리네.<結約桃園洞裏仙 豈知今日事凄然 坐懷暗恨五絃曲 萬意千事賦一篇 塵世是非多苦海 深閨永夜苦如年 藍橋欲暮重回首 靑疊雲山隔眼前> 이번 시(詩)는 칠언율시(七言律詩) 측기식(仄起) 시(詩)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선) 선통(先統) 운족(韻族) 중에 (仙), 연(然), 편(篇), 년(年), 전(前)으로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 맞게 작시(作詩)를 했다. 매창 한시 작법이 이러니, 유희경(劉希慶)도 반 할만도 하다. 독수공방 서울에 있는 님을 그리는 매창의 참으로 마음이 애처롭다. 이런 매창의 죽음을 접한 유희경은 슬픔에 젖어 만시(輓詩)를 썼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의 계랑아! 홀연히 구름 따라간 곳이 묘연하구나! 꽃다운 혼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 쓰다 남은 화장품에 옛 향기 그윽하다, 정미년에 다행히 서로 만나 즐겼건만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깃만 적시는구나!<明眸皓齒翠眉娘 忽然浮雲入鄕茫 終是芳魂歸浿邑 誰將玉骨葬家鄕 更無旅新交呂 只有粧瞼舊日香 丁未年間行相遇 不勘哀淚混衣裳> 38세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난 매창을 유희경은 만시(輓詩)로 마음을 달랬지만 그래도 애도의 감정이 복받쳐서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시를 짓는다.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를 다투어 말한다오.<香魂忽駕白雲去 碧落微茫歸路賖 只有梨園餘一曲 王孫爭設玉眞歌>
매창을 양귀비(楊貴妃) 이름을 빌려서 애도(哀悼)한 시(詩)다. 허균(許筠)은 매창(梅窓)을 평생을 친구로 대했다고 한다. 매창은 기녀지만 성품이 고결하고 음란한 짓도 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유희경 47세때 매창 19세 때 부안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한 사이가 되었다. 유희경은 여항(閭巷) 시인(詩人)으로 장안에서 이름이 나 있고, 매창(梅窓)은 기녀(妓女)지만 시재(詩才)가 능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나이 차를 넘어서 시문학(詩文學)으로 연(緣)을 맺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두 사람의 시를 보면 알 수가 있지 않는가? 매창의 시조 이화우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은 이별(離別)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길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이생에서 이루진 못한 꿈의 한이 부안에는 매창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매창(梅窓)은 아전(衙前)의 딸이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58수(首) 인데, 매창 사후 60년 후에 부안현(扶安縣)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는 시를 모아서 개암사(開巖寺) 목판본(木版本)에 새겨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유희경(劉希慶)과 이매창(李梅窓) 시세계(詩世界)를 산책(散策)을 해 보았습니다. 끝을 맺는 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 애잔할까?
여여 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