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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4
요한일서 1장 3절
사도신경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이어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한다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특별히 교회를 향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교회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창세로부터 세상 끝 날까지 참된 믿음 속에서 일치하여 영생을 얻도록 온 인류 가운데서 택하신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생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더 간단하게는 택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대하여 사도신경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표현하는데, 오직 교회의 머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또한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그런 다스림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교회는 통일성을 가집니다. 이런 통일성 아래 교회는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점과 흠이 없어서, 더 이상 거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일치하도록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이요, 또한 성령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죄의 찌꺼기들에서 점진적으로 구해내셔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순종의 모든 부분들을 시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거룩한 신적인 용도를 위하여 구별하셔서 교회 밖에 있는 자들과 분리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적으로 교회가 어느 특정한 장소나 나라에 매여 있거나 거기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온 세상에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간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람과 관련해서는 모든 민족에 속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모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교회를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 때가 되어 믿음 안에서 부르신 택자들은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며 영원토록 교회의 지체로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지체인 성도의 교제에 대한 고백을 살펴볼 텐데, 교제라는 말은 ‘서로가 사귀다’, ‘서로가 주고 받다’는 의미입니다. 성도의 교제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도 사이에서만 교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생각해야 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성도와의 사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5문이 성도의 교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55문. “성도의 교제”를 그대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첫째로, 모든 신자들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롬8:32, 요일1:3, 고전1:9, 6:17, 12:13). 둘째로, 각 신자는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기꺼이 기쁨으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롬12:4-8, 고전12:21, 13:1,5, 빌2:5-8).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시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사도 요한은 앞에 있는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1장에서부터 증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보고 들었다, 심지어 우리 손으로 만진 바 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그의 성육신과 관련된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몸과 영혼을 가진 분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보고 들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전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와 너희가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사귐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사귐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아 그의 지체가 됨으로 인해 성도의 교제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더불어 누림이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의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와 보화, 은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 이것이 성도의 교제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를 말할 때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성도의 교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떠난 교제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라고 해서 성도끼리만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먼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먼저입니다. 이 교제는 지금 사도 요한이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자 한다는 이 표현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교제는 말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일 우리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순서에 따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귐이 있는 것이요, 나아가 성도의 교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도 하나 됨이 있고 또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교회의 속성과 관련해서 교회의 하나 됨,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일치가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더욱 견고해 질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교제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통분모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특성상 그 공통분모가 세상의 가치관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 다시 말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예지만 이 교회는 이런 정치적인 성향을, 저 교회는 저런 정치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와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우리의 공통분모요 그의 말씀이 우리의 공통분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그의 말씀의 다스림 아래에만 있어야 합니다. 결코 세상의 어떤 가치관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주일 공예배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 공예배만이 아니라 주의 뜻과 말씀이 전해지는 모든 공적 모임이 중요합니다.
참고로 교회의 유일한 왕이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을 그의 직분자를 통해 증거 하시면서 교회를 다스리시는데, 말씀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은 결코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섬기는 자일뿐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처럼 칼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를 가질 뿐입니다. 때문에 무력으로 치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치리할 뿐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킬 뿐입니다.
이들은 가르치는 자이면서 다스리는 자로써 장로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로라고 해서 모두가 가르치는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치지는 않지만 다스리는 장로가 있는데, 보통 가르치는 장로는 목사로 부르며, 다스리는 장로를 장로라고 부릅니다. 가르치는 장로가 섬기는 자이듯, 다스리는 장로도 섬기는 자입니다. 가르치는 장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듯, 다스리는 장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교회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때문에 장로라면 하나님 지식,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 두 직분 외에 자비의 의무를 실행하도록 하는 집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치리회를 구성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교회가 다스려질 수 있도록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회가 개교회에 있는 것을 당회라고 하고, 여러 교회의 목사 혹은 당회 회원이 모이되 일정 지역을 따라 모이는 것을 노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노회의 대표로 교단의 전체가 모이는 것을 총회라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제도적인 형식이 존재하는 교회를 조직체로서의 교회라고 하는데, 이와 상응하는 교회를 유기체로서의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된 성도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요 하나 됨이라고 할 때 분명 유기체로서의 교회임을 확인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다비 주의자들, 혹은 플리머스 형제단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형제들, 형제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직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임을 가집니다. 그러나 직분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충동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설교를 합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성례까지 시행합니다. 이것은 결코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코로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예배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을 통해 예배는 드릴 수 있지만 주께서 말씀 외에 세례와 성찬 그리고 권징 같은 것을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명하셨다고 할 때 그런 부분은 전혀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개혁자들이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면서 참 교회의 표지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가?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재정하신 그대로 순수하게 거행되고 있는가? 죄를 벌하는 교회의 권징이 실시되고 있는가? 