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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 산을 향하여
1호선 녹양역에서 위짜추 조단스 서류바 씨모우 까토나 다섯이 만났습니다. 오늘은 경기 양주에 있는 홍복산(463m) 호명산(425m)을 산행할 계획입니다.. 녹양역에는 조선시대 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 군마(軍馬)를 많이 기르던 곳이라 합니다. 역 바로 앞에는 새끼 말 망아지와 어미말의 조각상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한컷 씩 스마트폰에 담고 의정부 종합 운동장 방향으로 향합니다. 리틀 야구장을 오른쪽에 두고 홍복산 능선을 오릅니다. 아래로는 홍복 저수지와 백석읍이 시야에 들어 오며 맞은편에는 양주 불곡산 모습도 보입니다. 정상에는 군사 시설이 있어 접근이 불가하여 다시 회귀하여 헬기장 까지 내려 옵니다. 저수지로는 통행이 차단되어 있어서 철조망 너머로만 홍복 저수지를 바라보며 차길로 계속 내려옵니다. 한강봉과 은봉산 그리고 호명산 들머리가 만나는 삼거리를 거치고 약수터를 지나서 가야 아파트를 오른편에 끼고 버스 승차장에 닿았습니다. 이번 산행코스는 호명산 정상과홍복산 정상 표지석은 못 밟았으나 걸은 걸음 수는 3만 보를 상회하는 거리입니다. 뻑적지근한 몸을 버스에 묻고 의정부역에서 하차하여 회식 장소로 들어가 우리들의 단골 레파토리를 부릅니다. 각 한병의 알콜 넘김의 의무를 마치고 시원한 생맥주는 청량리역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몇번 자리를 했던 2층 생맥집을 찾아 시원한 한 모금으로 지난 세월의 묻어 두었던 삶의 응어리를 풀어 놓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거기서 거기라지만 마주 앉은 친구의 스토리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군요.
運 命 의 背 信
운 명 의 배 신
부부란 과연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삶의 풍습으로 본다면 촌수(寸數)가 없는 무촌(無寸)입니다. 촌수만으로 따진다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분명한 남남입니다.
다른 부모에게서 태여났으며 몇 십년 동안 전혀 다른 곳 다른 가정 다른 환경과 교육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이렇듯 지구 상의 모든 인간들은 어찌 보면 이런면에서는 거의 모두가 동일한 조건을 가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봐도 별로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 넓은 지구상에는 많은 인종과 국가와 70억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100년을 살아도 옷깃 한번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으로 연애를 하였든지 아니면 중매를 통하였든지 당신과 나는 부부라는 천생의 배필로 맺어 집니다. 일가 친척을 비롯하여 친구들 동문회 선후배 사회 생활 하면서 알게된 지인들, 그리고 주위에 인연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참석합니다. 신랑 신부는 하객들 앞에서 신랑은 신부의 남편으로 신부는 신랑의 아내로 부부가 되어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선서합니다. 신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가장 사랑하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 합니다. 검은 머리가 하얀 파 뿌리가 되어도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엎드려 큰 절로 하객 앞에 맹세를 합니다. 신부는 가장 믿음직 스럽고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남성을 남편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 세상에 태여나서 이 순간만큼은 가장 행복하고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황홀한 순간입니다. 부부가 된 신랑 신부 두 사람은 더 없이 환한 웃음을 날리며 하객들의 축복 속에 새로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년이 가고 이년 삼년이 흐르노라면 슬하에는 어느새 자식들이 매달립니다. 사내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매일 밤 늦게 술에 떡이 되어 들어 옵니다. 여인은 하루 종일 아이들 돌보느라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모시느라 파김치가 되어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듭니다. 사내는 옆에 누가 있는지 여인은 사내가 집에 들어 왔는지 관심도 마음도 없습니다. 서로가 자기 맡은 일에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힘에 부치도록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내는 일터에서 들어 오는 수입 전부를 그대로 아내 통장으로 입금 시킵니다. 자식들 공부 시키고 모두 출가 시킨 다음에 당신과 나 둘만의 노후 생활은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평생 힘들게 벌어다 준 수입금은 아내인 자신이 관리하고 있으니 조금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사내는 팔 다리 쭉 뻗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잡니다. 넉넉하고 멋진 노년 생활을 밤마다 꿈을 꾸며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역시 아내 하나는 정말 잘 챙겼다고 술 자리에서는 아내 자랑이 단골 안주가 됩니다.
