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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예배에 미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1) 글쓴이:?
예배에 미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1)
1) ‘굿’화한 예배
교회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소집된 회합 혹은 단체를 가리킨다”는 뜻이며, 보편적 교회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같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임명된 직원들의 지도 아래 예배와 봉사의 목적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조직된 모든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이십오장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여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내적으로 비밀된 선택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를 갖고 있는 반면, 외적으로는 분명히 세상이 알아볼 수 있는 특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김의환은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굿’터가 되고 목회자는 무당화된 것 같이 여겨지는 곳도 있다. 물론 개혁-장로 교단에 속한 교회야 그럴 리 없지만 자칭 교회라고 칭하는 곳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러한 교회의 성도들은 목사가 영험 있는 무당인양 생각하고 재난을 추방하고 복을 빌기를 원한다. 마치 전속무당인 단골무당이 일정한 자기 관할권이 있는 지역을 한 달에 몇 차례씩 자기 단골 가정을 방문하는 것과 같이 그런 의미로 축복 받기 위하여 목회자의 심방을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나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여기며, 예배에 참석한 주에는 예배했으니까 아무 일도 없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들이 샤머니즘적인 사고로서 교인들은 마치 ‘굿’에 참가한 구경꾼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한국 교회 예배의 특징은 하나님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샤머니즘적인 데가 더 많다.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보다는 복을 받기 위한 예배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어떤 효과를 위해서 예배를 시도한다면 그 행동은 이미 예배가 아니고 그 결과는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예배 속에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사오니 만복의 근원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라는 공공연한 기도 속에는 현세적인 제재기복의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것은 공중예배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길흉간에 드리는 예배와 심방 예배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목사가 찾아가서 그 가정을 위해 드리는 예배는 주로 현세적인 축복만을 빌어주기를 바라고 있고, 따라서 목사의 손은 복 방망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해서 액땜을 하듯이 목사를 불러다가 액을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온전한 신앙, 온전한 예배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때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 간에 행해지고 있는 예언기도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운을 봐주는, 즉 개인의 재수를 점쳐주는 것으로 무당의 점복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점복의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자연현상을 보고 점복하는 자연관상점, 동물을 통해서 점복하는 동물점, 식물로 점치는 식물점, 꿈을 해몽해서 점치는 몽점, 사람의 신체의 특징이나 얼굴을 보아 점치는 관상점, 음양설에 따라 괘를 만들고 그 괘를 풀어 점치는 작괘점, 지상을 보아 거주자나 묘에 묻힌 자의 후손의 운명을 점치는 상지점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얼마나 샤머니즘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고 속에 깊이 들어왔으며, 점복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점복의 종류는 비교 할 수 없으리 만큼, 무슨 일이 생기면 목사의 기도를 받고 싶어하고 목사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해결함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교인들이 많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대접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탈을 쓴 목사가 있는가 하면, 그런 목회자나 교인들의 예배는 자연스럽게 ‘굿’화한 예배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제물이 많아야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샤만의 기능과 흡사하며 또 복을 기대하는 것도 ‘굿’을 하도록 한 사람들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굿’판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하듯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을수록 헌금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면 ‘굿’화한 예배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방법 등으로 ‘굿’화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일수록 샤머니즘적인 이기주의의 생각이 앞서서 “나 하나 예수 잘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고, 나 하나 헌금 많이 내고 그 대가로 더 큰 물질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생각이 내 교회주의를 낳았으며, 교단이 분열하는 분파주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관람적 예배
제임스 드 용(James A. de Jong)은 예배는 간단히 “하나님께서는 찬양 받으시고 그의 교회는 축복을 받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규정된 연합 집회”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예배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있다고 하면서, 이 두 가지 특징 모두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한다. 통일성은 진정한 범교회적인 단합을 가능하게 하고, 다양성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자인가를 규정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항상 문화적, 신학적, 역사적 중요성의 고려에 의해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이는 우리가 창조해야 할 부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익숙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난 여자의 질문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배로 표현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람이 어떻게 예배할 것이냐를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어디서든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과연 한국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인가?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사경회 혹은 부흥회 집회식의 예배가 그대로 정착된 것이라고 흔히 말을 한다. 그것은 예배에 평신도가 기도한다거나 예배 진행에 있어서 예전의 부분이 적은가 하면, 예배 진행자의 개인적인 인도에 예배가 많이 좌우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지나치게 설교 중심의 예배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전체적인 예배의 성격과 분위기도 그러하다. 한국 교회가 성례는 자주 행하지 않으면서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려 왔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배드리는 것은 곧 설교 말씀 듣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Liturgy)의 순서는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 행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예배를 함으로써 갖게되는 경건심과 은혜를 받았다는 충족감은 그 날의 설교가 좋았느냐에 좌우된다.
이러한 예배 가운데 교인들은 자기가 예배를 한다는 개념보다는 목사가 예배하는 데에 참여해서 관람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면서 오늘 목사 설교 잘하던데, 아니면 어떤 장로 기도는 목사보다도 잘해, 오늘 성가대 찬양 듣기 좋던데 하면서 예배를 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구경하고 와서 예배를 평가하는 식이 되었다.
그러니 한국 교회의 예배는 자연히 목사는 예수 이름으로 ‘굿’을 하고 교인들은 구경꾼으로 모여드는 샤머니즘적인 부흥회 형태가 인기를 끈다.
그래서 정용섭은 한국 교회의 예배의 특징을 구경꾼들만 모여서 관람하고 있는 예배라고 한다. 예배드리는 자가 따로 있고 방청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굿’을 하는 무당처럼, 목사는 예배하고, 성도들은 관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기현 역시 예배는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하는데, 관람객이 되면 그 예배는 형식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인들이 하는 말들 중에 “예배 보러 간다” “예배 보는 중이다”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런 말 자체가 목사는 예배를 하고 자기들은 예배에 참여자라기보다는 관람자로 단순히 구경하고 오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기도하는 것, 설교하는 것, 성가대가 찬양하는 것 등 모두가 인격적인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예배 장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서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각 순서에 직접 참여한다고 여기지 않고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관람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되니까 예배를 하고 있다는 참여 의식이 있을 수 없다.
목사가 예배하는 것을 구경하고, 성가대가 찬양하는 것을 잘한다 못한다고 평가하며, 감상하는 것으로 그친다. 어떤 목사는 “성가대가 찬양을 들려드리겠습니다”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아직도 우리의 심성 속에 뿌리박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특히 신교(Protestant)의 교회는 설교 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 이전의 순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한국 교회 주일 예배는 시작하기 전에 나와 앉은 교인은 얼마 되지 않고, 교인들의 예배 출석 행렬은 예배가 끝날 시간까지 꼬리를 무는 것이다. 찬송을 부를 때도, 기도할 때도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설교 시간에도 발자국 소리가 나면, 누가 오나 하고 뒤를 돌아보며, 자리에 앉아서도 누가 왔나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설교가 끝나기 바쁘게 나가 버리는 조퇴 신자도 상당수 있다. 그리고 되도록 뒷자리에 앉으려 한다. 뒤에 앉으면 예배를 구경하는 데 전망도 좋거니와 교인의 동태와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반면 제단과 멀어서 가벼운 기분이 되는 심리적 안정성이 있는 것 같다. 즉 제단에만 하나님이 좌정하시고 계시다는 관념, 그래서 죄인이기 때문에 멀수록 좋다는 거리감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뒷자리는 만원일 수밖에 없고, 찬송가가 자리 정돈하는데 신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설교 위주의 예배이기 때문에 강단의 위치는 점점 높아져서 교인들은 더욱 구경하기가 쉬워졌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쉽게 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설교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강단을 높게 하였겠으나 ‘굿 판’에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관람하기 쉽도록 만들어 준 경우가 되었다.
