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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부지와 문디 거튼 일
조 용 하
그간 마음이 궁해진 모양인가? 아니면 글을 멀리해서 무딘 글 솜씨마저 길을 잃었나? ‘삶의 자국’ 짧은 한편도 이루지를 않고 게으름을 피웠나 보다. 떼어놓은 멸치 대가리 마냥 시작다가만 글들이 컴퓨터 구석에 잠자고들 있건만, 다시 뒤끝을 잡으려 해도 어디론가 사라진 그 자락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문득, 어릴 때부터 지금껏 듣고, 배워 써온 내 고장 말, 옛 울산 말. 그간 울산촌놈이 울산말은 팽개쳐 두고, 표준어만 붙들고만 온 것이 아닌가? 울산사투리 연구가라는 자가 이래서야 쓰나? 울산옛말을 한번 쯤 글로 나타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아무도 쉬이 넘볼 수 없는 글을, 바가지와 몰매를 맞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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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쩍에, 그러이 1940~50년 그쭘땅 이바구니더.
그 주굼에 우라부지느 소이 운수업을 핸는데, 무신 운수업잉고 하머, 황소구루마를 해씸더. 1950년대 초 융이오 날리가 안이러날 때까정은, 하물도라꾸가 거진 엄서가주고, 촌이야 이르꺼릴 꺼또 엄찌마느, 쪼매느 도회지까정도 하물을 신는 도라꾸가 엄사가 무거분 짐은 거진 다 구루마에 실꼬 댕기곤 핸니더.
그라고요, 구루마 동태가 요새매추로 자동차 바꾸가치 고무로 맹근 바꾸가 아이고, 쇠로까 얄게 맹근 쇠동태를 나무동태 거테다가 끼아가, 나무동태가 잘 안 빠아 지구로 맹그러심더. 요론 동태가 잘 구불택이 이께능기요? 그러이까내 소가 구루마를 끄으기가 심이 대기 안 들겐능교? 이라이까내 암소느 구루마를 몬 끄으고, 황소만 끄으고 댕기심더.
옛날에, 그러니 1940~1950년 그때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소위 운수업을 했는데, 무슨 운수업인가 하면, 황소 우마차를 했습니다. 1950년대 초 6.25 동란이 안 일어났을 때까지는 화물트럭이 거의 없어서, 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작은 도시까지도 화물을 싣는 트럭이 없어서 무거운 짐은 거의 다 우마차에 싣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고 우마차 바퀴가 요사이처럼 자동차 바퀴같이 고무로 만든 바퀴가 아니고, 엷은 철로 만든 띠를 나무바퀴 겉에다 끼워서 나무바퀴가 잘 안 부러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바퀴가 잘 구를 턱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소가 우마차를 끌기가 힘이 엄청 안 들겠습니까? 이러니까 암소는 우마차를 못 끌고, 황소만 끌고 다녔습니다.
언젱가 한분으 냉거랑 너메 시례8반 동리에 사느 문디들이 우라부지자테 불뗄낭구를 한 구루마를 해다 달라꼬 해땀더. 그래가 우라부지가 동대산으로 나마러를 가게 댄는데요, 우리 집에서 동대산까정 가는 질이 아마도 5리쭘은 대는 질인데요, 쭈~욱가머 돌짜갈찔이여씸더. 전신에 굴따느 돌띠이들이 깔리인느 원말 돌거랑으로 구루마를 몰고서느, 도덕꼴잉강, 서당꼴잉가느 자알 모리게찌마느, 어째대뜽간에 달령쩨 가차분 산 꺼정 나마러를 가땀더.
언젠가 한번은 강(현재 동천강) 넘어 시례8반 동네에 사는 문둥이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뗄 나무를 한 우마차를 해 달라고 했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께서 동대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우리 집에서 동대산까지 가는 길이 5리쯤 되는 길인데, 전부 자갈길이었지요. 전부가 굵은 돌덩이들이 깔려있는 원지 돌 거랑(현재 송정천)으로 우마차를 몰고서 도덕골인지, 서당골인지(산골짜기 이름)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달령제(현재 무룡산) 가까운 산까지 나무하러 가셨답니다.
