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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변강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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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공자묘(Getty Images) |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이름은 구(丘)로,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 취푸(曲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송(宋)의 율읍(栗邑, 지금의 허난성 샤이(夏邑)현)이다.
◈ 중국의 성인
공자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14년간 자신의 제자들과 열국을 돌아다니며 인정(仁政) 사상을 설파했다. 만년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 등 6권의 경전을 편찬하는 데 집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3천여 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그 중 72명이 현인의 반열에 올랐다. 공자의 학설과 사상은 <논어>를 통해 집약되었는데, '인(仁)'을 핵심으로 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 유가의 정수를 모아놓았다. 중국의 역대 봉건왕조들은 <논어>를 치국(治國)의 경전으로 삼았으며 이를 기초로 국가를 운영했다.
고대 사람들은 공자를 '천종지현(天縱之聖)', '천지목탁(天之木鐸)'이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 후대의 통치자들은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영원한 스승)'로 숭배했다. 또한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는 국가장의 최고격인 '대사(大祀)'로 분류되어 치러졌다. 유가사상은 중국 및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공자는 '세계 10대 문화명인' 중 첫 번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자 이후 중국 5천년 문명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단절되거나 폭군이 등장한 시기는 있었으나 근본적인 정체성을 잃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역사의 도통(道統)이 제대로 계승된 데에는 공자의 역할이 컸다. 그가 없었다면 인류는 온화한 인성과 찬란한 영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 공자의 무덤을 판 중국 홍위병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시작된 이후 마오쩌둥의 수하였던 캉성(康生)은 베이징 조반파(造反派) 두목인 탄허우란(譚厚蘭)에게 취푸(曲阜)현의 공자묘를 파헤치라고 지시했다. 캉성은 자신이 “사흘 밤낮을 생각하고 나서 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캉성은 탄허우란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이든지 부숴라.”
1966년 11월 7일, 탄허우란은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대중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공가점(孔家店, 공자의 유교 사상 전반을 가리킴)'을 파괴할 것을 맹세했다. 200여명의 조반파가 탄허우란을 따라 취푸현에 도착했으며 지역 내 조반파들과 연합했다. '철저한 공가점 파괴를 위한 혁명조반파 연락망'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뒤 공자묘를 파괴할 만인 대회를 소집했다. 11월 9일에서 12월 7일까지 그들이 파괴한 문물은 6000여개가 넘었다. 공자상(像)이 파괴됐으며 고서 2700여권 및 서화 900여 폭이 불에 탔고 비석 1000여점이 훼손됐다.
그들의 '전적'은 신속히 중앙혁명소조에게 보고됐다.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곧바로 이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 “공자묘, 공부(孔府), 공자묘지 등은 파손해선 안된다. 그러나 공자의 무덤은 파도 좋다.”
홍위병들은 일제히 '마오쩌둥 어록'을 외면서 공자의 무덤을 파헤쳤다. 신속하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뇌관과 폭약까지 동원됐다. 그들은 공자의 해골을 대중에게 보이고 그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 유명한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 비석은 여러 조각으로 박살났다. 그들은 공 씨 후손들의 묘도 같이 훼손했으며 공자의 76대손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 공령이(孔令貽)의 관을 부수어 유골을 매장하지 않은 채로 두었다.
또한 경학(經學)을 연구하던 저우위퉁(周予同) 교수를 '공가점 파괴' 현장으로 압송했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공자의 묘를 파도록 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지방 각급 간부와 함께 1962년 '공자토론회'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공자상 주위에서 놀림감이 되게 했다. 그들 스스로 이를 '공로이(孔老二, 공가의 차남)를 위한 장송'이라 칭했다.
조상의 묘가 파헤쳐진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공자의 77대손 연성공손 공덕성(孔德成)은 이 일로 타이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중국대륙이 수차례 초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취푸(曲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베이징에서 '종신 전국정협위원'을 맡고 있는 그의 누이 공덕무(孔德懋)마저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대한 조상 공자의 묘와 친부모의 묘가 훼손됐지만 최후의 연성공인 공덕성은 중국 당국에게 정중한 사과 한마디 받지 못했다.
