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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목차>
29.明鬼上(명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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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에 대해
묵자(墨子 475?-396? B.C)는 중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전국시대부터 한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흔히 공묵(孔墨)으로 병칭했다. 다만 묵자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은 극히 간략하다.
아마 사마천이 <사기>를 저작할 당시 사상계는
이미 유가의 천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세가(世家)에 모셔졌으나 묵자는
열전(列傳)에도 끼지 못한 것 같다.
사마천의 <사기>의 체계는
‘本紀’, ‘表’, ‘書’, ‘世家’, ‘列傳‘인데 예외가 있다.
항우는 황제가 되지 않았지만 황제와 같은 명성으로 인하여 ’本紀‘에 편입이 되었고,
공자는 대부와 왕이 아니면서 ’世家‘에 편입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원칙으로 따지면 항우는
‘世家’에 들어가야 하며 공자는 ‘列傳’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다.
그 당대에 공자와 묵자는 쌍벽을 이루었지만 사마천은 <묵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야박했다.
묵자는 공자의 유가가 중화사상의 주류사상으로 격상이 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2천년이 지나서 청대 말에 이르러서야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묵학 연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고, 묵자에 관한 고증도 점차 늘어난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청나라 말기는 그야말로
<중국>이라는 나라가 껍데기만 남아서 신음하던 시기이다. 당연히 그 당시의 인민은 의식주에 허덕이면서 살아갈 나날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묵자>는 2천년 동안의 잠을 깨고 나타난 것이다.
그 <묵자>의 사상적 조명은 청나라가 망하고
모태동의 현대중국이 탄생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과 결합이 되면서
새롭게 탄생을 한다. 실용주의적인 측면과 인민에 대한 사상적 측면이
재조명 되면서 연구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전국시대의 초기에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수많은 사상이 명멸했다. 수많은 사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했지만 묵자는 그렇지 않았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층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묵자의 사상을 오늘 날 ‘좌파의 원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대 중국에서 정치적 변화의 주요 매체는
계급전쟁이 아니라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관료주의화였다. 묵가는 관직에의
문로가 차단된 하층민 출신이었던 듯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하층계급은 고상한 이념보다는 의/식/주에 목을 매달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묵자의 사상은 이념적이고 명상적인 것보다는 매우 실용적이다. 그 실용성은 굶주리고 헐벗고 일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지배계급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조직화도 필요했다.
그래서 묵자의 무리들은 ‘거자(鉅子)’라 불리는
수령을 정점으로 고도의 조직사회를 이루면서 엄격한 규율로 뭉쳤다. 기원전 4~3세기의 전체를 통해서 묵자는 거자(鉅子)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유래된 명칭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조직폭력배의 무리와 같은 그런 그룹을 형성했다고 보면 무리일까? 묵자의 무리나 지금의 조직폭력배나 하층계급에서는 동류로 인정이 된다.
그렇지만 묵자의 무리는 지배계급에 대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 반면, 지금의 조직폭력배는 지배계급에 대한 반대의 이데올로기가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의식주에 대한 처절함에 있어서는 같은 동선을 그리고 있다.
현재 전하는 <묵자>는 53편이다.
53편이 5부 15권으로 분류되고 있다. 묵자의 중심사상은 제2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2권에서의 9편에서 25편에 개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자의 10대 사상으로 알려진 그의 주장이 이 부분에 실려 있다.
<상현><상동><겸애><비공><절용>
<절장><천지><명귀><비악><비명> 등10편이다. 마지막 2편 外 자묵자왈로 시작되고
있어서 제자들이 기록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외에도 논리학, 자연과학, 언행, 방어전술교본 등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