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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은 이동표의 삶과 시문학
이원걸(문학박사)
난은 이동표의 삶과 시문학
이원걸(문학박사)
1. 머리말 2. 작은 퇴계 난은 3. 문집의 체제와 내용 4. 시문학의 내용과 특성 1) 농촌 서정 묘사 2) 산수 자연 친화 3) 산수 흥취 미학 4) 여성 정한 형상 5) 연민 정서 표출 6) 유자 은둔 미학 7) 표현 기법 특성 5. 맺음말 |
1. 머리말
퇴계학 전개 과정에서 난은의 역할은 분명히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던 것은 그가 16년 동안 입조하여 출사한 기간을 합산하면 200일이 안될 만큼 중앙 요직을 사임하고 향리에서 노모를 봉양하고 심성을 수양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종가의 화재로 인해 논저들이 소실되어 그가 남긴 글이 모두 수합되지 못한 점도 부분적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출처 대의가 명확했고 당대 올곧은 선비로 중망을 받았으며, 장원 급제 출신으로 학문적 조예가 깊었던 만큼 그에 따른 연구를 통해 새로이 조명할 필요가 있다.
남은 문집 분석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 경향 및 문학성을 파악하여 강직한 선비의 전형을 재정립해야 한다. 난은에 대한 학적인 관심은 제기되었지만, 문학과 사상적 측면이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 후속 연구 작업을 통해 난은의 행적과 사상 및 문학 위상의 정립이 요청된다. 이 글에서는 출처 대의가 분명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난은 이동표의 생애와 시문학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의 생애를 면밀하게 추적하면서 그가 ‘작은 퇴계’로 불린 이유를 해명한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강인한 정신과 지조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연 애호 정신이 문학으로 형상화되는 기저를 추적하고자 한다. 그는 진출보다는 향리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심성을 수양하는 것에 더 큰 목적을 두었기에 그의 삶과 철학 지향은 선조 퇴계의 형상을 답습했고 퇴계처럼 자연을 애호하는 사상 기반을 가졌다. 이런 점이 규명되면 난은이 출처의리가 분명했던 퇴계의 행적을 답습했던 면모가 드러날 것이다. 이와 함께 현전하는 문집을 분석하여 문집의 체계와 내용을 정리하여 난은 연구의 기반을 제공한다.
이를 토대로 하여 그의 시가 갖는 특성 농촌 정서 묘사, 산수 자연 친화, 산수 흥취 미학, 여성 정한 형상, 연민 정서 표출, 유자 은둔 미학과 시 표현 기법의 특성으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이로써 난은의 생애와 시문학의 특징이 가시화되며, 이후 연구될 사상 및 학문 연구의 기반이 될 것이다. 일련의 난은 연구가 유기적으로 통합되면 청렴 강직한 선비이며 뛰어난 시인이었던 난은의 면모가 한 층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로써 봉화의 선비 난은의 위상 제고를 거쳐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작은 퇴계 난은
이동표(李東標, 1644-1700)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군칙(君則), 호는 난은(懶隱)이다. 그는 예천군(醴泉郡) 금릉리(金陵里)에서 부친 처사 운익(雲翼)과 모친 순천 김씨(順天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난은을 임신한 뒤, 신인(神人)에게서 진주 한 항아리를 받는 태몽을 꾸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1649) 무렵에 이미 문리를 통했으며, 행동거지도 단정하였다. 11세(1654)에 조모상을 당하자, 부친을 따라 예법에 의거해 조상(助喪)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14세(1657)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항상 말하기를 “장부로 태어나서 마땅히 성현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유교 경전을 독파하였으며, 15세(1658)에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통달하였다. 이 해에 권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다. 17세(1660) 때에 동학들과 함께 향교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난은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21세에 부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흘러내린 피를 약에 타서 올렸다. 그러나 부친은 난은 형제에게 각고의 노력으로 입신출세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하직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하였다. 26세(1669)에는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내방을 받아 함께 심경을 강론하였는데, 하당은 그의 학문적 조예가 깊음을 보고는 감탄했다. 29세(1672)에 거주지를 금릉에서 고산으로 옮겨 재(齋)를 ‘향양(向陽)’이라 했고, 당(堂)을 ‘취한(翠寒)’이라 했으며 이를 합해 ‘고산초려(孤山草廬)’라고 했다. 30세(1673)에는 당시 안동과 예안의 명사(名士)였던 류세명(柳世鳴)․김명기(金命基)․이선(李瑄)․권성구(權聖矩)․권두인(權斗寅) 등 36명과 함께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학문과 도의를 연마하였다.
난은은 애당초 출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32세(1675)에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는 당시
아우 세표(世標)의 병사(病死)와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상심한 모부인을 위로해 드리기 위함이었다. 이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자, 시관(試官)이 “이번 과장에는 이모(李某)가 반드시 장원할 것이다.”라고 예견하자, 난은은 당일 새벽에 일부로 머리를 천 번이나 빗으며 과장(科場) 입장 시한을 넘기며 응거하지 않아 ‘이천소(李千梳)’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난은의 강직한 출처대의가 드러난다.
이어 34세(1677)에는 증광회시에서 장원급제하였지만 억울하게도 부정 응거자들로 인해 초시와 회시 전체가 파방(罷榜) 조치되었다. 그 해 3월에 아들 회겸(晦兼)이 태어났다. 이 무렵, 중부(仲父)가 호서(湖西) 지방 절도사를 역임하고 있어 그를 배알하고 백마강을 유람하였다. 35세(1678)에 향리에서 독서하며 후학을 지도하다가 37세(1680)에는 학가산(鶴駕山)에서 독서하였다. 40세(1683)에 용궁 선비 이유래(李濰來)가 찾아와 배우기를 청하자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그 해 6월에 둘째 제겸(濟兼)이 태어났다. 11월에 모부인의 권유에 따라 증광급제경과(增廣及第慶科)에 응거하여 장원급제했다.
41세(1684) 11월에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를 임명받았으며, 42세(1685) 때에는 친족들과 진보(眞寶) 기곡(岐谷)에 모여 시조(始祖)의 묘비를 세웠다. 이 당시 그가 4년 동안이나 승진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율척향소(牛栗斥享疏)」에 소수(疏首)로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44세(1687)에는 창악도찰방(昌樂道察訪)에 임명되어 직무에 충실하며 청렴한 관직 생활을 실천하였다. 체직되어 돌아 올 무렵에 역졸들이 그의 짐 꾸러미에 책지(冊紙) 수십속(數十束)을 몰래 넣어 주자 그는 엄중히 책망하고는 받지 않았다. 45세(1688)에 조산대부(朝山大夫)로 승진되었다. 46세(1689)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부수찬지제교(弘文館副修撰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어 특진을 정중히 사양했으나, 주상께서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주상이 한림(翰林) 적격자를 추천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난은이 영위(領位)로 추천되었고, 당시 재상 권대운(權大運)은 “주상께서 이동표는 문학과 조행(操行)이 당세에 짝할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옥당에 둘 일이지만 요직에 임용하기가 바쁘니 순서를 기다릴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난은은 특명으로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이틀 만에 다시 홍문관 부수찬에 발탁됐다. 난은이 부임하지 않고 사양하자 다시 사간원헌납에 임명되었다.
사간원헌납직을 수행하면서 난은은 강직한 신료로 소임을 다했다. 이른바 기사환국 당시 곤전(坤殿)의 폐위를 극간하고 당시 조정의 처분이 부당함을 직언간쟁(直言諫爭)한 간관(諫官)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이상신(李尙眞) 등은 죽거나 귀양갔다. 주상이 명령하기를, “그 일에 대해 다시 말하는 자가 있다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이런 정국에도 불구하고 난은은 이들의 신원(伸寃)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사헌납소(辭獻納疏)」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언관과 언로가 지닌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여론 정치의 창달을 주청하였다. 이에 주상은 진노하여 엄형(嚴刑)을 내리려고 하였지만 유신(儒臣)들의 신원에 힘입어 파출(罷黜)에 그쳤다. 그리고 당시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에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백부(伯父)인 민정중(閔鼎重)에게 형벌을 주라고 합계(合啓)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이어 병조정랑(兵曹正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주어졌지만 그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이처럼 평소 청렴강직하며 대의에 따라 출처를 분명히 했던 난은은 ‘남자는 모름지기 천 길의 절벽에 선 것과 같은 기상을 지녀야 한다’라고 하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귀향한 그는 군(郡)의 동서쪽 냇가에 영천암(靈泉庵)을 수축하고 도의를 강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부름은 이어져 47세(1590)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에 임명되었지만 외직을 희망하여 양양현감(襄陽縣監) 직을 받았다. 그해 5월에 모부인을 임지로 모셔 봉양하였다. 이는 오직 그의 효성에서 비롯되었다. 사직 상소문에 의하면 그는 연로한 모부인을 두고 홀로 상경하여 관료 노릇을 할 수 없기에 굳이 사양했으며, 부득이 주상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모부인을 모실 수 있는 외직을 자청했다. 그는 외직으로 근무하면서 모부인의 음식 수발을 몸소 실행하는 한편 강직한 관료로 불의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48세(1691) 때에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의 명을 받들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副修撰)․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고관(考官)이 되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은근히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그해 9월에 하늘에서 우레가 울리는 괴변이 있자, 「우재수성소(遇災修省疏)」를 올려 주상이 심지를 바로 세울 것을 주청하였다. 상소문의 요지는 첫째 언로(言路)를 개척(開拓)해야 하며, 둘째 공도(公道)를 넓혀야 하며, 셋째 기강(紀綱)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주상은 ‘일즉애군(一則愛君) 이즉애국(二則愛國)’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후 주상의 성총은 더욱 두터웠다. 주상께서 그를 두고 문학과 경학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으며, 이듬해 봄에 모부인을 모시고 상경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조좌랑(吏曹佐郞)․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49세(1692) 때 이조정랑으로 재직할 무렵, 이조의 실권자인 민암(閔黯)이 권문세가의 자제를 등용하라는 압력을 거부하였다. 공평성이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적으로 사람을 회유하려는 자와 함께 일을 볼 수 없다며 그 날로 사표를 내고 한양을 떠났다.
우비를 갖추고 배에 오르니 조정의 동료들이 전송 나와서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작은 퇴계(退溪)를 다시 보았다.”라고 했다. 낙향한 그에게 조정의 부름은 계속 이어져서 홍문관교리(弘文館副校理)․교리(校理)․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조좌랑(吏曹佐郞)․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등 무려 열세 번에 걸친 임명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결국 임금의 뜻이 너무 융숭하고 간절하므로 부득이 부름을 받고 다시 올라갔더니 정부에서나 민간에서나 다 같이 기뻐하였고, 거리의 아이들도 서로 싸울 때에 하는 말이 “네가 이사인(李舍人)과 같이 덕망이 있느냐.”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이런 일화를 통해 명분에 따라 거취를 명확하게 하였던 남은의 행적이 드러난다.
이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재직할 무렵에 장희대(張希戴) 집안의 사람들이 횡포를 자행하자, 난은은 법에 따라 징치하여 강직하다는 평을 들었다. 50세(1693)에는 사헌부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지만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다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집의(執義)로 장희대의 전횡을 응징하고 시정(時政)을 논했는데, 숙종이 가납했다. 이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승문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館)에 임명되어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에 어쩔 도리가 없어 외직을 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내정했으나, 그는 모친 봉양을 위해 작은 고을을 희망하여 12월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51세(1694) 2월에 모부인을 임지로 모셨으며 그해 7월에 사직을 하고 돌아왔다. 52세(1695)에는 호조참의(戶曹參議)․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53세(1696) 12월에 외직인 삼척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로 임명되었다. 삼척부사로 부임하면서 춘양(春陽)을 지나가다가 이곳이 만년 은거지로 삼겠다고 작정했다. 54세(1697) 때인 봄에 모부인을 임소로 모셨다.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고을의 각종 민폐를 개혁하며 세금을 감면토록 조치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어사 정호(鄭澔)는 그의 치적이 훌륭하다는 장계를 올렸다.
55세(1698) 3월에 부인 권씨가 삼척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춘향현(春陽縣) 어로동(漁老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가을에 임기를 마치고 거주지를 춘양현 어로동으로 옮겼다. 이에 하당 권두인과 상례(喪禮)를 논했다. 그 해 12월에 모부인이 별세하자 평소 효성이 지극했던 난은은 지성으로 애도했다. 홀로 남은 모친의 상을 당한 후 슬퍼함이 지나쳐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앞서 난은이 지나치게 집상(執喪)할 것을 염려해 모친이 병중에 유계(遺戒)를 써두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며 슬픔을 자제할 것으로 권했다. 하지만 난은은 그것을 읽어보며 더욱 통곡했다고 한다. 조석으로 빈소를 찾아 몸소 예를 다하고 장후(葬後)에도 날마다 상묘(上墓)하되, 비바람이 몰아쳐도 예를 그만 두지 않았다. 효자인 난은은 지나친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모부인 묘소 앞 여막에서 삼년상도 마치지 못한 채 57세가 되던 1700년(숙종26) 7월 17일 사시(巳時)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해 9월에 춘양현 어로동 축좌(丑坐) 언덕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후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는 너무나 청렴하게 살아 왔기에 치상할 의복도 없을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회겸(晦兼)으로 통덕랑(通德郞)이며 차남은 제겸(濟兼)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맏따님은 정석기(鄭碩耆)에게, 둘째 따님은 홍상진(洪相晋)에게 출가했다. 회겸은 사어(司禦) 권두인(權斗寅)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1남 4녀를 낳았으며, 제겸은 사인(士人) 김창현(金昌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다. 뒤에 사인(士人) 김집(金偮)의 따님에게 재취하여 4남을 낳았다.
사후, 1741년(영조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으로 추증되었으며, 자손들을 관직에 등용하라는 하교와 함께 ‘역주청의 수립탁연(力主淸議 樹立卓然)’이라는 증첩(贈帖)을 하사받았다. 이어 1784년(정조8)에 영남의 사람들이 난은의 덕을 진술해 시호내릴 것을 청하니 정조가 허락했고 태상관(太常官)들의 의견에 따라 ‘충간(忠簡 : 危身奉上曰忠 正直無邪曰簡)’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1845년(헌종11)에 예천 원산서원(元山書院)에 배향되었다.
3. 문집의 체제와 내용
[난은집]은 목판본 9권 5책이다. 난은의 유고는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과 강좌(江左) 권만(權萬)의 교감(校監)을 거쳐 수장(收藏)되었다. 그러나 1753년(영조29)에 종가의 화재로 문집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다. 이후, 현손(玄孫) 한응(漢膺)과 오대손(五代孫) 형상(衡相)이 흩어진 유문(遺文)을 재차 수합하여 원집(原集) 5책과 속집(續集) 1책으로 간행했다.
권1․2에 서(序)(許傳撰)와 시(詩) 260여 수와 만사(輓詞) 20편(辛慶山․張玧․朴世說․李尙逸․權游餘․尹商美․李在寬․柳元之․朴廷薜․李萬榮․金賓․孫遇馹․李元才․木齋洪先生․沈梓․無名․李丈․無名․金學詩․李徽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상소문 17편(辭修撰疏․辭獻納疏․辭修撰疏․乞郡疏․請還收將母上來之命仍乞歸覲疏․辭命賜老母衣資食物疏․辭司諫疏․辭同副承旨疏․乞郡疏․辭戶曹參議疏․承召至龍仁請歸省病親疏․三陟民瘼疏․鼎山書院請額疏․丹山書院請額疏․文巖書院請額疏․請移建醴泉鄕校聖廟疏․公山民瘼疏)과 차(箚)․계(啓) 각 1편, 전(箋) 8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서간문(書簡文) 46편(李惟樟․李孤山․李孤山․李孤山兄弟․內舅箕山公如萬3․鳳覽書院儒生․張仲溫․蔡彭胤․柳世鳴․金南一․權斗寅․權春卿6․關東伯兪道一․李湜․權斗經․李啓商․李萬敷․柳後光․柳晦夫․柳後章․金顯于․金世鎬․朴施采․朴文翁․李宜仲․張萬杰․張器彦․柳日祥5․洪相民․權景仲․權景仲․金元仲․洪相晉․李震標․李學標)이 실려 있으며, 권5에는 서(序) 1편(萬景寺勝會序), 기문류(記文類) 3편(覽德樓記․遊金剛山錄․遊白馬江錄) 및 주문(奏文) 8편이 실려 있다.