◈ 공산당의 '비림비공(批林批孔)'
1971년의 '9.13' 린뱌오(林彪) 사건은 중국공산당의 ‘림표(林彪)와 공자(孔子)를 비판한다’는 뜻의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발단이 됐다. 린뱌오의 집을 압수수색할 때 유교경전의 어록집이 발견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1973년 7월, 마오쩌둥은 왕홍원(王洪文)과 장춘차오(张春桥)에게 “린뱌오는 국민당과 같이 ‘존공반법(尊孔反法, 공자를 존경하며 법가에 반하는)’ 분자 중 한명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역사적으로 법가를 진보적인 학문, 유교는 퇴보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마오쩌둥은 공자에 대해 일찍부터 편견을 갖고 있었다. 1919년 7월, 마오쩌둥은 자신이 편간한 '샹장(湘江) 평론'의 창간호에서 캉유웨이(康有為) 등 '공자를 존경하는' 자들에 대해 폭로한 4편의 글을 실은 바 있었다. 이는 그가 '공자를 비판한' 첫 번째 글이었다. 1966년 12월, 마오쩌둥은 한 외빈에게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바로 각 방면에서 공자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이 궈모뤄(郭沫若)에게 보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자학은 명성이 높으나 실제로는 쭉정이나 겨에 지나지 않다.'
1973년 8월 7일, <인민일보>는 중산(中山)대학의 교수 양룽궈(楊榮國)의 <공자, 노예제를 완고히 견지한 사상가> 라는 글을 실었다. 이는 마오쩌둥의 승인 하에 쓰인 글이었다.
1974년 1월 18일, 마오쩌둥은 중앙 1974년 1호 문건으로 장칭(江青)이 주도 편찬한 <린뱌오와 공자, 맹자의 도>를 선정했다. 이로써 중국 전역에는 '비림비공'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공산당이 배포한 선전자료 중에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름)'를 대대적으로 모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의 고향은 허베이(河北)이다. 필자는 비림비공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비림비공' 대회를 소집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강단에 올라 발언을 하고 타유시(打油詩, 韻律에 구애받지 않는 통속적인 해학시) 몇 구절을 외웠다. 지금 그 때를 되돌아보면 성현 공자에게 참으로 죄송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필자는 마을의 한 화가가 마을 사거리의 벽 사방에 공산당의 공자모독 포스터를 본 떠 그려놓았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림 속 공자의 모습은 과장되고 추했다.
'비공(批孔)'의 황당무계함은 많은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공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어떤 단체들이 중학교 교사를 초청해 사람들이 '공로이(孔老二)'를 비판하도록 선동했다. 중화민족의 성인은 이렇게 폭도정치 시기에, 공산당에 미혹된 민중들에 의해, '입에 오르내리는 광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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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 월 25 일, 중국 길림성 장춘의 공자 사당에서 개최된 공자 탄생 2556주년 기념 행사 모습. (Getty Images) |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이름은 구(丘)로,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 취푸(曲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송(宋)의 율읍(栗邑, 지금의 허난성 샤이(夏邑)현)이다.
◈ '공자학원'은 성인에 대한 수치
'태극수련복을 입고 사람들이 침착한 자세로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다. 뒤에 있는 외국 어린이들도 요리조리 몸짓을 따라하며 흉내 낸다. 오른발을 내미는 아이, 왼다리로 발길질하는 아이, 혀를 내미는 아이….' 이는 뉴스에 보도된 해외 '공자학원' 교실의 모습이다.
세계 최초의 공자학원은 2004년 6월 15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정식으로 설립됐다. 한반(漢辦·중국어보급위원회) 직원에 의하면 공자학원은 공자 사상에 대한 교육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공자의 이름을 빌려 세계에 중국어를 널리 퍼뜨리고자 설립된 기관이다. 실제로 많은 공자학원들은 외국인들에게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곡을 가르치는 등 공산당 이념과 문화를 설파하는 데 애쓰고 있었다.
각국에 설치된 공자학원은 사실상 공자의 이념과 사상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공산당의 왜곡된 이념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의 공자학원이다. 그들이 주최한 한 포럼에서 해당 학교의 교수는 자신이 이전에 마르크스가 다녔던 본 대학에서 공부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발언을 시작했으며 마르크스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태국 동방대학의 공자학원은 중국과 태국, 양국의 교사와 지원자들을 모아 10월 1일에 정권찬탈 60주년 열병식을 시청하게 했다.
2008년, '공자학원'의 예산은 18억 위안에 달했으며 책정 예산 역시 매년 높아졌다. 이와 함께 ‘희망공정(希望工程)’을 20년간 진행하여 50억 위안 가량을 모금하기도 했다.
