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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이름으로 구약성경 보는 법>의 줄거리:
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는 신약의 교회이면서 유대 종교의 경전인 구약을 정경으로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만을 정경이라 하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 아래서 구약 성경을 보아야 하는 당위성과 방법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히신 분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약성경 보는 법
(사도행전 7장 1절~8절)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이름으로 구약성경 보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약성경 보는 법’
본문은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앞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나 그 인물들의 이름을 들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읽고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본문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약성경 보는 방법을 신약의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붙잡고 있는 유대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합니다. 이 차이는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에서 보여주신 대로 구약성경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가 붙잡고 있는 구약성경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에 들어있는 신앙적 가치는 엄청납니다.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설교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나 빌립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앞서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로부터 소외된 사건을 통해 일곱 집사가 선출되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일곱 집사는 거의 헬라파 유대인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스데반 집사님은 교인이 아니었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6장 10절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스데반 집사님을 논쟁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헬라파 유대인들은 거짓 증거로 스데반 집사님을 모함하여 산헤드린공회에 고발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사건의 재판에서 이루어진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입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구약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한 부분만을 읽었지만 이어서 요셉 모세 다윗 등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는 스데반 집사님이 고발당한 이유가 바로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혐의였기 때문입니다. 6장 11절에서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라 하였고 또 13~14절에서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거룩한 곳은 성전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나사렛 예수가 헐고 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모세의 율법을 고치려 했다고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고발하기 위해 성전과 율법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고발로부터 스데반 집사님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무엇으로 논쟁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성전의 존재의미를 온전히 이루셨고 따라서 건물로서의 성전의 존재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또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가능하다는 것도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통해 이러한 증언이 이루어졌을 것임을 무리 없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 논쟁이 벌어진 대상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떠나서 외국으로 이주를 했다가 여생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돌아온 역이민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이 성전의 의미를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에 더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필요가 없어졌다는 증언은 엄청난 충격이고 자극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성전을 그리워해서 역이민을 왔는데 그 성전이 아무 존재의미도 없는 껍데기라고 말하니 삶의 이유를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분통이 터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거짓 증인까지 동원하여 스데반 집사님을 산헤드린공회에 고발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나타나게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나타난 변론은 교회역사상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의 주제는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길게 이어지는 설교의 내용 중에서 단 한 마디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내용만 보자면 단순히 구약성경 속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과연 이것을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루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신약의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신약성경과 함께 교회의 정경으로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즉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약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스데반 집사님에게서만 나타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이 인용되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구약성경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가리켰던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시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다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전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율법의 관계입니다. 성전과 모세의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소재입니다. 성전과 모세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와 무척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스데반 집사님은 명백하게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이후 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하게 되는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의 양대 기둥이 됩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순교현장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고자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바울은 돌이킨 후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 언급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성전,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율법이라는 두 주제로 신약의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붙잡아야 될 진리체계를 집대성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 엄청난 사건들의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을 보는 방법을 제시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2~3절에 나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는 없는 내용으로써 스데반 집사님이 구약성경을 보고 읽고 해석하여 삽입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코 이 구절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굳이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 구절이 쉽게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버릇이 될 만큼 익숙한 일입니다. 그러나 익숙해진 만큼 간과하기 쉽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구절은 이후에 바울신학에 대한 이해로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신학뿐만 아니라 신약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진리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주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알 때에 그리스도 교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 55절 이하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과 연결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언급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 사건에 이르러서 다시 영광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약을 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人子, the Son of Man)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누군가를 가리킬 때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붙여진 별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별칭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람을 관계하시는 구조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관계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별명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붙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성령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을 관계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성령님은 인간을 관계하신다는 의미가 바로 인자라는 단어에 들어있습니다.
