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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 하늘 나라 청지기 - 8. 하늘나라 청지기로서 1 1970년 12월 1일은 전 축복가정 부인들이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깨우치기 위한 거룩한 성업에 동참했다. 아기 엄마는 경남 산청으로 갔다. 한 살배기 선영이는 젖 달라고 엄마 나간 문을 붙잡고 울어댔다. 복귀 역사의 한을 풀기 위해 나선 길 어찌 뒤를 돌아 볼 수 있으랴! 몸성히 3년 동안 민족을 위한 탕감의 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오기만을 빌었다. 2 안동 지구장으로 있으면서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니, 또 선생님의 귀한 상을 받는 영광을 가졌다. 34개 전지구에서 세 지구장에게 주는 상패였다. 1971년 2월 1일이었다. 너무나 과분한 은사이고 보니 격려의 뜻으로 받았다. 남들은 상복이 많다고 하며 그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오기도 했다. “언제나 맡은 일에 충실하며 식구들과 하나 되어 꾸준하게 노력한 것뿐이라”라고 대답했다. 3 1962년 7월 호 성화지(신문판)에 일선 교역자로서는 처음으로 편면경에 실리는 영광을 차지했다. 꿈에 선생님께서 어디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시며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어주셨다. 며칠 후 지방 순회 도중의 유광렬 문화부장님을 경남 하동에서 만났다. 그분이 봉철씨 프로필을 우리 대내 기관지인 성화지에 실었노라 말씀해 주셨다. 우리의 일거일동이 어느 하나 하늘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지난 잘못된 일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4 지방에서 13년의 인도자 생활을 마치고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시 “하나님 집에 청지기가 없으니 집을 지키러 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던 말씀을 잊지 않았다. 5 교회를 잘 지키며 식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밑창에서 받들어 모시는 마음으로 임했다. 서울 성동교회 생활은 역시 어려운 편이었다. “하나님께서 다 잘 해 주실 것이라”라는 선생님 말씀을 축복으로 알고 지내다 보니 생활 형편도 나아졌고 식구들도 늘기 시작하였다. 6 식구들이 기다려졌고 찾아 온 식구들은 밤이 늦도록 갈 줄 몰랐다. 정말 한 가족과도 같았다. 부부 싸움도 교회에 와서 교회장 앞에서 할 정도였다. 그때는 재판장 부탁을 받게 된다. “나는 막대기와 같으니 쓰시는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마음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와 의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 식구들의 얼굴에서 말씀할 것과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가 있었다. 7 4층 다다미 방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방안이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계셔서 우리들의 마음까지는 얼게 못하였다. 엄마 없이 자라는 어린 아기도 하늘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게 자랐다. 1970년 12월, 부인 대원 동원 때의 말씀에서 “금번 부인들 동원에 동참 않는 자는 나와 상관없다”라고 하셨다. 8 3년 전도 출발 전에 임신한 아기가 태어나게 되어 얼마간 서울에서 지냈다. 아기 낳은 지 100일이 가깝지만 갓난 아기를 맡길 적당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단판 기도를 했다. “3일 후까지 아기 볼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내가 아기를 업고 안고 설교와 강의를 하게 됩니다. 하늘의 뜻이면 당신의 딸을 임지로 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9 하늘은 기도를 들어 주셨다.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유정희씨가 교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하고 기뻤다. 아기 엄마도 마음 놓고 산청 임지를 향해 떠났다. 젖 달라고 보채는 원섭이에게 젖 대신 우유를 먹이면서 엄마 대신 고맙게 잘 키워 주었다. 10 엄마가 3년 전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선영이와 원섭이는 엄마에게 가지 않으려고 한다. 낳은 정도 크지만 키운 정 또한 못지않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 보수나 대가 없이 어려운 교회 생활과 아기들을 6년 동안 보살펴 온 충성스러운 식구에게 하늘은 기성 가정 축복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다. 11 선생님께서 “내가 제일 두려운 말씀이 있다면, 하늘이 나는 너를 모른다” 라는 것이라 하셨다. 