권6에는 상량문(上樑文) 2편과 축문(祝文) 14편 및 사제문(賜祭文) 3편(臨成君滉․統制使申瀏․嬪御宮)․제문(祭文) 12편(木齋洪先生․權游餘․金賓․金夏銃․代作․柳世哲․李朝漢․朴醫․仲父監司公․亡弟季則․大祥祭文․金泰世) 및 「행록(行錄)」 1편(忠孝堂金公行錄)이 실려 있다. 권7은 「연보(年譜)」이며, 권8에는 「행장(行狀)」․「휘장(諱狀)」․「신도비명(神道碑銘)」․「묘지명(墓誌銘)」․「묘표(墓表)」가 실려 있다. 권9는 후인들이 난은에 관한 언행이나 사적을 일정한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정리한 것으로, 「언행록(言行錄)」 성격의 자료를 모아 둔 것이다.
문집의 내용을 보면, 권1․2에 시 260여 수가 실렸다. 5언․6언․7언 및 고체시․악부시 등 다양한 시체가 보인다. 이렇듯 다양한 시에 난은의 문학적 역량이 반영되어 있다. 전반적 시풍이 밝고 명랑하여 청신쇄락(淸新灑落)한 정조(情調)를 이루고 있다. 후반부에 일부 작품이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경향은 아니다. 대개의 시가 농촌 자연 경관이나 산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대상물을 취하여 그것의 변화와 추이 형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 묘사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적미(靜寂美)와 동적미(動的美)가 혼합되기도 하며, 시각과 청각의 감각이 어우러져 표현되기도 한다. 악부체 형식을 빌려 여성의 정감을 시에 수용하여 남녀의 애정 양상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도 돋보인다. 이외에 농민의 고달픈 삶을 주시하여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동일시하여 형상한 시도 다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 사유를 반영한 시도 몇 편 보인다(「괴정강회운(槐亭講會韻)」․「한음(閑吟)」․「천의(天意)」).
난은의 문학 역량을 살필 수 있는 시 경향을 보면, 첫째, 농어촌 정서를 묘사한 것으로, 「차선집운희정권유여이발(次先集韻戱呈權遊餘以發)」․「희정권상사우중저사립환가(戱呈權上舍雨中著蓑笠還家)」․「동산도중경차선조운(洞山道中敬次先祖韻)」․「목동요(牧童謠)」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여성의 정서를 담은 「오야제(烏夜啼)」․「아면홍(我面紅)」․「채련사(采蓮詞)」․「모상사(暮相思)」 등은 악부체 형식을 띤다. 셋째, 연민 정서를 반영한 「관어타(觀魚打)」․「수전종교행(水田種蕎行)」․「초부사(樵夫詞)」 등이 있다. 넷째, 호방하고 낭만적 정서가 집약된 작품으로,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봉래산월가(蓬萊山月歌)」․머무를 집이 없어도 호기가 일어난다는 「아무가행(我無家行)」․진나라 도연명처럼 가을 국화를 꺾어 들고 낭만 정서를 표출한 「제애국당(題愛菊堂)」․춘양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 무릉도원의 주인임을 자부한 「이복춘양(移卜春陽)」 등이 있다.
권3의 상소문 17편을 성격상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직 상소(辭修撰疏․辭獻納疏․辭修撰疏․辭司諫疏․辭同副承旨疏․辭戶曹參議疏)․노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한 상소(乞郡疏․請還收將母上來之命仍乞歸覲疏․辭命賜老母衣資食物疏․乞郡疏․召至龍仁請歸省病親疏)․지방 유학 진작을 위한 상소(鼎山書院請額疏․丹山書院請額疏․文巖書院請額疏․請移建醴泉鄕校聖廟疏)․목민관으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기 위한 상소(三陟民瘼疏․公山民瘼疏) 등이다.
생애에서 보았듯이, 그는 관료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보다는 향리에서 은둔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심성 공부에 주력했다. 그러기에 조정에서 중직이 내려오면 이내 사직 상소를 올리곤 하였다. 그가 일련의 사직 상소를 올린 이유는 조정의 권력 쟁투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의도와 노모에 대한 효성에 기인한다.
「묘지명(墓碣銘)」에 의하면, 그가 출사(出仕) 기간 16년 동안 입조(入朝)한 기간을 총합산해도 채 200일이 넘지 않았기에 ‘작은 퇴계’라고 불려졌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헌납소(辭獻納疏)」인데, 난은은 곤전(坤殿)의 폐위를 직언간쟁(直言諫爭)한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이상진(李尙眞) 등의 신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언관과 언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여론 정치의 창달을 주청하였다. 그리고 「우재수성소(遇災修省疏)」에서 주상이 올바른 위민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로(言路)를 개척(開拓)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기강(紀綱)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에 정치 이념과 연민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가 외직을 자청한 상소문에는 노모 봉양을 위한 강한 효심이 담겨 있다. 「걸군소(乞郡疏)」에 의하면, 그는 삼남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자신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떠나면 노모를 봉양할 도리가 없어 외직을 자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방 유학의 진흥을 위해 일련의 상소인 「정산서원청액소(鼎山書院請額疏)」․「단산서원청액소(丹山書院請額疏)」․「문암서원청액소(文巖書院請額疏)」․「청이건예천향교성묘소(請移建醴泉鄕校聖廟疏)」에는 난은의 유학자적 면모가 각인되어 있다. 그의 유학 사유를 담은 논문 「태극변설(太極辨說)」․「심경주해(心經註解)」․「역도론(易道論)」․「예설변(禮說辨)」 등은 소실되어 제목만 남아 있다.
난은의 애민 정서는 외직에서 해당 고을 백성들의 고충 해소를 위해 조정에 해결책을 건의한 상소문에서 잘 드러난다. 「삼척민막소(三陟民瘼疏)」는 장편인데, 그가 부임할 당시 삼척 지방민들이 한해와 수해를 겪은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수령으로서 이러한 지경에 이른 백성들에게 구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무책임한 방치는 결국 유민을 발생시키게 되므로 적절한 세금 감면의 혜택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공산민막소(公山民瘼疏)」 역시 이러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중부(仲父)를 대신해 지은 것인데, 수해를 당한 백성들이 40여명이나 죽고 토지는 매몰된 터에 누적된 세금 독촉으로 인해 백성들이 살 도리를 잃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국가적 탕감 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옥당진시무차(玉堂陣時務箚)」는 올바른 정치 구현을 위해 언로 개방과 공정한 인사 정책, 군주의 올바른 처신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계(啓)․전문(箋文)에서는 대전(大殿)의 각종 경축 행사와 중궁 복위를 하례하였다.
권4는 총46편의 서간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간문이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압축된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상대방의 근황과 안부 등을 묻거나 화답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이한 내용을 담은 몇가지를 소개하면, 지방 서원의 육성과 유학 진작을 위한 고민의 표출[答鳳覽書院儒生], 예설에 대한 문답[答權春卿]․[上從兄震標別紙], 시문을 주고 받은 감회 서술[答朴文翁], 진퇴출처에 관한 의견 개진[答張萬杰], 문체는 문인의 기질과 형식에 구애 받는다는 의견 제시[別紙論濟南文] 등이다.
권5의 「만경사승회서(萬景寺勝會序)」는 70여 명의 족친(族親)들이 풍광이 좋은 10월에 만경사에 모여 3일 동안 담소하며 교유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남덕루기(覽德樓記)」는 봉정사에 남덕루를 세운 내력을 적은 것으로, 봉정사의 명칭 유래와 원근 산세를 조망하면서 쓴 것이다.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은 난은이 직접 금강산의 위용과 자태를 유람하고 이르는 곳곳의 전설과 사적 등을 꼼꼼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천일대(天逸臺)에서 바라 본 여러 봉우리들의 기묘한 형상을 일일이 묘사해 두었다.
「유백마강록(遊白馬江錄)」은 사실적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백마강 유람을 하면서 주변 농가의 저녁 무렵 피는 연기, 보리 물결, 나무하는 아이 등을 보고 시를 읊고, 낙화암과 삼천 궁녀, 소정방에 얽힌 전설, 그 지방의 민속 등을 기록해 두었다. 여러 편의 시도 간간이 섞여 있다. 민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자신의 내방을 고을 관아에 알리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데서 청렴한 모습이 파악된다. 8편의 의주문(擬奏文)에서 중국과의 대외교린에 있어서 중국 문물제도를 수용하고 유생을 파견하여 학문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강조하였다.
권6의 「천서신옥상량문(川西新屋上樑文)」은 난은이 향리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지나온 생애를 회고하며 남은 생애를 은거자적하겠다고 한 내용이다. 「재사상량문(齋舍上樑文)」은 선영을 돌볼 재사가 없어 고심하다가 재사를 신축하고 나서, 선조의 유택과 자손의 번영을 염원하고 있다. 이어지는 여러 편의 축문(祝文) 가운데 「제사직단신문(祭社稷壇神文)」이 돋보인다. 이는 그가 삼척부사로 재직할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기우 제문인데, 지독한 가뭄으로 인해 보리 이삭이 달린 채 말라 버리고 벼 모종도 말라 버린 참상을 신에게 직접 호소하듯 표현하여 애민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여러 편의 제문에서도 그의 인간미가 드러난다. 특히, 「제목재홍선생문(祭木齋洪先生文)」에는 스승에 대한 추모와 함께 고결한 스승의 자세를 사모하는 마음이 드러나 있다. 「제망제계칙문(祭亡弟季則文)」은 1800자의 장문으로, 병사(病死)했던 한 살 아래 아우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아우의 일대기를 짧은 4언의 형식에 맞추어 소년 시절 동학하던 시절을 회고하는 한편 아우의 불행한 죽음을 애절한 심정으로 표현했다.
권7의 「연보(年譜)」에 난은의 생평(生平)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말미 기록에 의하면, 「신도비(神道碑)」는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이 찬(撰)했는데, 원래 난은의 유고(遺稿)는 매우 많았다고 전한다. 이는 눌은(訥隱)과 강좌(江左)의 교감을 거쳐 수장되었는데,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후손 한응과 형상이 이를 다시 수합해 원집 5책․속집 1책으로 편집, 간행한 내력을 밝혔다.
이어 권8의 「행장(行狀)」(李世澤撰)․「휘장(諱狀)」(徐有隣撰)․「신도비명(神道碑銘)」(萬世瞻撰)․「묘지명(墓誌銘)」(洪重孝撰)․「묘표(墓表)」(鄭宗魯撰) 등에 난은의 강직하고 청렴한 관료 형상 및 효자 형상이 부각되어 있다. 권9는 후인들이 난은의 죽음을 애도하며 49명의 동학들과 문하생들이 쓴 제문(祭文)과 만사(輓詞)이다. 「제현연설(諸賢筵說)」과 「제현기문록(諸賢記聞錄)」은 그의 행적 및 일화에 대한 평을 정리한 것이다. 이제 시문학의 특징을 검토한다.
4. 시문학의 특징
260여 수의 시는 5언․6언․7언 및 고체시․악부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 시풍이 밝고 명랑하여 청신쇄락한 정조를 이루고 있다. 대개의 시가 농촌 자연 경관이나 산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대상이 변화하고 추이하는 형태를 관찰해 그려내었다.
1) 농촌 정서 묘사
농어촌 정서를 묘사한 시이다. 이러한 난은의 농촌 목가 정서는 퇴계가(退溪家) 문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시문학으로 표출된 바 있다. 이러한 전통을 난은도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한적한 시골 풍경을 보기로 한다.
학가산 가을 구름이 젖어 날지 않고 鶴駕秋雲濕不飛
천 길 넝쿨은 푸르게 엉켰네 薜蘿千丈綠參差
종일 산행해도 사람 뵈지 없고 山行盡日無人見
강 건너 어촌은 낮에도 사립문 닫혔네 隔水漁家晝掩扉
학가산을 배경으로 하였다. 가을 구름이 비에 젖어 날지 못한다는 천진한 시적 발상을 시에 담았다. 천 길 낭떠러지에 푸른 넝쿨이 뒤엉킨 장관을 묘사하고 하루 종일 산행을 하는 동안 인적조차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속된다. 산 위에서 조망하는 가운데 봉화에서 흘러 들어오는 내성천 건너편 마을을 마주한다. 대낮의 강 마을 정경이 평화롭다. 오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굳이 사립문을 열지 않아도 된다. 다음 시도 한가한 농가의 일상 풍경을 그리고 있다.
강물 빛 산 빛 산뜻하고 맑은데 水光山色媚新晴
십 리길 이어진 뽕나무 삼나무 十里桑麻一望平
이른 아침 어디선가 보리타작하고 何處崇朝人打麥
집집마다 태평성가 부르네 家家唱起太平聲
향토적 소재의 시어들이 담겨 있다. 맑은 개울물에 대비되는 상큼한 산의 농촌 정경이 포착되고 있다. 기구와 승구에서 시각적 심상이 강조된다. 온통 푸름이 가득한 강산과 농토의 정경을 그려낸다. 푸른 강물과 초록의 산과 농토에 펼쳐진 자연 경물은 초여름 농촌의 서경을 드러낸다. 뽕나무와 삼나무가 이어진 정경에서 우리 농촌 정서를 흠씬 느끼게 한다. 이어 들려오는 보리타작은 절로 흥을 일으킨다. 이는 결구의 태평성가를 위한 반전이다. 보리 고개를 넘긴 농가의 보리 타작은 농민들의 굶주림을 해소시키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무렵 농민들의 보리타작은 흥겨운 노동으로 치환된다. 흥겨운 마을에서 밀착 취재를 하기로 한다.
고운 백사장 십 리에 踏著瓊瑤十里沙
강촌을 돌던 강물 집 둘러 흐르고 繞村江水侵人家
양지 언덕엔 누렁 소 졸고 陽坡側畔眠黃犢
한 그루 찬 매화 활짝 피었네 一樹寒梅正放花
구슬처럼 고운 십 리 길 백사장에 빛깔 고운 물이 흐른다. 이 역시 내성천 강촌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은빛 모래와 녹색의 물 흐름은 장관을 연출한다. 마을을 안고 흐르던 물이 인가 근처로 흐르고 양지 언덕에는 송아지가 졸고 있다. 이른 봄 차가운 날씨 속에 핀 매화의 자태가 곱다. 색감과 시각적 미감이 돋보인다. 백사장․황소․매화에서 정다운 색감과 포근한 농촌 정서를 감지할 수 있다. 누렁소가 조는 평화로움과 매화가 핀 정경이 어우러져 있다. 강촌의 풍경은 정답고 화사하다. 완연한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 느낌을 받는다. 시인의 사실적 필치가 작품성을 제고시켰다. 시인의 자연 정감 필치에 의해 화가가 동양화를 그려내듯 이처럼 곱고 정겨운 시를 그려낸 것이다. 어촌 풍경 묘사도 일품이다.
