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 목사님을 추모하며
제가 속한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지난 5.18민주화운동 제43주년 기념주일을 위해 보내온 예배 자료들 가운데 설교문도 있었습니다. 보통은 앞 부분에 준비해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밝히는데, 그런 정보가 없어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오월의 부활절”이란 제목도 범상치 않았는데, 읽어보니 정말 가슴을 뜨겁게 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헬라어 원문까지 확인하며 이처럼 철저히 설교문을 준비해 주셨을까 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니 “이 설교문은 목포노회 산돌교회 김종수 목사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동설교를 구민교회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제게는 신학교 2년 선배이셨던 목사님은 젊었을 때부터 저를 이름으로 불렀지요. 물론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김 목사’라고도 했지만, 그 호칭은 별로 익숙치 않았습니다. 제게도 늘 마음을 함께 하는 ‘종수 형’, ‘형님’이었던 까닭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역사를 해석하고 또 기록합니다. 그 또한 연세대 대학원에서 “Benedetto Croce의 역사인식 방법론에 관한 연구”(1983)란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지만, 사실 그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역사를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9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 때 선후배, 동료들이 나서 그 아픔을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신학화를 주창했고 그 바탕이 될 지역 교회협의회를 조직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4.16 참사가 일어나고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거치되었을 때, 그는 현지에서 가족들의 ‘비빌 언덕’이 되었습니다. 그때 해양수산부 세월호후속대책추진단에서 단장으로 일하던 조승우 후배에게도 기적과도 같은 만남의 주인공이었고, ‘연대’ 선배님이라는 든든한 자랑거리였습니다.
80년대 말, 제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라는 재야단체에 몸담고 있을 때 하루는 형이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한 주에 3만원 활동비를 받아 집에 2만원을 가져다 주고 나머지로 식비, 교통비 등을 써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형’과 김지희 사모님은 대신 아내가 일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챙겨 주셨습니다. 그런 덕분에 제 가정은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학부 졸업 후 학사편입해서 또 수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아픈 이들과 계속 나누고 또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는 싯귀처럼 새로운 ‘산수’를 몸소 살았습니다.
그의 치유와 소생을 간절히 빌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슬픈 소식을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뉴욕 행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들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 보다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분”이라고 항변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내는 얼마 전 가족을 잃은 때에도 그리 슬퍼하지 않았는데,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김종수 목사님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남기신 삶, 우리가 이어 살아가겠습니다.”
“존경합니다. 김종수 목사님!”
“사랑해요, 종수 형!”
하나님의 위로가 사모님, 따님, 가족들과 교우들, 그를 사랑하는 모든 벗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뉴욕에서 김거성 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