샤머니즘에서 ‘굿’은 언제나 무당이 하고 거기 운집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구경꾼에 지나지 않듯이 한국 교회는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신앙상태가 기독교의 예배 속에서도 나타나 기도를 포함한 일체의 예배의식을 목사나 몇 명의 예배 인도자들에게 일임해 버리고 자기들은 구경만 하고 앉아 있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예배 자체를 드리기보다는 ‘보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의 문제에서도 예배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는 분위기도 너무나 산만하다. 심지어는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의 설교가 있을 때에는 참석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부담 없이 예배를 외면해 버리는 기형적 현상이나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전의 순서는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예배를 참석하는 식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형식과 체면의 바탕에서 체질을 형성해온 한국 교인들이 형식적인 예배, 내용도 없고 빈 껍질만 있는 예배, 구경꾼과 방청객들만 모여서 ‘보고’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배를 능동적인 참여와 행위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람실에 앉은 피동적 자세로 드릴 때, 그것은 하나의 수양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김기현은 예배를 관람객으로 참여하여 구경하기 때문에 마치 영화를 보고 난 후처럼 그 예배의 메시지와 내용과 요청이 우리 생활과는 동떨어져 유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예배자들은 예배의 당사자가 되어야지 예배의 관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명희는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 신령으로,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삶 자체도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에 미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2)
한국교회의 예배에 미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2)
3) 주정주의적인 예배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하였다. 박윤선은 여기에서 말하는 근면과 열심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신자는 그의 사업이나 활동에서 주님만을 위한다고 한다. 또 “열심을 품고”란 말은 “끓는 심령으로”란 의미이며, 그것은 열중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또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라”(계 3:19)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충성 없이 무관심한 태도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하는 것이지 열광적으로 이끌어 가는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샤머니즘에서 샤만이 노래와 춤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을 내려오게’(강신)하고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경지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이 샤만의 노래와 춤은 엑스타시로 이끄는 기술이요, 교령의 방술인 것을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한국 교회의 열광적인 집회 현상은 회중을 엑스타시로 이끌어 가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열광적인 예배가 될 때에 예배는 질서가 없어지고 문란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말하면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예배의 갱신을 요청하는 것임과 동시에, 공식 예배는 어느 시대나 질서 있게 실행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 예배 자체가 무절제하고 무질서하게 드려진다면 질서의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지 않을뿐더러, 그런 사람의 생활 역시 절제 있고 질서 있게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중 예배는 개인의 정서를 훈련하고 절제와 질서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너무 자신이 하나님과 만난 경험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이 빠진 예배가 되었다. 결국 자기의 희한한 경험에 도취되어서 교인들을 은사 체험하는 데로만 이끄는 예배 아닌 예배가 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니고, 황홀경(ecstasy)에만 빠지게 하는 예배가 되었으며, 복음의 내용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복음의 내용 즉,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열광적인 예배는 그 생활에도 변화를 주지 못하고 일시적 충동에 열심을 내었다가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4) 개인주의적인 예배
사도 바울은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허순길은 그리스도는 진실로 교회의 머리요, 왕이시라고 하면서, 그가 자기 ‘피로 사셨기’ 때문에 교회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러기에 그는 교회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가지시고 왕적 권위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기에 교회 안에서는 그의 권위만이 행사되어야 하고 그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생활의 법으로 선언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주님은 그의 교회에 그의 이 왕적 직분을 봉사할 자들을 불러 세우셨다. 그러니 이들 직분자들의 사명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봉사할 뿐이요, 그의 뜻을 거스리는 어떤 권위도 행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두려워하며 수종드는 생활이 정착되어 있지 못하다. 모두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론적으로 인정하나 생활에서는 부인하고 있는 일이 많다. 상당한 수의 직분자들이 그들이 가진 권위가 자기 고유의 것인 양 이를 휘두르며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사기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님은 그의 왕권이 확립되고 그의 말씀이 생활의 법으로 받아들여지는 교회를 원하신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곧 교회란 하나의 유기체인 몸과 같다는 뜻이다. 몸은 하나인데 각양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지체는 서로를 잘 알고 도와감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이다.
교회를 몸이라고 할 때, 이 몸된 교회의 성도들은 한 몸의 지체처럼 서로 서로를 잘 알고, 도우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과연 수천명, 수만명이 모이는 대교회에서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 공동체로서의 생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하셨다. 참 교회란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며 양과 양이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돕는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17세기에서 19세기 초엽까지 지속된 경건주의 영향으로 종교는 고도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되어 왔고, 인간이 주로 자기 혼자서 하는 일이라고 한정되어 왔다. 예배드리는 회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함께 뭉치고 결합된 공동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자가 제각기 구원을 찾아 나온 하나의 영혼들의 집합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러한 생각이 한국에서는 샤머니즘과 혼합되어 극단의 개인주의로 흘러가서 교회 강단에서는 아직도 공동체의 신앙이 아니라, 그 자리에 와 앉은 회중 개개인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 용섭은 한국 교회 예배의 특징을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예배는 결코 개인주의적인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종속적인 데에 두고 하나님을 동경하는 주관주의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서는 안된다.
개인주의나 주관주의적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 혼자 받는 것 같은 종교적 경험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은 아닌 것이다.
존 스토트는 교회를 공동체로 말하고 있는데
1)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공동체이다.
2)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구별되는 공동체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택하심을 받은 공동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택함을 입은 모든 중생한 교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니 만큼 나 혼자만을 위한 예배, 즉 개인주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척 하면서 내 자신의 유익만을 꾀하는 것은,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분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보다는 우리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보다 아래로 놓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그분 자신의 영광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에 대한 장애물이다.
예배의식에 미친 샤머니즘적 요소들(3)
한국교회의 예배의식에 미친 샤머니즘적 요소들(3)
1) 기복주의적인 설교
김병원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설교라고 하면서,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설교는 대단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H.Thielicke의 주장대로 설교 그 자체가 시들어가며 붕괴되어가고 심지어는 사멸의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설교의 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설교의 위기는 설교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수철은 설교를 정의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매개체로 삼아 특별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현대 교회에 산 진리로서 증언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일과 유대교의 회당 설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언하는 설교가 성찬과 함께 예배의 요소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설교를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초대 교부들이 그러하였다.
정 성구에 따르면 일반교회에서 오늘날과 같이 많은 설교가 행하여 졌던 것은 종교개혁 이후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개혁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전승 속에 묶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교되지 못하고 하찮은 이야기거리나, 종교윤리적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달아 개혁자들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이 기초가 되고 그것을 해설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설교를 통하여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으며, 인간은 예배 때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하면 어떤 예배도 참된 것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알았고, 참된 예배는 항상 참된 설교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된 설교는 예배적 설교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예배적 설교는 무엇인가?
정용섭은 예배적 설교를 출애굽과 부활절의 이 두 가지 사건 위에 바탕을 둔 설교라고 하면서, 예배적인 설교는 회중의 요구와 관심에 초점을 맞추려는 현실 부응적인 설교가 아니라 예배의 본래적 성격인 축제에 초점을 둔 설교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기복적 신앙이 일반화됨에 따라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강해설교 보다는 돈벌고 병 낫고 축복 받는다는 기복주의적인 설교가 교인들로부터 더 환영을 받고, 또 설교자들은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회중이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나 기복주의적인 설교를 많이 하게 되었다.
심수철에 의하면 대형교회인 여의도 S교회의 메시지는 로버트 슐러(R. Schuller)의 “삼박자 축복”과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의 “적극적 사고”라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의 삼박자 축복을 여의도의 S교회 조 목사는 요한삼서 2절에 적용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다는 S교단의 특허 같은 축복론을 전하게 되었다. 여의도 S교회의 조 목사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체의 건강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의 설교를 듣다보니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예수 믿는 것을 세상적인 축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며 기도 열심히 하는데 왜 중병에 걸리고 아이의 진로가 왜 평탄치 못하냐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다.
