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 성주성 전투(星州城 戰鬪)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성주성이 점령당하자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벌어진 전투이다. 양력 1592년 (선조 25년) 9월 26일 ~ 1593년 (선조 26년) 2월 15일
성주성은 1592년 6월 6일(음력 4월 27일) 문경을 함락시키고 경상도 방어선이 붕괴될 때 기세를 모아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에 의해 함락되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성주는 당시 경상도의 거점 고을 중 하나였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주보급로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성주성을 탈환해서 일본군의 물자보급에 차질을 주고 개령에 본진을 둔 모리 테루모토의 부대를 고립시킬 계획이었다.
원래 성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에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와 휘하 장수인 가쓰라 모토쓰나의 1만 병력과 교대하였고, 나중에는 의병들에게 쫓긴 우도 일대의 일본군까지 합세하여 병력이 2만 명이 넘게 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이 성주성을 탈환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5천명을 지원받았고, 화순에서 기병한 의병까지 합세하여 병력이 2만 명에 달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 주둔지에서 출발하여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하고, 다음 날인 8월 22일부터 공성기구를 마련해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때 일본군의 지휘관이었던 가쓰라 모토쓰나는 조선군의 병력이 수만명에 달하자 개령에 있는 본진의 모리 테루모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증원군은 의병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포위망을 형성하기 전에 기습을 받은 조선군은 대열이 무너져 제대로 된 대항을 하지 못 하고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조선군은 9월 11일 다시 성주성 탈환을 시도한다.
조선군이 공성기구를 준비하는 등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증원군이 의병을 공격했고, 성안의 일본군도 합세하여 조선군을 공격했다. 전투 중에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게 되는 피해를 입고 조선군은 2차 공격도 실패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주목<성주성>
3달 뒤인 12월 7일에 3차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8일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지만 피해가 커지자 12월 14일에 철수하게 된다. 일본군은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도 성을 지켜냈지만 1593년에 접어들면서 보급이 줄어 식량이 부족해지는 등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 본대가 후퇴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1월 15일 밤에 성주성을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조선군은 3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으로부터 성주성을 탈환함으로서 조선은 경상우도, 낙동강 서부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으며, 일본군의 주요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성주성 전투에서 입은 피해 자체는 일본군보다 조선 측의 피해가 더 커서 승전이 맞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군의 성주성 탈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했고, 일본군의 보급에 큰 타격을 주었으므로 전략적 승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성주 목사 제말과 정유재란 때 진주성을 지원하다가 전사한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공을 기리기 위해 1792년 정조 때 성주성과 진주성에 쌍충사적비를 세웠으며 현재도 비석이 남아 있다.
제말은 고성 사람으로 전란 전 수문장을 지냈다는데, 기록이 워낙 적어 출신도 불분명하다. 아무튼 제말은 원혼이 되어 후임 수령들한테 원통함을 호소하고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민담마저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빠르게 잊혀졌다. 그나마 전란 후 200년이 지나서야 정조대에 복권된다.
임진왜란 의병활동 지역 및 성주목 위치
◆ 전라좌의병 – 성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다.
- 남도 의병의 중심 ‘보성’에서 777명의 의병이 의(義)로써 일어나다.
죽천 박광전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7세의 노령에도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 700여 명을 모병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라좌도 의병의 시작이었다. 선생이 병이 위독해져 직접 군사를 이끌지 못하고 임계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금산과 무주를 파수하고, 성산과 개령(김천)의 적을 방어케 하였다. 박광전 선생은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미암 유희춘과 함께 ‘호남5현(湖南5賢)’으로 추앙받았다. 남도 의병의 선구자 죽천 박광전 선생의 호국 정신은 대래로 이어져 그의 후손들도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떨쳐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박광전의 전라좌의진 명단(의병 수 700명, 징표 호랑이)
총수 박광전, 대장 임계영, 부장 김익복, 부장 장윤, 부장 최억남, 종사관 정사제(박광전의 제자), 양향관 문위세(박광전의 처남), 양향관 이굉중, 참모 박근효(박광전의 장남), 연락관 안방준(박광전의 제자), 별장 소상진, 별장 남응길, 본진 보성수성장 선상근, 막하장수 박근제(박광전의 차남), 막하장수 이충량, 막하장수 문홍헌, 막하장수 김여중, 의병모집(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백민수=문위세의 아들과 사위)
임계영, 박광전과 더불어 전라좌의병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장흥의 문위세이다. 풍암 문위세는 박광전의 손아래 처남으로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그는 장흥지역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남평 문씨 일문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아들 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와 조카인 문희개, 사위 백민수 그리고 종손 문익명과 문익화 등과 함께 문씨집안 거의 전부가 의병에 참여 하였다. 문위세는 큰 아들 문원개로 하여금 집안 하인 1백 명을 동원하고 군량을 모으는 한편, 강진 출신 이충량을 자신의 부장으로 삼아 조직을 갖춘 뒤, 보성의 박광전, 임계영의 조직에 합류하였다.