바닷가 소리 없이 보슬비 내리고 海天飛雨細無聲
해당화 십리 길 눈부시게 피었구나 十里棠花照眼明
문 닫힌 어촌 주막엔 인적이 없고 漁店閉門人語寂
숲 건너 간간이 닭 울음만 들리네 隔林時聽午鷄鳴
시․청각 심상이 조화된 작품이다. 만개한 해당화의 자태와 낮에 울어대는 닭 울음이 그것이다. 보슬비 내리고 인적이 없는 어촌 주막에서 정적인 미감도 느낄 수 있다. 어촌의 풍경화가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한적한 작은 어촌에 보슬비가 조용히 내리고 먼 길까지 붉은 해당화가 곱게 피었다. 길가에 핀 해당화는 어촌을 밝게 채색해 주어 보는 이들의 눈을 현란케 한다.
이처럼 기구와 전구에서 보슬비의 백색 이미지와 해당화의 붉은 색감을 배합시켜 시의 완성도를 높여 문학 정감을 내밀화했다. 이어지는 전구와 결구에서는 집집마다 사립문이 닫힌 적막감과 인적이 드문 정경을 그려내다가 문득 건너편 숲에서 이따금 울어대는 닭 울음을 배치함으로써 정적을 깨우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했다. 이로써 전체 시상 전개상 유동성이 강화되었다. 「목동사(牧童詞)」에는 소에게 풀을 먹이는 농촌 아이의 일상이 담겨 있다.
간밤에 가랑비 내려 微雨夜來過
앞 들판엔 봄 풀 무성하네 前郊春草深
가는 데로 달구지 맡겼더니 驅車任所之
소가 내 마음 절로 안다네 牛自知人心
아침 이슬 옷에 젖었고 朝行露濕衣
저녁 바람 옷깃에 스며드네 暮歸風吹襟
어둑한 안개는 비올 것 같고 霧暗知天雨
흐르는 구름과 어둑한 날씨라네 雲湧知天陰
어미 소 풀 먹으로 가는데 大牛行牧草
송아지 마침 숲에 숨었네 小牛時隱林
고개 돌려 송아지 찾는데 回頭喚小牛
뿔을 땅에 박으며 울부짖네 叩角仍謳吟
아이들 박수치며 깔깔대는데 群童拍手笑
소리 끊겨 울음소리 되질 않네 調斷不成音
지난밤에 소리 없이 비가 내려 온 들녘을 적셨다. 간만에 내린 비를 맞은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농부는 소달구지를 몰고 들판을 가로질러간다. 굳이 이리저리 방향을 잡을 필요도 없이 누렁 소가 길을 안내하는 대로 갈 길을 맡긴다. 소와 농부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소를 닥달할 필요가 없다.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누렁 소는 밭일을 하기 위해 농토로 향한다. 아침 이슬에 옷이 젖고 마음은 한결 풍요롭다. 이슬비가 내렸기에 농사가 더욱 바빠진다. 밭갈이와 파종을 서둘러야 한다. 하루 종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도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저녁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하루 농사 일과로 지친 황소와 농부의 마음까지 이완시킨다. 저녁 무렵에는 어둑한 구름이 끼여 있고 어미 소는 풀을 먹으로 숲을 향한다. 종일 밭갈이로 지친 황소가 풀을 배불리 뜯어먹을 수 있게 배려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송아지가 숲으로 숨어 버린 것이다. 다급해진 어미는 아기 소를 찾느라 조급해진다. 아무리 불러도 고집 센 송아지는 나오질 않는다. 답답해진 어미 소는 뿔을 땅에 박고 울부짖는다. 이러한 어미 소의 심정을 아기 송아지가 인지하지 못하니 어미 소는 더욱 조급해진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목동들은 배를 움켜쥐고 깔깔댄다. 어미 소는 목이 메여고 더 이상 울음을 내지 못한다. 시인은 저녁 무렵 잠시 벌어진 농가의 정경을 재치 있게 그렸다. 여유를 부리는 송아지 때문에 혼 줄이 난 어미의 다급한 내심이 시에 그대로 묻어난다. 이렇듯 우리 농어촌을 소재로 하여 그곳의 정서를 담박하게 표현하였다. 이제 산수와 친화하며 교감을 이루어가는 의상을 담은 시를 보기로 한다.
2) 산수 자연 친화
난은은 농촌에서 펼쳐진 평화로운 시골 서정과 한적한 풍경을 즐겨 표현하였다. 그런 심미적 안목은 자연을 애호하며 친화하는 사상 기반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단서는 다음 시를 통해 파악된다.
늙은 몸 사물에 일체 탐내지 않나니 老夫於物百無貪
반평생 우활하고 성그나 한 지조를 지켰네 半世迃疎守一憨
근래 꽃과 대나무가 도리어 성벽이 되어 邇來花竹還成癖
많을수록 더욱 탐내니 우스워라 却笑多多意益饞
늙은 몸으로 사물에 대해 탐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반평생 흡족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지키는 삶은 실천했다고 자부한다. 최근에 꽃과 대나무를 즐겨 성벽(性癖)을 이뤘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탐하는 버릇 때문에 도리어 우습다고 한다. 그의 산수 자연 애호 정서는 이처럼 안분지족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화훼와 대나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만족한 삶을 누린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자연 경물이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방식의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 애호 정서가 난은 시문학의 주요한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제 그의 작품을 탐색하기로 한다.
고산의 풍미 한 번 새로운데 孤山風味一番新
낙동강 봄에 처음 옮겨 심은 것일세 移植初從洛水春
비록 객수로 안색이 초췌하나 縱有客中焦悴色
이슬 띤 가지 바람 쐰 잎이 정신 맑게 해 露枝風葉也精神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옮긴 뒤의 감회다. 고산의 풍광이 새롭고 낙동강에 봄바람이 불어오는 시절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시인은 나그네로 지내면서 안색이 초췌해지고 피로가 몰려왔지만 가지에 내린 이슬과 바람에 일렁이는 댓잎을 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대나무의 청신한 멋을 보노라니 정신이 맑아짐을 자연히 느낀 것이다. 자연에 의탁하여 인간 내면의 정화를 이룬 경지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진나라 도연명처럼 국화를 즐기는 정서 표현으로 이어진다.
가을 나그네가 주인집에 와서 秋風客到主人家
술 취해 주인 뜰의 국화를 따네 醉摘主人庭畔菊
술병의 술 떨어져 하산해 오니 壺傾酒歇下山歸
구름 깊은 동구를 남들은 모르네 洞口雲深人不識
애국당 짓고 시도 이뤄지니 愛菊堂成詩亦成
울타리에 국화 심어 당에 걸맞네 繞籬佳菊稱堂名
강성에 다시 온다 약속했으니 江城已結重來約
서풍 불 때 이별 정한 염려 마오 莫向西風別恨生
가을철 유람객이 주인집을 찾아온다. 가을 기운과 술에 취해 주인의 뜰에 핀 국화를 따면서 도연명 고사를 재현한다. 술병의 술이 떨어져 하산해 오면서 구름이 깊어 일반인은 유벽한 이곳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곳에 국화를 애국당을 수축하고 당호에 부합되는 시를 짓고 울타리에 국화를 심어 당호에 걸맞게 하였다. 강가의 성에 다시 온다고 약조를 했으니 이별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국화는 소나무․대나무와 함께 지조를 상징하는 식물로 인격화된다.
객토 외론 뿌리 매우 어렵지만 客土孤根特地艱
찬바람 물보라에 남기 어려운데 冷風飛沫亂相殘
수국에 아는 이 없다 말지니 莫言水國無知已
언덕 두른 솔과 대 있어 홀몸 아닐세 匝岸松篁也不單
낯선 땅으로 심겨 온 국화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객지에서 정착하기가 쉽지 않겠다고 하면서 찬바람과 물보라 속에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도 설명하였다. 하지만 애써 국화를 위로해 본다. 아는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언덕에 심겨진 소나무와 대나무를 벗 삼아 지내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이와 함께 소나무․대나무․국화는 절개․지조․고절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부각될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정신 지향에는 난은의 자연 애호 정서와 지조와 절의를 소중히 여기는 내면의 심리가 담겨있다. 이어지는 시에 이러한 자연을 벗으로 대하고 즐기는 시적 감성이 충만하게 표현된다.
서봉 너머 공중 가득 비가 내리고 滿空銀竹度西岑
바위 모퉁이 폭포는 만금의 가치 巖角飛泉直萬金
산집에서 종일 보아도 싫지 않고 竟日山堂看不厭
밤이면 고운 거문고 소릴 듣네 夜來携被聽瑤琴
서쪽 봉 너머로는 공중 가득하게 빗줄기가 보이고 바위 모퉁이의 폭포는 만금의 가치를 지닌 다. 하늘의 빗줄기와 지상의 폭포 줄기는 상호 대를 이루며 시상을 한 층 더 풍부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산 속 조용한 집에서 머무는 시인은 이러한 광경을 하루 종일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과 동화된 진락을 추구하는 선비의 전형을 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밤이 되면 거문고 연주 가락을 듣는 풍류한적의 미감을 만끽한다. 이러한 산수 자연 애호 정서는 고산의 경치를 집중해서 읊은 잡영에서 그 진가를 발한다.
잡영의 전통은 이미 퇴계 선조에게서 익히 확인되는 바이다. 이는 퇴계가 도산서당에 화단을 만들어 연․송․죽․매․국을 심은 뒤에 ‘절우사’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형’이라 불렀다. 퇴계는 식물인 매화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이처럼 존중하며 고결한 벗으로 대했다. 퇴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도 제자들에게 분재한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평생 매화를 곁에 두고 애정을 기울였다. 퇴계에게 매화는 너무나 소중한 벗이었다. 매화의 고결한 인격을 그리워하여 그러한 인격을 구비한 매화를 벗으로 맞았던 것이다. 퇴계는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연꽃 가운데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는 매화를 가장 먼저 ‘절우사’에 심었다.
이러한 퇴계의 자연관은 자연히 퇴계가에서 계승되었다고 본다. 난은 역시 이러한 퇴계의 산수 자연 인식을 터득하였을 것이며, 그런 선상에서 그의 농촌 정서 표현의 시와 자연 애호 정신이 반영된 시 창작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난은의 「고산잡영」은 퇴계의 「도산잡영」 창작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후계(後溪) 이이순(李頤淳, 1754-1832)에게 계승되었다. 후계는 퇴계의 「도산잡영」 창작 정신을 계승하여 「후계잡영」을 지었다. 즉, 후계는 주자(朱子)가 강학을 하던 무이(武夷)와 도산(陶山)은 지리상 일만 여리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도 이미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두 곳은 상호 근친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았다. 무이가 주자로 인해 그 절경이 천하에 회자되듯이, 도산은 퇴계가 있기 때문에 무이와 같은 승경을 지닌 곳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이잡영」 12수과 「도산잡영」의 18절은 성리 철학의 문학적인 형상화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성을 확보한다. 「도산구곡」 서문을 검토해 보면 후계의 면밀한 작가 의식이 드러난다.
세상에서 도산을 일컬어 무이라 한다. 지역상 서로 떨어진 것이 1만여 리이고 시대상 서로 떨어진 것이 오백여 년인데 두 산이 서로 이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참으로 양항숙이 ‘땅은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에 같아진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의 빼어난 경치 또한 서로 멀지 않으니 두 선생이 지은 「잡영」을 살펴보면 「무이잡영」의 12수와 「도산잡영」 18절이 또한 절절이 서로 부합된다.
후계는 무이와 도산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무이와 도산의 밀접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연관성을 공고히 한다. 주자가 강학을 하던 무이와 도산은 지리상 일만 여리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도 이미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두 곳은 상호 근친성을 확보하고 있다. 결국 후계는 양항숙의 말을 빌려 땅은 뛰어난 사람으로 인해 같아진다는 논리를 들어 반증해 보인 것이다. 무이가 주자로 인해 그 절경이 천하에 회자되듯이, 도산은 퇴계가 있기 때문에 무이와 같은 승경을 지닌 곳이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무이잡영」과 「도산잡영」은 성리학 사유의 문학적 형상이라는 동질성을 확보한다.
난은은 이러한 퇴계가의 산수 자연 애호 정신과 잡영 창작 정신을 어렵지 않게 계승했다. 이처럼 난은은 퇴계의 산수자연 미적 감각과 자연합일의 경지 추구의 전통을 이어 「고산잡영」을 창작했던 것이다. 첫 수를 보기로 한다.
바위 가 두어 칸 띠 집 지으니 巖畔茅廬只兩間
반 칸은 서가 절반은 난간일세 半間書架半間欄
남은 한 칸은 길손이 잠자는 방 贏得一間和客睡
처마 끝엔 정처 없는 백운 머무네 白雲無處宿簷端
바위 가에 두어 칸 모옥을 지어 멋진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모두 두 칸을 완성했는데 반 칸은 서재로 활용하고 나머지 반 칸은 난간을 만들어 산천 경관을 바라보며 사색과 풍광을 즐긴다고 하였다. 더욱 멋진 것은 시인 묵객을 맞아 시를 창수하며 즐기다 함께 잠드는 방을 두었다는 것이다. 처마 끝에는 흰 구름이 깃드는 심산유곡의 한적한 풍광을 즐기는 시인의 심경을 표백하였다. 이런 형상은 두 번째 시에서 증폭된다.
반 공중에 층계 길이 솔 끝에 나있고 半空層路出松端
조석으로 읊으며 갈관 쓰고 다니네 曉夕行吟岸鶡冠
때로 나막신의 굽이 돌부리 치니 屐齒時時觸山石
소리가 차갑게 저무는 구름까지 전해져 一聲高徹暮雲寒
소나무 가지 끝의 공중에 층계 길이 나있다. 좁고 험한 산속 돌길을 의미한다. 탈속과 고고한 경지 속에 노니는 은자 형상처럼 시상이 참신하다. 신선한 자연 속에 노닐며 고고한 품격을 누리는 시인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석으로 갈관을 쓰고 시를 읊조리는 풍류한적의 시인으로 자처하며 이따금 나막신을 끌고 언덕을 누비며 산보를 즐긴다. 한적한 곳이기에 시인의 나막신 끄는 소리가 돌부리를 울리고 이어 먼 하늘 차갑게 저무는 구름까지 울린다고 하였다. 전반부 시각적 이미지 부여와 후반부 청각 심상 배치를 통해 탈속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시인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상의 편폭을 조절하고 있다.
그믐달 낮게 떠 사람소리 들고파 缺月漸低人語隔
푸른 등칡 새로 자라 산길이 좁네 碧藤新長山蹊窄
지팡이 소리가 고개 마루 구름 흩고 一笻響破嶺頭雲
두 나막신 소나무 아래 돌을 친다네 雙屐踏穿松下石
그믐달이 점점 낮게 떠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만큼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어 승구에서도 푸른 등칡이 새로 자라 산길이 더욱 좁혀졌다고 하였다. 허공의 달을 지상으로 밀착시켰고 지상의 넝쿨을 등장시켜 길을 좁혀 가며 자연과 시인의 거리감을 허물었다. 자연과 교감과 일체감을 누린 시인의 낭만 정신은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끌어 하늘의 구름을 흩어버리고 소나무 아래 돌을 쳐서 적막을 깨우는 것으로 그 파동을 확대한다. 시인의 거동 탓에 산골짜기의 적막감이 일순간에 균형을 잃었다. 넷째 수에는 반촌을 찾은 시인의 풍류 정서가 넘친다.
돌을 밟고 숲을 지나 작은 길 나있고 斲石穿林細逕迴
반촌 뽕나무에 자줏빛 노을 감도네 半村桑柘紫霞堆
차조 술 석에 얼굴이 붉어지고 三盃秫酒紅潮面
달을 안고 돌아오며 푸른 이끼 밟네 帶月歸來踏綠苔
돌길을 따라 숲을 지나니 오솔길이 나있다. 오솔길을 따라 가다 보니 반촌이 나타난다. 뽕나무에는 자줏빛 저녁놀이 감돌고 있다. 석양 무렵 시인은 후덕한 시골 벗을 만나 차좁쌀로 빚은 술을 몇 사발 마셔 얼굴에는 홍조가 들었다. 붉어진 얼굴처럼 흥이 오르고 시인의 풍류 정신도 달아오른다. 달을 안고 양탄자 같이 푹신한 잔디를 밟고 돌아온다. 시인은 오가는 길목에 한없이 펼쳐진 자연의 풍광에 도취가 되었다. 다섯 째 구는 강렬한 산 빛에 매료된 시적 흥취를 보여준다.