이광희는 복의 개념을 “예수 믿으면 네가 복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예수 믿는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세상적인 물질의 축복이나 건강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수철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전해 준 복음은 개인이 잘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든지, 그 잘사는 것이 육체의 건강과 부귀를 말하는 극히 개인적이고 육적인 축복을 얻게 하심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삼박자 축복을 다 받아 누리기 원하는 마음 자세로 믿는 마음이나, 나 하나와 내 가족만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이런 기복주의적인 신앙은 기독교의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샤머니즘적인 신앙 형태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은 세속적이고 무속적인 축복의 길을 트기 위함보다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의 실현을 위하여 주를 따르는 자들이 자기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정신으로 사는 참 삶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샤머니즘적인 기복적인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가 설교다워야 하겠으며, 교인들의 눈치만 살피며 비위만 맞추는 설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2) 기복주의적인 기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금식기도도 하며, 울부짖고 기도하는 등 기복주의적인 기도를 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사도 바울에게서 우리는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기도 습관을 보게 된다. 그의 서신들은 예외 없이 그의 서신이 전달되어질 신자들에게 그의 관심과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그의 서신의 앞에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란 말로 끝을 맺고,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들에는 그의 수신자들에 대한 감사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항상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갖는 가장 귀한 특권 중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권이 남용되어 있거나 오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기도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방인과 같은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축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는 경향은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서 비는 비복음적인,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아직도 우리의 문화와 우리의 심성에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다. 그 기도에서 우리는 먼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묻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것을 먼저 묻지 않고 내 뜻만 아뢰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이다. 그것도 내 뜻이 주를 위한 봉사와 헌신과 관련되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축복만을 하여 달라는 기도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아무생각 없이 예배가 끝날 때, 자기 신앙고백 없이 그냥 의미없이 외워지는 예배 마감의 한 형식으로 바뀌고 말았음은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럿이 모여서 어떤 모임을 끝낼 때 가르치신 기도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이 기도는 내 인격과 영혼 전체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정길 목사는 이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중요한 몇가지를 가르친다고 한다. 첫째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르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셋째로,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임을 가르친다. 넷째로, 주인과 종인 것을 가르친다. 다섯째로, 은혜의 공급자인신 하나님과 은혜를 받아야하는 나를 가르친다. 여섯째로, 구세주이신 주님과 죄인인 나를 가르쳐 준다. 일곱째, 나의 삶의 인도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순례 길을 다니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여덟째, 구원자이신 우리 하나님과 포로인 나, 그분의 피 값으로 사신 나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또 주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는 우리의 영적인 자세를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첫째로, 비리기적인 마음,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친다. 둘째로, 자식으로서의 마음을 기도할 때마다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넷째로, 충성된 마음이 기도에 요구된다. 다섯째로, 복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로, 의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곱째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덟째,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아홉째, 승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열째로는,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인가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이 기도는 우리가 어떤 영적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가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기도 때문에 철야 기도, 새벽 기도, 금식 기도가 말만 많이 하면 되는 줄 알고 중언 부언하는 기도로 그칠 때가 많다. ‘주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예수께 나아와 두 아들의 장래에 관하여 기도한 세베대의 아내에게 예수님은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함을 책망하셨다.
최 갑종에 의하면 예수님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방면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 당대에 가장 버림받은 자들, 천대받고 멸시받고, 소외당했던 자들, 죄인으로 낙인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워질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 당하였던 자들, 가난하고 무식하고 억눌림을 당하고 병들고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자들,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교제하기를 꺼려했던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고, 집으로 초대하여 교제의 식탁을 나누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리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소개함으로써였고, 또 하나는 자신의 뜻을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인류의 구속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써였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두 가지 점에서, 즉 수직적인 차원의 문제와 수평적 차원의 문제에서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 헌신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겠다는 헌신의 기도, 예수님이 사랑하신, 세상에서 소외 받고, 어려우며,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사랑하는 중보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온전한 기도가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응답이 될 줄로 안다. 이제 내 자신만을 위한 기도, 기복주의적인 기도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기도는 마치 샤머니즘적인 ‘굿’을 하는 샤만처럼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던지 복을 빌어주기만 하면 복을 받는 다는 생각과 다름이 없는 잘못된 기도이기 때문이다.
3) 기복적인 헌금
헌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마음과 몸을 바치는 뜻에서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해야 복을 받는다고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헌금을 드린다”는데 문제점이 있다하겠다.
문인현은 축복 받기 위해 헌금하는 즉, 기복신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는 한국인 속에 깊이 내재하는 샤머니즘적인 심성에서 연루한다고 한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헌금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헌금하라고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통해서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하시면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다.
김의환에 의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먼저, 바치는 자의 마음의 제사, 곧 감사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참된 헌금은 헌금 자체의 액수보다 헌금하는 사람의 정성과 진심이 달려있느냐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부의 옆전 두 푼을 주님이 칭찬하셨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그 많은 헌금을 책망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헌금 경향은 축복을 받았음으로 감사한 마음에서 바치기보다는, 축복을 받기 위해 바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내포된 기복적인 헌금이 아닌가?
이제 기복적인 헌금, 체면 위주의 헌금은 하지 말아야겠다. 마음에 있는 헌금을 할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닌가? 간혹 교회에서는 헌금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얼마 전 대림동의 P교회에서는 건축 헌금을 작정하는데 집사가 몇 십 만원 밖에 안 했다고 불러 호통치며 야단했다고 한다. 억지로 하는 헌금으로 교회를 건축할 수는 있겠지만 그 여파로 오는 교인들의 신앙의 문제는 어디에서 보상을 받겠는가? 또 간혹 강단에서 거액의 헌금은 이름 불러 박수치고 칭찬하면서, 소액의 헌금은 이따위 것을 헌금이라고 드렸느냐, 하나님을 거지로 보느냐는 등의 언행이, 일부 몰지각한 부흥사들에게서 있는 상황이고 보면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이만 저만이 아닌 것 같다. 바로 그 적은 금액의 헌금이 마음과 정성이 담긴 과부의 두 렙돈이었다면 어찌하려는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이 바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친, 그 바친 자의 마음에 입는 상처를 누가 싸매어 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 속에 한국 교회는 자꾸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헌금의 액수만 바라보는 샤머니즘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헌금의 본 뜻을 교인들에게 심어주어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금을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헌금이다.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예배의식에 미친 샤머니즘적 요소들(4)
한국교회의 예배의식에 미친 샤머니즘적 요소들(4)
4) 치유
무속신앙(shamanism)은 왜 발생했는가? 인간이 살다보면 인간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이런 경우 주위에 건전한 종교가 없을 때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 태기는 이렇게 수천년 수만년 건전한 종교를 접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신을 만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샤만(무당)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샤만이 ‘굿’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을 만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한판의 치유과정이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치유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치유가 같지는 않지만, 기독교 역사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병을 치료하시는데 계속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치유의 능력을 선지자에게 부여하시기도 하고, 직접 치료하시기도 하였다.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아람 나라 군대 장관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낫게 하였다. 또 이사야 38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에 걸렸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하여 주시고 15년이나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으며, 신약 성경에서도 수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이 병을 직접 고쳐주시는 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치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3장 1-8절에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가 고쳐줬으며,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병 나은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병 나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면 치유의 사역을 복음 전파를 위하여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질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등의 이적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적들 가운데 병고침의 역사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어 교회를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기독교 신문 일간지에 남 목사는 “병 고침 받는 신유 집회”라는 기사 밑에 자기 사진과 이력을 게재해 놓고 “모든 병든 사람들은 누구나 오시면 틀림없이 나을 수 있습니다”하면서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집회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샤머니즘에서의 샤만의 역할 중 하나인 의무직의 기능으로 받아들여지는 샤만적인 목사, 즉 사기임에 틀림없다.
심수철에 의하면 여의도 S교회의 예배의식에 있어서 비록 치유 사역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치유 제의”가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고, 신유와 방언에 대한 설교 후에 행하여지는 치유의 프로그램은 실상 그 예배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학수 고대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치유를 예로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14절에서 삼십팔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은, 몸의 치유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 사탄의 박멸이라는 구속적인 관점에서 전인 치유, 지.정.의가 완전히 조화된 육체와 영혼을 함께 치유하셨음을 볼 수 있다.
