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225
동봉
제8장.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한 선배 스님이
우리절을 찾았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스님이신데
중앙승가대는 한참 후배이지만
해인승가대가 한 해 빠르기에
나는 늘 선배 스님으로 부릅니다
대학 선후배는 따지지 않아도
어려서 함께했던 초등학교나
사춘기를 지내온 중고등학교는
선후배를 많이 따지잖습니까
"스님, 이순耳順고개 올랐지요?"
"웬걸요 선배 스님. 예순셋입니다."
"그래요. 그럼 나보다 많으시네."
"그렇게 되었나요?"
"난 쉰여덟이니까."
"절집 안 시주물만 축냈지요 뭐~"
"그래도 스님은 책을 많이 내셨지?"
"네, 선배 스님. 몇 권 안 됩니다."
"아니, 내가 알기로는 한 60권쯤 되던데~"
"네, 선배 스님 뭐 그쯤."
이 나이쯤 되면 할 말이 많기도 하고
또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가까이 지내면 수다라도 떨지만
십여 년 넘어 만났으니
기껏해야 나이 묻고
덧붙여 건강이나 묻는 정도라
서먹서먹할 수밖에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럼 동봉 스님. 생일은?"
내가 웃으면서 되물었습니다
"선배 스님께서 생일까지 챙겨 주시게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11월 22일입니다. 음력이고요."
"그럼 스님 지금 만예순 하나네
게다가 동문 수첩에서 보니까
1955년생으로 되어 있던데
그리 따지면 만으로 쉰아홉인데~
나는 1958년 정월생이라
나하고 두 살 차이구먼그래."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금강경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그는 계속 뭐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위 말씀으로 꽉 찼습니다
칵테일 파티 효과인 셈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만 듣고
무관심한 것은 흘려버리는
칵테일 파티 효과가 분명했습니다
'만삼천대천세계'의 '만滿'은
가득함을 뜻하는 '찰만'이라 풀며
제 돌이 꽉 찬 것을 나타냅니다
왜 돐이라 하지 않고
ㅅ을 뺀 돌이라 하느냐고요
날카로우십니다
예전에는 생일을 돐이라 했는데
요즘은 그냥 돌로 쓰더라고요
언어도 변천하니까 말입니다
'헬게란드의 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슈뢰딩거 아인슈타인 등
선배들과의 설전에서 패배한 뒤
며칠 동안을 숙고한 끝에
원자의 행렬 역학을 끝냈지요
전통수학으로서는
원자의 세계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전통수학에서는 순서와 상관없이
같은 답이 요구되지만
원자의 세계에서는 순서에 따라
답이 완벽하게 달라집니다
새로운 순수수학이어야 가능합니다
전통수학에서는
3×4와 4×3은
어느 쪽이든 같은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자에서는
3×4의 답과 4×3의 답이 다릅니다
바로 순서 때문입니다
원자의 위치에서 보느냐
원자의 운동량에서 보느냐에 따라
요구하는 답이 달라집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같은 3×4와 4×3의 순서라 해도
관측하고 계산한 시차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헬게란드 언덕에서
그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습니다
환희에 찬 하이젠베르크는
깨달음의 세계를 명명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라고요
아직까지 하이젠베르크의
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건재합니다
닐스보어도 한 때는
하이젠베르크의 반대쪽에서
끊임없이 비판을 제기했으나
물리학에서 차지하는
하이젠베르크의 위치는 견고합니다
다문제일 아난다 존자가
최초 결집에 해당하는 500결집에서
결집대회장 가섭존자로부터
참여자격을 박탈당하고 밀려납니다
그는 그 길로 계족산에 올라가
눈물을 머금고 정진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쩌면 아난다 존자가
계족산에서 느낀 깨달음의 환희와
2,500년 뒤 하이젠베르크가
헬게란드 언덕에서 느낀
깨달음의 환희가
똑같았을 것이라 나는 보는데
그게 뭐 문제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삼천대천세계칠보"는
읽는 자에 따라 달리 이해됩니다
비록 같은 문장이라도
어디서 끊느냐가 중요하고
동사를 목적어 뒤에 붙이느냐
목적어 앞에 형용동사로 놓느냐
그리고 주부와 술부는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지므로 숙고해야 합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하느냐
이미 꽉 차있는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보시할 것이냐
수평水平Horizontality이란
물의 평평한 상태이며
지구 중력과 직각이 되는 방향입니다
온도 상황에 따라
물은 액체 기체 고체를
나타내는 변신의 귀재입니다
0°C에서 100°C 사이는
물의 기본 틀인 액체이고
영하로 떨어지면 고체가 되고
