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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프레소 한잔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환대는
먼 길을 돌아 부산으로 이어졌고
낯선 도시의 바람과 사람들은
오래 걸어온 나를 가만히 받아 주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파도는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거듭했고
내 안에 깊이 잠겨 있던 풍경 하나가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수면 위에 가장 오래 머문 것은
한 사람이었고
가장 먼저 그 사람에게
이 풍경에 담긴 마음을 들려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또렷해졌지만
함께 걸어갈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나는 쓰다 지운 말들 사이에서
마음의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건네는 것뿐.
그 마음을 품을지 흘려보낼지는
이제 바람의 방향처럼 그 사람의 몫이었다.
* 사람의 마음이 건너온 자리
꿈 같은 시간을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음까지 함께 돌아온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득 컵에 물을 따를 때면 아프가니스탄의 한 집에서 손을 씻게 해 주던 물 항아리가 떠올랐고, 물을 따라 주던 아이의 눈빛과 말없이 웃어주던 사람들의 잔잔한 웃음도 불쑥불쑥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별이 가득하던 밤하늘과 환대, 그리고 좁은 화장실에서 들려온 한 줄의 소리까지, 사랑받았던 그 모든 풍경은 좀처럼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났다고 해서 받은 마음까지 함께 두고 온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그 한마디는 더 자주 나를 찾아왔다.
"너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라."
정작 나는 그 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는데, 서울로 돌아오자 그 말은 내 안에 수많은 질문과 갈등을 낳고 있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내가 정말 그 말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내 안에서 무언가는 달라졌지만 선뜻 그 감정과 생각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에는 내 마음에 심긴 씨앗이 너무 소중했다.
그랗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다만 내 안에 심긴 작은 씨앗은 마음의 귀착을 향한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끝나지 않은 그 여운을 고민하고 싶어 바다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송정해수욕장 근처에 작은 숙소를 잡고 별다른 일도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을 자주 보냈다.
가끔은 커피 한 잔을 들고.
가끔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바다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지만, 지평선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답을 얻기보다 질문을 품은 채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는지.
내가 정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멀리까지는 보였지만 그 너머까지 볼 수는 없었기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그 선에 시선을 두었다.
지평선 한가운데 작은 점 하나를 정해 바라보는 동안, 아직 답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지만 삶은 그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뒤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신 있게 앞으로 걸어갈 수도 없는 그 사이에서 나는 오래 머뭇거렸다.
이상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두려움의 이유를 찾다가 납득할 만한 답이 없으면 멈추는 쪽을 택했겠지만,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온 뒤에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두려운 것은 여전했지만, 그것만으로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그 마음을 선뜻 설명할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멈췄을 텐데, 이번에는 나 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우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그 말이 가리키는 곳까지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왜 그런지는 다 알 수 없었지만, 군대에서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어느 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는 한마디를 붙들고 다시 하루를 살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앞날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하루를 지나왔고, 어쩌면 그 기억이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라’는 말은 나 같은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말이었지만, 정말 내게 주어진 말이라면 이번에도 한 번은 그쪽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다.
가고 싶어서 두려웠고, 두려운데도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마음만 먼저 저만치 가 있었다.
그래서 멀리까지 보려고 하기보다, 그날 내 앞에 놓인 만큼만 걸어 보기로 했다.
마음의 귀착이란 어디에 도착할지를 미리 아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방향이 처음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곳은 그날의 송정 바다였다.
2004년, 부산 송정해수욕장 끝자락, 죽도 앞 바다에서.
부산에 내려온 데에는 바다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성재 선생님의 소개로 조은희 이모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 번도 만나 뵌 적은 없었지만, 이모님은 오랫동안 아프간 아이들에게 축구화와 축구공을 보내며 그들을 도와오신 분이었다.
모두가 위험하다고 떠나는 땅에 남아 아이들과 공을 차는 사람이 있었고, 멀리 부산에는 그 사람과 아이들을 오랫동안 생각해 온 사람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준비해 온 작은 선물을 가방에 넣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이 지켜 온 시간이 궁금했다.
한 번도 곁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을 오랫 품게 한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먼 거리를 건너간 것은 축구화와 축구공이었지만, 그 안에는 한쪽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시간도 함께 실려 있었을 것이다.
아직 얼굴조차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름보다 그 사람이 오래 품어 온 마음이 먼저 궁금했다.
한 사람이 놓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지금의 나에게까지 닿아 움직이는 소리로 들렸고, 어쩌면 나는 그 소리를 따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을 만나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금요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조은희 이모님을 만났다.
이모님 곁에는 김태희 님이 함께 계셨다.
운전이 어려운 이모님을 위해 늘 길을 함께해 오신 분이라고 했고, 한때 여성 레이서로 활동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않은 그분에게서 왠지 부산이라는 도시의 씩씩한 기운이 먼저 느껴지는 듯했다.
인사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님은 내게 숙소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내가 송정에 머물고 있다고 대답을 듣자마자, 이모님은 다른 곳에서 지낼 것 없이 당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다음에 부산에 오면 그때 신세 질게요." 하고 웃으며 몇 번을 사양했지만, 이모님의 단단한 권유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셨다
결국 숙소를 정리하고 이모님 댁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되었다.
잠깐 인사를 드리러 왔다가 어느새 한집에서 밥을 먹고,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투리의 억양만큼이나 이곳 사람들도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모님 댁 식탁에 앉으면 이야기는 늘 내 쪽에서 시작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밥은 입에 맞는지 하나씩 물으셨고, 대답을 듣는 동안에도 밥그릇이 비어 가는 것을 먼저 살피셨다.