5) 축사
매크 비 스톡스(Mack B. Stokes)에 의하면 축사(귀신물림)란 기도, 안수, 명령 그리고 다른 행사들을 수단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행위를 말하며, 마귀들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점령하여 그것을 악한 목적을 위해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의하여 그 사람은 마귀들에 의하여 온통 좌우되어 자신의 행동을 다스릴 수도 없을 만큼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샤머니즘에 있어서는 이 축사(귀신물림)가 그 종교 행사의 중요한 특징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도 귀신을 내어쫓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마태복음 8장 2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자 둘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사나웠고, 다른 사람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벌벌 떨었으며, 저들이 돼지 떼에 들여 보내달라기로 예수님이 가라 명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고, 또 마태복음 9장 32절 이하에 보면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말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서 열두 제자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신일이 있다. 예수님은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정결케 하신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도 표적이 따르리니 하시면서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든 병의 근원을 귀신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창균도 성경은 귀신으로 말미암아 병에 걸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은 아니라고 올바로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질병이 마귀나 귀신뿐만 아니라(욥 2:6-7), 죄(창 12:17, 마 9:1-8), 불경건한 생활(고전 11:27-30), 과로나 부주의(빌 2:25-30)로 말미암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요 11:4) 등으로 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론을 주장하는 김 기동은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이라는 것인데 옳지 않은 주장이다. 더구나 김 기동이 주장하는 귀신 침입의 경로를 보면 한심한 얘기만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귀신은 충격을 통해서 들어오며,
둘째, 귀신은 부정적 관념을 통해서 들어오고,
셋째, 귀신은 혈기를 통해서 들어오며,
넷째, 귀신은 담배 연기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다섯째, 귀신은 내성적인 성격을 통해서 들어오며
여섯째, 귀신은 쉽게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고
일곱째, 귀신은 불신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통해서 들어오며
여덟째, 귀신은 이방인의 제사를 통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귀신을 쫓기 위해서는 귀신 들렸는지를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체험적인 진단에 의하여 귀신이 들어왔는가를 진단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예로, 차멀미, 배 멀미 하는 것도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며, 어두운 곳이나 골목에 들어설 때 머리칼이 쭈뼛하는 것도 귀신 들렸기 때문이며, 죽고 싶다는 좌절감을 갖는 것도 귀신 들렸기 때문이고, 각종 신경질환도 귀신 들렸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앉거나 설 때 어지러운 것도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고 허무 맹랑한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김 기동은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고 할 때, ‘불신자의 영이 귀신이 된다’는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불신자의 영을 귀신으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는 회개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하지 않지만,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살았을 때는 귀신 노릇을 한 것이고 죽었을 때는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 기동은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절대적인 기초가 되며, 우리의 경험은 여러 가지 이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증거는 성경에 있으므로, 누구든지 성경에 기초하여 절대적인 경험을 가져야 자신이 소유한 능력이나 일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하여 마치 그의 경험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그의 경험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성경에 근거한 경험이 아니고 무당과 귀신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이원열은 주장한다. 그러면 김 기동이 주장하는 마귀론이 성경적인지 살펴보아야겠다.
(1) 김 기동이 사탄과 마귀에 대해 내린 정의의 오류
김 기동에 의하면 사탄과 마귀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 혁명을 일으킨 천사로서 원래 동격인데, 사탄은 하나님을 대항할 때를 가리키고 마귀는 인간을 대적할 때 부르는 명칭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사탄을 대적하라.’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사탄 마귀의 타락 시기에 있어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창조 전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견해는 타락의 시기를 창조 후 하와가 유혹 받기 전 어느 시기로 보고 있다. 또 그가 주장하는 사탄은 하나님을 도전할 때 사탄이라고 하는 말과,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고 한 말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같은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2) 귀신은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는 말의 오류
김 기동은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연수의 한계를 창세기 6장 3절을 인용하여 120년이라고 하면서, 과거에는 사람들이 천 년 가까이 살았는데 노아 홍수 이후부터 사람의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불신자의 자연수명이 80년이라고 할 때 그가 병도 없이 살다가 자연수명이 다 되어 세상을 떠났다면 그는 곧바로 무저갱으로 가게 되고, 자연수명이 백살인 사람이 암으로 60살에 죽었다고 하면 그는 자연수명이 40년 남았기에 이때는 무저갱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음부에서 자연수명이 차기까지 40년 간을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수명도 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어느 곳에도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밝히고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3) 모든 질병이 귀신에서 온다는 말의 오류
김 기동은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온다는 주장을 하면서 의학이나 약으로는 어떤 질병도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질병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운동에 의해서만 고침을 받는다고 하나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모든 질병이 귀신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보는 것은 모든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지도 있을 수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질병 이전의 실수나 무식마저도 귀신이 주장한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성경은 귀신을 불신자의 사후 영으로 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서 사탄이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하였으니, 귀신이 조상이나 죽은 자의 신분이나 이름을 대면서 가장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귀신론을 추종하는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상황들은 귀신을 달래는 샤머니즘의 ‘굿’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1)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1)
1. 한국교회의 내면적 모습에 나타난 샤머니즘적 요소의 갱신
1)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갱신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개인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J.Calvin은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30) 보호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평생동안 이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1) 바른 교회관을 갖게 해야 한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제각기 따로 떨어져서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절 이하에서 몸의 비유로써, 몸의 모든 지체의 서로의 결함을 각 지체에 나눠준 성령의 은사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로 기술하였다.
바클레이는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불 교회의 의무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며, 기독교인은 교회의 활동이 작업과 개입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가 아니라 남과 사귀는 생활을 통하여 당신을 섬기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타주의적인 삶으로 상호 협력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가 그 지체임을 안다면 상호 협력하며 약한 지체를 도와 주며 함께 고통을 받으며 상대방의 허물을 가리워 주며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연합 사업에도 적극 참여할 것이다. 이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2) 바른 성찬론을 갖게 해야 한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책임적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한 의무도 있는 것이다.
장 석영에 따르면 이는 타인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인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구성의 요소가 되는 개인간에 상호의 관계와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은 자기만을 위한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 이기주의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체 의식을 갖고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야하며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사회에 기여하는 삶으로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개인주의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정 일웅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실제로 자기교회 교인 만들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며, 잘 훈련된 교회 운영의 협력자들은 찾으면서, 이웃을 도우며, 세상을 섬기는,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공동체여야 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교회의 임무가, 모이는 교회로서 예배를 중심한 성도의 교제에 있다면,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세상가운데서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섬김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으로서 예배하며,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느끼며, 경험하도록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수적인 성장, 교세확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이끌어 온 교회성장의 이념은 이제 그 한계를 맞고 있다고 하겠다. 교회가 지나치게 개교회의 수적 성장에 얽매이다 보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의 참 모습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자.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 모두가 보여 주어야 하겠다. 말로만의 섬김이 아니라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며, 아픔을 함께 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에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은 갱신될 것이다.
2) 물량주의적인 신앙생활의 갱신
한국교회는 경제적 자립과 외형적인 성장에 주로 역점을 두어 온 반면, 교회의 내적 성장에는 많은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무언가 기대를 하고 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또 복 받기 위해 왔던 사람들이 국가의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생활이 윤택해지니 더 기대할 것이 없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는 올바른 신앙관을 확립시켜주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하겠다.
물량주의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개교회의 수적인 증가만을 성장으로 취급하던 수적인 성장개념에서, 양적성장과 질적성장을 병행해 나가야 갱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의 성장을 양에 둘 것이냐, 질에 둘 것이냐 하는 것은 목회 계획과 관계가 된다. 목회자들이 외형에 신경을 쓰는 이유중의 하나는 사람들의 기준이 외형에 있으며, 양이 많아야 그래도 좋은 질을 많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목회의 성공을 외형적인 데에 두기 때문이다.
정용섭에 의하면 그러다 보니 목회자나 교인들의 시선은 주보에 나타나는 집회 참석인원과 헌금액의 통계 숫자에만 가 있어, “교인들이 얼마나 모이느냐?” “예배당 건물은 자체 건물이냐?” “예배당의 크기는 얼마나 되느냐?” “한 주에 헌금은 얼마나 나오느냐?” 등의 물량적인 데에 목회 성공의 척도를 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일마다 새로 등록한 신자를 일으켜 세워 박수를 치고, 특별 헌금이나 많은 액수의 헌금은 호명하여 축복기도를 해주고 지내는 동안,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과 겉치레는 그럴듯하게 꾸며졌지만 교인들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하고 해가 거듭될수록 허전함을 느끼기만 하였으며, 교인들의 현세적 축복과 샤머니즘적인 제재기복 신앙에 경쟁을 붙여오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한 것이 목사를 위한 것인 양 예배를 했는데 목사가 고마워도 안한다는 눈치이며, 반갑게 맞지 않아 다른 교회로 가겠다는 사람들도 있는 상황이고 보면, 물량주의가 빚어낸 심각한 한국교회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제라도 목회자는 목회성공에 너무 집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을 끌어 모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배당을 크게 지으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내적인 질적 성장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목회를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다.
