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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프레소 한잔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환대는
먼 길을 돌아 부산으로 이어졌고
낯선 도시의 바람과 사람들은
오래 걸어온 나를 가만히 받아 주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을 잃었는지보다
무엇이 내 안에 남아 있었는지를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하며
풍경을 하나씩 수면 위로 데려왔다.
그 수면 위에 가장 오래 머문 것은
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이 풍경과 이 마음을 들려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계절처럼 또렷해졌지만
함께 걸어갈 길은 아직 안개 너머에 있었고
나는 쓰다 지운 말들 사이에서
바람이 걷히기를 오래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건네는 일뿐
그 마음을 품을지 흘려보낼지는
이제 내 손을 떠난 그 사람의 몫이었다.
사흘의 침묵 끝에
그녀가 건넨 대답은 짧았지만
나와 너를 향하던 두 길은
그날부터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온 소리는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았고
그 소리를 따라 걷던 길은 어느새
함께 걷는 우리의 발걸음이 되어 있었다.
* 늦지 않았어, 한나라는 대답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문득 컵에 물을 따를 때면 손을 씻게 해 주던 물 항아리가 떠올랐다.
물을 따라 주던 아이의 눈빛도, 말없이 건네던 사람들의 잔잔한 웃음도 좀처럼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사랑받은 풍경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대와 별이 가득하던 밤하늘, 그리고 화장실에서 들려온 그 한 줄의 소리는 이미 내 안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있었기에, 아프가니스탄을 떠난다고 그 소리까지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발걸음은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무엇이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인지 그 복잡한 심정을 선뜻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여운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송정해수욕장 근처에 숙소를 잡고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을 자주 보내곤 했다.
그곳에서야 나는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소리와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지평선을 바라보는 시간은 어느새 내 일상이 되었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그 바다를 다시 찾았다.
그날 이후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작은 방 벽에 선 하나를 그어 두었다.
그 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다시 송정의 지평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곤 했다.
부산을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뒤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던 마음을 바다 곁에 잠시 내려놓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이성재 선생님의 소개로 조은희 이모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모님은 오랫동안 아프간 아이들에게 축구화와 축구공을 보내며 그들을 도와오신 분이었다.
위험하다고 모두가 떠나는 땅에도 끝내 아이들과 공을 차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곁에는 오랫동안 축구화와 축구공을 보내며 말없이 마음을 보태 온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진 분일까.
먼 거리를 건너간 것은 축구화와 축구공이었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오랜 시간도 함께 건너가고 있었다.
그 시간은 어떤 결을 품고 살아왔을까.
이름보다 마음이 먼저 궁금해지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준비해 온 작은 선물을 들고 그 궁금함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금요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처음 인사를 드렸다.
이모님 곁에는 김태희님도 함께 계셨다.
운전이 어려운 이모님을 위해 기꺼이 길을 함께해 오신 분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여성 레이서로 활동하신 분이기도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날의 만남은 훗날 부산을 낯선 도시가 아닌 또 하나의 고향처럼 기억하게 되는 첫 장면이 되었다.
처음 만난 이모님은 다른 곳에 머물지 말고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하셨다.
나는 웃으며 "다음에 부산에 오면 그때 신세 질게요." 하고 말씀드렸지만, 이모님의 단단한 권유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숙소를 정리하고 일주일 동안 이모님 댁에 머물게 되었다.
성격이 소탈한 이모님은 식사 때마다 내 이야기를 먼저 물으시고,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담담히 들려주셨다.
낯선 사람을 오래 아는 사람처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집 식탁에서 배워 갔다.
집에 자주 들르던 태희 님과도 식사를 함께하며 가까워졌고, 자연스레 호칭을 "태희 누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누님은 "부산을 잘 모를 테니 구경시켜 줄게." 하시며 틈만 나면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달맞이길, 송정해수욕장, 오륙도 스카이워크, 황령산 터널, 봉수대 전망대, 다대포까지.
누님은 풍경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먼저 소개해 주셨다.
오래 다닌 가게에 들러 인사를 건네고, 아끼는 후배인 정은 씨와 윤희 씨를 소개해 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안부를 주고받았다.
낯선 도시를 옆집 동네처럼 소개하던 그 다정함 덕분에 부산은 여행지가 아니라, 문득 다시 돌아오고 싶은 동네가 되어 갔다.
누님은 부산을 풍경보다 사람과 음식으로 기억하는 분이었다.
유난히 떡볶이를 좋아하셔서 다대포에 가면 꼭 다리집의 떡볶이와 오징어튀김을 먹어야 한다며 나를 이끄셨고, 그날을 시작으로 부산 떡볶이 투어가 시작됐다.
점심에는 대연할매떡볶이, 저녁에는 남천할매떡볶이.