강 가득한 비바람이 밤에 강했고 滿江風雨夜來多
새벽 창문 흐릿해 푸른 노을 끼었네 曉日葱曨壓翠霞
무한히 푸른 그늘 이슬과 함께 젖어 無限綠陰和露濕
산 빛을 바라보니 정말 아름답구나 望中山色十分佳
밤에 강 가득한 비바람이 몰아쳤고 새벽에는 푸른 노을이 강 마을을 둘렀다. 푸른 녹음이 이슬과 함께 젖어들었다. 푸른 자연 색상이 이슬과 엉켜 산 빛을 더욱 푸르고 환상적으로 보여지게 하였다. 이에 시인은 절로 감탄을 하면서 자연의 신비와 멋진 풍경에 찬사를 보낸다. 여섯 째 구에서는 생동하는 자연 경물과 생물의 동태를 담아내었다.
베개 머리 바람 부는 것 깨닫지 못하다 一枕淸風也不知
맑은 날 창가의 낮잠을 깨네 午窓晴日夢回時
산 빛은 비에 머리감아 물이 떨어지듯 山光沐雨濃疑滴
재잘대던 새가 바람 맞아 울음 막혔네 鳥語迎風澀似癡
맑은 날 창가에서 낮잠을 청했는데 베개 머리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잠을 깨고 보니 한낮에 맑은 바람이 불었던 것을 인지하게 된다. 산은 금방 머리를 감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물기를 띈 채 치렁치렁하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산천의 생동감 어린 표현을 통해 시인의 문학 재치와 섬세한 표현 미학을 감지할 수 있다. 말미에서는 급반전을 이룬다. 재잘대던 새가 바람을 맞고 울음을 멈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밀히 주시하여 담아내었다. 이처럼 난은은 자연 경물과 생물의 동태를 사실적 안목으로 그려내었다. 일곱 째 구는 촌가의 일상을 담고 있다.
대 집 쓸쓸하여 푸른 기미 숨겼고 竹屋蕭然隱翠微
푸른 넝쿨 엉킨 길을 찾는 이 없네 綠蘿無逕客來稀
푸른 언덕에 촌가가 있는데 村家知在靑林畔
밤중에 닭 울음이 돌 사립문에 이르네 半夜鷄聲到石扉
대나무 집이 쓸쓸하여 푸른 기미를 숨겼고 푸른 넝쿨이 우거진 곳을 찾는 이가 없다. 시인이 거쳐하는 공간은 인가와 동떨어진 유벽한 곳이다. 그래서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늘 한적하며 고적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자연과 대화하며 멋과 풍류를 만끽하며 살아간다. 이따금 닭 울음소리가 적막을 헤치고 들려온다. 푸른 언덕에 촌가가 있어 닭 우는 소리가 허공을 가로 질러 사립문까지 들려온다고 했다. 그의 산수 자연 애정은 광범하고 탈속 경지 희구로의 반전을 시도한다. 때문에 그의 미학적 수준과 자연 체감 의식이 고차원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정적인 산수 자연 애호 정서는 유동적 산수 흥취 미학으로 확대되어 표출된다.
3) 산수 흥취 미학
난은의 산수 흥취 미학 정신은 일반 선비들이 즐긴 완상의 경지를 넘는 광범하며 탈속과 고원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봄을 만끽하는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모든 경물이 시의 소재라고 한다.
취객이 강의 성읍 길에 있는데 醉客江城路
봄바람 불어 눈 가득 시일세 春風滿眼詩
큰 제방에 맑은 가락 울리고 大堤淸唱發
어촌 주막에 밝은 달 비치네 漁店月明時
취한 길손이 강을 두른 성읍을 지난다. 취한 길손에게 자연 풍광은 멋스럽고 정겹게 접수된다. 봄바람이 불어 시인의 문학 정서를 자극하여 작시 욕구를 충동질한다. 제방에는 맑은 가락의 풍악이 울리고 어촌 주막에는 밝은 달이 비치는 봄 정취가 무르녹은 정경을 그렸다. 이러한 시인의 풍류 서정은 뱃놀이를 즐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칠월 기망에 도산구곡 선유를 즐기는 풍경이다. 이러한 전통을 난은 역시 답습하고 있다.
푸른 하늘 구름 모두 걷혀 강물 연기 같고 碧天雲盡水如烟
풍류객은 가을 밤 뱃놀이 즐기네 遊人夜泛秋江船
가을 강에 달 오르고 양쪽 언덕 평평한데 秋江月出兩岸平
적벽강이 하늘 천인 못에 펼쳐졌네 赤壁揷天天人淵
푸른 하늘에 구름이 모두 걷히고 강물은 연기와 같다. 풍류객들이 모여 가을의 달이 뜬 밤에 뱃놀이를 즐긴다. 시인은 선조 퇴계가 학문을 연찬했던 유촉지에서 선유를 하며 선조에 대한 추 모심을 발휘하여 뱃놀이를 즐긴다. 이러한 행사는 단순히 풍류 흥을 돋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퇴계의 성리학 전통을 지속 이어가자는 후손의 다짐이다. 이로써 도산서원과 퇴계가 ‘우리 산’이라고 즐겨 부른 청량산을 한국 성리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가을 강에 달이 오르고 양쪽 언덕은 평평하다. 양쪽 언덕은 도산서원 일대의 ‘동취병’과 ‘서취병’을 말한다. 그 앞을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그 옛날 소동파가 적벽 강 유람을 즐긴 것을 소급한다. 그리고 하늘의 달과 강 위의 수면에 천인합일의 경지가 이룩된 상태인 성리 철학적 사유를 함의하였다. 이러한 선유는 성리 철학 의미와 산수 유람의 흥취도 동시에 담고 있다.
이러한 도산구곡 선유의 전통은 퇴계가에서 후손들이 즐겨 행했던 전통이다. 퇴계의 학문 전통은 손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 1541-1584)에게 전해지며, 이는 몽재의 현손인 청벽(靑壁) 이수연(李守淵, 1693-1748)에게 이어진다. 청벽은 퇴계집에 유의해 군자의 위기지학을 추구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가학 계승을 실천했다. 이따금 그는 퇴계가 노닐던 단사협으로 뱃놀이를 즐기며 청벽으로 호를 삼았다. 청벽은 선조 유촉지를 탐방하면서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했다.
난은이 이러한 전통을 실행했다는 점이 확인되므로, 난은 역시 퇴계의 가학 전승 및 가문 전통의 계승자로 주목된다. 이러한 퇴계가 주동의 도산구곡 설정과 도산구곡시 전승 확대는 퇴계 추존 사업의 일환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퇴계 후손들이 선조 유촉지를 탐방하여 퇴계를 계술하려는 의식을 실행한 사례와 같다. 황지에서 달음질을 시작한 낙동강은 태백산을 거칠게 달려 와 퇴계가 ‘우리 산’이라 애창했던 청량산 앞을 지난다. 이제 낙동강은 거친 숨결을 늦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 유유한 흐름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고운 석벽, 유리알처럼 맑은 자갈, 은빛 반짝이는 모
래와 함께 비취색 물빛으로 흐르면서 도산의 멋진 풍광을 자랑해 보인다.
낙동강이 태백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면 주물주가 빚어낸 천연적 굽이를 돌면서 못[沼]을 만들고, 내[川]와 협(峽)을 형성했다. 강을 이룬 낙천은 청량산을 지나 고산, 단사, 천사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연출해 내었다. 이 물줄기는 도산서당 주위에 이르러 동서로 병풍처럼 고운 산을 맞이한다[東翠屛․西翠屛]. 병풍 아래 곱게 흐르는 강물은 유리처럼 맑고[琉璃水色], 맑은 강과 어울린 산은 비단처럼 곱다[錦繡山光]. 그래서 퇴계는 영남의 낙동강이 물 가운데 임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청량산을 찾아가면서 7곡에 이르러 벗 이문량(1498-1581)에게 써 준 시에 그림 속을 거니는 것 같다는 감탄사를 발했다. 후계 이이순은 「도산구곡(陶山九曲)」(9)에서 9곡의 지리적 배경과 퇴계의 시를 인용한 경위를 밝히면서, 다음처럼 청량산의 승경을 극찬했다.
선생께서 「무이구곡도발」에서 ‘삼십육 동천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있다면 무이산이 당연히 첫째일 것이다’ 라고 했다. 육육봉은 열두 봉을 말함이다. 그러나 육육봉과 삼십육 동천의 차이가 없다면 이제 육육봉을 삼십육 동천 가운데서도 첫째로 삼을 수 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이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일지라도 청량산만한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도산구곡의 절정인 청량산의 모습은 장관이다. 열 두 봉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풍광과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청량산은 퇴계가 강학하던 공간이다. 후계의 청량산에 대한 인식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계는 중국 명산대천을 대표하는 36동천이 있다 해도 그 가운데 ‘무이산이 가장 으뜸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청량산과 무이산은 동격’이 된다. 그렇지만 청량산은 무이산 여러 경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산수 자연 공간이라고 했다. 때문에 ‘청량산의 승경은 무이산의 그 어떤 경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난 곳’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결론적으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무이산보다 고품격의 경관을 지녔으므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서도 최고의 품격을 지닌 으뜸 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계는 선조 퇴계처럼 아주 특별하게 청량산을 애호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이러한 후계의 도산 산수에 대한 애정은 풍월담 선유를 통해 실현된다. 퇴계는 1562년(명종 17) 7월 기망에 적벽 고사를 본받아 문인들과 월천곡의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계획했지만 큰 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후계는 이로부터 261년이 지난 1823년(순조 23)에 선조가 이루지 못한 뱃놀이를 추진했다. 풍월담의 지리적 배경과 위치와 선조 퇴계가 향토 제현들과 함께 소동파의 ‘적벽고사’에 근거한 선유를 기획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아쉬움을 일깨우며 풍월담의 명칭 내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여기서 주요한 대목은 퇴계가 이곳 월천의 풍광을 들어,우리 고장 강산 가운데 제일이라는 찬사를 했던 점이다. 이로써 월천은 퇴계를 통해 최고의 풍광을 지닌 강산의 미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후계는 이 풍월담을 명명한 분이 바로 퇴계 선조였다는 점에서 추존 의식이 절로 발동되었던 것이다. 후계는 선조를 비롯한 선현들이 선유를 이루지 못했던 점을 상기하면서 그 풍류 정신의 맥락을 계술하고자 내심 희망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금년[임술년] 7월 16일에 고을의 후생들이 망령되이 선배들의 고사를 추모하여 선유를 실행하고자 역동서원에서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그 일을 주관한 이는 역동서원 원장이고, 그 모임을 협조한 이는 도산서원 원장이다. 선유에 참여한 자는 노소와 관동을 포함해 모두 25인이었다. 오담에서 배를 띄워 물결을 따라 풍월담으로 내려갔다. ‘오담’은 ‘동취병’이 남쪽에서 뻗어 온 자락의 끝부분에 있고, ‘풍월담’은 ‘서취병’이 북쪽에서 뻗어 온 끝자락에 있으니 이른바 ‘동쪽에서 뻗어 서로 이어졌다는 것’과 ‘서쪽에서 뻗은 것이 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형세가 합쳐진 곳이다. 그런데 강물은 동취병에서 흘러나와 서취병에 부딪혀 남으로 흘러 오담이 된다. 또 동으로 흘러 풍월담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배는 물길을 따라 동에서 내려오고 달은 물을 거슬러 서행하여 두 못 사이에서 만나 함께 배회한다. 이는 한 구역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경관으로 천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된 오묘한 곳으로 적벽도 이 경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에 풍월담이 도산 강산의 첫째 승경이 되는 점과 달 오른 밤에 뱃놀이를 하기로는 가장 좋은 구역임을 알게 되었다.
후계는 임술년(1802년) 칠월 기망에 25명 인사들과 함께 역동서원에 모였다. 이어 오담에서 배를 띄우는 선유를 감행하였다. 이 행사를 전반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한 분은 역동서원 원장이고, 협찬을 아끼지 않았던 분은 도산서원 원장이다. 이어 오담과 풍월담의 지리 환경적 특성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은 아주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월담은 중국 적벽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도산 산수 승경에 대한 찬미를 연속적으로 발하였다. 이 대목에서도 후계의 도산 산수 승경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후계의 도산 산수 애정과 미학적 감수성이 「도산구곡」 창작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정신 작용이 도산구곡 창작의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도산구곡에 이런 의식이 선명히 반영되어 있다. 후계는 실제로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아홉 굽이를 자신이 직접 설정하고, 구곡시를 지었던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퇴계는 실제로 구곡 경영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난삼아 칠대 삼곡시를 짓다’라는 시에서 ‘월란암’ 주변의 산수 가운데 ‘초은대’․‘월란대’․‘고반대’․‘응사대’․‘낭영대’․‘석담곡’․‘천사곡’․‘단사곡’을 ‘칠대’와 ‘삼곡’으로 읊었는데 물이 산을 감고 돌아 흐르는 곳은 세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퇴계는 더 이상 무모하게 구곡의 범위를 확대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후계는 현장 답사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도산구곡의 정확한 위치를 서술한 서문을 작성하고 구곡시를 남겼다.
그리고 무이구곡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도산의 낙천도 선유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이와 도산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주자가 은거구도했던 무이처럼 도산도 그러한 성리학 성지 공간으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후계는 서두에서 도산과 무이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두 곳은 성리학 유풍이 깃들고 철리적(哲理的) 사유가 구현되며 천인합일이 이루어진 신성한 지역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어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도산구곡(陶山九曲)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이에 한두 동지들과 물을 거슬러 오르며 굽이를 따라 노닐면서 강산의 승경을 토론하였다. 저 ‘영지산’과 ‘부용봉’이 구름 끝에 솟은 것은 ‘만정봉’과 ‘옥녀봉’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학소암’과 ‘갈선대’가 가파른 절벽에 임한 것은 ‘금계동’과 ‘선장봉’과 매우 닮았으며, ‘동취병’과 ‘서취병’은 참으로 ‘대은병’과 같다. ‘청벽’과 ‘단사’는 그대로 ‘벽소’와 ‘도원’이다. 처음에는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들의 그윽하고 깊은 곳을 찾았는데, 끝에는 시내의 근원에서 별천지의 기이한 절경에 임하여 가득히 얻어 호연히 돌아오니 거리가 멀고 세월이 아득하다는 한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산천과 운물이 서로 닮았을 뿐만 아니라 천지 사이에 우리 도가 한 가지 기맥이 북에서 남으로 서로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구비에 따라 차운하여 구비마다 지난 일을 기록해두었으니 후일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다르지 않으며 지리상 멀지도 않은 곳임을 알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 또 도산지를 편찬하여 구곡의 승경을 실어 무이지와 짝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청량산의 복이 아닌가? 나는 이로 인해 깊은 기대를 갖고 있다.