" 야, 이 녀석아 못 난 놈아 여편네 자랑 그만해라, 이 팔불출아, 여자는 그렇게 믿을만한 동물이 아니야, 정신 차려 --- " 엄숙한 표정으로 충고를 하는 친구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립니다. " 내 여자는 이 세상 여인네와는 인격적으로 성품으로도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이 친구야,알간 , 너나 잘 관리해라 " 언제나처럼 돌아오는 심드렁한 대답 뿐입니다. 해외에서도 몇년씩이나 근무를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여 십원 한장 남기지 않고 몽땅 송금을 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옆구리가 허전함은 어쩔 수 없지만 남성(男性)으로서의 성열(性熱)만은 감당키 어려운 고역입니다. 그럴라치면 냉수 한컵 들이키곤 매끄러운 곡선미를 품은 아내의 풍만한 육체가 눈에 어른 거립니다. 향긋한 아내의 체취에 목말라 하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세월 또한 몇해 이던가요. 새벽마다 치솟는 양수(陽水)를 막을 수 없으매 짜릿한 쾌감의 성벽(性僻)을 수동(手動))으로 나마 달래봅니다. 이처럼 삶의 질곡을 수없이 겪으며 인생의 갱년기로 들어 섭니다. 어느덧 유효 기간의 만료로 폐기되어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입사 동기들은 몇년 전에 이미 명퇴라는 허울을 받아드리고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듣기 좋은 말로 자의 반 타의 반이라지만 본인 의사와는 달리 떠밀려 그만 두었지요. 늦은 밤까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집안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아내와 다정한 대화 한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덤덤한 일상의 연속입니다. 더군다나 하나 뿐인 예쁜 딸내미 녀석과도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외식 한번 제대로 한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젊음을 송두리채 쏟아 부은 직장이지만 내후년이면 정년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사십대 중반에 퇴직 하면서 푸념 하듯이 내 뱉은 동기생의 한 마디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 회사에 너무 올인 하지마라, 적당히 건강도 챙기고 집 사람과 여행도 다녀라, 아니면 마누라랑 모든 것을 몽땅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네, 그리고 돌아 오는 건 배신뿐이야," 우리는 그 날 밤 늦도록 통음을 하며 서울의 명동 밤거리를 헤매다가 아쉬운 이별을 했습니다. 아직은 늦둥이 외동 딸이 대학 1년차인데 그 녀석 앞 날만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아려옵니다. 내가 더 늙기 전에 출가를 시키고 손주 놈을 품에 안아 보는 것이 내 소원인데 마음만 급해 집니다. 1.4 후퇴 때 함경도 북청에서 피난을 부모님과 형제 자매 네명 모두 여섯 식구가 빈 손으로 남하했습니다. 아버지는 도중에 헤여져 행방 불명으로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내 앞날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6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의 꿈이던 사관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문제로 신원 조회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요. 북(北)에 아직 생존해 있는 상태이기에 불가하다는 설명입니다. 이런 사실만 있어도 외국에 여행가는 일도 만만치 않은 그 당시의 현실이였습니다. 모든 꿈을 접어 버리고 무조건 돈을 벌어야겠다는 오기와 집념 하나로 지금껏 살아 왔습니다. 아내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돈만 벌어다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만으로 매달려 왔습니다. 막상 퇴직을 하는 날은 시원 섭섭하지만 홀가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살림살이 하랴 자식 공부 시키느라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내의 남편으로 그리고 딸 자식을 위한 아버지로서 못 다 한 사랑과 관심을 베풀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우선 종로 4가에 있는 시계 골목으로 들어 섭니다. 33년 전 아내와 함께 찾았던 친구가 아직 이 곳에서 보석상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일 주일 전에 그 친구에게 결혼식 때 예물 반지와 똑 같은 것을 부탁했습니다. 신혼 초에 시동생 대학 등록금을 마련키 위하여 아내가 반지를 전당포에 저당 잡혔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내의 손 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쁘게 포장한 다이야 반지를 양복 안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붉은 장미꽃 33 송이와 흰 백합 33 송이를 가슴에 품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아파트 벨을 누르고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습니다. 황급히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 가니 TV 옆 탁자에는 약혼식 대신 기념으로 찍었던 사진 액자 앞에 메모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 형부 ! 오늘 언니를 Y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합니다." 처제가 급히 적어 놓은 메모 입니다. 순간 머리 속이 멍 해지며 다리에 기운이 쭉 빠져서 꼼짝 없이 한참을 주저 앉습니다.