하루에 두 번 떡볶이를 먹고도 "여기는 또 맛이 다르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누님의 표정을 보며, 나는 부산 사람들의 정다움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딱딱한 말투와 사투리의 억양 때문에 부산 사람들은 강하고 거친 인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누님은 부산에 왔으면 국밥도 꼭 먹어야 한다며 오래 다니던 국밥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부산 사람들은 국밥에 자부심이 있어."
누님은 국밥을 앞에 두고 부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든 부산에서는 국밥 한 그릇이 허기를 달래는 음식이자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마음이었다.
김이 오르는 국밥을 앞에 두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아프가니스탄에서 손을 씻게 해 주던 물 항아리가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물 한 그릇이 먼저였고, 이곳에서는 국밥 한 그릇이 먼저였다.
건네는 것은 달랐지만, 낯선 사람을 먼저 품는 마음은 닮아 있었다.
그날 나는 국밥의 맛보다, 한 그릇으로 낯선 사람을 맞아 온 부산의 마음이 먼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에게까지 닿아 있다는 사실을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부산의 길은 굽이굽이 이어졌지만, 누님의 운전은 그 길만큼이나 거침이 없었다.
카레이서로 오래 살아온 몸은 코너마다 망설임이 없었고, 나는 어느새 조수석 손잡이를 힘껏 붙잡고 있었다.
내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누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크게 웃으셨고, 그 웃음소리마저 부산을 기억하게 하는 풍경이 되었다.
나도 그 웃음에 전염되어 함께 크게 웃었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부산의 바람은 내 안의 복잡한 긴장마저 시원하게 흩어 놓는 듯했다.
부산 송정해수욕장에 머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산 사람들도 사투리처럼 투박하고 거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을 통해 만난 부산은 따뜻하고 다정한 도시였다.
집의 문을 열어 준 이모님.
시간을 내어 길을 함께 달려 준 태희 누님.
그들의 마음을 만나고 나니 부산은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바다보다 먼저 사람의 온기가 떠오르는 곳.
그 일주일 동안 내가 만난 부산은 그런 도시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환대는 부산에서도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만나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품은 채 거제도와 제주도를 지나, 집을 떠난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상계동으로 돌아왔다.
한 달이면 충분할 여정이 다섯 달이 된 것은 여행이 길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곧장 집으로 향하지 못한 것은 전역 후 대학교에서 만난 한 사람이 자꾸 떠올랐고,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보낸 일주일은 아프가니스탄의 여운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었지만, 정작 정리된 것은 여행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사람들을 통해 내 마음을 비추어 주었고, 그 끝에서 가장 선명하게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쁜 일정과 긴장 속에서도 늘 노트와 펜을 챙겨 기록을 남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여행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시작한 기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기록은 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마음이 한 사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마지막 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문장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또 하나의 방향을 남긴 것이다.
"너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라."
그 한마디는 여행의 끝에서 들려온 말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첫 부름이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도,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는 그 소리도 분명했지만 그 두 길을 어떻게 함께 품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흘러가 버리기엔 너무 소중한 감정과 생각들이 있었고, 나는 길 위를 걸으며 그것들을 천천히 정리하며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단지 보고 싶었다는 마음만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삶을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촘촘히 적어 내려간 기록을 다시 펼쳐 보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 별이 가득하던 밤하늘, 부산의 바다, 그리고 그 사이사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 사람.
그 기록들은 여행을 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한 사람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제야 왜 그토록 기록을 붙들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진짜 사랑하고 있구나."
계획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나는 한 사람에게 함께 가자고 말해야 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나도 알지 못한 채.
마음은 이미 결론에 도착해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깔린 길목에 선 사람처럼 오래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말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짧은 순간에도 괜히 손끝에 힘이 들어갔고, 수없이 머릿속으로 연습했던 말들이 막상 전화를 걸려 하니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울렸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준비해 두었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있었어요?"
잠깐의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야 겨우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저는 여행 잘 다녀왔어요. 은정 씨 드릴 것도 있고... 시간 괜찮으면 내일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가 한솔교육에 다녔기에 우리는 제기동역 6번 출구에서 만나 경동시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 안쪽에 있는 용두동 나정순 할매쭈꾸미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 당일, 바람이 불어와 외투를 여몄다.
주머니에는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수첩이 들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향해 걸었다.
제기동역 앞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 사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베이직 톤의 모던 오피스룩 정장을 입은 그녀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떨리던 입술과 손끝은 이상하게도 그녀를 보는 순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고, 오래 기다려 온 사람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그녀의 미소가 조용히 내 마음을 적셨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시간도, 부산과 제주도를 떠돌던 시간도, 수첩 가득 적어 내려간 기록들도 결국은 저 사람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떨려 오던 마음은 여전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정직하게 전하는 것뿐이었고, 그 마음을 받아들일지 다른 선택을 할지는 그녀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 한편이 조금 가벼워졌다.