후계는 동지들과 함께 ‘무이’와 ‘도산’의 산천 지리적 유사성에 착안하여 구곡의 위치 설정에 대해 토론을 했다. 도산의 ‘영지산’과 무이의 ‘망정봉’을 견주었다. 이어 도산의 ‘부용봉’과 무이의 ‘옥녀봉’을 비교했다. 이어 도산의 ‘학소암’을 무이의 ‘금계봉’에, 도산의 ‘갈선대’를 무이의 ‘선장봉’에 비교했다. 도산의 ‘동취병’과 ‘서취병’을 무이의 ‘대은병’에 비교하였다. 이는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도산서원이 ‘동취병’과 ‘서취병’에 위치한 것처럼 무이정사가 ‘대은병’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다. 퇴계가 학문을 강학하던 도산서원이 도산구곡의 제5곡에 있고, 주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대은병’이 무이구곡의 제5곡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 도산의 ‘청벽’을 무이의 ‘벽소’에, 도산의 ‘단사’를 무이의 ‘도원’에 비교하면서 도산의 지리적 특성이 무이의 지리적 특성과 상호 부합됨을 강조했다.
이어 도산의 ‘청량산’과 무이의 ‘무이산’은 짝을 이루고, 도산지와 무이지도 절묘한 대를 이룬다. 이로써 ‘무이’와 ‘도산’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퇴계의 학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유학의 정수가 온축된 성지로서 명실상부한 공간임이 확증된다고 했다. 이제 후계는 도산과 무이의 상호 부합성을 인지시키고 나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구곡 설정에 자신이 직접 나선다. ‘청량산’에서 ‘운암’까지 명승지를 충분히 관찰하고 무이구곡에 견주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음처럼 구곡을 설정한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가운데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하여 상하를 관할하며 하나의 동천을 형성한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에 따라 나누면, ‘운암’이 제1곡, ‘비암’이 제2곡, ‘월천’이 제3곡, ‘분천’이 제4곡, ‘탁영담’이 제5곡에 있는데 여기에 도산서당이 있다. 제6곡은 ‘천사’, 제7곡은 ‘단사’, 제8곡은 ‘고산’, 제9곡은 ‘청량’이다.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과 음상이 미친 곳이다.
후계는 자신이 직접 도산구곡의 위치를 추적하고 현장 답사를 거쳐 선조 퇴계의 유촉을 실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후계는 ‘시험 삼아 무이구곡의 설정 선례를 따라 도산구곡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했다. 무이구곡은 주자의 학문이 온축된 성지인 만큼 도산의 퇴계 유촉지에 한국 유학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후계의 구곡 설정은 일부 다르다. 후계는 2곡을 ‘비암’,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다. 오가산지에 의하면, 2곡을 ‘월천’, 3곡을 ‘오담’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이유는 후계의 의식 근저에는 도산구곡은 무이구곡의 지형과 유사성을 확보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후계는 주자의 학문 전통이 퇴계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듯이, 무이구곡의 지형과 도산구곡은 외형상 일체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래서 무이구곡의 2곡에 있는 여성 이미지의 ‘옥녀봉’을 닮은 바위가 도산구곡의 제2곡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굳이 ‘비암’을 2곡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도산구곡 제3곡에도 무이구곡의 제3곡에 있는 ‘가학선’을 닮은 벼랑이나 바위가 존재해야 한다고 신념했기 때문에, ‘부용봉’이 있는 ‘월천’을 제3곡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후계는 무이구곡 제2곡 ‘옥녀봉’을 의식하면서 도산구곡 제2곡에서 ‘비암’을 두른 푸른 숲의 모습을 여인이 머리를 길게 닿은 것에 비유하여 정감이 있게 표현했다. 후계의 문학 정신이 반영된 일면이다.
이런 정신은 실제 구곡시 창작 과정상 현장 답사 후 구곡의 실제 위치와 관련 인물 행적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구곡시를 지을 때 반드시 퇴계 시문 가운데 한 두 구를 인용하여 창작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는 무이와 도산을 비교하면서 상관관계를 시종일관 강조한 점을 유추해 볼 때, 후계 의식 저변에 도산구곡과 무이구곡의 지형성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이 2곡을 ‘비암’으로,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후계의 구곡 설정과 구곡시 창작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학문 계술 의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퇴계가 후손들에 의해 당시 집중 산생되어 유포된 도산구곡시는 선조 퇴계 추존 의식과 영남 학맥의 공고화 및 퇴계 학문 계술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퇴계가에서 전통적으로 시행해 온 도산구곡 선유는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퇴계 학문 전통의 계승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논의를 본고의 논지로 집중하고자 한다. 다음은 춘양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 무릉도원의 주인임을 자부한 작품인데 동일한 정서가 담겨 있다.
이 세상에 도화가 물에 떠가는 곳 있나니 桃花流水在人間
태백산 천 봉우리 해와 달 사이일세 太白千峯日月閒
서생의 생계가 궁하다 하지 말지니 莫道書生生計拙
지난번부터 푸른 산을 샀기 때문이오 向來猶得買靑山
복숭아꽃이 물에 둥둥 떠가며 자유롭고 평화가 넘치는 무릉도원이 태백산 아래 춘양에 있다며 흥겨운 마음을 표현한다. 거주지를 옮기면서 봉화 춘양이 중국 진나라 때 화를 피해 은둔한 사람들이 찾은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계가 다소 궁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왜냐하면 이에 앞서 푸른 산을 샀기 때문이다. 하늘이 제공한 수려한 춘양의 산수를 선점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데서 난은의 산수 자연 애호 정신이 새겨져 있다. 산수 자연은 천하 공물이기 때문에 그곳의 정취를 알고 선점하는 이만이 자연의 미감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인식 논리다. 이처럼 자연에서 멋을 즐기는 시인은 진나라 도연명처럼 가을 국화를 꺾어 들고 낭만 정서를 표출한다. 이 때문에 머무를 집이 없어도 호기가 일어난다.
내게 집이 없다오 我無家
나에게 집이 없다네 我無家
천지 넓고 넓어도 내겐 집이 없다네 天地蕩蕩我無家
집 없어도 집 있는 자 부럽지 않고 無家不必羨有家
집 있더라도 높고 화려한 건 원하지 않네 有家不願高且華
지난 십년 세월 우환으로 지내 向來憂患十年間
일 년에 아홉 번 이사했네 一年九徙堪咨嗟
옛집이 모두 무너져도 새 집 마련 못했고 舊屋頹盡新未就
동서로 떠돌며 머물 집이 없었네 飄泊東西無定窠
지난 해 식솔 이끌고 북으로 강을 건너 去歲携家北渡江
몇 칸 새집을 산에 의지해 지었네 數椽新搆依山阿
쓸쓸한 담장은 바람도 가릴 수 없어 蕭然環堵不蔽風
들어가면 매번 아내 자식들 원망했네 入室每遭妻孥訶
멍하게 쓰러져 귀에 담지 않고 㗳然頹臥耳不聞
만 축의 시로 자부하였네 萬軸牙韱聊自誇
어렵게 살아 자리로 문을 만들어 蓬蒿塞逕席作門
객이 찾아 왔지만 잘못 온 것 같다 하여 客來訪我多誤過
아이 불러 문을 나가 손을 모셔오게 했네 呼童出門喚客回
태연히 맞아 웃고 맑은 강가에 나가 岸巾一笑臨晴沙
좌정하고 책을 펴서 고금을 이야기하되 坐定開卷話千古
격노하지 않고 은거한 농부처럼 대화했네 掉臂不許談桑麻
지난밤 먼 언덕에서 가을바람 불었으며 昨夜金風動遠皐
오강에 가을 돌아와 흰 물결 일어났네 浯水秋回生素波
차조 술 석 잔으로 호기가 발하여 秫酒三盃豪興發
일어나 보니 숲의 달이 차갑고 눈부시네 起看林月寒婆娑
장부가 뜻을 얻음이 이와 같으면 되지 丈夫得意有如此
층층 누대 겹겹 누각 내게 무슨 소용인가 層樓複閣如吾何
그대는 보질 못하였소 君不見
낙양 성 구름처럼 이어진 권세가들이 洛陽城裏連雲起甲第
아침에 옥당 떠나 저녁엔 먼 곳 떠도는 것을 朝辭玉堂暮天涯
천지가 넓지만 집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한탄이 아니다. 집이 없어도 집을 가진 자들이 부럽지 않고 굳이 집을 소유한다 해도 화려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지난 십 년 세월 동안 여러 차례 이주한 경험도 늘어놓았다. 산에 의지해 몇 칸 집을 꾸렸지만 비바람도 가릴 수 없는 공간이므로 아내와 자식들의 원망도 많았다. 미안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시인은 시문을 즐기며 안빈낙도의 삶을 이어간다. 때로 내방객이 있어도 오두막이어서 집을 잘못 찾아온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럴 때면 아이를 불러 벗을 오게 하여 고금의 역사와 성리 철학을 담론하며 즐긴다.
끝부분에 시인의 은거 미학이 드러난다. 가을바람이 불고 강은 흰 물결을 낸다. 차조 술 석 잔에 호기가 발하여 시흥도 일어난다. 찬 가을 달빛이 넘실대며 시인의 가을 흥취를 일깨운다. 장부로서 이 정도 득의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한다. 한양 겹겹 누대에서 호사를 부리는 권문세가들이 정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하루아침에 실추당하는 사례를 보건대 자신의 이러한 삶이 현명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런 낭만 정서는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지은 작품에서 호방하게 표출된다.
그대는 보질 못했소 君不見
봉래산 남쪽 일만이천봉과 蓬萊之山一萬二千峯
동해 부상의 섬을 乃在東海之上扶桑之洲
바다 빛깔 푸르러 삼만 리나 되고 海色蒼蒼三萬里
흰 구름 천 년 동안 오래 아득했다오 白雲千載長悠悠
그 가운데 봉래산이 있어 蓬萊山在其間
일만 이천 봉 찬 구슬처럼 높이 솟았소 萬二千峯矗寒玉
밝은 태양이 구름과 눈을 비쳐주니 白日照之如雲雪
구름 흩어지고 눈이 무너져 우주에 찼소 雲崩雪堆塞宇宙
위로 푸른 하늘과 빛을 서로 다투고 上與靑天色相奪
우리에게 와서 정히 중추절 만났소 我來正値中秋月
곧바로 비로봉에 올라 철죽을 불고 直上毗盧吹鐵笛
북두까지 잡고 올라가 팔황을 바라보니 攀援北斗望八荒
푸른 공중 만 리에 부운이 사라졌네 碧空萬里浮雲滅
부운이 사라지고 浮雲滅
달이 떠서 큰 바다가 봉래를 비추어 月出滄溟照蓬萊
그림자가 푸른 바다 멀리 떨어졌다오 影落滄溟闊
건곤 어디들 달 밝지 않으랴만 乾坤何處無月明
달이 봉래에 이르러 기이하고 빼어나네 月到蓬萊更奇絶
봉래산 빛은 세상에 없는 것 蓬萊山月天下無
이 세상 몇 사람이 봉래산 달 빛 보았으리 天下幾人能見蓬萊山上月
봉래산 신선이 내게 풍진 속에 고생했다 하고 蓬萊仙人笑我蹩躄風塵中
달을 향해 바람처럼 빨리 날아가는데 向月飛去如旋風
손 흔들며 불러도 돌아보질 않네 舉手相邀不囘顧
내 따라 가고파도 어찌 만나랴 我縱追之安得逢
돌아 와 취해 산머리 돌에 누워 잠들며 歸來醉臥山頭石
일만 이천 봉에 오른 달만 바라본다오 但見萬二千峯秋月白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위용을 소개한다. 푸른 바다는 삼만 리나 펼쳐있고 천 리 길 흰 구름이 아득하다. 그 가운데 금강산이 차가운 구슬처럼 우뚝 솟아있다고 하였다. 이어 정상에 올라 주위 경관을 묘사한다. 밝은 태양이 구름과 눈을 비추어 반사된다. 구름이 흩어지고 하얀 눈이 우주에 가득 찬 장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금강산은 위로는 푸른 하늘과 빛을 다투고 때는 중추절이라고 한다. 시인의 호방한 기운이 시에 반영된다. 북두칠성을 잡고 올라가 팔황을 조망하는 상상의 시야를 펼친다. 푸른 공중에 부운이 사라지고 휘영청 밝은 달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은 시상 전개를 우주 밖으로 펼쳐 광활한 우주 공간에 뜬 달을 주목한다.
금강산이 동해에 그림자로 비친다. 금강산에 비치는 달이 이 세상 어디보다 아름답고 빼어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금강산의 달빛을 쉽게 볼 수 없다면서 신비감에 젖어든다. 이 무렵, 반전을 시도한다. 봉래산 신선을 등장시켜 시적 긴장을 높인다. 그렇다고 시인이 선계를 동경한 것은 아니다. 작품의 미학적 측면을 제고하고 황홀한 금강산 중추절 달빛을 강조하기 위해 극적 장치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은의 문학적 역량이 우수하고 정감과 표현미가 돋보인다. 이어 여성 정한을 형상한 시를 보기로 하자.
4) 여성 정한 형상
여성의 정서를 형상한 시를 보기로 한다. 이처럼 난은의 시문학 층위는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소재를 택해 감정을 담아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집약한 작품이다.
깊은 산골 아무도 오지 않는데 谷深人不到
늦봄에 꽃이 활짝 피었네 春深花晩發
출렁대는 물 사이에 盈盈一水間
달을 보며 임을 그리워해요 共此相思月
그리워도 임 오질 않고 思君君不來
꽃 속에 앉으니 낙심만 되요 芳菲坐衰歇
깊은 산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 꽃이 피었다. 외로이 핀 꽃은 여성을 상징한다. 늦은 봄에 뒤늦게 홀로 핀 꽃은 임과의 교류가 단절된 여성 이미지를 의미한다. 화창한 봄의 향연에 동참하지 못한 외로운 꽃은 고독한 여성의 형상이며, 서러움과 고독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전구에 화자가 등장한다. 출렁대는 연못 물 사이에 비친 달을 보며 임을 그리워한다. 그리운 임은 오질 않아 꽃 속에 앉고 보니 외롭게 핀 꽃은 자기 신세와 흡사하여 동질감을 느낀다.
이 때문에 임을 그리워하는 고독한 정념과 내밀한 정서는 더욱 깊어간다. 고독과 애수를 내면으로 잠재우며 홀로 인고하는 여성 이미지를 부각하였다. 이어지는 시에서는 보다 적극성을 확보한 여성 형상으로 반전된다. 연꽃을 따며 그리움을 몰라준다고 원망한 작품으로 상징과 비유가 내포되어 있다.
노 저어 멀리 가지 마요 挐舟莫深入
깊은 물엔 연 잎 드물어요 水深蓮葉疎
연잎은 푸른 덮개 같구요 蓮葉如翠蓋
연꽃은 예쁜 저잖아요 蓮花似名姝
고개 숙인 채 따지 않으니 低頭不忍采
봄 강에서 눈물 흘려요 淚落春江隅
아침엔 강가에서 바라보고 朝從江浦望
저녁엔 강 누대에서 자요 暮向江樓宿
제방의 나무에 달 오르고 月出大堤樹
구름은 푸른 호수에 뜨는데 雲生靑草湖
꽃 너머 죽지사만 부르니 隔花唱竹枝
낭군님은 정말 바보예요 卽心何太愚
노를 저어 멀리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면 깊은 물에는 연잎이 많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어 연꽃의 모습을 소개하는데, 연잎은 푸른 덮개 같고 예쁜 연꽃은 여성 자신의 얼굴과 같다고 한다. 고개 숙인 채 연꽃을 따지 않아 봄 날 강가에서 하염없이 운다고 하였다. 여기서 연꽃을 여성 자신에 비유했는데 낭군님이 연꽃을 따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의 심정을 담아 낸 것이다. 남성으로 가탁된 낭군이 여성으로 비유된 연꽃을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소극성을 질책하면서 여성의 적극적이며 도전적 내면 정서를 토로한 것이다.