그 주굼에느 산에 나마러 가바짜 크다느 나무들은 엄꼬, 나무라캐야 머 물거리 정도 바껜 엄사심더. 솔
나무 가틍거느 엄사꼬, 크다느 솔나무느 장재기꺼리로 벌씨러 다 비 내뿌고, 어짜다가 보머 묘뜽 가세에 인느 도래솔만 이썬니더. 그라고 물거리라 카능거느 잡목인데요, 작은 꿀빰나무 하고, 깨똥나무, 물깜나무, 물푸레나무들, 그라고 망개덩쿨이나 싸릿대, 또 찬꽃나무
이런 거지요. 잘몬하다가 모리고 온나무를 만지머 옻을 타는 사람은 크일 안 나능교. 잘몬하머 죽기도 하니더.
그 시대에는 산에 나무하러 가 봤자 큰 나무들은 없고, 나무라고 해야 뭐 잡목 정도밖엔 없었습니다. 소나무 같은 것은 없었고, 큰 소나무는 장작거리로 벌써 모두 베어내 버리고, 어쩌다가 보면 묘 가장자리에 있는 도래솔만 있었지요, 그리고 물거리라 하는 것은 잡목으로, 작은 도토리(상수리)나무 하고, 누리장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들, 그리고 청미래 넝쿨이나 싸리나무, 또 진달래나무 이런 것이지요. 잘 못하다가 모르고 옻나무를 만지면 옻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큰일 안 납니까. 잘 못하면 죽기도 합니다.
그러고 혹 솔나무가 이따카디라도 솔나무를 짜리머 크일나니더. 그주굼에느 만야게 솔나무를
찌다가 다당키머, 벌금 거틍거또 마이 내야하고, 또 주대소에 뿌짜피가가 욕도 마이 어다묵꼬, 구루를 살덩가, 혹은 시기 뚜디리 마자가 일도 메칠 몬아고 누바 이끼도 하덩가, 빙시가 대도로 뚜디리 마끼도 해씸더.
그리고 혹 소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소나무를 자르면 큰일 납니다. 그 때는 만약 소나무를 자르다가 들키면, 벌금 같은 것도 많이 내야하고, 또 파출소에 잡혀 가서 욕도 많이 먹고, 구류를 살던가, 혹은 세게 두들겨 맞아서 일도 며칠 못하고 누워 있기도 하던가, 병신이 되도록 두들겨 맞기도 했었죠.
그 주굼에느 빙원이 어디 이선능기요? 그냥 쑥이나 육모초, 인정쑥 거틍걸 뜨다다가 찍아가 짜가 묵떵가, 아이머 인똥을 불에 꾸바가 물에 우라가 마시등가 해씸더. 대기마이 뚜디리 마자가 어열이 들어 잘 안나을 때느 생똥물을 퍼묵기도 하니더. 그런데 참 희안항거느 그렁거를 묵고 메칠지나머 아주 잘 나꺼덩요.
그때는 병원이 어디 있었습니까? 보통 쑥이나 익모초, 인진쑥 같은 것을 뜯어다 찧어서 짜서 먹든가, 아니면 인분을 불에 구워서 물에 우려 마시든가 했습니다. 엄청 많이 두들겨 맞아서 어혈이 많이 들어 잘 안 낫을 때는 급하면 생 인분 물을 퍼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기이한 것은 그런 것을 먹고 며칠 지나고 나면 아주 잘 낫는답니다.
그 시대는 새로 말해가 융이오사변 앞디라가 사회가 무법천지 비수무리 해씸더. 다앵이도 산에 몬 뜨가느 벱이 맹글지 안아가 산에 나마러 가능거느 몬하구로느 안해심더.
그 당시느, 다시 말해서 6.25동란 전후라서 사회가 무법천지 비슷했습니다. 다행히도 입산금지법이 만들어 지기 전이라 산에 들어가 나무하는 것은 못하게 하지는 안했답니다.
