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송강 4백주기/김성우(문화칼럼)
입력1993.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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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누가 이 「관동별곡」을 모른다 하랴.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누가 이 「장진주사」를 모른다 하랴.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서러라거든 짐을 조차 지실까」
누가 이 시조를 모른다 하랴.
이 시가들의 작자인 송강 정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또한 없다. 그러나 그가 지금 어디 누워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를 타고 내려가다가 충청북도 땅의 진천인터체인지에서 빠진다. 곧 읍내에 들어서게 되고 여기서 청주로 가는 국도를 계속 달린다. 얼마 안가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송강사가 있다.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읍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의 거리다.
송강은 1593년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별세했다. 처음에는 양친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고양군의 신원에 묻혔다가 1665년 진천의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진천 현감으로 있던 손자가 자기 아버지(송강의 둘째아들)와 함께 모시기 위해서였다. 당시 송시열이 지명을 쓴 신도비가 지금 송강사의 입구에 서있다.
송강사는 1978년 중건을 시작하여 1988년에 마쳤다. 사당외에 유물관도 세워졌다. 경비는 국고외에 종친회에서 성금을 보탰다. 경내에는 문인들이 건립한 가사비도 보인다.
올해는 송강이 별세한지 꼭 4백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5일 한식날 이 송강사에서 기념추모제가 열렸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과 유림들,그리고 국어학자 등 1천여명이 모였다. 묘소에서 봉제를 지낸뒤 사당에서 춘향제를 올리고 송강의 문학과 충절을 기리는 기념강연도 있었다.
이번에 유물관은 기념관으로 새로 현판되었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등의 가사가 서예가들의 새글씨로 걸려졌다. 송강의 친필유묵이 달필이다. 손수 쓰던 유품은 선조가 하사했다는 은배와 옥배,그리고 중국에 사신 갔을 때 받아온 용연이 모두다. 밥공기만한 크기의 은배는 쭈글쭈글하다. 선조가 딱 석잔만 마시라고 해서 술을 한방울이라도 더 담기 위해 송강이 두들겨 늘렸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애주가 송강의 호방한 풍류가 그 안에 담겼다. 술잔의 진품은 송강의 묘소를 지키는 종손이 보관중이다. 이 종손의 배려로 진품 은배에 제주를 한잔 따라 마셔본다. 4세기를 격한 송경과의 건배다.
묘소는 사당입구에서 산허리를 돌아나간 곳에 있다. 환희산 중턱이다. 아들과 위 아래로 함께 누웠다. 봉분이 대왕처럼 크다. 둘레에는 진달래가 한창 화사하게 피었다. 꽃꺾어 산놓고 싶다. 묘앞에 엎드린다.
송강 정철. 노계(박인로) 고산(윤선도)과 함께 조선조 국어문학의 3대 가인의 하나이자 그중에서도 당연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름이다. 그는 4편의 가사외에도 80여수의 단가와 7백수가 넘는 한시의 명편들을 남겼다. 1백년뒤에 태어난 김만중은 『자고로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관동별곡과 전·후미인곡의 3편뿐이다』라고 썼고 고가연구의 대가 양주동은 『조선조 5백년간 시조는 수천수에 달하나 시조다운 시조의 대표적인 작가는 송강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장가건 단가건 그의 문학은 오늘 읽어도 입에 설지 않다. 한문문학이 사대부의 문학이던 시대에 그의 당당한 언문문학은 자국문학을 일깨웠다. 생생한 민중의 구어가 그의 노래로 하여 비로서 찬란한 문학어로 되었다. 우리 국어의 미학은 송강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말이 아름다운 줄을 송강이 인식시켜 주었다. 한글을 처음 지은 것이 세종대왕이라면 한글로 글다운 글을 처음 지은 것은 송강이라 할 수 있다. 송강은 우리 모국어의 발견자다. 그 모국어를 쓰는 우리는 모두 그의 후손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송강의 4백주기가 어찌 영일정씨 문청공파 종친회만의 것이랴. 추모제를 마련한 것은 종친회였다. 「송강문학 연구논총」이라는 기념 논문집을 출간한 것도 종친회중의 한사람이다. 올해 예정된 기념행사는 충북대학에서의 학술대회와 서울서 열릴 학생들의 백일장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쓸쓸할 일이 아니다. 전국민적인 경의가 곳곳에서 떠들썩해야 할 것이다. 한해내내 이 송강사에 순례의 행렬이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송강사를 배운 사람들은 송강사에 모이지 않고 다 어디로 흩어졌는가. 추모제 현장에는 TV 카메라 한대 안보인다. 학교에서 송강의 시조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어디로 다니는가. 평일 송강사를 찾아오는 사람은 백명도 안된다.
송강의 유적으로는 이곳말고도 「관동별곡」의 무대가 된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성산별곡」 및 두 「사미인곡」을 지은 전남 담양의 식영정과 송강정이 와보란듯이 남아있다.
「이 몸 죽은 후면… 누른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제 뉘한잔 먹자 말고」하고 「장진주사」에서 읊조린 송강이다. 묘소에는 술잔 하나 갖다 놓여진 것이 없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