중국은 이렇게 많은 돈을 국외 교육에 투입하면서 어째서 본국의 아이들에게는 투자하지 않는 것일까? 손해를 감수하며 '소프트파워 수출'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이러한 행위는 해외 교포들을 더 실망하게 만든다고 홍콩의 학자 우싼싱(吳三興)은 지적했다. 교포들의 경멸을 살 뿐만 아니라 분열을 더욱 키운다는 것이다.
한 업계 인사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공자학원'이라고 불리는 기관들은 소위 '삼무학원(三無學院)'으로 불리는데, 법적 보증, 학술적 자격, 정규 교사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학원들은 운영 과정에서 거액의 적자를 공통적으로 기록했다. 적자의 원인은 다양한데 가장 큰 문제는 운영형식과 재무상황의 불투명성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의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인 동시에 교육부 직원들이 각국 화폐를 임의로 인출하는 현금 인출기와 같은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2011년 12월에 열린 '제6차 공자학원대회'에 초청된 각국의 청년 가수들 다수가 공산당을 찬양하는 '홍가(红歌)'를 불렀다. 선전부장 리창춘(李長春)은 '공자학원'을 '대외선전' 부처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공자학원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공산당 찬탈기념일을 경축하며 공산당의 '홍가'를 부르게 한다. 이는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바로 공자학원이 유명무실한 교육기구라는 것이다. 즉 공자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교육기구의 모습을 어설프게 취한 것에 불과했다. 공자학원은 중화문화를 선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2017년 3월 3일, 중국의 해외 '공자학원'의 내막과 진상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공자의 이름으로>가 캐나다 온타리오의 벨르빌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됐다. 평가위원은 <공자의 이름으로>에 대해 "이 다큐멘터리는 놀라운 디테일을 담고 있으며 악독한 (공산당의) 심보, 그리고 평민영웅을 동시에 보여주며 수십억 달러로 착복하는 학원의 배후를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 공자를 왜 못살게 하나
중국은 왜 공자를 못살게 구는 걸까? 공자의 사상인 '인, 의, 예, 지, 신'은 인간의 정도이며, 이를 통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齐家治国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공산주의와 투쟁철학은 이단사설로 사람을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나라를 망치고, 중화(中華)를 어지럽게 할 뿐이다. 1949년, 공자가 대표하는 중화전통문화와 공산당이 대표하는 마르크스 레닌 공산주의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던 공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공자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중국전통문화는 사실상 도교, 유교, 불교, 삼대종교를 핵심으로 한다. 이 세 사상은 중국인의 도덕적 기반을 함께 구성해왔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완전하고 철저하게 중국 5천년 전통문화의 명을 끊는 운동'이나 다름없었다. '문화대혁명'의 '대(大)'자는 구체적으로 '완전하고 철저하게'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현재 문혁시기를 되돌아볼 때, 문화대혁명이 두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불교와 도교를 멸절시키는 것, 둘째는 유교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문화가 파괴된 중국에서 문화적 공백은 생기지 않았다. 중국전통문화를 멸절시키는 과정 속에서 공산당 문화를 확고히 해나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산당은 힘을 모아 중국을 10년간 파괴해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10년간의 문혁 과정에서 중국은 ‘파사구(破四舊, 4대악습철폐-구사상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운동을 통해 불교와 도교의 승려를 내쫓았으며 사찰, 경전에서 문물을 거의 파괴한 후 말기에 접어들어 '비림비공'을 시작했다. 불교 및 도교에 대한 파괴와 공자에 대한 비판으로써 얻는 결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전자를 통해서 정신에서 물질에 이르기까지 신불에 대한 신앙 개념을 철저히 제거했다. 이를 통해 무신론과 유물론이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후자를 통해서 '인, 의, 예, 지, 신' 사상을 사람들 마음속에서 철저히 뿌리 뽑았다. 그리고 투쟁철학을 뿌리내리고 독재 및 폭정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공자를 제거하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 공자묘를 팠던 사건은 '4대악습철폐' 내지 전체 10년 문혁과정 중 가장 큰 '단일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최고위부로부터 나왔으며 주도면밀한 계획, 높은 기세, 많은 인원, 긴 시간, 파괴한 문물 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기록을 세웠다.
'신을 멸망케 하고자 하는 이는 필히 미치게 된다.' 역사상 몽골족의 원나라가 송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웠을 당시에도 공자묘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중화의 주인이 누구였든지 간에 성현 공자는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공산당이 일으킨 '문혁’ 대란만은 피할 수 없었다. 공산당이 파괴한 중국 선현이 어찌 공자뿐이겠는가? 이와 관련한 검색어를 바이두에 검색한다면 기나긴 명단을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이에 분노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