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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 생매장된 내 마음 구조하기>의 줄거리:
세상에 파묻힌 내 마음을 구조하려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세상에 파묻힌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은 세상에 파묻힌 내 마음을 구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가? 즉 왜 마음이 세상에 매몰된 상태에서 구조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어떻게 구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매장된 내 마음 구조하기
(요한복음 5:30~47)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 생매장된 내 마음 구조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 생매장된 내 마음 구조하기”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안식과 연관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무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2절에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고 또 44절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예수님을 증언하셨는지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읽지 않은 부분의 내용부터 보자면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을 통하여 증언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모세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언하셨습니다. 모세오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46절에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초에 모세오경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증언하셨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다양한 방식의 증언 내용이기도 합니다. 증언은 증인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관련된 사실 중에서 하나님만 보고 아시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가족을 직접 만나듯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도 모르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증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유대인 중 한 명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목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 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직접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여러 방법을 통해서 증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증언의 내용이란 이 땅에서 사는 한 사람이신 예수님과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연결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언을 통하여 이 사실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증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연결되셨듯이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연결이 됩니다. 이 연결이 바로 평강과 행복함의 안식입니다.
평강과 행복함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연결입니다. 이러한 연결이 일어나야 안식인 평강과 행복함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이 평강과 행복함이 주어질 수 있는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42절에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의 연결을 이루게 됩니다. 이 연결이 평강과 행복함이 주어지는 안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과 마주 대할 정도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진정한 평강과 행복함의 안식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증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안식이 바로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고 관심하지 않는 것이 안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세상에 생매장된 내 마음 구조하기”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로 인격이 연결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인격의 구조를 염두에 둘 때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의 오감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피부로 촉감을 느낍니다. 이 오감은 세상을 퍼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이제 오감이 담은 세상을 의식이 마음에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은 채 방임한다면 마음은 세상의 쓰나미를 만나 묻히게 됩니다. 그래서 의식에는 제동장치가 필요합니다. 오감으로 퍼 담은 세상이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의식을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면 마음에서는 세상에 대해 좋음과 싫음을 느끼고 반응하기에 열중하게 됩니다. 싫은 것은 피하고 거부하려고 하고 좋은 것은 잡아서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 것들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오감에 담깁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식을 통하여 거침없이 마음에 전달되면 마음은 세상에 매몰되게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미신의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이 좋음과 싫음을 느낄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 삶에는 이러한 기준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나쁘다, 건강하면 좋고 아프면 나쁘다 이러한 기준들은 세상에서는 원칙처럼 작용하지만 실제로는 미신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좋음과 싫음을 느끼며 마음에 와닿는 세상 것들에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반응하며 사는 동안 마음은 정신이 없습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세상일들에 파묻혀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매몰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 세상만을 강력하게 실제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오감으로 접촉하는 세상만이 실제 대상으로 느껴지면 천국,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과 같은 사실들이 세상 쓰나미에 파묻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집니다. 종교가 말하는 상투적인 가르침 정도의 이론으로 느끼게 됩니다. 실제 삶에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전혀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도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 세상일들 또한 객관적 사실로써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감이 퍼 담고 의식이 퍼 나르는 대로 마음이 세상일을 받아들이고 좋음과 싫음을 판단하고 반응하게 되면 세상일들만을 객관적 사실로 느끼게 됩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걱정하고 관심을 갖습니다. 일이 안 풀리면 화내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또 일이 잘 풀리면 좋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마음은 세상일들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천국도 사실이고 하나님도 사실이고 세상일도 사실이지만 세상일만 현실로 느껴지고 하나님은 전설 속의 주인공처럼 현실로 와 닿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와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사실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에 묻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일들의 크기가 뒤바뀐 상태입니다. 의식이 아이맥스 영화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분으로 우주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크기가 돈 100만 원 문제보다도 작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묻힌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과 천국의 사실감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티끌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묻힌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내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와 형제자매와 친구들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내 재산과 집과 물건들과 직장과 승진은 땅에 있습니다. 이렇게 관심하는 대상들이 땅에 있기에 아무도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매몰되고 생매장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반복하여 언급하셨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된 사람들이 천국의 관점에서는 죽은 자들입니다.