내가 하늘을 믿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하늘이 나를 믿어주고 계시느냐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련다. 12 1974년 5월, 전남 교구장으로 발령받고 광주로 내려갔다. 선생님께서 1958년도 처음 부산 영도 교회에서 나를 보면서 “봉철이는 잘 다녀야 좋겠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정말 전국을 몇 년 사이를 두고 이사하기란 힘이 들었지만 “팔자이겠거니” “잘 다녀야 좋다”라고 하시니 또 가보자고 말씀 앞에 순종하고 떠났다. 1959년도 제1회 협회 40일 수련 때 주신 예언적인 말씀이 현실로 다가왔다. 13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온 1,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희망의 날 대향연” 의 주역들로서 활동을 하여 광주에서 “빛나게 승리했다”라고 선생님께서 집회 끝나신 후 기뻐하시며 축복의 말씀을 주시던 일이 엊그제 같다.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반대하여 어느 하나 순조롭게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될 때까지 찾아가고 일했다. 14 1975년 4월 30일의 광주 희망의 날 대향연은 그곳 실내체육관 개관 이래 최대의 행사로서 선생님의 승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위하여 살자”라고 목이 터지게 외치신 말씀의 메아리가 온누리에 지금도 퍼지리라. 15 광주 집회 다음 날인 5월 1일은 승한일이다. 육천 년 복귀의 한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서툰 한국말로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한국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라고 말하던 국제 기동 대원들이 한국 사람 이상으로 한국을 사랑하며 활동해 주었다. 16 그 여세를 몰고 각 군•시•읍을 순회하며 지방 유지와 기관장, 뜻있는 인사들을 초청하여 선생님과 통일교회를 소개하고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고 있음을 외쳤다. 정말 감격스럽고 가슴이 벅찼다. 마음 놓고 목이 터져라 말씀을 전했다. 17 내 집이 없어 남의 셋방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전하면 시끄럽다고 나가라고 하고 한 맺힌 하늘의 심정 때문에 울면 초상났느냐고 내쫓던 일들을 생각하며 외쳤다. 보고 들은 이마다 인식이 달라졌고 대하는 사람마다 선생님과 통일교회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대받으며 자라왔던 뜻이 이렇게 빨리 달라지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18 그러나 서울서부터 좋지 않았던 편도선이 부어오르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해서 울었다. 이제 우리 활동을 보고 싶어하고 말씀을 듣고 싶어 찾아오는 무리들에게 말을 제대로 못하다니 정말 괴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일할 수 있는 한때를 맡겨 주셨으니 후회 없이 소신껏 다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역사는 게으른 자를 위하여 머물러 주지 않는다”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모두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19 지난 20여 년의 기간을 회고해 보니 남을 위한다고 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지내 놓고 보니 기쁘고 보람된 일이었다. 하늘 앞에 걱정 끼친 많은 일과 잘못된 것들이 한두 가지 아닐 것 같다. 두려운 마음뿐이다. 가정부장으로서 3년을 거쳐 지금은 태능교회에서 조용히 지난 일들을 반성하면서 목회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20 오늘날까지 지내올 수 있음도 하나님의 은혜고 부모님의 사랑의 가호임을 안다.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의 참된 중인이요, 증언자가 되고자 다시 한번 뜻 앞에 다짐한다. |
