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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4
시편 135편 5-6절 [5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하여 다루고, 제4장에서 창조에 대해 다룹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살피게 되는 제5장에서 섭리를 다루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창조와 함께 섭리로 실행이 됩니다. 작정하신 그대로 창조가 있고, 또한 작정하신 그대로 섭리가 있습니다.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거기 속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6일 동안 만드신 것이 창조라면, 섭리는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유지하고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창조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창조에 속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하십니다. 분명 죄는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 제6장에서 확인하게 될 것처럼 인간은 그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결국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까지 섭리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실 때 작정 안에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이 있는 것처럼, 장차 일어날 일을 작정하셨다면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섭리인 것입니다.
참고로 섭리라는 단어는 ‘앞에’ 혹은 ‘전에’를 의미하는 ‘pro’[프로]라는 접두어와 ‘보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어근 ‘videre’[비데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어적인 의미로만 보면 미리 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보면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섭리만이 아니라, 작정의 의미로서 섭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작정과 관련하여 예지를 말할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예지예정이 아니라 예정의 의미로서 예지를 말하는 것처럼 섭리 역시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섭리는 언어적으로 미리 보는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신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요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경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섭리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계속적 창조’ 혹은 ‘창조의 연속’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가 세계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작정은 하나님의 단일한 행위이기 때문에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섭리는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계속적 창조로 이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살펴볼 텐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섭리에 대한 1항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무오한 예지와(행15:18, 시94:8-11)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엡1:11, 시33:10,11)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해(사63:14, 엡3:10, 롬9:17, 창45:7, 시145:7)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잠15:3, 시104:24, 145:17)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마10:29-31)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혹은 움직임들]과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단4:34,35, 시135:6, 행17:25,26,28, 욥38-41장) 유지하고(히1:3)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리십니다.
18세기 계명주의 시대에 이신론(deism)이라는 게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면서도 섭리를 부인하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창조하신 후 창조하신 만물과 그것들의 행동과 일들에 대하여 전혀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창조하신 각각의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특성과 능력에 따라 이끌어 가시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섭리를 말합니다. 소위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우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운명이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섭리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 모든 것들을 유지하고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창조와 함께 섭리까지 실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시는데, 이 표현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에서, 또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고백에서도 나온 내용입니다. 우선 제2장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 1항 중간 부분에서는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며...”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 1항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불변하시며 가장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는 것에 있어서도 불변하며 가장 의롭다는 것이고, 동일하게 작정에 있어서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정하시면 불변토록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작정이 이러하다면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섭리에서는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무오한 예지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예지예정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오한 예지’를 말하고, 이어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섭리하신다고 해서 예지예정이라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예지예정을 거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오한 예지’라는 표현은 작정하신 것을 그대로 미리 아신다는 것이고, 그렇게 아시는 바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겁니다. 작정이 불변하다면 섭리 역시 불변하다는 것이고, 작정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낸다면 섭리의 모든 내용 역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이 작정에서 빛난다면 그분의 지혜와 거룩하심은 섭리의 역사 안에서도 반드시 그 빛을 드러내십니다.
계속해서 섭리의 목적은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해’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할 때 그렇게 역사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작정에 대한 고백에서도 그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3항 참고). 작정이 그러하다면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4장 1항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동일하게 섭리 역시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그의 지혜와 권능, 공의, 선하심, 자비는 다 하나님의 속성인데, 작정이든,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든, 섭리든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심으로 그분의 속성을 찬양하도록 한다는 것이 목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통해 예를 들자면, 먼저 이사야 63장 12절에서 14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사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분의 창조,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알되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도 압니다. 그런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로마서 9장 17절과 18절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사야 63장이 모세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도록 한다면, 모세의 대적자라 할 수 있는 바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는데, 이때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억지로, 하기 싫은 것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본래 그의 마음이 완악합니다. 그런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시는 것이 그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공의와 함께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함을 사용해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보이시면서 자신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온 땅에 알리시는데, 알린다고 해서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만, 그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도록 하는 것은 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한됩니다.
