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의 편집이 언제 일단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다만 몇 가지 분명한 사실들이 있는데, 그것은 고따마 붓다가 열반에 드신 직후에 경전의 결집이 시작되어 계속되었고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종려나무 잎사귀에 문자화되었는데,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은 부처님 열반 이후 500년경에 스리랑카에서 비로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빠알리대장경의 결집은 여섯 차례가 있었다.
① 제일차결집은 《디가니까야》주석서 『쑤망갈라빌라씨니』(妙吉祥贊 Sum-aṅgalavilāsini)에 따르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라자가하 시, 칠엽굴에서 장로 마하 깟싸빠가 주도하여 오백 명의 거룩한 님들이 모여 정법의 수호를 위해 경전을 합송하여 결집한 것이다.
② 제이차결집은 『디빠방사』(Dīpavaṃsa)와 『마하방싸』(Mahāvaṃsa)에 의하면 아자따쌋뚜 왕의 후손인 깔라쇼까왕 치세시에 몇몇 계율의 해석을 둘러싸고 불멸후 100년 경에 뻬쌀리 시에서 일어났다.
칠백 명의 수행승들이 밧지 족 출신의 수행승들이 주장한 금은을 수용하는 것 등의 열가지 주제(十事)에 대하여 비법으로 규정함으로써 보수적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ika)로 근본분열이 일어났고 각각의 부파에서 자신들의 경전을 결집한 것이다.
③ 제삼차결집은 『디빠방사』와 『마하방싸』에 의하면, 불멸후 236년 아쇼카 대왕의 후원 하에 빠딸리뿟따 시에서 장로 목갈리뿟따 띳싸(Moggaliputtta Tissa)의 주재로 1000명의 거룩한 님이 참여하여 분별설(分別設) 이외의 비정통파를 교단에서 추방하고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완성한 것을 말한다.
④ 제사차결집은 불별후 500년경 스리랑카의 밧따가마니(Vaṭṭagāmani)와의 치세시에 남인도의 비불교도들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과 한발에 의한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승려들이 죽어가게 되어, 더 이상 암송가 합송에 의거하여 구전으로 불경을 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마하비하라(Mahāvihāra)파의 스님들이 불전을 오늘날의 형태로 문자로 기록한 것을 말한다.
⑤ 제오차결집은 미얀마 북쪽의 마달레이(Mandalay)에서 1871년 민돈 왕의 후원으로 개최되어 빠알리 삼장이 729개 대리석의 석판(율장111개, 경장410개, 논장208개) 위에 새겨지게 된 것을 말한다.
⑥ 제6차결집은 1965년에서 1966년에 걸쳐 미얀마의 양곤 근처의 인공바위굴에서 2,500명의 불제자가 참여하여 삼장을 교열한 것을 말한다.
결집의 역사에 근거하면, 빠알리대장경은 상좌부 소속의 대장경이므로 《디가니까야》는 다른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제일결집 당시에 생겨났더라도 불멸후 100년경 근본분열로 상좌부가 갈라져 제이결집이 이루어졌을 때 다져지고 제삼결집에서 추가되었다. 실제로 《디가니까야》의 주석서(Smv. 615)에서는 사리 이야기와 탑묘의 건설은 「완전한 열반의 큰 경」이 인도에서 일어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삼결집에서 추가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제사결집에서 문자화된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올리버 아베나야께(O. Abenayake)는 「완전한 열반의 큰 경」의 마지막 게송들은 『붓다방싸』(Buddha-vaṃsa)의 마지막 장의 게송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아 스리랑카 승려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AKh: 194)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전이 문자화된 이후에도 경전의 변용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붓다고싸(Buddhaghosa)는 A.D. 500년경에 『쑤망갈라빌라씨니』(妙吉祥贊 Sum-aṅgalavilāsini)이라는 《디가니까야》 주석서를 썼다. 이 주석서에서 붓다고싸(Smv. I. 2-15)는 최초의 가르침과 계율의 합송·편찬을 의미하는 제일결집에 관하여 상세한 주석을 쓰고 있다. 결집은 정법의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불교존속에 불가결한 세 가지 요소 즉, 이론(敎: pariyatti; 삼장에 포함된 부처님의 말씀) 실천(行: patipatti; 길과 경지[四向四果]와 열반의 획득을 위한 실천) 검증(証: paṭivedha; 깨달음의 획득)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붓다고싸의 제일결집에 대한 주석은 오늘날의 불교학자들은 적어도 계율과 가르침의 내용이 훗날 율장과 경장으로 발전하였다는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경전성립사적으로 명확히 살펴본다는 것은 어렵고, 그의 주석에는 제삼결집에서 결집된 논사가 이미 제일결집에서 합송되어, 마치 삼장이 완벽하게 제일결집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부파불교와 초기경전
위의 제일결집에서의 삼장의 결집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나, 경장만 하더라도 위의 결집 순서대로 이루어진 것, 우리에게 전해지는 빠알리대장경은 상좌부 소속의 경전으로 실제로는 제이결집 이후에 부파불교가 생겨나면서 정통적인 상좌부에 의해서 결집된 것이다.
부파불교는 처음에는 근본분열을 통해서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파로 나뉘었다가, 지말분열의 시대에는 20개의 부파로 나뉘었다. 부파의 분열에 따라 각각의 부파는 율장과 경장을 전승하여 성전을 증보하거나 개편하기도 했다.
빠알리대장경의 율장과 경장은 단일한 상좌부 소속의 경전인데 비해, 북전에 한문으로 전해지는 율장이나 초기경전(阿含經)은 모두 지말분열에서 생겨난 여러 부파에 소속된 것을 무작위로 취합한 것이다.
한역 율장은 법장부(法藏部)의 『사분율』(四分律), 화지부(化地部)의 『오분율』(五分律),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티베트본재)가 있다.
북전의 한문으로 전해지는 초기경전(阿含經) 가운데 《장아함경》(長阿含經)은 법장부, 《중아함경》(中阿含經)은 설일체유부, 《잡아함경》(雜阿含經)은 설일체유부 혹은 부파불명,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은 대중부 혹은 부파불명의 소속이다. 이들 경전의 범본은 오직 단편적으로만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들 한역 초기경전들도 상좌부의 빠알리 경장의 기본적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