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곳이 특히 순교 성지 또는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미리내로 옮겨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지시에 의해 당시 교회 법원 판사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르) 신부와 서기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신부(1911년 주교로 서품) 등이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옮겨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도착,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이와 함께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한편 1876년 6월 24일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 성인의 유해가 용인 먹방이(용인시 이동면 묵리)에서 미리내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 내에 조성된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성인으로 시성된 지 2년 뒤인 1986년 12월 20일 대구대교구 발굴단에 의해 대구 관덕정 기념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 무렵에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시신도 그 인근에 안장되었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의 유해가 현재와 같이 경당 옆으로 이장되었다.이어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4월 23일에는 음다라니(응달 아니, 응다라니, 용인시 양지면 대대리)에서 12구의 순교자 시신이, 12월 17일에는 시봉골(또는 서봉골, 용인시 수지구 신 봉리)에서 4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미리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위치한 이 산골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 교우들이 옮겨와 안장한 후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성지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된 곳이다.천주교가 이 지역에 전파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846년 한강변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이곳 신자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등 여러 교우들이 옮겨 와 안장한 것으로 보아 이미 그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리내에 공소가 개설된 것은 프랑스 선교사가 작성한 경기도 교세 통계표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1884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이민식 빈첸시오의 기록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 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 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 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 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외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 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 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하여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2. 두 번째 간 곳 : 은이성지 (골배마실)
성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의 요람지
은이 마을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은이 공소는 1836년 4월, 조선 최초의 선교사 프랑인 모방 신부가 소년 김대건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이다.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조부 김택현을 따라 솔 뫼에서 이사와 15세 때 마카오로 떠나기 전까지 수년 동안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 마을에 이웃한 은이 마을은 김 신부가 서품을 받고 귀국한 뒤 공소를 차린 곳이다. 김 신부의 첫 사목지로서 일찍부터 복음이 뿌려진 은이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가 사목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연말까지 약 2개월간 서울 일대에서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보좌하여 활동하다가, 1846년 초부터는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와 동생 김난식(金蘭植, 프란치스코)이 살고 있는 ‘은이’로 가서 부활 대축일까지 약 4개월 동안 기거하면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은이’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 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 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밤에 험한 산길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곧이어 조선에 입국하게 될 메스트르(Maistre, 1753~1821, 요셉)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가 맡겨졌다.
은이 마을은 한 이형(韓履亨, 병심, 1799~1846, 라우렌시오) 성인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대들보에 매달아 심한 매질과 다리를 묶고 두 발 사이에 깨진 사기그릇의 작은 조각들을 끼우고 다리에 굵은 밧줄을 감고는 앞뒤로 번갈아 가며 잡아당겨 톱질을 하여 살을 으스러뜨렸다.
이 참혹한 형벌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자 포졸들은 감화를 받아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도 정말 천주교인이 되려거든 한이형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고문을 치른 후에 한 라우렌시오는 포졸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9월 20일에 4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교하였다.
■ 순교자
◆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 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생애>1821년 8월 21일 : 출생
1836년 4월 :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
1836년 12월 2일 : 동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순명과 복종 서약 후 마카오로 출발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1841년 11월 : 철학과정 이수, 신학과정 입문
1844년 12월 : 최양업과 함께 삭발례부터 부제서품까지 받음
1845년 1월 1일 : 조선교회 밀사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
1845년 3월 : 서울에서 신학생 2명을 지도함
1845년 4월 30일 : 선교사 영입 위해 제물포 출발
1845년 8월 17일 : 상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년 11월~1846년 4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
1846년 4월 13일 :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울로 출발
1846년 6월 5일 : 인천 앞바다 순위도에서 체포됨
1846년 9월16일 :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년 9월 23일 : 가경자로 선포됨
1925년 7월 5일 :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됨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됨
◆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1846)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 타 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모든 교우들이 더욱 깊은 인내심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골배마실)
골배마실은 김제준 성인과 성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 뫼를 떠나 정착한 골배마실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1836년 이웃 은이 공소에서 세례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 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으로 알려졌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 리인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金濟俊, 보명 濟麟, 1796~1839, 이냐시오) 성인과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며, 1805년 다시 붙잡혀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再福)이라는 아명(兒名, 어릴 때 이름)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지내다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金澤鉉, 宗元)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한덕골로 내려오기 전에 이보다 더 험준한 인근의 광파리골에 살았고, 그 후 한덕골에서 다시 인접한 굴암(구람)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 일대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1836년 4월 이웃에 있는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836년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9년 만인 1845년 10월 국내에 잠입한 김 신부는 비로소 자신이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하였다. 귀국 후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첫 사목 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 비로서 하늘에서는 (골배마실에서) <김영수> ▒
한 처음에 말씀 있어
그 사랑을 달리던 소년 하나
목말라 가슴 뛰는 노래로
지금도 이곳 골짜기 밝힙니다.
