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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비밀
본문 <요3:1~12>
오늘 살펴볼 말씀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큰 잘못이나 실수를 한 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시작을 할 때 흔히 거듭나는 심정으로 새출발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접한다. 정치인들 역시 “이제 거듭나는 정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거듭남이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새 사람이 되는 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는 거듭남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성령을 통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거듭남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의 변화이다.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듭남이 이럴까요? 정말 거듭나면 새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걸까요? 오늘 이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
거듭남이란 주제는 신약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 그래서 거듭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거듭남의 주제는 이미 구약 성경에 여러 번 예언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겔36:26-27절이다.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 거듭남의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지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로 변화된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게 문자에 잡혀있는 한계이다. 그래서 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흔히 ‘거듭났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가 있어?”라고 말한다. 거듭났다면 삶이 달라져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 문제는 거듭난 사람이 과연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착한 사람으로의 변화가 아니라는데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방금 읽은 본문을 보면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지체 높은 바리새인이었다. 낮이 아닌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이유는 얼마 전 성전 정화 사건으로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교 종교당국에 블랙리스트로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층이었던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대낮에 예수를 찾아오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라는 용어가 주는 메시지는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가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비유도 담고 있는 이중계시이기도 하다. 어둠이기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온전히 모르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수를 찾아온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표적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임을 개인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니고데모가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우리’를 말하는 것을 볼 때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음에도 이를 감수하고 예수를 찾아와 대화해 보고자 했던 것은 그가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이란 유대교 분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4개의 분파가 있었다. 바리새파(분리하다), 사두개파(의롭다), 에세네파(거룩하다), 헤롯당파(독립운동). 바리새파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대중들의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던 자들이었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나라로 나눠진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 모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남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ㅎ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그들의 포로생활은 70년 만에 끝이 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들에게 이러한 저주가 임했던 이유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탓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 운동을 벌인다. 이때 옛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은 세습직이었던 제사장과는 달리 스스로 경건한 삶을 모토로 삼는 바리새인이 되기로 헌신한 자들이었기에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 기간은 산헤드린 공회였다. 오늘날 국회의원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70인의 의원과 대세장인 의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공회를 구성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 에세네파는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광야로 나가서 세상과 겪리된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생활을 했기에 산헤드린은 바리새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막강했다. 헤롯당이나 사두개파가 비록 정치, 종교적으로 실제적 권력을 쥐고 있기는 했지만 늘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신임을 얻고 있고, 여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하며 신자들에게 행함을 촉구한다. 그 결과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다. 이 길이 유대인들이 갔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의 종착역은 멸망이었다. (롬10:2-3 / 너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니고데모는 이 길에 가장 앞에 서서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고 있던 자였다. 주님은 그에게 다른 말씀을 일체 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은 “너희는 사람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천국 가는 일은 오직 거듭남이란 방법으로만 가능한 거야” 라는 뜻이다.
‘거듭나다’ 라는 말에서 ‘거듭’이란 말의 헬라어 “아노덴”이란 말은 ‘위로부터” 혹은 “다시, 새롭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출생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12~13/ 영접하는 자, IX를 믿는 자는 혈통 육정 사람의 뜻 아님, ㅎ님께로서 난 자임)= 위로부터 난 자(거듭남)
그런데 유대교의 구원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말씀의 실천에 있었다. 즉 구원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19:16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한다. 주님께 구원 얻을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은 어떤 행함으로 되는 줄로 여긴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구원관이었다. 당연히 천국을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신앙행위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는 고역이 되고 말았다.
바울도 자신이 예전에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 모든 율법행위가 배설물이었다고 고백한다. 눅18장을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신앙세계를 엿볼 수 있다(나는 저 토색, 불의, 간음하는 세리나 창기 같지 아니하니 감사~/이레에 두 번씩 금식, 십일조, 구제를 한다고 자랑~)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고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 철저한 율법에 대한 실천. 이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러한 신앙관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신다”는 말과, “주일에 놀러가지 않고 주일성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앙관이 바리새인들의 신앙관이었다. 복 받고 천국 가는 방법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었다.
니고데모 역시 이러한 신앙관을 갖고 있었던 자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그에게 다른 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4절~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고데모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듭남이란 말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라는 말로 이해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에 속한 말이었다. 육에 속해 있던 그는 영에 속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우리들의 한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을 제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도 니고데모와 같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육의 생각이란 인간이 중심이 된 생각을 말한다. 구원이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육의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니고데모 역시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성경을 연구했지만 성경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이라는 육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듭남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오면 천편일률적으로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 받아 복의 근원이 되자! 이삭의 신앙을 본 받아100배의 복을 받자! 요셉을 본 받자, 모세를 본 받자. 여호수아를 본 받자. 다윗을 본 받자. 바울을 본 받자. 모세의 리더십을 말하고, 바울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이 같은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한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설교이기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자신들의 삶에 모범이 되는 교훈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가령 산상수훈을 보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여기고 따라서 행한 자들이 간디와, 슈바이쳐 박사, 테레사 수녀이다. (속옷을~, 오리를~, 왼빰을 치면~)- 그대로 행하려고 목숨을 걸었다. 간디는 무저항 운동으로 인도의 영웅이 되었고 슈바이쳐는 온 평생을 아프리카에 바쳤다. 테레사는 빈민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의 눈에 위대하게 비쳐지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물론 위인전에도 거뜬히 등극했다. 그러나 다 멸망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사단에게 속아 산 것이다.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쟁취하려한 이들에게는 십자가 복음이 필요 없었다.