능성현령 김익복도 중심역할을 한 사람이다. 정자 정사제는 보성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그는 상중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임계영의 종사관이 되었고 군중의 기무와 격문을 쓰는 일을 담당하였다. 박광전의 장자 박근효는 박광전의 병세가 위독하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참모관이 되었고, 박광전의 차남 박근제도 참여하였다. 박광전의 제자 안방준은 보성출신으로 20세의 나이로 참여하였는데, 그는 양호 도체찰사 송강 정철에게 파견되어 연락참모 역할을 함으로서 조정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외에도 임계영의 조카 임제, 보성의 염세경, 김홍업, 선경릉, 김언립, 남응길과 장흥의 임영개, 양간, 흥양의 황윤기 등이있다. 양간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하고 그 대신 아들 양자하를 보내면서 양곡 100석을 내주었다. 진영을 갖추고 보성을 출발하여 장흥, 낙안을 거쳐 순천에서 전 만호 장윤이 합류하였다. 임계영은 장윤을 부장으로 삼았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남길 글귀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의 3분의 2 이상이 호남 의병이었다. 이처럼 호남 의병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그 중심에 ‘보성’이 있었다.(사실확인 : 제1차 진주성 전투 관군 3,800여 명과 성외 후방 공격 호남의병 2천명/ 제2차 진주성 전투 관군 3천여 명과 의병 3천여 명(담양 고종후, 나주 김천일 양산숙, 광양 강희보, 남원 변사정, 태인 민여운, 순천 강희열, 해남 임희진, 영광 심우신, 장성 김극후, 강진 황대중) 등 다수의 호남의병이 참전했고,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지휘한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화순에서 창의한 의병장 출신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의병장으로 출전하였다.)
보성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전라좌도 의병을 최초로 일으킨 죽천 박광전 선생을 시작으로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긴 수많은 의병들이 베출되었다. 보성 의병은 나이, 신분 구별 없이 의로써 일어나 육상 해상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며 이 나라를 지켜냈다.
▲ 전라좌의병 – 의병장 삼도 임계영의 기록
1592년 7월 20일 보성 관문에 붙은 계영의 격문을 보고 1,000여 명의 장정들이 달려왔다. 66세의 박광전이 의병대대장으로 추대됐으나, 건강 문제로 사양하자 임계영이 대장이 됐다. 호랑이 그림을 깃발에 매달고 8월 중순 남원에 도착한 그는 남원부사 윤안성에게 화살, 칼 등 무기와 군량을 건네받은 뒤 최경회와 첫 인사를 나눴다.
진용을 정비한 후 8월 20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을 치기위해 합동작전을 준비하던 중 경상감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영남 방어에 나섰다. 경남 함양을 지나 합천에서 의병장 정인홍, 김면 등과 성주성 공략에 나섰으나 1, 2차에서는 실패한 뒤 9월 중순 진주성으로 이동했다. 왜적 2만여 명이 포위한 진주성에 진군하지 못한 임계영은 곽재우와 그의 선봉장 심대승, 고성현령 조응도, 최강, 정유경 등은 후방에서 왜적을 괴롭히는 역할을 했다. (성주성 3차는 오봉 정사제 참조) 1593년 1월 13일 임계영과 최경회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왜적 공격을 계획했으며, 1593년 3월 18일 경북 선산의 적들을 공격하기로 하고 작전회의를 가졌다. 3월 26일 성안 왜적의 보급로를 막고 4월 5일 공격을 감행해 400여 명을 사살하자 왜적은 상주와 함창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임계영은 선산, 개녕, 성주 등의 왜적을 모두 몰아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5월 24일 도체찰사 정철에게 보고한 뒤 6월 5일 경남 함안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진주성의 위급함을 알고 장윤에게 우선 3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돕도록 하였다. 자신은 부족한 군량과 무기를 확보해 진주성으로 가려했으나 6월 29일 함락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7월 27일 경남 의령으로 이동해 진주성에서 북상하는 왜적들을 괴롭힌 뒤 12월 하동으로 진을 이동하였다.