김원식에 따르면 물량주의 목회에는 교인의 숫자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세례요한이나 나단 같은 예언의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양적 성장과 교회 재정의 보충을 위해 부흥회를 빈번히 여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많은 폐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물량적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마치 한 인간의 성장이나 한 사회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이기 때문에 물리적 성장이 필요하나 이와 동시에 정신적 성숙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물량주의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전도중심에서, 이제는 전도와 교육을 병행시켜나가야 한다.
성숙한 교회는 그 신앙생활을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흩어져 나가는 것이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로 될 때만 성숙해지는 것이며, 신앙 공동체는 선교 공동체로 전환될 때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기실현은 완성된다. 이계준은 모이는 교회는 자기 중심적 또는 예배 중심적 교회라는 뜻이고 흩어지는 교회는 선교 중심적 또는 역사 중심적 교회라고 하는데 전체 교회가 꼭 그렇다고 보지는 않는다.
박 지덕은 물량주의에 초점을 두고 있는 한국교회는, 전도에 모든 것을 동원한다고 하며, 교회가 전도 특공대를 조직하여 전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전교인을 전도 요원화 하고 있고, 전도왕이라고 하여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을 시상하기도 하며, 또 총동원 주일을 정하여 인기 연예인 등을 초청하여 놓고, 많이 모일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기도 한다고 한다. 양적 성장을 위해서는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바른 신앙으로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그것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라 사료된다. 물량주의 신앙 생활을 갱신시키는데는 보다 자주 모일 수 있게 하며 성경 공부로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 중·대형 교회가 아니면 장년층을 위한 성경 공부가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것도 교인들의 신앙이 나태하며 빈약하게 되는 원인이라 하겠다.
3) 배금주의적인 신앙생활의 갱신
배금주의적인 신앙생활은 가치관을 바로 가짐으로 갱신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하고 영적인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 판단이다.
김원식은 그래서 “교회가 경제적인 부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세속적인 것에 너무 깊숙이 빨려들고 있다” 고 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복음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 천국의 상속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모든 희생도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진주 장사의 비유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복음을 듣고서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에 그의 영혼의 만족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발견하여 그의 가진 어떤 값진 것이라도 다 드리고, 그리스도를 그의 주로 받아 영원한 생명의 희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를 휩쓸고 있는 배금주의는 세속의 것을 위하여 천국을 희생하는 타락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배금주의적인 신앙생활은 기독교의 가치관을 바로 가짐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배금주의적인 신앙생활은 영적 은혜 중심의 집회를 가짐으로 갱신되어 질 수 있다.
전도 많이 한 사람에게 현금으로 시상하는 경우 역시 배금주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또 교회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흥회를 여는 모금집회도 지양해야 하며,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집회로 바뀌어야 한다.
교인들이 체면 때문에 하는 헌금이나, 강요에 못 이겨서 하는 헌금은 하지 않도록 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도록 하여야 한다. 또 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에 끌려 다니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물질을 잘 사용하며 잘 다루는 지혜가 더욱 필요함을 인식시켜야 하겠다. 이 땅위의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 것이니 만큼, 물질을 다루는 데에도 물질을 잠시동안 맡은 청지기 정신을 갖고 생활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삶이 영위되지 않을까 한다.
4) 비윤리적 신앙생활의 갱신
비윤리적인 신앙생활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윤리의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갱신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윤리적인 면도 많이 강조하는 것을 바울 서신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함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타인에게 덕을 끼치며 모범이 되는 윤리적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 못지 않게 중요함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도 하셨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세례 요한의 요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고 한 야고보의 말이나,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 받으려 함이라”고 한 바울의 말은 다 행함이 동반된 믿음이 참 믿음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독교 윤리의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비윤리적 신앙생활은 갱신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 경건 운동을 전개함으로 비윤리적인 신앙생활을 갱신할 수 있다.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해서 예수님은 강하게 지적하고 계시며, 사도 바울은 말세에 지켜야 될 복음을 말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권하고 있다.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했다”고 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야고보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한 것도 윤리적인 신앙생활을 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신앙생활 즉,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사람들과의 올바른 태도에서 나올 수 있다. 윤리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서 하는 신앙생활은 제멋대로 살다가 무당을 불러 ‘굿’을하면 뭐든지 다 해결함을 받는다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담긴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비윤리적인 생활은 하지 않는 참된 경건 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2)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2)
2. 한국교회의 예배에 미친 샤머니즘적 요소의 갱신
1) 기복신앙의 갱신
기복신앙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 사상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지금부터 30여년 전만 해도 새해가 되면 복조리, 복주머니 등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사서 방 문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는데 그것은 복 받기 원하는 한국인의 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샤머니즘적인 복의 개념이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 박힌 채 오랫동안 내려왔다.
김의환은 그래서 한국인의 종교관은 영적인 차원의 구원 개념보다 현실적 구복사상으로 기울어져 왔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인의 샤머니즘적인 신앙적 의식구조 때문에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의 씨가 뿌리내리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기복적 신앙이 일반화됨에 따라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성경 강해 보다는 돈 벌고 병 낫고 축복 받았다는 신비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체험 간증이 더 환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돈 벌고 병 낫고 잘되는 현실적 축복은 아무에게나 고루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어려울 때 보다 밝은 미래를 희원하는 것은 인간 상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원이 샤머니즘과 결부될 때 요행주의적 심리작용이 생긴다.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그 축복의 부분적 표현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장차 크게 축복 받으리라는 약속은 받았으나 오랫동안 그 약속의 실현이 더딤으로 인간적으로 약해졌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더 크게 복을 받은 것도 구약시대 성도들은 부분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했으나 신약시대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모시고 산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축복의 초점은 머리가 되거나 물질의 부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신령한 복을 말하는바,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것이요, 영생을 얻은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복에 대해서 즉, 현세적인 복이 아닌 믿음으로 받게 되는 영적인 복을 말씀하셨다.
시편 1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따라 사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고, 신명기 28장에서는 세상적인, 육적인 복을 나열하면서 율법의 준수를 조건으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살지 않고 현세적인 복만을 구한다는 것은 비기독교적인 태도이다.
고넬료와 그의 가정의 기도와 구제등 경건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그들이 받은 복은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고, 성령과 세례를 받게 되는 것,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예수를 믿게된 것 등이 영적인 복이다. 또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며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복에 대한 말씀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으나 이외에도 성경은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고,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으며,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등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육적인 복이 아닌 영적인 복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복보다 육적이고 물질적인 복만을 바라는 것은 세상적이고 샤머니즘적인 복 사상이다.
정용섭에 의하면 “복 받기 위한 예배”를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기복신앙적인 예배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예배, 감사하는 예배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기복신앙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매 예배시에 케리그마가 선포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및 재림 등의 메시지가 예배 때마다 선포되어져야 한다. 설교가 윤리 강연회 같은 인상을 주던지 교인의 비위만 맞추는 식의 설교나, 샤머니즘의 무당이 ‘굿’하는 것처럼 복만 받으라고 하는 식의 설교, 또는 자신의 체험에 얽매이는 설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것이던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로 올바른 신앙관을 심어 주어야 기복신앙을 갱신할 수 있다.
최근에 급성장하는 교회는 죄를 말하며 회개하라고 하는 교회가 아니라 죄에 대한 것은 거론하지 않고 복 받으라고 하는 교회, 마음 편하게 놔두는 교회,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될까? 헌금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드려진다면 샤머니즘에서 복 받기 위하여 ‘굿’을 할 때에 바쳐지는 제물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제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 복은 예수를 믿는 그 자체가 복이 아닌가. 이제는 세상적인 풍요와 건강만을 원하는 근시안적인 복의 태도에서 영적인 복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그 자체로 복을 받았다고 느끼며 감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다.