이에 여성 화자는 원망과 체념의 독백을 토로한다. 임의 소극적 행동에 대한 원망을 담아 전한다. 임의 무관심은 그녀로 하여금 고독과 슬픔을 자극하여 화창한 봄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진전된다. 아침에는 임의 내방을 고대하면서 설렘으로 기다리지만 임의 부재와 냉대 속에 고독한 몸으로 강 누대에서 잠이 든다. 제방의 나무에 달이 오르고 호수에 달이 오른다. 이럴 즈음 여성은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임이 여성에게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임은 죽지사만 부르며 쉽게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낭군님은 정말 바보’라는 여성 특유의 원망을 던지고 말았다. 소극적 남정네의 애정 행각을 원망하면서 적극적이며 도전적 여성의 애정 의식을 발휘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난은의 문학 정감과 역량을 읽을 수 있다. 악부체 형식의 시를 통해 난은의 풍부한 정감과 섬세한 표현 미학을 느낄 수 있다. 까마귀 울음과 대조적인 여성 화자의 내면을 보기로 한다.
까마귀 밤에 울어요 烏夜啼
밤마다 울어 잠 못 이루게 하네요 夜夜烏啼人不眠
까마귀 우는 게 나와 상관없지만 烏啼不必便有情
이처럼 눈물 쏟아지는 건 웬일일까요? 使我如何雙涕懸
까마귀 밤에 울어요 烏夜啼
밤에 까마귀 우는 게 상관없다 해도 不恨夜啼烏
가을밤 지새우기란 참으로 힘들어요 但恨秋宵苦難曉
원앙 비단 이부자리 펴고 당신이랑 속삭인다면 繡枕鴦衾共君語
밤마다 까마귀 울어도 나는 좋아요 烏夜啼啼亦好
이 시에서 까마귀는 애당초 길조가 아니다. 밤마다 울어대기에 여인은 잠을 이룰 수 없고 급기야 임과의 이별 서러움이 강하게 밀려든다. 임을 그리워하다가 긴 밤을 지새우기도 일쑤였는데 밤마다 까마귀가 울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까마귀가 울지 않아도 잠을 뒤척이건만 녀석 때문에 잠을 청할 수 없다. 까마귀는 고독한 여심의 내면에 감춰진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일깨우고 말았다. 까마귀 울음이 기폭제가 되어 잠재된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일순간에 터져 나오게 하였다.
이를 애써 부인하려고 하였다. 까마귀 우는 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자위도 해보지만 여인 홀로 가을밤을 지새우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고 고백하고 말았다. 임을 그리는 감춰둔 속마음이 들키고 말았다. 더 이상 그 속내를 감추길 없다. 가을밤을 홀로 지새우기란 여간 힘겹지 않다고 독백함으로써 그러한 여성의 내심을 털어놓았다. 말미에 임과 함께 하는 밤을 맞는다면 까마귀 울어도 탓하지 않겠다고 하여 임에 대한 그리움을 점증시킨다.
임과 함께 하는 밤이 오면 평소 밤잠을 설치게 했던 까마귀의 심술도 탓하지 않겠다는 데서 임을 그리는 심정이 애절하게 토로된다. 임과 함께 원앙 비단 이불을 펴고 사랑을 속삭인다면 지금까지 속을 상하게 했던 까마귀 울음도 전혀 문제 삼을 게 없다고 하였다. 임과 함께 하는 밤의 즐거움을 고대하면서 희망 사항을 담았다. 이면에는 임과의 재회를 가슴 설레는 여인네 심정으로 처절하게 그려내었다. 임의 부재 현실 공간에서 느끼는 애정의 통증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은유한 것이다. 이어지는 시에는 임과 결별한 아픔이 그려진다.
볼그스레한 제 얼굴 我面紅
뽀얀 당신 얼굴 君面白
붉고 흰 게 달라도 紅白雖不同
둘 다 청춘의 얼굴이어요 總是靑春色
청춘은 쉬이 가고 사람도 이내 늙으니 靑春已失人易老
떨어지는 꽃 보고 있으면 애간장 다 타요 坐見落花心斷絶
구름 같은 머리결도 당신 때문에 빗었구요 我有雲鬟爲君梳
난초향 뿌린 것도 당신 때문이어요 我佩幽蘭爲君潔
백 년 고락을 당신께 의지하고자 했더니 百年苦樂長倚君
당신은 이별을 그리도 쉽게 생각하셔요? 君獨何爲不重別
볼그스레한 제 얼굴 我面紅
뽀얀 당신 얼굴 君面白
제 마음 변함이 없지만 我心正如面
당신 마음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君心不可測
붉고 고운 얼굴의 여인과 흰 얼굴 미소년의 애정 갈등을 여성 화자 입장으로 표현하였다. 여인은 수동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붉은 여인의 얼굴과 백색 동안 남성의 색채감이 배색되어 작품의 미학 장치를 강화한다. 붉은 여인의 얼굴과 백색 미소년의 얼굴 색상이 달라도 모두 청춘이란 점에서 애정 온도는 상승되어 열애 감정이 충만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청춘이 쉬이 늙어가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도 많다고 했다. 게다가 봄이 지남에 따라 시들어가는 꽃을 보면 애절한 마음이 든다고 하였다. 남성을 그리는 여성 이미지가 표출되어 적극성을 부여한 반면에 남성의 형상화는 수동적이다.
청춘이 쉬이 흘러가는 아쉬움과 임의 애정도가 자못 식어져 감에 대한 여성의 불안 심리가 깔려 있다. 시종 여인은 남성에 대해 헌신과 희생을 지향하고 있다. 남성을 위해 구름 같이 풍성한 머리도 빗었고 난초향도 뿌리며 교태를 부리기로 하였다. 백 년 고락을 남성에게 의탁하려고 했지만 남정네는 이별을 쉽게 생각한다며 원망을 표현하였다. 작중 남성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여성의 독백 속에 임의 애정 유발 촉구와 이별을 염려하는 불안감이 드러난다. 말미에 후렴 형식으로 여성과 남성의 얼굴색을 다시 강조하고 남정네에 대한 원망 어조를 표현하면서 여성의 내심을 토로하고 있다. 일련의 여성 독백 표현을 통해 남성을 그리워하며 애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려는 의지를 담아내었다. 이러한 여성 어조와 정감의 표현은 결국 난은 문학 정감의 다양성과 개방성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여성 정감을 다양하게 표현한 난은의 문학적 호소력은 연민 정서 표출로 확대된다.
5) 연민 정서 표출
다음은 연민 정서가 반영된 시이다. 나무꾼들의 힘겨운 삶을 주목한 작품에도 이러한 작가 의식이 발견된다. 이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푸른 남산의 소나무 靑靑南山松
위는 훤하고 낮은 가지도 없네 上疎無低枝
허리에 도끼 찬 지 오래여서 腰斧日已久
쉽고 어려움을 모두 안다네 難易皆自知
지름길 찾아 때로 홀로 가서 尋逕時獨往
날 저물어 짝을 지어 돌아오네 日暮隨伴歸
음산한 바람 밤에 급히 불고 陰風夜來急
흰 눈이 띠 집을 덮었네 白雪覆茅茨
새벽에 연기도 일지 않고 炊烟曉不起
어린 아들 추워 떨어도 입힐 옷이 없네 穉子寒無衣
나무꾼 신세 끝이 있으랴만 薪樵豈有窮
사는 게 갈수록 험난했다오 生理轉艱危
식구들 이끌고 시장으로 와서 携家在城市
그제야 지난 세월 그릇됨을 알았소 始覺早計非
남산의 푸른 소나무가 나무꾼들의 쉼이 없는 벌목 등살을 견디지 못해 윗부분이 모두 잘려나가고 아래에는 낮은 가지도 없다. 벌목꾼들은 경력이 오래되어 벌목 작업의 난이도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산세도 훤히 알기에 지름길로 가서 땔감을 해 날이 저물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귀가한다. 이어지는 시를 통해 이들의 극난했던 생활고가 파
악된다.
한 겨울 급하고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백설이 집을 모두 덮는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불을 피우기로 했지만 새벽 무렵 불도 제대로 피지 않는다. 추위에 떠는 아이들은 입을 옷조차 변변치 않다. 엄동설한 추위와 가난으로 얼룩진 나무꾼들의 곤란한 생활 형편을 동감하면서 시적으로 형상하였다. 이어지는 그들의 독백을 통해 이들의 삶이 매일매일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들이 산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았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농촌 빈민층의 도시 이주화 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도시에서의 벌목꾼의 생계는 산촌에서 보다는 다소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시 이농과 도시 유입화 현상을 이 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농민층의 극난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음은 한해로 인해 일반 곡식을 파종하지 못해 대체 작물인 메밀을 파종하는 정경을 그려내었다. 장편 시이기 때문에 분절해서 검토 한다.
어제 밤 남촌에 밭갈 만큼 비 왔지만 南村昨夜雨一犂
높은 나무에 바람 불어 새벽이슬 말랐네 高樹風生曉露滴
산 영감은 잠 깨어 절기 때문에 놀라 山翁睡罷驚節序
명아주 짚고 늦게 밭둑에 가서 섰네 杖藜晩向田頭立
위의 밭이나 아래 밭 모두 먼지만 일고 上田下田黃塵飛
오늘처럼 비 안 온 지 이백 일일세 不雨如今二百日
지난밤에 남촌에 밭갈 만큼 비가 내렸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먼지를 적셔 줄 만큼 내린 비가 모두 건조해 버렸던 것이다. 산촌 영감은 절기의 변화를 체감하며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밭둑에 서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래 위의 밭을 둘러보며 7개월 동안 지속된 가뭄을 한탄한다.
파종도 못했으니 가을걷이는 늦어 種不入土秋事晩
밭에 오로지 메밀만 뿌릴 수밖에 田家望望惟蕎麥
메밀은 수분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人言蕎性不宜水
올해는 옥토에도 심을 만 하겠네 今年澤田皆可植
일 년 내내 비오지 않는다면 若使終年不下雨
거친 밭에서 한 말은 거둘 수 있겠지 斗穀可從荒田得
백곡들아, 메밀을 나쁘다고 하지 마라 百穀休言蕎最惡
흉년에 무슨 곡식이든 가리겠나 凶歲得穀何所擇
싸라기 쌀겨로 죽 쑤고 쌀로 밥 지어 糜糠爲粥米爲飯
늦게 핀 꽃은 소나무 껍질에 섞고 晩萼兼好和松殻
밀가루와 메밀 섞어 물만두 만들어 白粉交麪作水饅
설날 손님 접대하기 좋다네 歲時偏宜供上客
파종을 못했으니 가을걷이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에 그나마 파종할 작물이라고는 메밀뿐이다. 수분을 싫어하는 메밀이어서 오랜 가뭄에도 파종할 수 있어 다행이다. 평소 메밀이 천시를 받던 곡물이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효자 곡물 노릇을 한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싸라기 쌀겨와 함께 섞어 끓이면 흉년에 먹는 구황 식품이 된다. 경상도에서는 이를 ‘송구죽’이라고 한다. 이는 보리 고개를 넘기는 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어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혼합하여 물만두를 만들어 설날 떡국과 함께 끓여먹는 세시풍속도 소개하였다. 그만큼 메밀의 효용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파종을 시작한다.
아이 부르고 소 몰아 묵은 땅 가니 呼童驅牛闢舊菑
팍팍한 땅은 돌보다 더 단단하네 土脈燥澀堅於石
어린 여종 허리에 전대 두르고 파종하고 小婢腰槖行復種
큰 여종 삽을 들고 흙덩이를 부수네 大婢荷鍤敲且擊
작은 종놈 교활하고 꾀 많아 일하지 않고 短㒒嬌頑不用命
몰래 사람들에게 쓸 데 없는 짓이라며 나불대네 暗向傍人說無益
이제 본격적인 파종 작업을 시작한다. 아이를 부르고 소를 몰아 가뭄에 찌든 밭을 갈아본다. 팍팍하게 견고한 땅은 돌덩이보다 더 단단하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토양을 일구어 파종할 채비를 마친다. 어린 여종은 허리에 전대를 두르고 메밀 씨앗을 흩어뿌리기 방식으로 파종한다. 힘 센 여종은 삽을 들고 흙덩이를 부수어 메밀 씨앗을 땅에 묻는 작업을 병행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리 종놈은 이는 헛된 일이라고 하며 나불댄다. 어쩌면 이 어린 종놈의 독백이 맞을 런지 모른다. 비가 올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놈의 짓이 매우 얄밉게 들려온다. 애써 파종한 메밀이 온전히 싹을 틔워 구황 작물로 자라나 기아를 면하게 해줄 대안을 제공해 주길 바랄 뿐이다.
밤에 하느님이 큰 비를 내려주시어 一夜天工降大雨
땅에 물 질펀해 밭두렁 분간 못하게 하소서 此地淼漫無畛域
나는 이 말을 듣고 듣지 못한 척하고는 我聞此語如不聞
다만 힘을 다해 도랑을 깊이 치라고 시켰네 但敎盡力深溝洫
깊은 도랑은 흐르는 물을 수용하겠지만 深溝猶可辟行潦
만약 큰 물 만나면 단번에 넘치리 若遇大水從一拔
장부 생계가 이와 같으니 丈夫生計只如此
서풍을 향해 탄식하지 마시라 笑向西風一嘆息
이 밤에 하느님이 밭두둑과 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큰 비를 내려 주길 바라면서 미리 도랑을 친다. 그만큼 해갈과 농민들의 목숨을 살려 줄 비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도랑을 치기는 하지만 홍수가 나면 이 도랑을 넘쳐나리라는 염원도 담았다. 시인은 비아냥대는 어린 종놈과 대비된 소박한 노인의 역발상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작시하면서 지독한 가뭄으로 고초를 겪는 농민의 애환과 고통을 갈파하였다.
이와 함께 농민들의 기아 해결과 가뭄 해소를 간절하게 염원하면서 장부로 이러한 포부와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농민들이 겪는 가뭄의 한해를 염려하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 모색을 시도한 작가의 연민 의식이 각인되어 있다. 남천 개울가에는 천렵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는 일반 시골 농부의 일상적 천렵이 아니다. 아전들의 횡포와 학대가 수반된 고통의 현장이다. 이러한 현장을 연민 시각으로 주목하였다.
그대는 보질 못하였소? 君不見
남천 개울물 쪽빛처럼 푸르러 南川之水靑如藍
주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日夜滔滔流入海
바다 고기 놈 애당초 푸른 바다에 살 것이지 海魚本在滄溟間
어인 일로 개울물에 올라 왔누? 何事更上川中在
산촌 백성 그물 쳐서 고기 잡는 것 몰라 山氓不識網罟利
개오동나무 뿌리 개울에 담가 고기잡네 但把楸根沈水底
뿌리 담그자 개울물 검어지는데 楸根入水水爲黑
맑던 개울 이내 먹물 뿌린 것 같네 頃刻淸流如潑墨
개울의 새끼 고기 죄다 죽더니 水底魚兒皆爛死
빛깔 곱고 한 자 되는 놈 물 위로 떠오른다 玉尺銀鱗浮水白
큰 놈은 상납하려고 한 놈도 놓치지 않지만 大魚獻御固必取
죄 없이 죽어 버린 새우와 거머리가 불쌍하여라 浪死偏憐蝦與蛭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물결 따라 떠내려가고 巨細洪纖逐水流
교룡마저 죽어 버려 하늘도 근심하겠네 蛟龍索寞天爲愁
요행히 손아귀 벗어난 놈 잽싸게 내빼고 幸有脫者走紛紛
양쪽 언덕에 창이 삐죽삐죽 널려 있구나 兩岸戈戟森相投
이 광경 보고서 안쓰러워 탄식하는데 我來咨嗟久不樂
놈들이 촌민들 호령하며 매까지 휘두르네 猶督黎庶恣鞭朴
하느님, 이 백성 불쌍히 여겨 我願天公恤天民
동해물 기울이고 막아 주셔서 爲傾東海爲沮洳
그물만 들면 고기 잡혀 관아에 바치게 하소서 擧網得魚輸縣官
백성들 편안히 농사짓고 一身無事耕菑畬
태수님 매질하지 않게 하시며 太守不用事捶撻
백성들에게 게와 고기 싫컷 먹게 하시고 細民亦厭蟹與魚
저는 주려도 나물만 먹겠나이다 我食不飽甘喫蔬
남천 개울가에 펼쳐진 물고기 소탕 작전을 주목하였다. 산촌 백성들이라 그물을 쳐서 고기 잡는 법을 익히지 못해 개울물을 막고 쓴 액체가 나는 개오동나무 뿌리를 개울물에 넣어 뿌리의 진액으로 고기를 마취시켜 잡는다. 작은 고기들은 독한 진액으로 인해 먼저 희생되어 수면에 허옇게 떠올랐다. 이어 큰놈들도 뿌연 뱃살을 드러내고 마취된 채 물 위로 떠오른다. 잽싸게 손아귀를 벗어난 놈은 포위망을 벗어나 옆의 냇물로 살 길을 찾아 헤엄쳐간다.