100°C부터는 기체가 됩니다
라오쯔老子(B.C571~B.C531)도
물을 비유로 들어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했고
불교에서도 최상의 법은
물氵의 흐름去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울기의 평형을 맞출 때
액체로서의 물이 기준이 됩니다
찰만滿자는 물의 수평입니다
물氵이란 좌우대칭㒼을 이룹니다
물을 땅에 부으면
땅속으로 스며들지요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은 속속들이 스며들며
밖으로 채워나옵니다
평평함㒼은
기다란 호스에 담긴 물이
양쪽에 똑같은 수준水準이 될 때
수평을 이루었다 합니다
물은 땅一 아래丅로 스며들되
주어진 빈틈帀을 모두 채웁니다
스며들入고 스며들入어
더 이상 스며들 곳이 없을 때
물은 차고 넘치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이처럼 칠보로 가득 채운다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틈새까지
완전하게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것을 보시한다면
복덕이 꽤 크겠지요
당연히 클 수밖에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덕은
복덕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비복덕非福德에 연결된 성性입니다
비복덕의 성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경전에서의 즉비복덕성이란
곧 복덕성이 아니라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느닷없이 무슨 말입니까
다들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신다며
풀이하고 있습니다만
복덕의 세계는 비유를 들면
원자Atom의 세계와 같습니다
따라서 복덕과 비복덕성이 아니라
복덕과 비복덕의 성입니다
복덕은 관찰하지 않을 때는
복덕의 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덕을 관찰할 때
복덕은 비복덕의 성으로 바뀝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야무진 수보리 대선배님께서
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원자의 이중 슬릿Slit
통과 실험을 하지 않았다 해서
부처님의 생각과 수보리의 생각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용어는 비록 다르다 해도
이중슬릿 실험에서 드러났듯이
복덕과 비복덕의 성은
사실은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이중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던
원자 양자 또는 광자가
관심을 갖고 관측할 때는
오직 하나의 슬릿으로만 통과하듯이
복덕에 관심을 가지면서
복덕은 비복덕으로 성질을 달리합니다
특이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 내용이
2,500년이 흐른 뒤
물리학자들의 실험에서 증명됨이
이 어찌 멋지지 않습니까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복덕은 곧 비복덕의 성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했을 때
이해시키기가 실로 어려운 것입니다
게다가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다
그러기에 복덕이 많다고
여래께서는 말씀하신다."로 풀이한다면
<성性>의 세계가
복덕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가
복덕이 아닐 때는 슬며시 따라붙는다는
그런 어떤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나는《금강경》을 읽으며
정말이지 엄청난 환희를 느낍니다
복덕의 세계는 거시세계에서
아주 작은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전체에 걸려 있습니다
이른바 삼천대천세계라는
거시세계에 집착하다 보면
실로 복덕과 비복덕의 성이라는
미시세계를 모르고 넘어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꽉 찬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서
(어느 누군가에게)보시했을 때
그가 얻는 복덕이 클까요 작을까요
그가 얻는 복덕이 많을까요 적을까요
3×4는 열 둘이요
4×3은 스물 하나로다
08/13/2015
곤지암 우리절 선창에서



첫댓글 물氵이란 좌우대칭㒼을 이룹니다
물을 땅에 부으면
땅속으로 스며들지요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은 속속들이 스며들며
밖으로 채워나옵니다
평평함㒼은
기다란 호스에 담긴 물이
양쪽에 똑같은 수준水準이 될 때
수평을 이루었다 합니다
물은 땅一 아래丅로 스며들되
주어진 빈틈帀을 모두 채웁니다
스며들入고 스며들入어
더 이상 스며들 곳이 없을 때
물은 차고 넘치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3*4
4*3
이 틀린다.
아난존자의 깨닭음과 일치한다.
새로운 것을 알았읍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