더분날 산비알서 물거리를 비가주고 나무단을 무꿀라꼬 하까내, 물거리 가지끈티가 자꼬 낯짝을 찔라사가, 우라부지가 잘 하시느 18번이 티 나오게 대땀더.
“이 문디거튼 일이 인나? 이 문디거튼 일이. . ” 이런 소리를 자꼬 하시먼서 나무를 해따꼬 하디더. 그라고 물거리단을 산 미테로 떤지 내라야 할낀데, 물거리 무꿍기 자꼬 다린 낭구에 걸리사 가주고 잘안내리가까내, 또 “ 이 문디거튼 일이 인나? 이 문디거튼 일이. . .” 이런 말을 연다라 안 해깬능기요?
더운 날 산비탈에서 잡목을 베어서 나뭇단을 묶으려고 하니깐, 잡목 가지 끝이 자꾸 얼굴을 찔러대니, 우리 아버지께서 잘 하시는 18번이 그때부터 튀어 나오게 되었답니다.
“이 문둥이 같은 일이 있나? 문둥이 같은 일이. . .” 이런 말을 자꾸 하시면서 나무를 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잡목 나뭇단을 산 아래로 던져 내려야 할 텐데, 나뭇단이 자꾸 다른 나뭇가지에 걸리곤 해서 잘 안 내려가니깐, 또 “이 문둥이 같은 일이 있나? 이 문둥이 같은 일이. . .” 이런 말씀을 연거푸 안 했겠습니까?
다앵이 날이 조아가 나무하는거느 머 크기 어러분거는 엄서찌마느, 항 구루마 채울라꼬 하이 힘이 억시기 안 들아껜능교. 이래저래 지내고 보이 점섬때가 대어뜨람더. 황소에게 소죽통을 땡기다 주고느, 우럼마가 삼베보재기에다 무까준 초배기(대나무 도시락)를 차자와가 다리를 쫙 피고 안자가 점섬을 잡사따 쿠디더. 머 점섬이라야 상반지기 밥에다가 무시 짱지 메쪼가리하고, 마린 메래치 멘마리에다 꼬오장 한수까락 아이겐능교. 그래도 아부지느 배가 고파션는지 잘 잡사따꾸디더.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나무하는 것은 뭐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지마는, 우마차 가득 채우려하니 힘든 것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지요. 한참을 지나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더랍니다. 황소에게 소죽을 먹도록 소죽통을 갖다 주고, 우리엄마가 삼베보자기로 묶어주신 도시락을 찾아와서 다리 쭉 피고 앉아서 점심을 잡수신 거랍니다. 뭐 점심이라야 상반지기 밥에다 무 장지 몇 쪽하고, 마른 멸치 몇 마리에다 고추장 한 숟가락 정도 이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허기가 지셨는지 잘 잡수셨다고 합디다.
우라부지느 점섬을 잡수꼬느 반다시 나짬 한심을 자야거등요. 점섬 잡수꼬, 담바 한 대꼬바리를 떼우시고느, 한심 푹 자고 일라이까내, 벌씨 지넉 참때가 지나빼가 서둘라가 구루마에 나무를 시라땀더. 와 고롱고하머 산에서느 해가 퍼뜩 너머가가 어두바 지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점심을 잡수시고는 꼭 낮잠 한숨을 주무셔야 합니다. 점심 잡수시고 풍년초(칼로 썬 담배)를 한 대 피우시고는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니까, 벌써 오후 새참 때(오후3시경)가 지나버려서, 서둘러서 우마차에 나무를 실었답니다. 왜 그런가하면 산에서는 해가 빨리 저물어서 어두워지니까.
구루마에 물거리를 잔뜩 실꼬, 5리찔 내메기돌거랑을 내라와가느, 또 푹푹 빠지느 몰개냉거랑을 거네는데, 짐이 너무 무거바가 소가 앙갈라꼬 서적을 하더람더. 소가 식식꺼리머 앙갈라꼬 쿠이까네, 아부지도 어쩌겐능교? 도리가 엄사가, 아부지가 도따가 나중게 잡술라꼬 낭가도떤 탁배기를 소 입에다가 다 바아여어 조땀더. 소가 억지로 묵긴 묵고는 입맛을 다시니까내 “야 이넘아! 씸 쪼매마 더 씨거라! 나중게 집에 가가 마신는 죽을 마이 끌리주꾸마! 씸좀 내라! 하먼서 소를 달래땀더.