전쟁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전쟁은 3차 대전이나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아닙니다. 남북의 대치 상황도 아닙니다.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여야의 진흙탕 싸움도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싸움이 가장 큰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상이 완전히 나를 생매장해 버릴 정도로 압도해버리고 정복해버리면 하나님의 존재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일 뿐이지 현실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이고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란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평강과 행복함의 안식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마치 후렴처럼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평강을 강조하셨던 것일까요?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당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폐단은 하나님의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폐단은 자꾸만 문제의식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부부간의 문제, 직장 문제, 승진 문제, 돈 문제, 재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를 끌어안은 사람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된 상태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지 평강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님, 지금 평강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평강도 따라올 것입니다.”라고 반문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주시면 되고, 승진을 못했으니 승진하게 해주시고,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시면 평강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어도 평강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마음이 생매장된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전설 속의 존재로 멀리멀리 밀쳐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향하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 또한 현실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경공부에서는 하나님이 주권자라고 배웁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다 주관하신다고 배우지만 나의 마음이 실제로 그 하나님의 주권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다는 말씀이 믿어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면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현실로 느끼는 동안에는 이 병도 하나님 주권의 표현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표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병이 치료되었다면 이 또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돈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돈이 없다가 생겼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결코 문제가 있다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된 사람들은 항상 문제의식을 갖습니다. 오감으로 퍼 담은 세상을 의식이 마음으로 여과 없이 퍼 나릅니다. 따라서 마음에서는 이런저런 세상일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생기고 그 결과 걱정도 생기고 의지와 욕구도 생겨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매몰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티끌처럼 작아지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이론상으로는 믿어질지언정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끊임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문제의식에 묶여서 해결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지옥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세상에 생매장된 마음을 구조할 수 있을까요?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본문의 시점에서는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사역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 생매장된 나의 마음이 실제로 있는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인격적으로 연결되는 안식의 상태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의식하는 동안 오감과 마음의 연결이 차단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봄과 동시에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돈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세상을 빠져나갑니다. 이제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하늘에 도착하여 하늘로 숨을 쉬게 됩니다. 그 결과 더는 돈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몸이 생매장되면 숨을 쉴 수 없어 죽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될 때 숨을 쉴 수 없기에 죽도록 괴롭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는 부분의 원문을 직역하면 위를 향해 호흡을 한다는 의미로써 마음이 유쾌하고 상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돈 문제라는 세상일에 생매장된 동안에는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돈과 연관된 상황을 오감이 퍼 담고 의식이 여과 없이 마음에 전달하면 판단과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마음은 부담을 느끼고 해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리게 됩니다. 짓눌리는 만큼 숨을 쉴 수 없고 괴로움을 느끼는 지옥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의식이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오감이 돈 문제를 담는 것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의식에서 돈 문제에 대한 차단이 이루어집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에 도달하게 됩니다.
의식으로 십자가 바라보기는 실천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 문제에 사로잡혀서 걱정과 고민이 생긴다면 의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상황을 의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문제에 생매장되었던 마음이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문제라고 느꼈던 일들이 실은 전혀 문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진즉에 뜻을 가지고 계셨던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진행되어가야 할 것이기에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해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상에 매몰된 마음을 계속 깨워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가족들과 집에서 뉴스를 보면 세상이 그대로 마음까지 들이닥칩니다. 의식의 여과작용 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세상의 소식들을 마음에 전달합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며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지만 실은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이 사실이듯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돼있는 동안에는 세상을 현실로 여기기에 하나님을 현실로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비현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는 구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기 이전에 현실의 대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를 짓누르고 있는 세상만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조차 인정받지를 못하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에 대한 이론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만 할 뿐이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습니다.
오감과 마음 사이에 작동하는 의식에서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으면 마음은 세상에 생매장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반응하는 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없는 것처럼 똑같이 취급되는 하나님을 좋아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 가겠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오감으로 담는 세상을 의식이 가로막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내가 현실로 받아들일 대상조차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기독교 종교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의식에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오감으로 퍼 담은 세상을 마음에 퍼 나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오직 이론상으로만 생각합니다. 실제로 마음이 하나님께 가고 하나님 품에 안기고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복음도 오직 이론상의 죄 사함의 사건으로만 국한시키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인격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근심하고 걱정된다면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돼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매장된 상태에서는 십자가도 하나님도 다 멀게 느껴집니다. 아득한 사실로 느껴집니다. 이것을 실제로 체크해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일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단순한 문제의식이 아닙니다. 마음이 생매장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십자가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가야겠다. 세상에 매장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도 임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루종일 사는 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피부로 촉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오감이 세상을 어떻게 퍼 담고 의식이 마음으로 세상을 어떻게 퍼 나르는지 느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상에 생매장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아도 십자가 생활화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를 붙잡는 게 의미도 있고 강력하게 붙잡을 수 있으며 붙잡는 효과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나의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세상에 의해 마음이 파묻혀 버릴 수밖에 없는 인격구조를 삶의 현장에서 시시각각 깨닫고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이 세상에 파묻혀 생매장되는 현실을 차단하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실제 대상으로 마주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며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이 이루어지면 이 세상 삶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삼아 뜻을 이루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내 마음이 생매장되는 현실을 놓치지 말고 체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되고 있는 상황을 주시하게 하여 주심으로 십자가 생활화에 효율적으로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관계하며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