이러한 자들은 성경 모두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설교자의 입술에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인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육에 속한 목사들은 모두 당당봉사인데 어찌 빛으로 안내할 수 있겠는가? 소경이 소경들을 인도하는 형국이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 것이다(사43장~누가 나의 종처럼 소경이며 귀머거리 겠느냐?-가장 총명하고 지혜로워야 하는데 아님) 오늘날 유튜브에 떠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거의 다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신앙이지 십자가 복음만을 말하는 설교는 없다.
이들 모두 ㅎ님의 은혜, 복음, 구원을 말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와 복음이 아니다. 결국 인간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결론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설교가 교훈적이고 신앙행위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결국 설교의 핵심은-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헌금, 전도, 겸손, 봉사, 낮아짐 등과 같은 행위로 마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가 육에 속한 자들에게는 너무도 그럴싸하고 마음에 꽂히는 것이다. 듣기에 좋고 먹음직하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힘과 정성을 부추기는 게 선악과다.
게다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자들의 간증이 더해지면 행함은 더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다. 그들이 경험했다는 천국과 지옥은 철저히 신앙행위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다. 신앙행위가 없는 자들은 천국의 변두리에 거주한다거나 혹은 개털모자를 쓴 구원이라고 하며 소위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행위가 많았던 자들,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종된 목사들을 잘 섬겼던 자들은 예수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칭찬을 듣고 온갖 보화로 장식된 집을 그 보상으로 받는 것을 보았다고 간증한다. (cf: ㅎ님의 은혜구원=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임, 성도는 모두 같은 구원을 받은 자임).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목사들이 너도나도 이러한 자들을 초대하여 이러한 천국과 지옥 간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간증을 들은 교인들은 두려움 가운데 더욱 신앙생활에 힘쓸 수밖에 없게 된다. 이같이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간증에 귀를 기울이는 목사는 성경보다 신비주의에 더 비중을 두는 설교를 하게 된다. 멀쩡한 교회가 무당 잡교로 변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24장을 보면 사단은 갖은 미혹으로 택하신 자라도 넘어지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음성을 들었다는 것들은 사단이 그를 잡고 종으로 써먹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은사가 판을 치고 있고(방언이니 통변이니 예언이니 신유은사니...), 거짓 환상을 보여주어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게 부추기고 있다. 결국 이런 천국은 사탄이 말하고 있는 천국이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 행위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여 IX의 복음에서 그들을 끊어 놓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천국은 인간의 선행과 신앙행위가 칭찬받고 보상 받는 곳이 아니다. 아가서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는 슬람미는 비천한 노예였다. 검은 피부의 노예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매력은 전혀 없는데 왕은 그 슬람미가 그렇게 좋다. 그래서 나의 어여쁜 나의 신부야, 나의 사랑아, 흠이 없는 자야, ~그 사랑의 노래가 계속되는 내용이 아가서다. 이처럼 ㅎ님은 자기 의가 전혀 없는 죄인된 세리와 창기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끝까지 하는 사랑, 지독한 사랑, 아가~)
솔로몬 왕과 슬람미는 비유이다. IX와 신부된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된 은혜 장아찌들이 사는 곳이다. 이들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의 예복이다. 주님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이 예복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입술에는 자기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만이 찬송되어질 뿐이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천국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차원이다. 남의 나라 먼 이야기일 뿐이다.
5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물은 세례이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다. 이미 앞서서 물세례를 배운 바 있지만 다시 간단히 설명한다면, 물세례는 죽음을 상징한다. ‘너는 죄인이야, 그렇기에 죽어야 된다’를 함축해서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장면이 물속에 잠기는 침례의식(세례의식)이다.
이렇게 옛사람이 죽어야 그 빈속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죽이는 과정이 없으면 성령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말씀으로 먼저 죄인됨을 깨닫게하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됨이라는 것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행위의 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행함과 별개로 본질적이고 태생적 죄인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은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무능함과 무가치함 때문에 저주 받아 멸망의 대상임을 알게 될 때, ㅎ님의 긍흉과 용서를 바라고 십자가 밑에 엎드리게 된다.