金鳳哲 - 天の国の召使 8 - 天の国の召使として 一九七〇年十二月二日は、全祝福家庭の婦人たちが、国を守り、民族を覚醒するための素晴らしい聖業に同参した。家内は慶南の山清に行った。一歳足らずの善映は、オッパイがほしいと母親の出て行った門を捕まえて泣きじゃくった。 復帰歴史の恨みを解くためにいで立った道、どうして後ろを振り向くことができようか。 三年間、民族のための蕩減の道を無事に終えて帰ってくることだけをしきりに願った。 安東地区長として、任された仕事を誠実に行うと、また先生の尊く栄光ある賞を受けた。三十四ヵ所の全地区で、三人の地区長に与える賞牌であった。一九七一年二月一日のことであった。 あまりにも過分な恵みと思い、激励の意味として受けた。人々は福が多いと言って、その秘訣は何なのか尋ねてくることもあった。「いつも任せられたことに忠実で、食口たちと一つになってうまずに努力しただけである」と答えた。 一九六二年七月号の『成和誌』(新聞判)に、一線教域者としては初めて一面に載るという栄光を得た。夢で先生が、「どこどこに誇るものがある」と言われ、あちこち連れて回り写真をたくさん撮ってくださった。数日後、地方巡回の途中の柳光烈文化部長と慶南の河東で会った。彼が「鳳哲氏のプロフィールを内部機関誌の「成和誌」に載せよう」と話してくださった。 我々の一挙一動がどれ一つとして天と関係のないものはないことをもう一度感じ、過去の過ちを許してくださいと祈った。 地方で十三年の伝道者生活を終え、ソウルでの生活をす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ながらいつも、「神の家に召使がいないので、家を守りに行かないか」と言われた言葉を忘れなかった。 教会をよく守り、食口たちを一人一人、一番下からかしずく心で臨んだ。 ソウル城東教会の生活は、また、難しい方であった。「神様がすべてうまくやってくださるだろう」という先生のみ言を祝福と知って過ごしてみると、暮らし向きは良くなり、食口たちも増えはじめた。 食口たちが待ちどおしかったし、訪ねてきた食口たちは、夜遅くなっても帰ろうとしなかった。本当に一つの家族のようであった。夫婦げんかも教会に来て教会長の前でするほどであった。その時は裁判長の願いを受け入れるようになる。「私は棒切れのようなものですから、み心のままに用いてください」という心だけであった。 何か事が生ずれば訪ねてきて議論し、共に問題を解決することを願う。食口たちの顔から、話すべきことや願い求める答えをしてあげることができた。 四階の畳の部屋の冬は非常に寒かった。部屋の中がカチカチ凍りついた零下の寒さの中でも、神の愛があって、我々の心までは凍えさせなかった。母親なしに育つ幼い子も、天の加護によって健康に育った。 一九七〇年十二月、婦人隊員動員の時のみ言で、「今回婦人たちの動員に同参しない者は私と関係がない」と言われた。 三年伝道の出発前に子供が生まれるようになって、ある期間ソウルで過ごした。赤ん坊が生まれて一〇〇日近いが、生まれたばかりの赤ん坊を任せる適当な人を求められなかった。神に談判祈祷をした。「三日後までに赤ん坊を見る人を求め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私が赤ん坊を抱きかかえて説教と講義をするようにします。天のみ旨であれば、あなたの娘を任地に送ります」と言った。 天は祈りを聞いてくださった。入教して間もない柳貞姫氏が教会で生活するようになった。本当に感謝し喜んだ。家内も安心して任地の山清に向かって行った。 オッパイをせがむ元變に、オッパイの代わりに牛乳を飲ませながら、母親の代わりとして、有り難くも立派に育ててくれた。 母親が三年伝道を終えて帰ってきた。善映と元變は母のもとに行こうとしなかった。生んだ情も大きいだろうが、育てた情もまた劣らないことを知るようになった。 何の報酬も代価もなしに、難しい教会生活で子供たちを六年間見守ってきた忠誠に満ちた食口に、天は既成家庭の祝福の恵みを与えてくださった。 先生が、「私に一番恐しいみ言があるとすれば、天が私はお前を知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と言われた。私が天を信じたと誇らず、天が私を信じてくださるかどうかを思いながら生きていかれるのである。 一九七四年五月、全南の教区長として発令を受け、光州へ下った。 先生が一九五八年に初めて釜山の影島教会で私を見られ、「鳳哲が飛び回ればよい」と言われたみ言が思い出される。本当に全国を何年かの間に引っ越すことは大変なことであったが、「八字(運命)だ」と思い、「飛び回ればよい」と言われたので、また行ってみようと、み言の前に従順に従った。 一九五九年度も、第一回協会の四十日修練会の時に、下さった予言的なみ言が現実として訪れてきた。 全世界六十余カ国から来た千余名の若者たちが、「希望の日大饗宴」の主役として活動し、光州で「輝く勝利をした」と先生が集会の終わった後、喜ばれ祝福のみ言を下さったことがつい先日のようである。 行く所ごとに、することごとに反対し、どれ一つとしてうまくいくことがなかった。しかし一度でだめなら、二度三度まで訪ねていっては働いた。 一九七五年四月三十日の光州の「希望の日大饗宴」は、光州の室内体育館が開館以来、最大の行事として先生の大勝利の一ページを飾った。 「為に生きよう」とのどがつぶれるほどまでに叫ばれたみ言のこだまがあらゆる所に今も広がっている。 光州の集会の次の日の五月一日は勝利の日である。六〇〇〇年、復帰の恨みが一度に解かれるようであった。 拙い韓国語で、「私は韓国を愛します。韓国に神の祝福が共にありますように」と言って、国際機動隊員たちが韓国人以上に韓国を愛して活動してくれた。 その余勢で、各部、市、邑を巡回し、地方の有志と機関長、志ある人士たちを招請して、先生と統一教会を紹介し、この民族に神の大いなる祝福が臨んでいることを叫んだ。実に感激に満ち、胸が高鳴った。安心してのどがかれんばかりにみ言を伝えた。 自分の家はなく、間借りの他人の部屋で讃美歌を歌い、み言を伝えれば、「うるさい、出て行け」と言われ、恨みがましい天の心情のために泣けば、不幸だからと追い出されたことを思って叫んだ。 見、聞く人たちの認識が変わり、対する人たちはみな、先生と統一教会に称讃を惜しまなかった。 さげすまされてきたみ旨が、このように速く変わるとは全く思いもよらなかった。 ところが、ソウルの時から芳しくなかった扁桃腺がはれあがって、言葉が思うように出てこなかった。悔しくて泣いた。 いまや我々の活動を見たがったり、み言を聞きたくて訪ねてくる群れに、思うようにしゃべれなかったので、本当につらい瞬間だといわざるを得なかった。働くことのできる一時を任せてくださったので、後悔することなく信ずる限り果たすことのできる人が幸福な人であろう。 「歴史は怠け者のためにとどまってくれない」というみ言のように、我々すべてが後悔のない人生を送りたい。 過去二十余年の期間を回顧してみる時、人の為に生きるということは難しかったが、過ぎ去ってみると嬉しくやり甲斐のあることであった。天の前に心配をかけ、世話になった多くのことと誤ったことが一つ二つではないようである。畏敬の心だけである。 家庭部長として三年を過ぎ、今は泰陵教会で静かに過去のことを反省しながら、牧会をまた始めている。 今日まで過ごしてこれたことは神の恵みと先生御夫妻の愛の加護であることを知る。 召使としての責任を遂行しようと、神の真の証人であり、証人になろうともう一度み旨を誓うのである。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