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8월 24일 새벽, 루브르 궁전을 마주 보고 있는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이 때부터 수많은 사람이 파리 곳곳에서 살해당했다. 시신들은 옷이 벗겨진 채 산처럼 쌓이거나 센 강에 내던져졌다. 참혹했다. 학살은 수일간 계속되었으며 루앙, 리옹, 오를레앙 등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희생자 수는 파리에서만 적어도 수천 명에 달했다. 죽임을 당한 자들은 주로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들이었다. 이들은 며칠 전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라의 왕 앙리와 프랑스의 공주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에 온 하객들이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아 제네바로 피신한 신교도 화가인 프랑수아 뒤부와는 이 비극의 주요 장소를 한 폭의 그림(로잔느 주립 미술관 소장) 속에 담았다. 학살을 기록한 매우 드문 그림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150명 이상이 등장한 장면 속에 임산부와 유아 살해 등 끔찍한 참상들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가령 왼쪽에는 지금은 사라진 그랑조스탕 수도원, 센 강과 므니에 다리가 있고 그 옆으로는 루브르 궁전 앞에 학살의 주모자로 지목된 검은 옷의 대비 카트린 드 메디치가 서 있다. 또한 정면의 건물에서 신교도의 수장인 콜리니 제독이 살해되어 창문으로 내던져지고 목이 잘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은 점차 유럽 전역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안 세력, 즉 프로테스탄트 내지 신교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칼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위그노가 득세하면서 급기야 왕위 계승과 정치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카트린 드 메디치는 콜리니를 비롯한 신교도의 핵심 인사 몇몇만을 제거함으로써 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나, 종교적 증오심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위 그림과 같은 무자비한 학살을 초래했다.
유럽에서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이 자리 잡는 것은 백여 년간 지속된 종교전쟁의 값비싼 희생을 치른 후의 일이다. 이런 참극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 그림은 역설적으로 관용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경일 경성대 인문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