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원초옥(松睡園草屋)
박주병
평생소원이 정원 딸린 집에 사는 것이었는데
월급쟁이 삼십년을 절반은 곁방살이
절반의 절반은 건평 열다섯 평 한옥
그 집을 계약하고 며칠을 못 참아
밤마다 도둑고양이가 되어 찾아와
담 너머로 불빛을 훔쳐봤었지
고향에서 농협창고를 짓는다고 해서
부득불 쥐꼬리만 한 위토를 떼서 주고 생긴 돈을
집 사는 데 보태라고 아부지가 준 거에다
7년 간 적금 부은 걸 합친 것이
열다섯 평 한옥이 된 거다
사 모녀 단간 셋방살이를 면하고 아들을 낳고 나니
손자 보신다며 부모님이 내게로 오셨다
부모님 뜻에 따라 하나 더 낳았더니 낳고 보니 딸이라
아홉 식구에 고향에서 손님이 하나라도 오면 열이다
그래도 방 하나는 세를 놓으니
나도 이럴 때가 있는가 싶었다
공무원 했다 하면 도둑놈으로 보다가도
한직의 청빈을 업신여기는 세상인심
달구 벼슬 같은 벼슬, 구실아치 같은 자리
가정 통신문인가 뭔가 하는 데서 학부모 직업을 묻기에
공무원이라 적었더니 이튿날 다시 구체적으로 적어 오란다
특수직이라서 못 밝힌다 하여라 하였었지
아이는 애비 벼슬이 대단한 줄 알았겠고
아하, 선생은 내가 정보부 같은 데 다니는 줄 알았겠지
털면 먼지 안 나는 놈 없다지만 글쎄
내가 도둑질을 했던가 훔칠래야 훔칠 것도 없었는데
이십 년을 먼지도 그러모아 예순넷 평 집터를 샀더니
하룻밤 자고 나면 땅값이 올라
아침에 세수를 하면 얼굴이 부듯하였다 청천벽력,
도시계획으로 집터가 헐값에 수용당하고
가슴에 울화가 치밀어 한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사무관 서기관 때도 도시락 들고 다니고
부모님 용돈에 인색하고
아내 옷 한 벌 안 사 주고
큰딸 수능시험 보는 날 아침에도 버스를 갈아타고
적금 들고 또 들고 또 들고
식칼로 도려낸 내 넓적다리 살 같은
쇠고기 덩어리를 신문지에 싸 가지고
아침 일찍 동장한테 청을 넣어 마을금고에 돈을 꾸고
한옥을 팔아 합쳐서 2층 양옥을 샀다 그때 아부지 하시던 말씀,
“공무원이 집이 너무 호화롭다.” 어매 하시던 말씀,
“돌집일쎄! 중앙청이다.” 노인당에 나가면 아들이 뭐하냐고 물을 때
서슴없이 판사라고 거짓말을 하셨던 우리 어매가
아들이 고등고시 공부할 때 산에 나무를 하셨지
한옥에서 키 큰 아부지 다리도 제대로 펼 수가 없다가
내가 오십이 되어서 효도 한 번 하는구나 싶어 몰래 나는 울었었지
2층은 세를 놓았으니 절반은 남의 집
통째로 내 집이 되기엔 십 년이 더 걸려 환갑쯤 해서다
마당에서 딸아이들이 겨우 배드민턴을 칠 수가 있었는데
어쩌자고 딸아이 대신에 나무가 빽빽하다
그 중에도 매화가 네 그루 소나무가 네 그루
자식 같다
당호를 전기(田琦)의 그림처럼 매화초옥(梅花草屋)이라 하다가
자존심이 상해 나대로 송수원초옥(松睡園草屋)이라 한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사십여 년
새끼들은 다 나가고 늙은이만 둘이 남았는데
나는 어디, 너는 어디
어제는 어디, 오늘은 어디
사람은 사람대로 집은 집대로
한군데도 빤한 날이, 성한 곳이 없다
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내가 가고 나면
이 고가古家는 어찌 될꼬
매화는 어찌 되고 솔을 또 어찌 될꼬
고인은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이라 했지만
나는 나무를 그러안고 부질없이 운다
내 이미 인생사 속절없음을 알았는데
남은 세월에 뭘 더 바라랴만
부모님께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빠닥빠닥한 새 돈으로 바꿔서 세어보지도 않고
용돈 한 번 푹 집어드리지 못 한 것이
못한 것이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해가 바뀌자마자 초봄부터 이별이라니,
매화가 다 지고 송수원엔 소나무가 졸고 있는데
바람이 제집인 양 제멋대로 들락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