한 구절만 더 확인하자면,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섭리와 관련해서 항상 언급되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린 사건인데, 이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방금 언급한 바로 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이런 하나님을 늘 찬양하면서 높여드리는 것이 그분의 섭리 아래에서 살아가는 주의 백성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섭리의 대상으로 신앙고백서는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혹은 움직임들]과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모든 것을 망라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 그리고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섭리의 대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http://repress.kr/19698/) 이성적인 피조물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선택받은 자이건 그렇지 않은 자이건, 선한 행동이건 악한 행동이건,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건 필연적인 일이건, 사회적 변화이건 자연적 변화이건 상관없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세세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이끄십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예로 들자면, 다니엘 4장 34절과 35절입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이 내용은 느부갓네살이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심판을 받아 총명을 잃고 들짐승과 같이 지내는 일곱 때는 다 보내고 난 뒤 깨달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강대국으로 있던 이방 왕에게조차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나라만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cf.눅12:6)는 말씀도 하십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만이 아니라 작은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은 땅에 떨어지게도, 떨어지지 않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교훈하시는 말씀이 30절과 31절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오늘 본문인 시편 135편 5절과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그보다 더 깊은 곳에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신자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우리의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신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타락한 인생들이 하나님 자리에 신들을 올려 놓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하자면 하나님은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것이고, 그런 위대함은 그의 섭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신론(deism)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는 어떤 법칙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어떤 언어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전(自轉)과 같이 스스로 돈다고 이름을 붙인 것은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는 먼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자전이라고 할 때 지구 스스로가 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법칙처럼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법칙 아래서 이해하도록 하는 모든 것은 섭리라는 주제 안에서 이신론과 다름없는 개념들입니다. 천체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것, 이것을 사람들은 자전이라고 붙이고 있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신 섭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한 천체가 다른 천제를 중심으로 해서 도는 것, 이것을 공전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자전만 하는 게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도 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신 섭리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섭리가 한 시간, 일 분, 일 초라도 멈추는 일이 있다면 소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것도 멈추게 됩니다. 멈추게 되면 거기에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게 하시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신 섭리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섭리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는가? 신앙고백서는 유지하고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유지하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의 말씀처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면서 보존하십니다. 해와 달이 일반적인 표현으로 공중에 떠 있어서 그것에게 부여한 특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그 모든 것들을 붙드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창조도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고 섭리도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해 자체에, 달 자체에 어떤 특성과 능력이 있어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것들로 하여금 발휘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유지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발휘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나타내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고백하는 것이 있었는데,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창조하고자 하시면 창조하시는 것이고, 창조하신 것을 유지하시고 붙들고자 하시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피조물의 존재됨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있습니다. 피조물 스스로가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하게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 피조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능력에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피조물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그 존재됨을 유지할 수 있는 피조물도 없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존재는 창조에서도, 섭리에서도 늘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9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일단 우리말 번역은 ‘일월 성신’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 직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합니다. “당신만 여호와십니다. 당신께서 하늘, 곧 하늘의 하늘과 그 모든 군대와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당신께서 그 모두를 살게 하시니 하늘의 군대가 당신께 경배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별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일월 성신’은 해와 달과 별들로 지칭되는 우주나 천체를 의미합니다. 자칫 한국의 무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일 수 있어서 주의를 해야 하는데, 느헤미야 9장 6절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으로 인해 다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것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피조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 지역을 전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유지하시는 역사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숨을 쉬는 것, 그냥 됩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하지 않아도 소위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유지하심, 붙드심, 보존하심 없이는 결과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지도하시고 배치하십니다. 신학자들의 경우 섭리를 주로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보존과 통치 그리고 협력입니다. 협력이 지도하고 배치한다는 내용인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섭리 안에서의 협력이 신학적으로 신인협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항에서 제1원인 그리고 제2원인에 대한 고백을 하게 되는데, 지도하고 배치한다는 것은 제2원인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의 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도 일하고, 사람도 일하고, 심지어 사단도 일한다고 할 때 하나님만의 일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이 일한다는 의미도 있다는 측면에서 협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제1원인, 제2원인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다고 여기는데, 왜냐하면 원인이라는 말을 돌릴 때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1원인으로서 하나님을 둔다면 나머지는 결과일 뿐이지 원인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한 예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면 비록 거기에 사도 바울의 수고가 있다 할지라도 그 수고조차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제1원인은 하나님의 은혜, 제2원인은 인간의 수고, 그것에 대한 결과는 나의 나 됨이 있다는 식으로 푸는 것은 뭔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2항에서 다시금 말씀드리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신학자들이 섭리 안에서 협력이라는 부분을 말할 때 신인협력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도하시고 배치하신다는 의미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하나님의 섭리는 사도행전 17장 26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전쟁을 통해 거주할 경계가 정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의해 거주의 경계가 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도하시고 배치하십니다.
열왕기상 22장 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아합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인데, 여기서 ‘우연히’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합은 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지도와 배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입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실제로 이 말씀이 열왕기상 22장 38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씀하는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도하시고 배치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조차 지도하시고 배치시키실 때 우리의 의지를 묵살하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제1원인, 제2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지까지도 지도하시고 배치시키십니다. 억지로 하도록 하시는 게 아니라,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처럼(겔36:26) 우리 마음을 그렇게 만들어서 이끌어 가십니다. 이런 점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자이십니다. 그럼에도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에 대하여 상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이 상을 받아야 하지만, 결과 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 위에 은혜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에게 협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혹은 제2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다스리십니다. 모든 만물을 유지하시고 붙드시며 본존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모든 만물에 대하여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왕 되심이 크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모든 만물이기 때문에 다스리지 않는 영역과 다스리지 않는 대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와 가뭄이 있는 이유, 풍년과 흉년이 있는 이유, 건강과 질병이 있는 이유, 부와 가난이 있는 이유, 사람들은 과학적 원리들로 설명하고 또한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그런 부분들을 묵살해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스림과 관련해 몇몇 구절을 언급하자면, 욥기 37장 5절과 6절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앞에서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붙드신다고도 했지만, 말씀으로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33절에서는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섭리하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죄와 관련해서도 다스리시는데, 사도행전 4장 27절과 28절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 한 것인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관련되어 있고 작정하신 대로 실행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역사된 일이라는 겁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도행전에서 악인조차 사용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결단코 도덕적 악의 원인자로 있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악한 일을 하기 싫은데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악에 대해서는 주체로 계십니다. 이사야 45장에서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는 ‘악’이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이때 ‘악’은 도덕적인 악이 아니라 물리적인 악입니다. 하나님은 평안도 주시지만, 도덕적인 악에 대하여 물리적인 악으로 벌하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다스림으로 섭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창조의 목적과 동일하게 섭리의 목적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해 모든 일에 대하여 섭리하십니다. 섭리를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볼 수 있는가? 참된 신자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만이 아니라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보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