고기잡이 현장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 탓에 애꿎은 새우와 거머리, 교룡이 전멸하였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도 희생되었다. 그래서 포위망에 걸린 어류가 몰살당한 것이다. 작은 물고기는 쓸 데 없어 현장에서 버려지나 큰 놈은 모두 관청에 상납해야 한다. 이와 함께 관아 하속이 산촌 무지렁이를 못살게 하는 행패가 보고된다. 관아의 이속들이 산촌 백성을 다그치며 매까지 후려치는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시인은 남천 개울가 고기잡이 광경에서 산촌 민들의 일상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혼자 기막힌 발상을 해 본 것
이다. 하느님이 동해를 조절하여 고기를 한곳으로 몰아주어 어부들이 그물만 들이대면 잡도록 조치해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이 산촌 백성의 고충도 해소되며 원님의 들볶음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이들에 대한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풍어가 이루어지면 이 척박한 산촌 백성도 맛난 해산물을 포식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다. 이 작품에 난은의 연민 정서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면서 지배 계층의 일방적 횡포와 묵묵히 굴종해야 하는 계층의 아픔이 동시에 파악된다. 이상 난은 시의 특징적 국면을 살펴보았다. 이런 작품을 통해 난은은 다양한 문학 정서를 폭넓게 형상화해 내는 역량을 지닌 시인으로 주목할 수 있다.
6) 유자 은둔 미학
성리 철학적 의미를 담은 시다. 이 역시 자연 대상의 속성을 들어 철학 사유를 형상하거나 경물을 완상하면서 심성을 수양하려는 의지를 투영한 부류이다.
청운의 꿈을 지닌 총각에게 말하건대 寄語靑襟丱角童
새 공부 부지런히 하길 사양 말지니 莫辤勤苦著新工
예로부터 이 공부는 높고 멀지 않으니 從來此學非高遠
도리어 마음으로 깨닫지 못할까 염려하오 却怕靈臺未發蒙
독서에 왜 천 번을 읽으려하오 讀書何須千卷破
고인들도 도 깨닫는데 삼동이면 족하다 했소 古人曾道足三冬
흉금에 한 물이라도 남김 없어야 但遣胷襟無一物
저절로 녹아 점점 두루 통하게 된다오 自能融液漸旁通
청운만리의 꿈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당부한 시이다. 새로운 각오와 자세로 공부를 하는데 전심전력해 주길 당부한다. 성리학 공부는 심원하고 고원하지 않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작정 독서에만 열중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도를 터득하는 과정에 충실하면 자연히 성리학에 접근해 몰입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에 외물로 인한 잡념이 일체 사라질 때 저절로 융화되어 성리학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다고 했다. 심성 공부에 주력하길 당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금강산 최고 암자에 잠드는데 一宿金剛第一庵
경쇠 소리 달을 흔들어 서암으로 지네 磬聲摇月落西巖
세상 인연 떨칠 수 없어 우스운데 自笑世綠磨不盡
내일 아침 돌아오면 백천담을 건너리 明朝囘過百川潭
어제 아침 등산에 걸음마다 힘들었고 昨日登山步步艱
하산은 쉬워 돌층계 헛디딜 듯하네 下山容易失層巒
예로부터 선악은 이처럼 섞여있나니 從來善惡渾如此
학문하듯 위를 보고 하산해야 하리 爲學須看上下山
금강산 최고 높은 암자에 올라 잠을 청하면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경쇠 소리를 듣는다. 경소 소리와 함께 서쪽으로 달이 기우는 선적인 경계를 그려냈다. 세상 인연을 모두 떨쳐내지 못해 우습다고 하면서 내일 아침의 행보를 정리해 두었다. 금강산 유람을 통해 세속의 모든 잡념을 떨쳐 버리고픈 욕심을 드러냈다. 등산이 힘들었지만 하산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실수하면 돌층계를 헛디딜 위험이 있다. 이에 시인은 등산하는 과정과 하산하는 과정을 학문 수행에 비유하였다. 세상 만사에 선악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게 선악을 가려내고 자기 수양에 전념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역시 성리학 사고가 함축된 표현이다. 이는 천지 상하에 하늘의 이치가 운행하는 경지를 묘사한 작품을 통해 가시화된다.
푸른 하늘 설명하자면 아득하고 說到蒼天却杳然
겨우 뜻을 보이면 곧 하늘이 아니라네 纔言著意便非天
알건대 여닫는 게 다른 물건 아니니 已知闔闢無他物
모름지기 음양을 따라 한 근원을 찾네 須信陰陽只一源
정미로운 것 찾는데 형상이 있나니 覓去精微如有像
신묘함 깨달음을 설명하기 어렵네 悟來神妙不容言
가련히도 이 이치 아는 이 없나니 可憐此理無人會
생기 넘치는 연못의 고기가 뛴다네 潑潑嘉魚躍在淵
푸른 하늘의 뜻을 설명하기에 난해하다. 겨우 보일 듯 말듯하다가 천리를 드러내기 때문에 진면목을 제대로 간파할 수가 없다. 천지 상하의 운행의 묘미는 음양을 따라 한 근원으로 귀착된다고 하였다. 정미한 것을 찾는데 형상이 있지만 신묘한 그 이치는 설명하기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천지 상하에 운행되는 자연의 오묘한 법칙과 천리 유행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음을 한탄한다. 하지만 그 이치가 그렇게 고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미에서 제시한다.
이른바, 하늘과 물 위에 생기발랄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물의 동태를 통해 천리 유행의 이치를 터득한다는 것이다. 말미의 시구 ‘연못의 물고기’는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뛴다는 의미가 축약된 것으로, 솔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뛰고 있다는 것은 성군의 다스림으로 바른 도에 따라 세상이 움직여진다는 의미이다. 새는 하늘에서 날아야 자연스러운 것이며,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자연스러운데 이것이 천지의 조화라는 것이다. 다음은 절의를 고수하다가 생을 마친 주나라 무왕 때 백이숙제의 고절한 기상을 반추한 것이다.
가을 기운이 먼 교외에서 일어나고 秋氣生遠郊
밝은 태양은 황하를 비추네 白日照黃河
엉키고 돌아 바라봐도 끝이 없고 縈迴望不極
만 리를 가로 질러 흰 파도 일어나네 萬里撗素波
고향은 날마다 이미 멀고 故鄕日已遠
근심 걱정 날마다 많다오 憂思日已多
수레 몰아 진나라로 향하니 驅車向秦天
구름 산 울창하고 험준하여라 雲山鬱嵯峨
쉬면서 가노라니 세월만 흐르고 栖遲歲月晩
지난 세월 느껴 홀로 슬픈 노래 부르네 感古獨悲歌
서산에서 고사리 캐던 늙은이가 西山採薇翁
굶어 죽은 들 누가 알아주리 飢死知爲何
여로 서정을 담은 작품이다. 중국을 지리적인 배경으로 설정했다. 교외에 가을 기운이 만연한 속에 황하를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회를 느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하의 물줄기가 이국 나그네 서러움을 고조시킨다. 고향은 아득히 멀어져 가고 향수와 객지에서 겪는 근심 걱정이 깊어간다. 수레를 모는 노중이 험난하기만 하다. 쉬엄쉬엄 가노라니 세월만 흘러가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슬픈 가락이 울려나온다. 마지막 구절에 주제 의식이 담겨있다. 이른바 백이숙제 고사를 되새기며 의리와 충절 정신을 기린 것이다.
백이숙제는 은나라 제후 고죽군의 두 아들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무왕이 듣지 않으니,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굶어 죽었다. 이러한 충절 선양 의식은 곧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의리 지향 정신과 통한다. 다음은 연꽃에 비겨 군자다운 기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내면의 정신 지향을 보여준다.
그대 집 흰 연꽃의 운치는 속기를 벗어나 君家白蓮韻絶俗
은자가 빈 골짜기에 있는 것 같소 恰似幽人在空谷
정신 한가하고 뜻 고원해 낮에도 조용하고 神閒意遠白日靜
눈 같은 피부 붉은 입술에 관은 옥을 다듬은 듯 雪膚朱唇冠切玉
서로 만나 적막한 물가에서 한 번 웃으니 相逢一笑寂寞濱
곧 천지에 가을 기운 가득한 시절일세 正値乾坤金氣伏
어제 밤 남쪽 교외에 가랑비 내리다 개니 昨夜南郊細雨晴
십 리 안개 노을이 굽은 강을 둘렀네 十里烟霞曲江曲
(…)
세모에 교분 독실하게 나눌 이 없고 歲晏無人交契篤
고산 도사를 세인들 알지 못하네 孤山道士世不識
십 년간 외출 않아 수레와 노복 사양하다가 十年不出謝輿僕
근래 삼월에 그대 집 찾아 갔네 邇來三月住君家
달 뜬 저녁 바람 부는 새벽의 멋을 즐겼고 月夕風晨幽賞足
가을바람 불어 가을 물이 차갑네 秋風颯颯秋水寒
외롭고 어여쁨 잘 보존해 서로 기쁘니 善保孤芳却相勗
그대는 보지 못했소 君不見
낙양성 집집마다 목단을 중히 여기며 洛陽城中家家重牧丹
염옹의 애련설을 읽지 않는 것을 濂翁小說誰解讀
흰 연꽃의 고아한 형태를 형상하면서 속된 기운을 벗어난 은자 형상을 한 것과 같다고 했다. 흰 연꽃의 자태는 흡사 빈 골짜기에 세속 잡념을 벗어나 청아하게 지내며 은일의 삶을 향유하는 은자와 다를 바 없다며 극찬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정신이 한가하고 뜻은 고원해지는 경지로 몰입된다. 정적이 흐르는 대낮에 보는 연꽃의 모습은 더욱 신비감이 들 정도로 곱다. 눈처럼 흰 바탕에 붉은 색을 띤 꽃잎과 관처럼 우뚝한 연밥을 표현했다. 이어 벗을 만난 감회를 이어간다. 적막한 강가에서 그를 만난 정회가 유별하며 가을을 맞은 청량함과 서글픈 서정도 함께 토로했다. 남쪽 교외에 가랑비 내리다 걷혔고 십 리 길에는 안개 노을이 굽은 강을 빙 둘렀다.
세모를 맞은 시인의 감회다. 고산에 은거해 사는 멋을 세인들은 알지 못한다. 십 년간 외출을 사양했기에 수레와 노복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다가 춘삼월에 벗을 찾아가 달이 뜬 저녁과 바람이 부는 새벽의 멋스러움을 만끽했더니 이제 가을을 맞았다. 저마다 선비로서 고절한 자태를 유지하며 심성을 수양해 나가기에 기쁨이 넘친다. 이 시의 핵심은 맨 하단에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주렴계의 「애련설」이다. 난은이 벗과 함께 세상을 멀리하고 고고한 선비의 삶을 지향하는 것은 연꽃을 사랑했던 주렴계의 이미지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울러 절의를 고수하며 은일한 삶을 영위하는 여유를 드러낸다. 낙양 성 사람들이 목단을 즐기는 것은 한양에서 명예와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권력 집단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은일한 삶을 누리는 연꽃의 멋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시인은 온갖 꽃 가운데 유독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를 밝히면서, 연꽃의 고상하고 군자다운 품격을 찬양하였다. 이면에는 자신을 연꽃에 비유하면서 당시 영리를 추구하는 속된 무리들을 풍자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은일한 삶을 누리는 군자의 형상을 담아내었다. 이러한 비유와 상징적 표현을 통한 내면 심리 묘사는 다음 시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출처대의와 연결되어 비유와 상징적 은둔 의식의 해명으로 이어진다.
굽으면 제후에 봉해지고 곧으면 죽으니 曲是封侯死是直
세인들 어찌 굽은 이치를 알리 世人寧或如鉤曲
너는 이제 세상과 상관이 없나니 汝今於世不相關
서리고 얽혔다고 악목이라더냐 盤屈何須爲惡木
굽게 자란 소나무에게 질문을 던진다. 굽은 소나무가 장수하는 비결은 굽었기 때문에 재목으로 쓰이지 못해 장수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곧게 자란 나무는 쉽게 벌목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그의 처세 철학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혼란한 정계에서 몸을 빼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심성을 수양하면 은자의 즐거움을 넉넉히 누릴 수 있다. 이에 반해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불의와 타협하며 지내면 거기에 멀려들어 빠져나오질 못해 패가망신한다는 논리를 제시
한다.
다시 말하면 곧은 나무는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인물을 가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도양양하게 진출하더라도 벼슬의 험난한 파도 속에 휩쓸리면 그 언제 몰락의 기로에 서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금 굽은 소나무에게 말한다. 굽게 엉켜 자란 못생긴 소나무가 더 이상 악목일 수 없다고 위로한다. 더 이상 악목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악목이라는 열등에서 벗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는 은자 형상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우의적 표현이다. 명철보신의 지혜를 굽은 소나무를 통해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어지는 답변에서 굽은 소나무의 강한 내면을 드러낸다.
곧은 도는 유래상 용납되지 않기에 直道由來不見容
때마다 땅에 서린 용이 되길 배웠소 故隨時樣學蟠龍
그러나 여전히 하늘 찌를 기운 있나니 雖然尙有衝霄氣
찬 공중 만 리의 바람도 두렵지 않소 不怕寒空萬里風
예전부터 곧은 도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이 소나무는 굽기를 자처했고 때때로 몸을 숨긴 용과 같은 형상을 하며 처세 철학을 체득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몸체가 굽었다고 해서 정신 지향마저 그렇지는 않다고 해명한다. 굽고 나직막한 소나무이지만 하늘을 찌를 만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찬 공중의 바람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강인한 선비 정신을 우의적으로 형상했다.
청렴하고 강직했던 난은의 선비 정신과 굳센 기상을 중의적 수법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유자의식과 은둔 지향 정신이 뚜렷하게 제시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난은은 성리 철학의 온축과 함께 은일 지향을 통해 강직한 선비 형상을 이뤘던 것이다. 이로써 난은 시의 내용적 특징을 정리했다. 이제 그의 시 표현 기법에 드러난 특성을 보기로 한다.
7) 표현 기법 특성
시에 두드러진 표현 양상을 보기로 한다. 첫째, 정적인 정감과 동적인 감각의 조화를 통한 참신한 표현을 구사한 경우이다.
일그러진 달이 고산에 지는데 缺月下孤山
어촌 주민들 모두 잠들었네 漁村人正宿
산승이 급히 배를 돌리니 山僧急回舟
배 매는 돌을 잘못 지나왔네 誤過繫船石
고산에 달이 지고 어촌 주민들은 한낮의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지친 탓에 깊이 잠들었다. 기구와 전구에서 조용한 시상이 전개되면서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절간 스님의 등장으로 급격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허둥지둥 배를 빨리 몬다. 어두운 밤이어서 배를 댈 곳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배를 댔다가 다시 제 위치를 찾아가는 광경을 그렸다. 전구에서 반전을 시도함으로써 정과 동의 배치를 통한 시의 긴장감을 높였다. 고산의 겨울 풍경에도 이런 장치가 보인다.