이모님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나'를 물어봐 준 사람이었다.
며칠 그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처음에는 거칠게 들리던 사투리도 어느새 이상하리만큼 정겨워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오랫동안 품어 온 이모님의 시간이 다시 궁금해졌다.
마음을 건네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 번 품은 마음을 오래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어느 날 이모님께 물었다.
“이모님은 마음을 어떻게 지키세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그렇게 오래 품어 오신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 마음을 어떻게 지금까지 지켜 오셨어요?”
이모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뜻밖의 말을 하셨다.
“나도 마음 잘 못 지켜.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고 감정 기복도 심해."
그러고는 수영로교회의 철야예배 이야기를 꺼내셨다.
금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예배에 가는데, 말씀이 끝나고 기도 시간이 시작되면 정필도 목사님이 두 팔을 들고 기도를 시작하신다고 했다.
“목사님 팔이 내려올 때까지 나도 기도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어. 아마 그 시간이 내 마음을 붙들어 줬던 것 같아.”
마음을 잘 지키는 분이라 생각했던 이모님도 자주 흔들린다고 했지만, 흔들릴 때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그 말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그 예배가 궁금해졌다.
“이번 금요일에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이모님은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다.
금요일 밤, 저녁을 먹고 이모님과 함께 수영로교회 철야예배에 갔다.
찬양과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다른 예배와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말씀이 끝나고 기도가 시작되자 정필도 목사님이 정말 두 팔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몇 분쯤 지나면 팔이 아파 내리시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이 목사님 곁으로 다가가 양팔을 붙들었다.
목사님은 그 팔을 내리지 않으셨고,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저마다의 자리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이 변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모님이 오랫동안 지켜 온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또 한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이모님 댁에 자주 들르던 김태희 님과 식사를 함께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가까워졌고, 자연스레 호칭을 "태희 누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누님은 "부산을 잘 모를 테니 구경시켜 줄게." 하시며 틈만 나면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달맞이길과 송정해수욕장, 오륙도와 다대포까지 여러 곳을 다녔지만, 돌이켜보면 누님이 내게 보여 준 것은 부산의 풍경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오래 다닌 가게에 들러 인사를 건네고, 아끼는 후배인 정은 씨와 윤희 씨를 소개해 주었으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안부를 나누셨다.
낯선 도시를 옆집 동네처럼 소개해 주던 다정함 덕분에, 부산은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라 다시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을 동네처럼 느껴졌다.
누님은 부산을 풍경보다 사람과 음식으로 기억하는 분이었다.
유난히 떡볶이를 좋아하시던 누님은 다대포에 가면 꼭 다리집의 떡볶이와 오징어튀김을 먹어야 한다며 나를 이끌었고, 어느 날은 점심에 대연할매떡볶이를 먹고 저녁에는 남천할매떡볶이에 앉아 있었다.
하루에 두 번 떡볶이를 먹고도 "여기는 또 맛이 달라." 하며 웃는 누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부산은 어느새 떡볶이와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도시가 되어 갔다.
이모님과 누님을 만나며 부산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참 쉽게 자기 곁으로 들이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더니, 누님은 빙그레 웃으며 "내일은 국밥도 꼭 먹어야지." 하시고는, 다음 날 오래 다니던 국밥집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부산 사람들은 국밥에 자부심이 있어."
김이 오르는 국밥이 나오자 누님은 부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란민이 모여든 부산에서는 따뜻한 국밥으로 낯선 사람의 허기를 먼저 달랬고, 그 한 그릇은 음식이기 전에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해도 그들을 향한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인사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김이 오르는 국밥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아프가니스탄의 한 집에서 두 손 위로 흘러내리던 물의 감촉이 다시 손끝에 닿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물 한 그릇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손길이었고, 이곳에서는 국밥 한 그릇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건네는 것은 달랐지만, 낯선 사람을 먼저 품는 마음은 닮아 있었다.
그날 문득, 낯선 사람을 먼저 품는 이곳의 마음이 조은희 이모님의 손을 통해 오래전부터 먼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에게까지 건너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의 길은 굽이굽이 이어졌지만 누님의 운전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코너를 돌 때마다 조수석 손잡이를 힘껏 붙들고 있는 나를 보며 누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크게 웃으셨다.
그 웃음소리마저 부산을 기억하게 하는 풍경이 되었다.
그 웃음에 전염되어 나도 따라 크게 웃었고, 창밖으로 부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얼음냉수를 마신 듯 내 안의 복잡한 생각마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이모님 댁에서 밥을 먹고 누님을 따라 사람들을 만나며 보낸 며칠 동안 부산은 어느새 바다나 풍경보다 몇 사람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집의 문을 열어 준 이모님도, 자신의 시간을 내어 부산의 길을 함께 달려 준 태희 누님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을 건네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시간은, 이미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따라가도 되는지는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다시 바라보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록이 한 페이지씩 쌓일수록 가장 먼저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늘 같았다.
물 항아리를 들고 서 있던 아이의 이야기도, 별이 쏟아지던 밤도, 좁은 화장실에서 들었던 그 한 줄의 소리도 그 사람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었다.
한 사람을 향해 가는 마음과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는 소리.
둘은 아직 하나의 길로 이어지지 않은 채 내 안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은 한 사람이 더 가까웠고, 어느 날은 그 한마디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그 둘이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한 채 거제도와 제주도를 지나, 집을 떠난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상계동으로 돌아왔다.
앞날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마음의 움직임이 부산의 사람들을 지나, 어느새 나를 한 사람 앞까지 데려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