멀리로 떠나는 날개 큰 새들은
흰 구름 끌며 지평선을 날고
소년은 달리고 달려마침내 새남터의 부활에 닿습니다.
세상에는 나 때문에 서러워진 이웃 있어
아픈 추억으로 소년따라 달릴 때
비로소 하늘에서는
나를 용서하는 폭설 내리는 것입니까
나는 언제 허둥대지 않고
고요한 눈빛으로 소년에 닿을까요
뜨거운 기도로 청년에 닿을까요
그리고
영원한 숨결로 하늘에 닿을까요
■ 순교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3. 세 번째 간 곳 : 복수동 성당(미사)
병인박해 때 집중적으로 순교자를 배출한 수원성 곳곳의 순교 터
수원 지방의 순교자들은 뮈델 주교의 《치명일기》에 의하면 33명 이상이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나오는 순교자만 해도 64명이다. 이들 중 중복되지 않고 순수하게 기록에 남은 병인박해 순교자가 77명, 그리고 1817년 샘골의 순교자 이용 빈을 합쳐서 최대 78명이다. 순교 형태도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 참수, 교수형 등 다양하다.
2000년 대희 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는 수원 화성의 중심인 북수동 성당(구수원 성당)을 수원 화성에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78위의 순교자들과 수많은 무명 교자들을 현양하는 성지로 선포하였다. 북수동 성당은 수원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이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치명한 중영(中營, 摠理營)터와 일부 겹쳐진다.
수원 지역에는 1801년 이전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1801년 신유박해를 계기로 서울, 광주, 내포 등지로부터 신자들이 숨어들어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병인박해 때 집중적으로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수원의 순교지는 북수동 성당 자리가 포함된 중영, 이아(貳衙, 화청관), 감옥, 동남각루, 남암문, 팔달문(남문) 밖 장터, 장안문(북문) 밖 장터 등 7~8군데로 확인되고 있고 그 외에도 사형터(화령전과 화서 문 사이), 종로 사거리, 동장대(군사 훈련장)에서도 공개 처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4년부터는 남수리 황학정 정자와 그 대지 800평을 사들여 공소 강당과 화양학교를 개설하여, 남녀 아동 200여명을 교육하다가 1906년 북수리(현 북수동 성당 자리)의 세칭 팔 부자 집이라 불리운 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를 매수하여 본당 창설 기지를 삼았다.
1930년 폴리(Polly, 沈應榮, 1884~1950, 데시데라토) 신부가 부임하고 나서부터 재임 18년간 수원의 천주교회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에 심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원조와 그의 모친이 삯바느질로 모아서 보내 준 돈으로 기와집 성당을 헐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고딕식 성당(75평)을 신축하였다.
1934년 학술 강습회 소화학원을 개설하였고, 해방 후 1946년 소화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1976년 구식의 석조 사제관을 헐고 다목적 사제관을 다시 건립하고, 1979년 4월 5일에는 40년 묵은 옛 고딕 성당을 철거하고 연건평 236평의 주교관(主敎冠) 모양으로 된 새 성당을 준공 축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