2) 관람적 예배의 갱신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를 참된 예배라고 성경은 말한다. “신령과 진정으로”하는 예배, 그것은 의식적이고 외형적인 희생제사도 아니고, 관습적이고 규례적으로 기울어진 회당 예배도 아니다. 인간의 영혼 깊은 속에서 “사랑, 충성, 복종, 헌신”으로 응답하는 예배이며, 그래서 인간의 전인격이 하나님과 만나서 변화를 받고 갱신되면서 그의 계시에 날마다 새롭게 응답하는 예배이다. 이것은 예배와 생활을 통일시킨 예배의 갱신이며,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분명히 밝혀놓았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오.” 이것은 생활을 통한 예배, 곧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몸은 성령이 거처하는 장소이며”(고전 6:19) “성령이 역사하시는 기관이 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고후 6:16).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날마다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용섭은 일컫는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마치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굿’을 하고, 참석자는 무당이 ‘굿’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는 예배로 끝난다면 그 예배는 형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류제창은 이에 “예배를 본다”라는 표현부터 “예배를 한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장복은 무속적 종교의 실상을 오늘의 예배 현장에 그대로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마저 내리지 못한 현실은 바로 개신교 예배의 본질적 요소에 관한 무지의 소치라고 보아도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한다. 그는 예배의 인도자나 참여자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것들을 말하는데,
첫째, 기독교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예배자들이 마음 속에 확신해야 한다고 하며,
둘째, 모든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계속되어져야 하고,
셋째로는, 개신교의 예배 가운데 최대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세로 예배에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마지못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행동적인 참여자로서 예배에 나아와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 있는 분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최고의 가치를 돌리는 것인데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구경꾼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성가대의 찬양 역시 구경시키기 위하여 부르지 말고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불러야 하는 것이고, 성가대 좌석에 앉아 있는 태도도 단정하게 하고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부르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성가대의 찬양이 설교를 돕거나, 예배를 돕는 것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기도도 목사나 장로에게 일임하고 구경만 하는 형식주의를 지양하고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참여자가 되어야 진실로 드릴 수 있다.
다음으로 예배 신학을 정립해야 온전한 예배로 나아갈 수 있다.
예배가 무엇인지 바로 안다면 형식적인 예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예배의 대상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 예배이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져야 하고, 성령의 활동으로 드려지는 것을 안다면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하게 될 것이고 형식적인 예배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한다. 샤머니즘적인 잘못된 예배는 예배 신학이 없는 탓이다.
정 성구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축하하는 공동적인 행위이며 동시에 이 축하의 행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부르는 초대라는 것이다. 그는 예배 신학의 근거를,
첫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며,
둘째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셋째는, 기독론적 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넷째로 예배 신학의 전제를 성령의 사역으로 보았다.
정 성구는 이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참된 예배가 성립될 수 없고 그의 영원성을 수납치 않고는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예배는 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이 아니고, 교회는 여호와의 공동체요, 예배를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기독교 예배는 단순한 전도 집회와는 다른 것이며 축복을 받기 위한 어떤 의도적인 것은 더욱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로 안다면 관람적인 형식적 예배는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예배는 그 계시에 대한 응답이므로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예배이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신령으로, 진정으로 드리게 될 것이고 형식주의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예배 신학이 바로 정립되지 아니하면 예배 신학이 없는 샤머니즘의 ‘굿’처럼 되고 말 것이다.
3) 주정주의적인 예배의 갱신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라(계 3:19)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충성 없이 무관심한 태도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하는 것이고 열광적으로 이끌어 가는 열광적인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 기독교 예배는 교회를 세우는데 이바지하였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영적인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집회 안에 나타나신다.
정용섭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이해와 경험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한편으로 세속적 자기중심적 인간욕구를 만족시키는데 불과한 모든 요소에서 정화시키며 동시에 예배를 정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공허하게 만드는 온갖 열광적 신앙까지도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교의 집회 속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구성요소, 즉 빵을 떼는 일, 성경 봉독, 예언, 방언 등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한 예배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고 하면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한 것은 예배의 갱신을 위한 지침이었다고 보여진다.
주정주의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인격의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계준은 “한국 교회의 당면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이 믿음의 열심에 치중할 뿐 믿음에 관하여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정주의 예배는 교인들이 기도만 하면 되는 것으로, 어떤 은사를 체험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처럼,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며, 예배도 그러한 상황들에 빠져들도록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예배에 참여하는 자의 최고의 관심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즉, 예배의 동기가 어떤 축복을 받거나, 찬송을 부를 때 뭉클한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감동을 경험하고 그 충격이 다음 주일까지 지속되게 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배에 참석한 자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어야 한다.
감정에만 치우쳐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식의 예배, 어떻게 보면 찬양 예배라고는 하는데 악기를 총동원하여 소리는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높은 음으로 어찌 보면 노래방을 방불케 하여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데 과연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옥한흠은 성령의 역사와 인위적으로 조성한 집회 분위기에서 나오는 어떤 감동과는 어떻게 구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느 쪽이 성령의 역사이며 어느 쪽이 분위기에서 나오는 감동인지 구별을 쉽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한다. 왜 찬송을 그렇게 미친 듯이 목이 터져라 불러야 하는지. 그것도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들기도 하면서, 박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도자의 신호에 맞춰서 빨리 빨리 해야 되고, 나중에는 엉덩이가 들썩들썩할 때까지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찬송을 크게 하는 것이나, 찬송할 때 손뼉치며 손을 들고 하는 것을 나쁘다거나, 아니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흥분시켜 놓아야만 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런 사고방식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 주정주의 예배는 지속적인 성경공부와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에 갱신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올바른 성경공부가 되지 않은 관계로 교인들이 쉽게 사이비 집단에 빠지게 되는 등 쉽게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예배를 해도 주정주의 예배를 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 부재 때문이겠지만 은사집회에 가면 은사를 받는다고 떠들어대는 목회자와 성도가 있는 상황이니, 성령께서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사를 자기들이 이제 나누어주겠다는 것인지, 자기들의 특허인양 받도록 해 주겠다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그런 집회일수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가? 그러면서 여기에 목사님들도 많이 참석하셨다고 한다니 그런 집회를 하는 사람이나, 그 집회에 참석해서 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러한 일들이 있었는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살펴봤으면 한다. 그리고 과연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집회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옥한흠은 이렇게 ‘은혜보다 은사가 더 강조되는 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보다 성령이 더 우대를 받는 것이니 그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옥한흠은, 스펄죤 목사가 성령을 일방적으로 우대한다거나 성령과 가장 매치가 잘되는데 감정만 앞세우는 감정위주의 신앙을 강조하면 성령을 적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경고를 한바 있다고 하는데 타당한 말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강단에서 춤을 춘다고 성령의 역사가 더 뜨겁게 오며, 북을 치고, 장구나 드럼을 친다고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하게 오는가?
옥 한흠에 의하면 신비주의적인 어떤 체험이나 은사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본위의 신앙이며,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은 영적으로 ‘enjoy’하는 스타일의 신앙이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사도행전을 훑어보아도 은사 받았다고 하여 그 은사에 집착하여 매달리는 사람이 없다.
쉴 사이 없이 그 사람의 입에서 ‘예수, 할렐루야’가 쏟아져 나온다 할지라도 또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체험적인 사랑이 넘친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예배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잘못하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유발적인 밑바닥이 있어 주정주의 예배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소영은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종교 강화를 듣는다든지 종교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말씀으로 예배자에게 오시는 것이고, 예배자는 믿음에 의하여 전인격적인 참여로 응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이며, 이것이 예배의 참된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배가 주정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유발하는 집회를 자제해야겠고, 무엇보다 교인들의 성경 지식을 함양하는데 교회교육의 관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인들이 신비주의나 성경지식의 어느 한편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잘 지도하여야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
4) 개인주의적인 예배의 갱신
정용섭에 따르면 희랍어 70인 역에서 통용된 교회라는 말은 본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백성인 온 이스라엘의 총회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처음부터 공중적인 행동이며, 원시 그리스도교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 즉 부활하신 분의 영적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었고 그 친교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헌신하는 것에 의하여 독특하게 하나가 된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예배는 결코 개인주의적인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일을 종속적인 데에 두고 하나님을 동경하는 주관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는 것이다.
