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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폭발음으로부터
실을 쥐면
여름의 풍속이 느껴진다
흘러왔구나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실감
실을 쥐면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방금 돌아눕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당신은 벽 뒤에
어쩌면 벽 뒤에
실을 쥐면
매듭을 지어 한 시절을 떠나보낼 수 있다
매듭과 매듭 사이에서 숨을 고를 수 있다
실을 쥐면
마른 땅에서 비를 기다리는 사람과
빗속에서 마른 땅을 기다리는 사람
쌍둥이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게 되고
실을 쥐면
어두운 색 공들 사이로 밝은 색 공이 날아든다*
덤불 속에 손을 집어넣을 수 있다
나는 이 실을
바닥에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세상을 버릴 수도 있었다
실을 쥐면
전조등이 켜진다
이유가 없는데 분명히 켜져서
단 하나, 실뜨기는 혼자 할 수 없다
나는 동작을 멈추고
다음 주자의 얼굴을 상상한다
* 레이 브래드버리.
반죽 이전의 손
이곳의 새벽은 분주합니다
밀가루 포대를 실은 트럭이 비밀스럽게 다녀가면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새하얀 함성들
그 안에 손을 찔러 넣을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게 뭉클해집니다
이제는 가루가 된 누군가의 속살을 만지는 기분
타오르고 타오르다 주저앉은
그러나 나는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손을 가지고 있어요
악몽을 녹이는 설탕을 추억을 부풀리는 이스트를 넣어줍니다
이곳은 향긋한 숨들이 피어오르는 정원
빵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평생을 빚어온 모양도 마음의 온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사실
오늘은 새카만 속을 채워 넣어야 하는 순간에 손이 헛돕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속도에 맞춰
노릇노릇 익어가는 이야기들
정오, 가장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홀로 앉아 빵마다 낯선 이름을 붙여보기도 해요
호시절, 폭풍우, 토성의 고리……
맛볼 수 없어 아름다운 것들의 이름을
이곳을 찾는 이는 예전만큼 많지 않습니다
저녁은 쉽게 눅눅해지고
어떤 하루는 떨이로 팔려나가기도 하지만
봉지 가득 빵을 사들고 귀가하는 어깨를 봅니다
뒤축이 닳은 구두가 저녁에서 밤으로 그를 데려갑니다
나는 그런 이들을 위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반죽 앞에 어둠의 조도를 맞추는 손이 있습니다
(발표시)
각인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이라는 게 필시 칼 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안내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로이 남겨둔 이유를 묻고 싶었다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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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뒤섞인 공, 진실의 경로, 이야기
안희연
뒤섞인 공들 사이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브래드버리, 몰입하는 글쓰기』(레이 브래드버리, 비아북, 2023)를 하루 한 챕터씩 읽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워낙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작가 불문, 창작의 비밀을 누설하는 책 앞에선 예외 없이 마음이 동하고 만다. 특히 이 책은 본문에 진입하기도 전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서문에 적힌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비소를 아주 조금 먹으면 저녁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 저녁에 또 아주 조금 먹으면 새벽까지 좀 더 살아 있을 수 있고, 비소는 미량만 섭취하면 독성에 중독되지 않도록 예방해 주며, 훗날 몸속에 들어온 독을 중화시키기도 한다. 삶의 한가운데서 해야 할 일이란 이러한 비소 섭취와 같다. 삶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색 공들 사이에 밝은 색 공을 던져 넣어, 여러 진실을 뒤섞어야 한다.”
레이 브래드버리, 『브래드버리, 몰입하는 글쓰기』, 비아북, 2023, 6쪽.
이 대목을 맞닥뜨렸을 때, 즉각적으로 ‘비소’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비소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납이나 수은처럼 몸에 유해한 원소는 아닌 것인가? 검색을 해보니 우리가 흔히 섭취하는 해산물, 곡물(특히 쌀), 버섯이나 유제품에도 미량의 비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간 나의 삶이 알게 모르게 비소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비가시적인 물질들, 무색무취 무향의 물질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중독된 줄도 모르고 중독된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
여기서 말하는 비소란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까지를 포괄할 것이므로, 내 삶의 독을 중화시켜줄 비소의 존재에 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내 삶에 들어와 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독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까. 무엇이 내 삶을 지키고 지탱하고 회복시킬까. 이 물음 앞에서 역시나 나는 ‘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비소=시’라는 등호를.