이로부터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말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영화로운 광채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영화롭다는 것은 마치 무대에서 다른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오직 한 대상에게만 조명이 비추고 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주인공에게만 조명이 비추어질 때는 무대 위의 모든 배우는 암흑 속에 가려지게 됩니다. 암흑 속에 있는 것은 다른 배우들뿐만이 아닙니다. 관객들도 암흑 속에 있습니다. 무대에서 독백을 하고 있는 주인공에게만 빛이 비추어지는 바로 그 상황에서 관객들은 모든 신경을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마음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만이 주인공이 되신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만이 있음을 느끼는 대상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존재는 의식할 수는 있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에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 마음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영광의 하나님의 그에게 보여”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영광의 하나님을 본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요? 스데반 집사님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인자이신 예수님이 모든 천군천사와 삼라만상을 합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마음 사이에서도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있다면 하나님이 영광의 광채를 받으실 수도 없으며, 아브라함에게 있음의 느낌을 주는 유일한 존재이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스데반 집사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구약성경을 보는 방법의 열쇠가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미 인자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낄 수 있었고,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는 영광의 상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관계하실 때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인간을 택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을 택하실 때는 예수님과 똑같은 대상으로 여기시기 위하여 택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벗어나서 택함을 받는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똑같이 자녀로 사랑하시기 위하여 택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본래 사람을 만드신 것도 예수님께 주시는 마음을 예수님의 자리에서 똑같이 받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은총아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마음은 이미 예수님 안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모독했다는 거짓 주장에 대해 아브라함을 언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이 존재하기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선민의 역사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브라함이 나사렛 예수에게 마음을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단지 다윗이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 속에서 다윗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인자이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예수님을 빼놓고 하나님을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이나 모세의 율법도 결국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관계할 때에 예표로서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생활화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관계한다는 것을 미리 그림자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관계할 때에 율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되는 구약성경의 내용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를 앞두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땅을 떠나게 됩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 같은 이 두 사건은 실은 동일한 마음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시작과 끝이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어를 통해 합쳐지면서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역사하고 계셨는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성경을 이야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에도 생생하게 역동적으로 살아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서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뒤에 나타난 일은 바로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잠시 정착을 하는 동안 또 다시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하란 지방도 등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발붙일 만한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일까요? 고향을 떠나 이른 하란 지방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하시고 또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도달한 가나안 땅에서도 이제는 발붙일 만한 땅도 주지 않으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사서 첫 번째로 얻은 땅이란 자기가 묻힐 무덤 자리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 결과 이 땅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사탄의 사자가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영광의 하나님만이 마음을 충족하게 하는 보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질 수 있는 소유의 전부는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발붙일 만한 땅을 한 조각도 주지 않으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 세상 어느 것도 소유로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데반 집사님 또한 순교의 순간에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간구하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구약성경을 이렇게 본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떠나셨던 하나님의 우편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전의 존재의미는 완성되었고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만 모세의 율법의 취지 또한 성취될 수 있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증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새삼스럽거나 낯선 말이거나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민의 시작이었던 아브라함조차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관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의 순간에 아브라함이 보았던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인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유대교에서 신성시하는 구약성경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의 골자입니다.
본문 5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의 역사가 열두 지파로 이어지게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을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고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다가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리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노예생활에서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지나 가나안복지 입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룰 목적은 바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것과 똑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민 각자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을 유일한 보물로 삼아서 이 땅에서 발붙일 만한 땅 하나가 없을지라도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와 있으면서 하나님을 관계할 수 있도록 이러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진행해 나가시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이삭도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냈고, 땅에 있는 것들을 그렇게 좋아하던 야곱도 노년에는 결국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으며 사사들과 사무엘도 마찬가지였으며 다윗 또한 그러했습니다. 여러 선지자들과 의로운 왕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나타났으며 그 족보를 이어서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경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인자이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교인 개개인이 아브라함처럼 마음이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만을 있음의 주인공으로 모시고, 하나님만을 보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는 발붙일 만한 땅 한 조각이 없는 상태일지라도 어떠한 부족감도 느끼지 않는 선민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계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계보는 나와 여러분 각자에게도 임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성경 전체를 예수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우리의 자산으로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조상을 곧바로 읽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은 지금도 예수님 안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도 아브라함을 따라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존재의미의 완성이자 모세 율법의 취지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으로 바라볼 때 구약성경 전체가 담고 있는 진리의 내용들이 가정에서 시장에서 직장에서 술술 풀려나가는 것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이 놀라운 비밀을 풀어주신 스데반 집사님의 대단함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성령을 통해 스데반 집사님을 감동시키셔서 우리에게 자산이 되도록 주신 구약성경을 예수 이름으로 풀어나가는 법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이름으로 성경을 꼭꼭 씹어 먹어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내 삶에서 나를 오직 인자 되신 예수님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