벨직 신앙고백 제29장에서는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순수하신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배격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로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 방송을 통해 예배하고 그것을 통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 교회도 아니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도의 교제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나와 지체된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요함이 교회의 부요함이요, 그분의 은사가 교회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문에 반드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 말씀에 경청을 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그리고 그분이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을 때, 그리고 성령께서 이 복음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셨을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동일한 화목, 그리고 구속, 칭의, 성화, 생명과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성도들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그 모든 은덕들을 공통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붙들어 주는 것이 바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받은 바 그 모든 은덕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라고 할 때 이미 예배하는 자리, 주의 말씀을 듣는 자리가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성도의 교제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영양분이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공급을 가지 스스로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포도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로부터 그 영양분을 흡수하여 가지에게까지 공급하도록 하는 나무 자체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부러진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성도끼리 교제한다고 하면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떨어져 교제를 한다면 거기에 과연 열매가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교제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상태가 아니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특히 베드로후서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은 열매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형제 우애가 있을 수 있고,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결국 형제 우애, 사랑, 존경과 같은 열매들은 반드시 누구와 접붙여져서 나와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접붙여져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특별히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형제 우애를, 그리고 사랑과 존경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와 먼저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없는 성도의 교제는 이미 성경이 말하는 그런 교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성도의 교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용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자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떨어지면 이미 그것 자체가 성도의 교제에서 이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적으로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런 열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의 교제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한 첫 번째 내용이 모든 신자들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들로 확인한다면, 두 번째 내용은 각 신자는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기꺼이 기쁨으로 사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은덕을 받게 된 성도들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를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12장을 보겠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여기 보면 은사가 여러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습니다. 그리고 직분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주님은 같습니다. 또한 사역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은사, 여러 가지 직분, 여러 가지 사역들이 있을 때 그 여러 가지를 한 사람이 다 가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무엇으로 비유하느냐 하면 몸으로서 비유합니다.
좀 길지만 12절부터 보시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12:12-25) 여기서 분명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누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화목, 구속, 칭의, 성화, 생명과 구원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13절에서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별되는 것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 눈으로, 다 귀로, 다 입으로, 다 손으로, 다 발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성도들에게 다른 은사들을 주십니다. 손으로서의 은사, 발로서의 은사, 눈과 귀, 그리고 입으로서의 은사,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 가지 것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시는가? 다시 7절로 가시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그것을 통해 나만 유익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 아닌 남도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공통적으로 주시는 것 외에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사도행전 11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글라우디오 황제 때 흉년이 크게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흉년으로 인하여 유대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매우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어렵다는 것은 교회의 어려움이기도 한데, 학자들에 따라면 이 흉년이 41년에서 54년 오랜 기간 동안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유대 지역의 흉년은 44년에서 48년 정도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한해 정도가 아니라 꽤 오랫동안 흉년이 지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방 지역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 속한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행11:29-30).
이런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단순히 어려운 교회를 도왔다는 측면에서 하나가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나의 것을 남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한 지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비록 예루살렘과 안디옥이라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교제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우리가 그 은사를 나눌 때 반드시 전제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을 가져야 하고, 또한 온 몸의 구원을 위한 목적, 그리고 각 지체들의 유익을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이름 알리기 위한 목적이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던 것입니다. 교회 앞에 헌금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의 샘플로서 그런 역사를 보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교제에 있어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지체라는 사실을 더욱 각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의 목적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 그리고 각 지체들의 유익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헌금을 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성도의 교제라는 목적도 있음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 그리고 각 지체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없는 자들에게 구제를 하기도 하며, 또 말씀 사역자들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말씀 사역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생활비로서 주기도 하며, 나아가 여러 가지 합당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헌금 생활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원리적으로 생각하자면 많은 받은 자는 많이, 적게 받은 자는 적게 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와 은사가 많은데도 이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합당한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헌금만이 아닙니다. 혹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어려움에 처한 지체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여러분의 도움을 그들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면, 그리고 내게는 그를 도울 수 있는 받은 은사들이 있다면 그런 은사를 사용하여 성도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실천적인 면에서 우리가 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지만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그리고 2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단지 성도 안에서만의 교제가 아니라 그런 성도의 교제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모든 은덕, 특별히 각자에게 주시는 그 은사를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들,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가 더욱 풍성하도록,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교회 안에서 성도의 유익함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더불어 모든 지체는 공통으로 받은 은사 중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 모두가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은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족함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부족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때문에 부족하지 않는 자들, 오히려 넉넉한 자들이 부족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겨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즉 달리 주어졌다고 할 때 각자의 위치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