고산에 처음 안개 걷힐 때 孤山雪初霽
나그네 밤에 집으로 돌아오네 客子夜還家
강 얼음 달밤에 쩡쩡거리니 江冰敲夜月
잠자던 물새 찬 모래서 깨네 睡雁起寒沙
눈 내려 평지 모래 덮고 落雪捲平沙
얼음 낀 강엔 쩡쩡 소리나네 冰江夜有響
찬 방의 객은 잠들지 못하는데 寒窓客無眠
점차 산에 달이 오르네 漸看山月上
겨울철 흐릿한 밤에 나그네는 귀가한다. 밤 추위가 더해지면서 강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때문에 추위를 참아가며 잠을 청하던 물새도 잠을 깼다. 연신 강 얼음이 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기구에서 정적인 시상이 전구에서 동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이어지는 시에도 이러한 구조가 드러난다. 눈이 내려 평지의 모래를 하얗게 덮는다. 여전히 강 얼음은 깨어지는 굉음을 낸다.
차가운 방의 나그네는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할 형편이다. 이 무렵 산 위에 달이 올라 겨울 서정을 더해준다. 눈이 내리다가 밝게 개인 겨울 밤 풍경은 신비롭다. 정적인 시적 구도에 이어 동적인 이미지를 가미함으로써 단조로움을 극복한 시의 창작을 가능케 했다. 이는 강변 노인의 여름철 일상에서 첨예하게 구도되어 있다.
강변 노인 밤에 밥 먹고 江邊老人夜飽飯
마루에 올라 갓을 벗고 평안히 쉬네 當軒脫頂棲息穩
하늘 우레 소리 땅 끝을 흔드는데 一聲乾雷響坤端
처음엔 구름 위에서 북 치는 것 같았네 初如戍皷傳雲間
번쩍번쩍 번개가 먼 산을 비추더니 閃閃電母明遥山
갑자기 서북쪽에서 큰 바람 일어났네 忽然大風起西北
검은 구름 곧바로 올라 깜깜해지더니 黑雲直上光潑墨
산 뒤집고 바다 엎을 형세 당할 수 없네 翻山倒海勢莫當
무서운 살기가 하늘에 울리자 殺氣虩虩鳴空蒼
주민들 하늘 기둥이 꺾일까 염려했네 居民但恐天柱折
지붕에 비가 새고 평상도 젖었고 豈識屋漏床床濕
천지 사방이 어두컴컴한 기운 토했네 六合晦冥氣吐呑
빗줄기가 낙석처럼 세게 후려치자 雨脚亂擊如落石
모든 신령들 벽력 소리에 놀랐다네 百靈震怖盡辟易
호표가 싸우는 듯 누가 감히 굴복하랴 虎豹股戰誰敢伏
종 치고 수레 나열하자 소리 잠시 멈췄고 撾鐘列陣聲暫歇
갑자기 말 타고 출입이 더욱 급하네 突騎別出來益急
밤 깊어 하늘 바람이 땅에서 멎어 夜久天風捲地休
둥근 잔월이 서산 위에 올랐네 一輪殘月西山頭
여름철이다. 강변에 사는 노인이 저녁밥을 먹고 시원한 마루에 올라가 편안히 쉬려고 할 때 굉장한 폭우로 인해 겪는 저녁의 풍경을 묘사했다. 조용한 시적 흐름이 전개되다가 급작스런 반전이 일어난다. 하늘에서 땅 끝을 흔드는 우레 소리가 난다. 애당초 구름 위에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 섬광을 발하더니 서북쪽에서 거센 바람이 몰려온다. 이 바람은 검은 구름을 몰고 와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였다. 무서운 살기가 뻗혀 주민들은 죄다 불안에 떨어야만 한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어 폭우로 지붕도 새고 천지와 사방이 깜깜하다. 거센 빗줄기는 산이나 바다도 뒤엎을 형세이다. 시간이 갈수록 장대비가 퍼붓는다. 신령들마저 폭우 때문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고 설정했다. 억수비가 내리는 광경을 호랑이와 표범이 다투며 전쟁터에서 군사와 말이나 병거를 정렬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밤이 깊어 사정없이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하늘도 맑게 개여 서산에 둥근 달이 오른 정경이 드러난다.
이 시는 서두와 말미에 정적인 이미지를 배치하고 가운데 부분에 동적인 이미지를 강화함으로써 시 표현 미학을 살렸다. 둘째, 시각과 청각 표현을 조화시킨 작품이다. 먼저 시각 이미지가 강화된 작품을 보기로 하자.
흰 눈이 천지에 가득하고 白雪滿天地
고산에 행인이 없구나 孤山人不行
대 곁에 새 달이 밝고 竹邊新月白
모래 곁에 맑은 노을 일어나네 沙際澹烟生.
온 천지에 흰 눈이 가득 내렸다. 하늘에도 땅에도 공중에도 눈꽃으로 일체감을 이룬다. 흰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윽고 눈이 그친다. 산촌에 눈이 내린 탓에 행인의 발걸음이 끊어졌다. 대나무 곁으로 새로 뜬 달이 영롱히 비친다. 백색의 대지 위에 어여쁜 달빛이 내려 하늘은 거울 같고 땅은 흰 색 포근한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모래 벌에는 또 다른 신비가 벌어진다. 노을이 일어나며 눈 내린 달밤의 묘미를 극치에 이르게 한다. 이 작품은 시종 시각적 이미지를 부여하여 백색과 청아한 달빛을 혼합시켜 신비감을 생산케 하였다. 시각과 청각 이미지가 복합된 작품을 보기로 한다. 이러한 표현은 「고산잡영」에 집약되어 있다.
반 공중에 층계 길이 솔 끝에 나있고 半空層路出松端
조석으로 읊으며 갈관 쓰고 다니네 曉夕行吟岸鶡冠
때로 나막신의 굽이 돌부리 차니 屐齒時時觸山石
소리가 차갑게 저무는 구름까지 전해져 一聲高徹暮雲寒
공중에 난 층계 길은 시각적 효과를 점증시킨다.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향유하는 은자의 고고한 행적이 표백되어 있다. 한적한 미감 표현에 이어 나막신 끄는 소리를 저무는 구름까지 최고 수위로 상승시킴으로써 청각 심상이 강화되어 공감각적 이미지 연출에 성공했다. 전반부의 시각 효과와 후반부의 탈속 경지를 넘나드는 청각 이미지 제고로 탈속의 경지를 모색하는 정감을 증대시켰다. 가을 밤 달 빛 아래의 전개되는 풍광에도 이러한 표현 미학이 드러난다.
하늘 공중에 우뚝한 누대 날아갈 듯 天半危樓勢欲浮
둥근 달 천 봉에 밝게 비친 가을이라네 一輪明月萬峯秋
구슬 피리 소리 푸른 하늘 멀리 퍼지고 玉簫響徹靑冥外
세상 만 가지 근심을 떨쳐버리네 吹破世間萬刼愁
공중에 날아갈 듯이 세워진 누대를 배경으로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올라 천 봉우리를 비치는 가을밤이다. 옥같이 고운 피리 소리가 울림으로써 시인의 만 가지 근심을 덜어낼 것만 같다. 누대와 둥근 달 빛, 수많은 봉우리는 시각적 이미지 제공의 시적 소재들이다. 구슬픔의 무게를 실은 피리 소리는 청각 심상 제공과 함께 가을 밤 애처로운 서정을 함께 담아 전한다. 달밤에 걷는 시인에게서 이런 표현을 엿볼 수 있다.
그믐달 낮게 떠 사람소리 듣고파 缺月漸低人語隔
푸른 등칡 새로 자라 산길이 좁네 碧藤新長山蹊窄
지팡이 소리가 고개 마루 구름 흩고 一笻響破嶺頭雲
두 나막신 소나무 아래 돌을 친다네 雙屐踏穿松下石
그믐달이 낮게 떠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가 보다 했다. 달빛 아래 고고한 형상의 은자가 좁게 난 산 길을 걷는다. 달빛과 푸름을 자랑하는 등칡은 시각 이미지 제공의 소재들이다. 좁은 산길도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전반부의 시에서 요소마다 시각 이미지를 부여했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청각 심상을 배치하여 지팡이 소리가 고개 마루를 넘어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는 과도한 시적 감흥을 펼쳤다. 나막신 끄는 소리가 소나무 아래 돌을 치는 시상을 펼침으로써 산골짜기의 적막감 분산 및 파동의 조장으로 적막감의 일탈시켜 표현 미학을 높였다.
북에서 온 비가 빈 성을 후려치니 北來飛雨打空城
은자는 놀라 낮잠을 깨네 驚破幽人午睡醒
장풍이 푸른 하늘 밖으로 몰아가 長風捲出碧天外
석양빛에 나무마다 매미가 요란히 우네 夕照亂蟬千樹聲.
서두에서부터 요란한 폭우가 등장한다. 조용히 낮잠을 자던 은자도 잠에서 깨고 말았다. 연이은 강풍이 비구름을 몰아간 뒤, 높고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산은목욕을 한 듯이 아름답고 곱다. 햇살에 비친 산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내 석양이 드러나 맑은 산 빛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와 함께 매미 떼가 합창을 하면서 여름 한 때의 시골 풍광을 장식한다. 이 시는 청각적 감각과 시각 이미지 부여에 이어 다시 청각 이미지를 혼재하여 여름 농촌의 한 때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5. 맺음말
난은은 퇴계학 전개 과정에서 비중도가 높고 탁월한 문예적 성취를 남겼다. 반면에 그에 대한 연구가 저조한 점을 감안해 생애와 문집의 내용 및 시문학 특징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난은의 유고는 목판본 9권 5책으로, 눌은과 강좌의 교감을 거쳐 수장되었다. 1753년 종가의 화재로 인해 유고가 소실되어 모두 수합되지는 못했다. 이후, 후손 한응과 형상이 흩어진 유문을 다시 모아 원집 5책과 속집 1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 분석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 경향 및 문학성을 파악해 강직한 선비의 전형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난은은 효자로서 일평생 모친을 봉양하고 후학을 지도하며 심성 공부에 주력하길 희망했다. 그가 과거에 응한 것도 실제로는 삼 남매 가운데 두 남매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고적한 생을 살아가는 모친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홀로 남은 모친의 마음을 위로하며 평생 효성을 다해 모셨다. 그는 선조 퇴계의 유훈을 체득하여 출처대의를 분명히 하여 중요한 벼슬에 나가 명성을 얻고 권세누리는 것을 마다하고 작은 고을원을 자청하여 모친을 모시고 가서 봉양하였다.
부득이 중앙 정계 요직에 임명되었을 때, 불의를 보면 죽음을 불사하고 상소문을 올려 정면으로 맞서는 청렴강직한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가 출사한 16년 동안 입조한 기간은 모두 합해도 200일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출세 지향의 벼슬에 초연하여 ‘작은 퇴계’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 점에서 난은은 효성이 극진했으며 강직하고 청빈하여 안빈낙도를 실천한 선비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는 선조 퇴계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인한 정신과 지조를 지녔으며, 산수 자연 애호 정신을 지녔다. 그의 삶과 철학 지향은 선조 퇴계의 형상을 답습했고 그러한 퇴계의 정신 지향을 실천하고 계승하였다. 이러한 정신 기제가 문학으로 형상화되어 농촌 자연 정서를 다양하게 묘사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점을 토대 그의 시를 분석해 보니, 농촌 친화적인 정서를 묘사하고 이어 산수 자연에 펼쳐진 자연과 친화하려는 정감을 담아내었다. 이어 이러한 작시 기반은 산수를 즐기며 흥취를 발휘하는 미학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내면 정서는 다양한 문학 정서로 표출되어 여성 화장 입장에서 여성의 내밀한 심정을 묘사한 여성 정한의 표출과 산촌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수용한 연민 정서로 확대되었다. 이어 난은의 성리 철학적 사유가 함축된 시 분석을 통해 은일한 멋과 고고한 탈속의 경지를 추구하는 선비 형상을 확인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의명분에 따라 출처를 분명히 했던 난은의 강직한 형상 및 은일을 추구하며 자연과 함께 안분지족했던 면모도 파악했다. 이러한 난은의 다양한 문학 정감 표현을 통해 출중한 문학 역량과 인간을 사랑했던 선비 정신을 확인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의식은 선조 퇴계가 추구했던 정신과 일치한다.
이와 함께 난은은 시 표현 기법에서 정적인 감각과 동적인 감각의 적절한 조화와 배치를 통해 시의 미학을 제고하면서 시적 긴장을 강화했던 점도 파악했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이미지의 조화와 안배를 통해 시적 구성 강화와 문학 정감의 다양한 표출 및 내밀성을 강화했던 점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다.
이로써 난은의 생애와 시문학의 특징을 정리했다. 이후 산문 작품 분석을 통해 그의 사상과 학문을 집중해 검토할 과제가 남았다. 이와 함께 작은 퇴계였던 난은을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한 후속 프로젝트도 이어졌으면 한다. 난은 선양 사업 추진, 난은 시비 건립, 문집 번역, 학술 세미나 개최, 난은 관련 자료집 발간, 난은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해 난은이 추구했던 절의와 지조의 선비 정신이 전승되고, 그를 둘러 싼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기반이 되도록 적극 추진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난은의 절의 정신 지향과 문학 정신이 새로이 조명될 것으로 믿는다.
【난은 연보】
․1644(1세) 경북 예천군 금릉리에서 출생
․1654(11세) 조모상을 당함
.1657(14세) 유교 경전 독파
․1660(17세) 향교에서 심경 강론
․1664(21세) 부친상을 당함
․1669(26세) 하당 권두인과 심경 강론
․1670(27세) 고산초려를 지어 거주지를 금릉에서 고산으로 옮김
․1673(30세) 안동․예안의 명사 36명과 학계를 조직해 학문 연마
․1675(32세) 증광생원시 합격
․1677(34세) 증광회시에서 장원, 이내 파방
․1683(40세) 증광급제경과 장원 급제
․1684(41세) 권지성균관학유 임명
․1685(42세) 시조의 묘비 수립
․1687(44세) 창악도찰방 부임
․1689(46세) 성균관전적․홍문관부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기사관 임명
* 사간원헌납에 임명되어 오두인․박태보 등의 신원을 위해 주청
* 병조정랑․홍문관수찬 임명, 사직 상소 후 귀향
* 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에 임명, 외직을 희망해 양양현감으로 부임
․ 1691(48세) 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홍문관교리․이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 임명
․ 1692(49세) 이조정랑 시, 민암의 인재 부당 추천을 보고 귀향해 ‘작은 퇴계’ 별호를 얻음
* 홍문관교리․사간원헌납․이조좌랑․사헌부집의․시강원보덕 등 열세 번의 임명을 사양
* 사헌부사간․의정부사인․성균관사성․사헌부집의․승문원동부승지․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임명,외직희망광주목사 부임
․1695(52세) 호조참의․지제교 임명
․1696(53세) 삼척도호부사 부임하면서 춘양현 어로동을 지나다가 만년 은거지로 삼으리라 작정함
․1697(54세) 모부인을 임지로 모심
․1698(55세) 임지에서 부인상 당해 어로동으로 반장, 가을에 임기 마치고 어로동 정착, 모부인상 당함
․1700(57세) 모부인 거상 중 별세
․1741(영조17) 자헌대부․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세자좌빈객․오위도총부총관 추증
․1784(정조8) ‘충간’의 시호가 내려짐
․1845년(헌종11) 예천 원산서원에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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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원걸. [난은 이동표의 삶과 시문학]. [봉화문화] 제21집. 봉화문화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