교회가 개인주의적인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설교와 성례전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대다수의 개신교가 설교를 중시하는 것은 좋았으나 성례전을 소홀히 했음은 자성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서는 사이버 교회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사이버 교회 즉 가상 교회는, 사이버 목사와 사이버 교인들로 이루어진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교회가 사이버 교회이다. 사이버 교회는 컴퓨터와 네트워크라는 가상공간에 존재한다.
김 영한은 사이버 교회가 야기시킬 문제를 진단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이버 교회의 위험으로
첫째, 사이버 교회는 영적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의 헌신과 기도와 정성으로 세워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이버 교회는 기도처도 없고 교제처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사이버 교회는 실재적 교회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상 교회라는 것이다.
셋째, 사이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며,
넷째, 사이버 교회는 인격적, 가시적 교제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하는 대화는 인격성이 결여된 하나의 제한된 의사소통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교회는 실재적 교회를 대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역 교회와 교단의 뒷받침이 없는 사이버 교회는 위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사이버 교회는 교단이나 교회연합을 통해 실행해야 하며, 지역교회에 대한 보완 기능으로서만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본인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이버 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김 지홍은 사이버 교회의 등장을 놓고 교계에서는 신학적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고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설교하고 헌금조차 온라인을 통해 받는 사이버 교회에 대해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류가 배제된 채 메시지만 남아있는 불완전한 형태의 교회’라며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 이규왕은 사이버 교회가 특히 청소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류와 성도들과의 친교가 빠져버린, 메시지만 남아있는 불완전한 형태의 교회”라고 지적한다.
이런 사이버 교회가 나오게 된 동기는 문화의 발달로 인한 것이나 그 배후에는 공동체적이 아닌,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나치게 설교를 중시하여 설교를 들으면 예배를 한 것처럼 생각하는, 설교 중심의 예배, 개인주의적인 예배에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정용섭에 의하면 “개인주의적이고 주정주의적인 예배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로 자기의 전인격을 가지고 사랑과 충성과 복종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예배를,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설교와 성례전이 균형을 이룬 예배로 갱신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례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일년에 한 두 차례 연례행사로 끝나는 별 의미도 주지 못하는 성례전이 아니라 성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바로 행해져야 앞으로 부지기수로 나타날 사이버 교회(가상 교회) 즉, 전자 교회(위성 교회, 온라인 교회, 네트워킹 교회)에 대비해야 한다.
칼빈은 성찬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가지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칼빈은 기독교인들이 자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하고 이로 인해서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강하게 하고 자신들이 힘을 얻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그의 선하심을 선언하고 마침내는 이로 인하여 서로의 사랑을 배양하며 그들 서로가 이 사랑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한 인침으로서의 성례전을 자주 행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그는 신자가 성찬식에 참예해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 것이 단순한 신앙적 행동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을 체험하고 감화를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육적으로 물질 안에 임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성찬 제정의 목적을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것을 제정하셨다”고 하였다.
세례의 목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이며, 주께서 우리와 떨어질 수 없도록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우리들이 주님의 축복들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심어졌다는 상징이며, 성찬식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과 신비스럽게 결합되었다는 표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성만찬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하도록 하거나, 이미 결합되었으면 이 연합이 하늘에서 완성될 때까지 점점 더 주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세례는 주로 우리가 이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증거 하지만, 성찬식은 우리가 이 연합 속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표식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한국교회에서 중요시해 온 설교와 성례전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가 될 때에 개인주의 예배가 개혁되어질 수 있다.
둘째로 개인주의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예배로 나아가야 한다.
가정예배, 구역예배, 공예배 등의 함께 예배하는 일을 통하여, 개인주의 예배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예배로 갱신할 수가 있다.
김 수학은 예배는 경건한 개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주(Lord of the church)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동행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 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개인 신앙의 유효성이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정당한 견지에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와 결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예배는 공동의 예배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예배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신자들이 함께 나아가는 공동적 접근, 즉 가족적인 행동(family activity)이다.
셋째로 개인주의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교회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겠다.
박지덕에 의하면 교회력을 사용함으로써 개인주의 예배를 갱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력은 기독교의 진리의 전체모습, 즉 성령과 역사적 교회와 인간의 경험 속에서 나타난 모든 신적인 계시를 그 연례적인 예배에 나타내 보이기 위한 교회의 정리된 노력이다”라고 Charles H. Heimsath 는 말했다.
교회력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는 것을 가지고 꾸민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이 일하시는 예수님의 역사를 가지고 배열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력을 사용하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회상하게 되는데 도움이 된다. 또는 인간의 시대적 내지 지역적인 폐쇄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의 보편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는 전체 세계 교회를 의식하게 해주고 그 전통의 다양성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교회력을 사용하게 되면 공동체적 신앙을 강조하게 되므로 개인주의 예배를 개혁할 수 있다고 본다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3)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적인 갱신에 대한 제안(3)
3. 한국교회의 예배의식에 나타난 샤머니즘적 요소의 갱신
1) 바람직한 설교
예배하면 설교가 떠오른다. 설교 없는 예배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예배에서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성장하는 교회도 보면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는 교회가 성장한다. 설교는 설교다워야 한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최 인식은 설교하는 설교자를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서 전달하는 매개자라고 하고 있다. 그는 설교자란 영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뿐 아니라, 변화하는 대중의 의식과 제반 문화의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고 한다.
설교는 말씀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선교행위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러한 설교를 통해서 세상에 다양한 형식으로 들려진다.
오늘의 한국 강단의 위기는 바로 설교의 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만 외쳐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전부’를 선포해야 할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한 채 시대적 상황 분석이나 하고 복 받으라고만 외치다보니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나 한다. 복 받으라고 설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기복주의적인 설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교의 위기는 설교의 홍수에서 생긴 탓도 있다. 목회자들이 설교하는 횟수가 너무 많아 설교에 억눌려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한 명뿐인 교회에서는 주일 낮과 저녁, 수요 저녁, 새벽기도회, 철야 기도회, 심방, 각종 집회 등에서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설교,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피곤한 몸으로 설교에 임하다 보면 설교다운 메시지를 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2-13)고 한 말에 설교자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제 기복주의적인 설교에서 벗어나 복음적인 설교를 하여야 한다.
정재훈에 의하면 복음적인 설교는 설교의 원천을 성경에 두는 설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첫째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에서 벗어나 설교자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전하는 도구가 될 때 그 설교는 강연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적 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설교여야 한다. 그것은 막연하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생명력 있게 나타내야 한다. 그런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인격적인 받침 위에서 설교를 하여야 한다.
셋째로 설교자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여야 한다.
성경의 많은 진리 중에서 어느 한 진리만이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해서는 안된다. 성경 전체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하며, 성경의 역사적 사실과 실존적 의미를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
2) 올바른 기도
무당이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기도가 아니라, 바람직한 기도 즉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한다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 기도는 소용이 없지 않는가?
그러면 기도는 무엇이고 바른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리고 바른 교제는 항상 상호 관계를 가질 때 성립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듣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도 하시는 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 바른 교제는 지속될 수가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성도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나의 마음 문을 열어 아뢰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김의환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탄식하는 주님의 그 탄식이 한국교회 제단 아래서 들리는 듯하다고 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여야 바른 기도다.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전체적인 교리와 교훈을 알고 거기에 비추어 주의 다스림을 찾으면서 나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김의환에 따르면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위하여 간구하여 주심은, 칼빈이 해석한대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친히 하시기 보다 성경을 깨닫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탄식케 하여 바른 기도를 하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해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기도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
기도 중에 우리는 목회 기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소영에 의하면 목회 기도는 설교전에 행하여지는 것이 보통인데, 기도자는 회중을 대표로 한 기도가 되게 하고 개인적 기도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목회기도는 준비가 필요하며 영광, 감사, 죄의 고백, 죄의 용서의 기원, 확증 기타의 기원, 간구의 제 요소가 포괄적으로 내포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주기도문’을 중이 ‘염불’하는 식으로, 무당이 ‘주문’을 외우듯이 무의미하게 반복하여 암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암송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같이 기도하라”(마 6:9)고 기도의 지침과 기준으로, 이러한 형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예배 마칠 때에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예배 마칠 때에 축도 대신하여 암송하다보니 형식적으로 무의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정 문호는 기도에 쉬거나 기도의 고장은 신앙생명의 위험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는 기도해야 할 이유를,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기도는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셨기에 해야 된다고 하면서, 기도시간에 하늘이 열리며, 기도시간에 변화될 수 있고, 기도하는 시간에 성령이 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기도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믿음의 기도라고 한다. 성경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다.