시선은 자연스레 그다음 문장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독과 비소, 중독과 예방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공 이야기를 꺼낸다. “어두운 색 공들 사이에 밝은 색 공을 던져 넣어, 여러 진실을 뒤섞”는 과정이 앞서 나온 비소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이 같은 문장의 배치(흐름)은 시를 읽고 쓸 때의 호흡과도 유사해 보였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필시 어떤 말들이 생략되어 있을 텐데 그 숨겨진 말들의 실체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그래서 적극적인 독해와 흥미를 유발한다는 점은 시의 매력이기도 할 터. 아마도 작가는 창작을 하는 행위가 여러 색의 “공”을 뒤섞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어두운 색 공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암울하다. 밝은 색 공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광기나 판타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뒤섞임일 것이다. 뒤섞인 공들의 세계에서 독자는 어둠과 밝음을 변별하는 눈을 갖게 되고, 끝내는 자신이 원하는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
실, 진실의 경로
어둠 속 밝음을 찾아내는 눈 갖기.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서기. 그것을 일종의 “비소 섭취”, 즉 읽고 쓰기의 궁극적 목표라고 말해도 될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임무를 완수해낼 수 있을까.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오라기의 ‘실’이었다. 왜 하필 실이었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가까이 있고 만질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슬픔에 대해 쓰고 싶어요’라는 말은 너무 거대한 말이다. 하지만 실을 쥐면, 실의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실의 슬픔이 느껴진다. 최소의 감각이 열린다.
실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매개로서의 사물이다. 실을 쥐는 순간 이곳의 반대편인 저곳이 생긴다. 내가 실이라는 구체(具體)를 움켜쥐었기 때문에 경험되는 추상이 있다. 「폭발음으로부터」는 그런 실감 속에서 적어 내려간 시다. 이 시를 쓰는 동안 몇 번이나 내면의 폭발음을 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공포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공포는 무색무취 무향의 물질처럼 영혼을 잠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을 쥐고 있다면? 실을 쥐면 다음 장면을, 그다음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견딜 수 있다.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아리아드네의 실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 오라기 실의 존재가 이토록 크다.
이야기
실을 쥔 내가 간절히 찾아 나서는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일 것이다. 스스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야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현실을 이해하고 세계의 의미를 발견하는 하나의 통로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 안에서 소화시키면서 확장된다. 첫 시집을 묶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중요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시는 이야기보다는 이미지에 가깝다고 여겨왔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가는 세상에서, 하루가 다르게 광포해지는 인간 종(種)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또 다른 실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시를 이야기로 만들기. 시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의 문이 열리면, 공간을 명확히 보여주고자 했다. 백지를 1차원의 납작한 공간이 아니라 3차원의 ‘백색 공간’으로 고쳐 부르는 일을 나는 오래 지속해왔다(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는 「백색 공간」이라는 동명의 시가 세 편 수록되어 있다). 흔하디흔한 베이커리나 도장가게를 시의 장소로 삼으면서도 일상적 공간으로만 머물지 않게 도약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장소에 이야기를 더했다. 그곳에 가면 인간을 빚는 신의 손을 볼 수 있다고, 신이 인간의 이름을 일으키는 행위가 각인이라고.
쓰는 내가 실을 쥐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갔듯이 시를 읽는 이들도 이야기를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를. 어두운 색 공과 밝은 색 공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현실 속에서 진실을 알아채기를. 그런데, 그런 진실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환상 아닌가. 끝없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는 또다시 믿음의 실을 붙들게 된다.
다시, 뒤섞인 공들 사이에서
흰 종이를 바라볼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공간이 열릴까 두근거린다. 마음이 새것이 아니면, 내가 나로만 가득 차 있으면 백지는 결코 백색 공간이 되지 못한다. 내 속 어딘가에는 보이지 않는 종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울리지 않는다면 나는 한 문장도 쓸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채로도 문장을 쓸 수는 있지만 그런 문장은 거짓이고 장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더 간절히 실을 붙들 수밖에 없다. 있는 힘껏 최소의 감각에 집중하면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다시 듣는 방”(「청음실」)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팔짱 끼고 멀리서 삶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신비로운 거라고 고쳐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삶의 굉장함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니까.
중독되지 않을 만큼만, 미량만 섭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번이 시를 향해 쏟아지는 이 마음은 누가 던져 올린 공일까. 시 앞에서는 언제나 질문뿐이다. 정답은커녕 대답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평생을 질문만 하다 끝나는 일. 그것이 시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울상을 짓는 내게, 멀리서 밝은 색 공 하나가 날아드는 것도 같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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