이껀을 시고나가 몽디이로 소 궁디이를 뚜디리 패까네, 소가 지도 아푸까내 어짤수가 엄시이까내 또이 빠지도로 긍그이 냉거랑을 건네가가 문디동네로 가따고 하디더.
우마차에 나무를 가득 싣고, 5리 길 돌거랑(송정천)을 내려와서는, 또 푹푹 빠지는 모래냉거랑(동천강)을 건너는데, 짐이 너무 무거워서 소가 쉽게 안 가려고 버티더랍니다. 소가 씩씩거리면서 안 가려고 하니깐, 아버지도 어쩌겠습니까? 방법이 없어서, 아버지께서 두었다가 나중에 잡수시려고 남겨 두었던 막걸리를 소입에다 모두 부어넣어 주었답니다. 소가 억지로 먹긴 먹고는 입맛을 싹싹 다시 길래 “야 이놈아! 힘 조금만 더 쓰라! 나중에 집에 가서 맛있는 죽 많이 끓여 줄게, 힘내!” 하면서 소를 달랬답니다.
한참을 쉬고 난 뒤에 몽둥이로 소 엉덩이를 두드려 패니깐, 소가 자기도 아프니까 어쩔 도리가 없어서 똥이 빠지도록 근근이 기듯이 동천강을 건너가서 문둥이 동네로 갔다고 합디다.
나무를 다 부루고 난디, 문디이하고 나무깝슬 맞추는데, 나무깝하고, 그전뿐에 구루마 운빤비 남안능거 하고, 끝따리가 잘 안마자가주고 한창 싱개이를 해땀더. 나중게야 끝따리를 마차가주고 아부지가 돈을 주미이에다가 여어먼서 한 마디 핸는데,
“어이 바라! 아까뿐에 내가 니자테 한 말이 마째! 앙글라? 그러체!” 하까내, 문디이가
“할배요! 아임더. 차말로 지가 마차준기 마따꼬 메뿐 앙쿠덩교? 기기 마따꼬 하까내 와자꼬 그레 산능교?”
“야 이사람아! 내가 언제 자꼬 그라더노? 니가 메뿌이나 자꼬 구쿠이까내 내가 구캐찌. 니가 앙구쿠머 내가 구캐껜나? 앙글나? 오늘은 하리조일 일이 문디메추로 와이리 꼬이노?” 이라이까내‘
“할배요! 머라꼬요? 문디이요? 문디라캔능교? 할배요! 문디이느 우리가 문디이 아인기요!”
“하!하!하! 같이 박장대소(拍掌大笑)를 캐따쿠디더.
나무를 다 내리고 난 뒤, 문둥이하고 나무 값을 맞추는데, 나무 값하고, 그 전에 우마차 운임 남은 것하고 끝이 잘 안 맞고 해서 한참 승강이를 했답니다. 나중에야 끝을 맞추고는, 아버지가 돈을 주머니에 넣으시면서 한 마디 하셨는데,
“어이 봐라! 조금 전에 내가 너에게 말 한 것이 맞지! 안 그런가? 그렇지!” 하니까, 문둥이가
“할아버지! 아닙니다. 정말 저가 맞추어 준 게 맞다고 몇 번 말 안 해드렸나요? 그것이 맞다고 하니까 왜 자꾸 그런 말씀 합니까?”
“야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자꾸 그랬나? 네가 몇 번이나 자꾸 그렇게 하니까 내가 말했지, 네가 말 안했으면, 내가 그렇게 말할 턱이 있나? 안 그런가? 오늘은 하루 종일 일이 문둥이처럼 왜 이렇게 꼬이나?” 이렇게 하니까,
“할아버지! 뭣이라고요! 문둥이요? 문둥이라고 했는가요? 할아버지! 문둥이는 우리가 문둥이 아닌 가요!”
“하! 하! 하!” 같이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합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