최 덕성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자신의 주권적 통치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최 덕성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며, 하늘 아버지와의 사귐의 대화라고 한다. 기도를 통해 좋은 사귐이 이루어 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부요해지고 승리하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자원과 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3) 헌금
기복주의적인 헌금이란 무당이 ‘굿’할 때에 바치는 물질처럼 병을 낫기 위하여, 복을 받기 위하여, 재해를 없이하기 위하여 바치는 헌금으로 드리니까 문제가 있다.
김소영은 헌금은 계획적으로 해야 하고, 수입에 응해서 해야 하며(신 16:17), 희생적이면서 기쁨으로(고후 11:7-9),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관리자로(신 8:17-18), 각자가(고전 16:2 ; 눅 21:1-4), 풍성하게(고후 9:6), 가장 좋은 것 즉 최상의 것을(레 22:2,21 ; 말 1:7-10) 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 헌금은 절대로 하나님에게 ‘뇌물’(?)을 바치는 격으로 드려서는 안되고, 또한 샤머니즘적으로 드림이 되어도 안된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일상생활 속에서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의 응답으로 드려야 한다.
김 득룡에 의하면 헌금이란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겸손함과 거룩함으로 드려야지 교만과 자랑으로 드려서는 안된다고 바른 헌금관을 말하고 있다.
헌금을 드렸으니까 축복해 주시겠지 하는 샤머니즘적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감사의 표로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4) 치유
귀신들림과 치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나 혹은 믿는 자들의 태도는 양극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악한 영의 존재와 활동을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편으로 초자연적인 악령들의 세력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 외에 절충적인 신학적 입장이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님의 교훈은 악령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의 존재보다는 윤리적인 목적에서 교훈하셨지, 귀신의 존재와 그 활동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조무남은 치유사역은 바로 구원사역이며 목회사역이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사역이라고 하면서 치유사역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최홍석에 의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사탄과 악령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런데 사탄의 역사는 윤리적인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 사탄과 악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세력들이며,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사탄의 나라와 대립관계에 있으며, 또한 정복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복음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세상은 마귀와 사탄으로 일컬어지는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한은 예수께서 귀신들과 싸우시는 일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사역은 본질상 초자연적인 세력과의 투쟁을 내포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좌절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예수를 대항해도 예수는 원수 마귀를 이긴 승리자로 나타난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사탄에 대한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에 사탄이 쫓겨나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면 바울서신은 어떤가? 바울은 선한 영과 악한 영 모두를 인정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존재들로서 그들의 중보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우상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들 속에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어떤 능력이 나타나기도 하며, 그래서 우상숭배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의하는 것으로 바울은 진술하고 있다.
사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이며 세상의 신으로서 그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사탄은 시험하는 자로서 환란을 통해 믿는 자들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방해한다. 또한 거짓 사도들을 일으켜 진리를 왜곡시키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항상 넘어뜨리려 한다. 그러나 사탄의 결말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발아래서 그를 상하게 하실 것이다.
최홍석에 의하면 대개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특별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그 계시의 방편인 이적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논조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계시가 종결된 이후, 이적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절대 주권과 상충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후대 이적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고 한다.
최홍석은 그렇기 때문에 치유에 대한 초자연적인 태도도 문제이고, 자연주의적인 태도 역시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해서, 질병하면 무조건 약과 병원과 의사를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극단적으로 초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여, 모든 질병에 대하여 전혀 의료행위와 그 처방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둘을 양자 택일의 관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유의 가능성을 오늘날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합의점이다.
귀신들림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와 마찬가지로 범신론적 차원의 존재론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그리고 귀신들림의 현상은 단순한 정신적인 질병과 구별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영적 정신적 육신적 건강함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기 위해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한국 샤머니즘 결론
한국 샤머니즘 결론
결론
한국교회 내에서의 샤머니즘적 요소는 한국교회의 병폐와 일맥상통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를 살펴보면, 첫째로 외형적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로서 혼합주의, 의타주의, 형식주의, 운명주의, 카리스마적인 목회자와 샤만적 부흥사 등에서 나타난다.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 주권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외형적 모습 속에서는 그러한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지 영혼으로만 인식한다면, 영혼을 가진 다른 존재자들과 하나님을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영은 하나님의 일부이거나 현현이라고 생각하는 범신론의 한 유형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다른 만물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둘째로, 교회의 내면적 모습에서 나타나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로서, 개인주의 신앙생활, 물량주의 신앙생활, 배금주의 신앙생활, 비윤리적 신앙생활을 들 수 있겠다.
개인주의적 신앙생활로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었던지 나만 믿어 구원받았으면 된다는 사상이나,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신이나 교회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교회도 크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헌금을 많이 내게 하며,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많이 모이게 하는 물량적인 방법, 또 돈이나 물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참 신앙이 아니라 돈에 의지하여 따라가는 배금주의 신앙생활, 하나님의 일을 펴 나갈 때도 나만 즐겁고, 우리 교회만 살찌우는 일이라면 윤리를 벗어나서라도 과감히 시도해 나가는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갈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요소들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세 번째로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나타나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로서, 예배가 ‘굿’화한 가운데 기복주의적인 데로만 예배가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고, 무당은 ‘굿’을 하고 참석자들은 구경만 하는 것처럼, 예배가 목사나 몇몇의 예배 인도자들이 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예배를 했다고 하는 상황이며, 예배가 너무 감정주의로 흘러서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예배를 하는 것인지, 분위기에 휘말려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에서 예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고, 예배가 공동체적인 예배라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예배로 나아가는, 그러다 보니 이웃 사랑은 간데 없고 하나님만 믿고 사랑하면 된다고 하는, 나만 믿어서 구원받았으니까 됐다, 설교를 들었으니까 됐다는 식의 신앙이 안타깝게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또 한국교회의 예배의식에 나타나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면, 기복적인 설교와 기복적인 기도, 헌금, 축사 등을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한국인의 종교성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심성 기저에 깔려 있는 샤머니즘적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적인 개혁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샤머니즘적인 토양 속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깊게 박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기독교가 토착화되지 아니하고 한국적인 사마니즘 토양에서 변질되지 아니한 채 온전히 전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자 자신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David J. Randolph 는 “설교의 갱신의 목표는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인간을 갱신하는데 있다”고 한 것처럼 예배와 생활의 일치를 위한 교회 개혁은 예배 장소나 의식을 수리하고 변경하는데 있지 않고 예배자들이 개혁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개혁자 루터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회개하며 기도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철저한 성경연구와 말씀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개혁은 이루어 질 수 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성장하고, 많은 신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사회에서 빛이 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교회가 성경의 진리 위에 올바로 서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 진리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문제는 해결되어질 수 있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회개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셋째, 회개도 성령의 도움으로만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육체와 성령이 서로 싸우나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고 탄식했으나 8장에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함으로써 성화의 길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역시 내가 맺으려고 한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접붙임이 되어 있으면 자라게 되어 있고, 그러면 성령께서 자연히 맺게 해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말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역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인 만큼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성경을 깨닫게 하는 일도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샤머니즘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개혁되어져야 한다. 개혁되어질 때에 교회 자체의 사명인 복음전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신앙공동체로서 나아가며,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전도가 어렵다고 해외로 나가려는 모습이라면 온전한 선교도 될 수 없겠고, 더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미명 하에 자기 교회이름을 내세워서 과시하기 위한 선교라면, 우선 성경으로 돌아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앞서야 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확인하고 나가야 한다.
기독교는 폐쇄적이거나 소극적인 종교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종교이다. 우리는 적극적 선교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화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통해 새로워진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 모든 신자와 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며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의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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