이런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마음이 온유한 자라고 한다.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ㅎ님의 자녀 삼아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인간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자각이 없이 그저 천국가는 욕심으로 ‘저도 죄인 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인으로 인정되는 게 아니다. 역시 이 마저도 성령을 부내 주셔야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니, 성도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죄인됨을 깨닫거나 고백할 수가 없다. 모두 ㅎ님의 소관일 뿐이다.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중생의 씻음(물세례를 말한다). 중생(한자어) -다시 태어남(즉 거듭남을 위한 씻음인 물세례와). 그 씻기운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의미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위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물은 곧 세례라, 물은 죄를 깨닫게 해서 죽이는 것이라는 말임. 선한 양심이란 자신은 ㅎ님의 말씀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아는 것을 말하지, 윤리도덕적인 반듯한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의 영적실체를 깨닫고 ㅎ님의 긍휼을 소망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IX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주는 물세례는 과연 죽이는 세례인가? (아님), 그냥 일정 시간이 지난 교인에게 ‘당신은 구원 받았다’는 징표로 종교의식을 베푼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또한 자신이 ㅎ님 말씀을 실천할 무능한 자임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말한다. 이제부터 더 열심내서 ㅎ님 말씀 철저히 지키고 교회에 충성 봉사하라구요..그러니 그런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나? 목사는 구원을 팔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종교 장사꾼이다.
6절,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11~12절 읽고,
이 말을 이해하려면 인간론 측면과 인식론 측면의 두 관점으로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인간론”(즉, 인간은 누구?)의 관점에서 보면, 육에 속한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선이 되지 않는 다는 뜻이다. 사64:6절을 보면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한다.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해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의로운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육으로 난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께 악일뿐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은 항상 악일뿐이다. 태생적 죄인인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그게 인간의 눈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ㅎ님의 관점에서는 다 악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즉, 깨닫는다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절대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육에 속한 인간은 영에 속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요셉의 처지를 육적으로 보면 분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ㅎ님은 이것을 두고 형통한 일이라고 하신다. 그 고난을 통해 ㅎ님이 하실 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인간은 영에 속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처럼 육에 속한 인간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구원도 해 낼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 자신이 사단의 영에 잡혀 있음을 모르기에 자기 가능성을 믿고 살아간다. 그래서 천국 가는 것이 인간 자신의 행동하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육의 생각 안에 갇혀 있다. 롬8장에서 이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ㅎ님과 원수가 된다고 고발하고 있다.
고전2: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라고 말한다. 인간은 영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13:11절을 보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말한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 비밀이 허락되어 있다. 이들이 인간적으로 우월하거나 무슨 특별한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ㅎ님의 택하심 때문이다. 죄의 본성은 택자나 불택자나 동일하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자는 입술을 닫게 된다. 한 게 없는데 거저로 구원을 받다니~한없는 은혜 앞에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고전2: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신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지금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그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Q가 낮은 것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 거듭남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듭남은 착한 사람으로의 변화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술 담배를 끊고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거나, 교회를 다니고, 가요가 아닌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거듭남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거듭남과 아무 상관이 없는 육에 속한 일이다.
거듭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악한 자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신의 악을 보게 된다. 이것이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이것이 거듭남의 비밀이다. 인간의 육의 인식론에서 영의 인식론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CF: 요19:39~니고데모가 빌라도에게 시체를..몰약과 침향100근,,장례 치름 /밤에 왔던 니고데모(표현), 지금은 빛이 되었다는 말임(명예, 평판, 죽음을 초월함)
<6~7>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영으로 거듭날 때, 위로부터 임하는 영을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즉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을 때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나의 악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리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상한 심령으로 ㅎ님의 용서를 구하게 된다(눅18:13)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열심히 신앙의 행위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일에 불과하다.
복음은 육에 속한 자들에게 언제나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복음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상 세상 사람들에게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경건치 않은 자를 조건 없이 의롭다하시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천국 간다는 복음의 말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음 전파자들을 율법 폐기론 자라는 낙인을 찍고 정죄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단 한가지만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저 받고 누리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을 이루어보고자 내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믿는 행위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한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아니 믿으려 해도 이게 안된다. ㅎ님을 잊으려 해도 불가능하다. 그냥 마음이 ㅎ님께 붙잡혀서 살게 된다. 가치와 의미를 ㅎ님께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이다. 이러한 복음을 이해하고 이 복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그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듭난 자이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인간은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지 못한다. 너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이기에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람은 행방이 묘연하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실체는 감지된다. 피부로, 나무의 흔들림으로~ 바람의 행방처럼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일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주제는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앞서서 말씀 드렸고 그 증거로 겔36장의 구절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자.
<겔36:26-27절>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맑은 물로 정결케 함(물세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성령 세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ㅎ님의 영이 임할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굳은 마음이란 율법적 정신사고를 말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각오를 굳세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령이 오면 이 생각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 것인지 산산이 깨어지고 인간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게 부드러운 마음이다. 마음이 겸비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여기서는 새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새 마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례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를 행한다는 것은 율법 조항들을 실천한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거듭난 자에게서 맺히는 열매이다. 이것을 알 때 오늘날 신앙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면 부가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해 준다. 내가 의를 행할 수 없는 죄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의 증거물은 그리스도의 행위만을 바라보는 자로의 변화이다. 이렇게 거듭난 자에게만 안식이 주어진다. 무언가를 행해서 ㅎ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행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거듭난 자이다.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주어진다. 자기 스스로 열매를 맺히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들이다.
내가 참으로 거듭난 자인지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내 행위에 달려 있지 않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구원이기에 안전하고 영원하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구원이기에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달려 있지 않는다. 거듭난 나의 구원은 나의 행위에 따라 변경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거듭남의 비밀에 눈이 열릴 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이 평강이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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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