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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9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3
설교 제목: 예수님과 다니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64
설교 목적:
지난 주에 나는 ‘금생과 내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 설교는 주로 죽은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과정에서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제가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수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운명을 이끌어 간다고 할 때 사람의 생각은 곧 그 사람의 팔자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목적 중에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점검하고 교정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생각을 알고자 노력한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셨다. 그들의 생각이 그릇되어 삶이 왜곡되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신 것 같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나는 예수님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셨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금요일 밤 기도를 드리면서 내가 마주한 영적인 실존과 유사하다. 이번 주 설교에서 나는 다니엘서에 기초를 둔 예수님의 생각을 제시하고 거기에 우리의 생각을 비추어 볼 계획이다. 우리도 어쩌면 생각을 수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설교 개요:
1. 통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의 티끌
2. 재판정에 서신 예수님
3. 예수님과 다니엘
***
1. 통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의 티끌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찾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성경을 배웁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예배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립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 것처럼 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모아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느끼고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은혜 받았다!’는 말은 바로 그런 감동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금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피곤하지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은 힘든 날이 되겠구나! 어서 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쉬어야지.’ 그렇게 절반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문득 그 예배 시간에 주님이 마음에 찾아오심을 느낍니다. 그런 날에는 더 깊은 은혜를 맛보고 감동합니다. ‘아! 주님이 나를 아시는가?’
이번 주 금요일 기도회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하신 분들과 더불어 예배당에 옵니다. 모두 지친 모습입니다. 저에게도 이번 주간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마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임합니다. 그런데 문득 기도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생각납니다. 주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눈을 감은 제 눈 앞에 영화처럼 펼쳐집니다.
그 앞에서 제가 얼마나 작은지, 저뿐 아니라 이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달아집니다.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을까?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니 온 우주도 하나님 앞에는 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주에서 거대한 운석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초토화되고 스러지는 장면이 눈에 그려집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엄위로신 임재와 거룩하심 앞에 누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자신의 앞에 서라 하시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부르심을 받은 자신이 얼마나 황송하고 영광스러운지 눈물나게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그때 문득 성경 말씀이 생각나며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온 세계가 저울 위의 티끌과 같고 통의 물 한방울과 같습니다!” 이렇게 외치노라면 마음은 목욕한 것처럼 새롭게 되고 하늘의 보좌를 방문한 것 같은 기쁨과 담력을 얻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신앙의 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은 신앙인들에게는 보편적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과 찬송에서 우리의 체험을 표현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이사야 40:12~17
우리나라 기독교 음악에도 이런 체험을 담은 곡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곡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 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한웅재 목사)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나의 작음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그런 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압박과 괴로움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런 용기가 충만해지면 우리는 세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2. 재판정에 서신 예수님
우리는 가끔 하나님 앞에 선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을 세척하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자주 이 세상에서 불의와 불법을 마주합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을 가지고 진실을 덮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자리인 재판정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중요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재판을 굽게 하는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오래 전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재판정에 세우고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그 유명한 철학자는 독배를 받아 죽는 형벌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잘못된 판결이 있습니다. 전에는 군사력을 등에 업고 일어난 독재자들이 판사들을 위협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리게 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어떤 사람을 빨갱이로 조작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재벌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돈을 많이 들여 변호인단을 꾸리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재판을 굽게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르며, 공의로 재판할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잠 17:23, 31:9). 재판이 얼마나 공정한가에 따라 국가의 힘이 결정됩니다. 재판이 굽은 세상에서는 그만큼 쉽게 악한 자들이 활개치기 때문입니다. 허약한 사람의 몸에 병균의 힘이 커지듯이 건강하지 않은 사회일수록 악인이 득세합니다.
이번 주에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끈 재판이 있었습니다. 쌍방울의 김성태 회장이 북한에 800만불을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전 경기도 부지사 이화영 씨가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재판부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이 부지사가 뇌물죄가 있다는 유죄 선언입니다. 이 재판은 야당 대표 이재명 씨의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매체에서 국정원의 문건을 보도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쌍방울 측의 대북송금은 북측과 모의하여 우리나라의 주가조작을 시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법부는 하나의 사실을 두고 ‘정치인의 뇌물’이냐 아니면 ‘사업가의 주가조작’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재판정에 선다는 것은 괴롭고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재판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재판정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누군가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고소를 할 때 우리는 법정에 섭니다. 그러므로 법정에 선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법정에 서신 분들입니다. 양심적인 사람도 때로는 법정에 서서 자신의 행위가 진실하고 정당한 것임을 밝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이 재판정에 서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마태복음 26:59~62
예수님이 붙들려서 출석하신 그 재판정에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목적을 가지고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재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거짓 증인을 많이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게 합니다. 그 진술 중에는 이런 증언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증인은 그 진술을 왜 할까요?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했으므로 유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때 재판장인 대제사장이 심문합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에 대하여 너는 뭣이라 하겠느냐?”