응급실 앞에서 계속 울기만 하는 딸과 처제를 만났습니다. 간암 말기로 수술도 불가하다고 합니다.계속 미안하다는 처제 이야기를 듣고는 할 말을 잃습니다. 뒷 통수를 망치로 한방 맞은 기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선택은 딱 한 가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채권자들의 손에 넘어 갔으며 언니 통장은 마이나스 상태랍니다. 이유는 모르겠고 언니는 그냥 형부와 딸에게 미안하다고만 한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뛰쳐 나왔습니다. 전후 좌우 사방으로 꽉 막힌 상태로 온 세상이 캄캄하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생각나는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홀딱 벗고 허허 벌판에 서 있는 기분인데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안한 상태입니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걷고 또 걷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동지 섣달입니다. 사흘이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서쪽 하늘 끝에는 황홀한 석양 노을이 한강물 위를 검붉게 물들이며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한강대교 난간을 붙들고 심호흡을 합니다.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냅니다. 보라색 은박지에 정성스레 포장한 자그마한 반지 케이스가 저녁 노을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십니다. 일렁이는 물 줄기는 한강 하류를 향하여 흘러 가지만 파도는 자꾸 자꾸 거꾸로 역류하고 있습니다. 힘껏 강물 위로 던집니다. 반지 주위로 조그마한 물결들이 원을 그립니다. 그 물결 속에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딸 아이의 얼굴이 겹칩니다. 딸내미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딸에게 전화를 해 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이 흐느끼는 소리만 강바람에 스칩니다.
" 아빠 아 ~~ ! 어디 계세요, 엄마가 --- 엄 ~마 ~가 ~ 아 아 아 "
아내의 죽음보다는 내심 딸 녀석이 걱정이지만 발걸음은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는 적막감만이 감싸이고 꽃다발이 발 아래에 채입니다. 가방에 옷가지 몇 벌 챙겨 가지고 집을 나섭니다. 모든 것이 정리된 느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회사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합니다.
거래처의 담당 상사와 접대를 하던 단골 회식 장소이기도 합니다. 여주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가방을 받아 주면서도 푸짐한 주안상으로 맞이 합니다. 하루 이틀 한달 함께 생활 하노라니 텅 비어버린 몸과 마음에는 새살이 차오르는 기분입니다. 하나 남은 딸 자식을 위해서도 살아야 겠다는 의욕도 생깁니다. 다행히도 퇴직한지 십여년이 지났으나 옛날 거래처에서 가끔 일감을 할애해 주는 배려를 받고 있습니다. 큰 돈은 아니지만 둘이 생활하기에는 별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번도 하지 않은 여인을 다시금 삶의 동반자로 서로가 받아 들이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서로 의지하며 모자람은 서로 채워주며 부담 없는 하나의 삶의 요람처인 셈입니다.
예전에도 스스로 상류의 삶을 영유하며 살아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 부러움 없이 상류층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인간은 태여나면서 부터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태여 났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 갈 뿐입니다. 거의 십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내가 어느 곳에 안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흩뿌려져 흔적도 없는지 생각키도 싫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딸과 함께 찾아가서 눈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답니다. 지난 날 자신의 과거를 스스럼 없이 토해내는 친구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굴곡의 삶입니다. 붉으스레 취기가 도는 얼굴에는 오히려 편안함과 자신감이 묻어 납니다. 나에게 닥쳐온 운명을 피할 수만 있었다면 지금 쯤 강남에 빌딩 하나는 가졌을 것입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나 자신은 목이 메이며 가슴이 아려 옵니다. 무슨 말로서 위로를 해야 할런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술잔의 부딪침이 계속 될수록 오히려 정신은 맑아 지는 느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류층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친구의 한 마디가 가슴에 비수로 돌아 옵니다. 아내의 운명이 어쩌면 그에겐 배신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이 혼란스레 뇌리에 맴 돌고 있습니다.
2016년 3월 24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