1594년 정월 광해군의 지시로 장흥, 보성 등의 군량을 전달받은 임계영은 2월 섬진강변으로 왜적을 유인해 복병으로 기습해 타격을 입힌 뒤 같은 해 4월 김덕령에게 의병을 인계하였다.
▲ 전라좌의병 - 오봉 정사제의병의 성주성 전투
임계영 의병의 종사관으로 전장에 참여한 오봉 정사제는 의병들에게 3일치 식량을 가지고 백마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서하도록 시켰다. 맹서의 내용은 여색과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치경회 의병과 합동작전에 합의하고 1592년 8월 20일 무주, 금산 방면을 나아가 전라도 침입을 노린 고바야가와, 다치바나 등을 견제해 물러가도록 했다.
경상감사 김성일의 지원 요청을 받은 임계영의 지시로 거창, 합천까지 진출한 정사제는 의병장 정인황과 합류해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도체찰사 정철, 경상감사 김성일 등이 운봉현감 남간, 구례현감 이춘원의 정병 5,000여 명을 보내주면서 의병과 관군 2만5,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가쓰라의 성주성 병력은 1만 명 내외로 추산됐다. 8월 19일 합천 해인사에서 작전회의를 한 뒤 21일 1차 공격에 나섰지만 구원에 나선 왜장 모리의 부장 요시미의 급습에 패퇘했다. 김면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9월 11일 제2차 공격에 나섰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의병들이 연합작전이 제대로 안 되고 군웅할거식 전투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정사제는 10월 10일 임계영을 대신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작성하는데, 그것이 유명한‘진창의토벌사소’다. 그는 자신의 하인 보리쇠 등 4명과 함께 소금장수, 지물장수, 죽물장수, 김장수 등으로 위장해 평안도 의주까지 12일만에 찾아가 직접 선조에게 이를 바쳤다.
선조로부터 분의사로 임명된 그는 10월 29일 다시 내려와 가쓰라와 무라가미가 지키고 있던 성주성 3차 공격에 나섰다. 11월 7일 정사제가 매복 공격으로 왜적에 타격을 입힌 뒤 11월 10일 의병장들이 작전회의를 한 뒤 14일 일제히 공격했다. 장윤이 200명의 왜적을 사살하고 400명의 포로를 구해내는 등 맹활약했으나 성주성 3차 전투에서 소상진, 남응길, 양자하 등이 전사했다. 패퇴한 뒤 성안에 머물던 왜적은 1593년 1월 15일 철수를 시작했으며, 2월 2일 이들을 추적한 정사제 등은 왜적 400여 명을 사살했다.
정사제는 비변사에게 장수들 공격을 보고하고, 조정은 왕실을 보호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임계영과 헤어져 300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정사제는 6월 중순 진주성의 함락 위기를 전해듣고 남하 하다가 6월 30일 곡성 송치에 도달해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이후 구례 두류산에 진을 치고 왜적을 공격했고, 도주하는 왜적을 쫓아 남원에 도달했다. 1594년 3월 남원에 운집하는 왜적을 공격하기로 다짐하고 진을 친 정사제는“왜적의 침입에 분하고 원통해 부모님 무덤을 눈물로 하직하고 창칼을 들어 의병을 일으켰네, 사람으로 태어나 하고자 한 충효를 다하지 못한 채 이제 죽음 길에 이르니 한만이 서리는구나”는 유언과 같은 시를 남기고 5월 9일 오전 10시 남원성을 공격했다. 20여명의 왜적을 벴으나 중과부적으로 화승총을 맞고 숨졌다.
▲ 임진왜란 – 성주성 전투의 의령남씨 선조
- 남응길(南應吉) : 충경공 충간공 별좌공파 16세 – 성주성 전투 전사
- 남응개(南應凱) : 충경공 충간공 별좌공파 16세 – 성주성 전투 참전
<참고문헌>
나무위키- 성주성 전투
광주일보-의병열전-오봉 정사제
광주일보-호남의병이야기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