진실이나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재판은 언제나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치열하게 다투는 싸움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고대인들은 이런 현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도서 3:16).
웬일인지 예수님은 재판정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이 쏟아지는데도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법부가 8인의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1975년 4월 8일입니다.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알려진 그 재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고 그 시신은 유족에게 전달되기 전에 경찰에 의해서 화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2007년 1월에 사법살인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재심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무죄판결이 났습니다. 그들도 어쩌면 유신정권에서 그 재판이 어떻게 끝날지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
는 예수님의 재판에 대해서 침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53:7). 그런데 예수님은 재판정에서 마지막 발언을 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발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63~64
재판장인 대제사장이 최후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우리에게 말하라!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의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근거가 될 것입니다. 재판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인정한다면 이는 명백하게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당신 말대로 내가 그리스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내가 권능자이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또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옷을 찢으며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3. 예수님과 다니엘
예수님의 마지막 발언은 대제사장과 그 재판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격동시켰습니다. 그 결과 즉시 사형이 언도됨으로 재판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진술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실 분에 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입니다. 그것은 시편에 있는 다음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1
이 본문은 신약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그만큼 유명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자기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에게 모든 권세를 맡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내용은 다니엘서의 예언입니다.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판타지로 표현하여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는 문학양식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시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시편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판타지로 그려줄 수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그림으로 그려서 나타낸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그런 문학양식에 해당합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짐승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특히 네 가지 사나운 짐승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 모습은 (1)날개 달린 사자와 (2)갈빗대를 물고 있는 곰, (3)머리와 날개가 네개 달린 표범과 (4)철로 된 이빨과 열 뿔을 가진 사나운 짐승입니다. 묵시문학에는 판타지에 대한 해석을 해 주는 천사가 나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그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라’(다니엘 7:17)고 합니다.
묵시문학인 다니엘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진리와 양심을 따라 사람답게 사는 이들이 있고 양심을 저버리고 짐승처럼 힘으로만 통치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성경은 사나운 짐승으로 그려서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사로잡아 심판의 불에 던지신다는 이야기가 묵시문학의 주제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은 짐승 같은 이들이 양심을 저버리고 위협하고 죽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도 재판정에서 그런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최후진술에서 심판을 선언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다니엘서에서 악한 세력이 맞을 결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다니엘 7:9~12
다니엘이 본 것은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고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기고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그 정한 시기가 되면 그 남은 짐승들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확신으로 최후진술을 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니엘서 위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13~14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서를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잘 알고 있는 그곳의 대제사장과 공의회원들은 일제히 예수님을 죽이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최후진술은 진실이었습니까? 인혁당 재판에서 32년만에 재판의 진실이 바로잡힌 것처럼 예수님의 재판도 하나님이 진실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세상의 법정은 예수님을 거짓말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판결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진실하신 아들로 입증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고 그것을 세상에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자기 아들이심을 어떻게 증명하셨습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3~4).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증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2:32, 36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셔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승천 후 10일만에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두 번째로 증거하는 증거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은 예수님의 최후진술을 통해서 증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그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늘 구름을 타고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진술에서 나온 말씀이면서 동시에 그 전에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0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징조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 그대로 약 40년 후에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철저하게 무너뜨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 일입니다. 이로써 예수께서 법정에서 최후로 진술하신 그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 서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장차 진실한 사람들을 높이시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불법의 법정에서도 잠잠하셨고 최후 진술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셨고 그들에게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를 것을 결단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저 천국으로 안내하는 다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은 사람들이 불법과 불의에 대항하여 나갈 때 마음에 간직하고 나아가는 길이며, 모범이며, 승리의 상징입니다.
오늘도 우리나라에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말할 증인이 필요하고, 사회를 감시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양심과 용기를 가진 언론인들이 필요합니다. 단체의 지도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공익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수많은 공직자들과 시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용기를 내야 할 순간이 올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때 우리가 사는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