은정 씨와 마주 앉아 쭈꾸미를 먹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와 음식, 이성재 선생님을 만난 일, 현지 가정에서 겪은 이야기까지 하나씩 꺼내 놓다 보니 그녀의 지난 시간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오 개월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당을 나와 용두초등학교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청계천 복원 공사 펜스가 길게 이어진 길 위로 저녁빛이 골목 사이에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고, 도시의 숨결은 노을빛과 뒤섞여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그렇게 용두동의 저녁길을 한참을 걷다가, 그 길 위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은정 씨."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하나님이 은정 씨에게 주신 마음이 있나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은 이상할 만큼 길게 느껴졌고, 잠시 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사흘 뒤에 다시 만나요."
대답 대신 사흘이라는 시간을 건네받았다.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하며 틈틈이 적어 둔 글이니 집에서 천천히 읽어 보라고 말하며 수첩을 건넸고, 선물이라기보다 내 마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전하고 싶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오늘은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120번 버스를 타고 중화동 집으로 향했고, 나는 상계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길게 느껴졌던 적막 끝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종로3가 단성사에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짧게 "좋아요"라고 답했다.
토요일 오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쓰고 마음을 다잡아 집을 나섰다.
사흘 동안 별일 아닌 척 지냈지만 사실은 그녀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통바지에 바다색 브이넥 상의를 입고 걸어왔다.
밝은 얼굴이 바다색과 잘 어울려,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오늘, 옷이랑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녀는 잠시 웃더니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 하나에도 아직은 조심스러운 거리가 남아 있음을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썬키스트 오렌지와 칸타타 캔커피, 꼬깔콘을 손에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스크린에서는 형제의 관계를 통해 전쟁의 비극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영화보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지, 그리고 사흘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처음의 어색함도 조금씩 풀려 가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바람이 살짝 스치는 길을 따라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으로 걸으며 나는 조용히 물었다.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었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숨을 길게 들이켰다.
"두 대사가 특히 남았어요."
그녀는 잠시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 진태(장동건)가 진석(원빈)에게 '꼭 한명만 살아야 한다면 그게 네가 되길 바라고 노력하는 거뿐이야.'라고 하잖아요."
"그 말 듣는데 갑자기 당신이 아프가니스탄에 갔을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9·11 테러 이후 가장 위험한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신은 그곳에 들어가는 첫 번째 외국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사흘에 한 번씩, 처음으로 텅 빈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안전을 비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잠깐의 침묵 속에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몇 걸음 더 걸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문득 내 이름을 ‘은정’에서 ‘한나’로 바꾸라는 마음이 스치는거에요.
혼자 교회에 가는 것도 낯설어서 그냥 이상한 생각이겠거니 하고 넘겼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당신이 ‘혹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마음이 있나요?’라고 묻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말문이 턱 막혔어요.
그 후에 당신이 건넨 수첩을 읽다가 당신이 지나온 여정과 그곳에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걸 느꼈지요.
그래서였는지 왠지 모르게 울컥하더라구요.”
길모퉁이에서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낮게 입을 열었다.
“오늘 영화에서 제일 울림을 준 대사가 있었어요. ‘지금이라도 같이 돌아가자. 늦지 않았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나는 '한나'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부정했거든요."
"그런데 그 대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사이, 당신과 떨어져 있던 오개월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이 한 편의 필름처럼 쭉 지나가더라고요.정말 늦지 않았다면, 당신과 같이 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잠시 눈을 감고 결심했어요.
내 이름을 ‘한나’로 하겠다고.”
그리고 아주 나지막이 덧붙였다.
“당신에게 주신 마음… ‘너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라.’ 그 일, 우리 같이 해요.”
아프가니스탄의 시간 이후, 나는 타이밍을 묻기 시작했다.
타이밍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빈칸 앞에 서서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기다림을 배우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하나님께도 나 자신에게도 타이밍을 물었다.
나는 옳다고 판단되면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지만, 타인은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다림을 배웠다.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서두르지 않고, 질문으로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 또 나보다 타인을 더 아낀다는 마음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스스로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마음을 내보였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엇갈린 매듭을 다시 고쳐 묶었다.
마지막 단추를 끼우듯,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래서 평생의 인연으로 묶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닿았다.
나는 내 틀을 넘어 타인에게로 걸음을 옮겼고, 그 선택이 진심이라면 그다음에는 자유가 따라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의 책임은 내 마음을 정직하게 나누는 데까지였다.
한나도 그만큼을 내어놓았다.
우리는 각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 필요를 서로 채워 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어진 자리에서 느슨했던 매듭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2004년 10월 9일 오전 11시 30분, 우리는 언약으로 부부가 되었다.
이후 석 달 동안 지도를 펼쳐 우르두와 힌디어, 그리고 영어가 뒤섞여 흐르는 인도를 살폈고, 2005년 1월 10일, ‘나’와 ‘너’에서 ‘우리’가 되어 새로운 인생으로 출발했다.
단추는 채워졌고, 끈은 단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늘의 한 걸음과 내일의 한 걸음을 함께 내딛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