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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자의 총론
송나라 선비가 마음을 비유하는데, 거울 혹은 성곽이라 하지만 뜻은 한 이치다. 대개 마음은 본래 형상이 없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또 무시로 출입하여 그 향하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런즉 마음을 밝혀 천성을 보고자 하는 자는 그림과 비유가 아니면 능히 밝히기 어렵다. 그림을 보고 뜻을 깊이 생각하면 선한 길과 악한 길이 마음눈에 소연(昭然)히 보이나니 여기에 특별히 그림을 분별하여 그렸다.
또한 마음은 도를 담는 그릇이니 비우고, 신령하며, 어둡지 아니하며, 모든 이치를 갖추었으되 후에 사욕이 동하여 육체의 욕망을 따라 마음이 어두워져 교만을 부리며, 음식을 탐하여 자기 몸을 잊으며 혹 아름다운 색을 보고 음심을 일으키며, 재물을 만나면 탐심을 낸다. 시기가 가득 차 완악한 성품이 되면 착한 길로 인도할지라도 발이 매어져 앞으로 못 나가고, 자주 정욕에 빠져 천사의 경계를 어기고, 성령의 빛을 가려 마귀가 무리로 들어와 마음을 요동하니 저가 죄에 빠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구습은 비록 더러웠을지라도 선을 행할 수 있나니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이 향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 마귀의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을 성령이 주장하면 광명하고, 고요하여 사특한 것들이 없어지지만 마음을 마귀가 주장하면 어둡고, 막혀 모든 욕심이 어지럽게 일어난다.
하나님과 마귀는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그 행적은 찾을 수 있은즉 선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마귀를 증명할 수 있으니 진실로 보는 데서 어그러짐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의 그림을 보면 선한 이와 악한 이가 죽을 때에 갚음을 받는 것이 각각 같지 아니함을 알지니, 천국 지옥이 그 지경을 나누고 하나님과 마귀가 각각 그 영혼을 영접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라. 이때에는 생전에 있던 부귀와 영광은 다 허(虛)로 돌아가나니 죽은 후에야 영혼의 관계가 중대한 줄 알게 된다. 고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마귀의 집도 된다. 또한 다음의 그림에 사람이 말씀을 좇는 것과 정욕을 좇는 것이 각각 다른 것임을 분별하여 비유를 하였느니라.
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공경하며, 정욕을 좇아 마귀의 꾐을 받아 죄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도 옛사람의 상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가나안 땅에는 이미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이미 다른 이방인에 의해서 점령되어 있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 일곱 부족은 상징적으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일곱 귀신, 일곱 악령들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정복되기 전에 이미 악한 영들, 악한 죄들이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모든 이방 족속을 멸하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듯이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해야 한다.
많이 알려지고 사용되어 왔던 ‘박군의 마음’이라는 전도지가 있었다.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악한 성향과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안에 그 일곱 가지의 영들, 죄들이 있는데 그것을 짐승으로 표현하여 보여준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3가지 짐승을 추가하여 10가지 짐승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그 이외에도 더 많이 추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추가하여 우리 마음을 좀 먹고 무너뜨리려는 무서운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도록 하자(엡 4:22-24).
다음의 그림을 자세히 보라. 외양은 맑고, 온순하고, 엄연하여 점잖고, 훌륭하나 그 속을 해부하니 별별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다(마 12:34, 막 7:20-23).
그 여러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다.
1. 개구리
개구리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거짓말을 많이 하는 더러운 영이다(계 16:13-14, 16). 요한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환상을 본다. 여기서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다르타’는 ‘불결한’이란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마귀를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막 1:23, 3:11, 5:2). 이들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미혹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로, 땅의 왕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거짓 예언자들처럼 이적을 행할 뿐만 아니라 온갖 거짓말과 유혹하는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2. 공작새
공작새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교만의 영이다.
공작새는 깃털이 볼 만하여 찬란한 몸뚱이로 교태를 부리나니, 교만의 성질을 가리킴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 잘난 재미로 산다고 한다. 얼굴만 좀 아름다워도 교만하고, 옷만 잘 입어도 교만하고, 돈푼이나 있어도 교만하고, 지식이 있으면 지식 교만, 권세와 지위의 별별 교만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므로 이 공작새의 교만을 물리치라. 이놈을 마음속에 기르다가는 먼저 자기를 비롯하여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도 망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교만한 자는 겸손의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고, 진보성이 없는 자이다. 알곡 이삭은 고개를 숙이는데 돌피 가라지는 고개를 젓는다.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눅 18:11, 12).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3. 뱀
뱀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간교한 영이다.
인류가 타락하여 죄에 빠지고, 모든 고통이 우리들의 삶속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혹자가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다. 그 유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진 것이다. 여기에 인류 모든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성경은 그 유혹자를 뱀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뱀을 도구로 사용한 사탄이었다. 사탄이 뱀을 도구로 사용하여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져 모든 인류에게 죄와 고통과 사망을 안겨주게 된 것이다.
4. 염소
염소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영이다.
성경에 나타난 염소의 특징을 통한 교훈들을 보라. 염소와 양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처럼 참다운 성도와 거짓 교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히 다르다. 염소와 같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에서 항상 자기 고집만 부리고 절대로 순종하지 않는다. 거칠고 난폭한 언행으로 누구든지 부딪치기만 하면 성질을 부리며, 싸우고, 뿔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교만하여 언제나 높은 곳을 좋아한다. 때문에 염소가 묘위에 올라가 ‘음매’하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분별이 없이 항상 큰소리만 친다.
너무나도 배타적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생활도 못한다. 항상 자기 혼자 겉돌면서 불평만 한다. 남들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칭찬해 주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한다. 더 나아가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제 멋대로 산다. 성도로서의 체면이나 양심도 없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며 행동한다.
5. 호랑이
호랑이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혈기가 많은 영이다.
어려서는 애완동물처럼 있다가 커서는 사람을 공격하는 호랑이의 모습은 꼭 죄의 모습과 유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작은 죄를 가볍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무섭게 보이지 않고 갖고 놀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처음에는 무서운 것 같지 않고,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나중에 그 죄가 커지면 언젠가 그 야성과 폭력성이 나타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약 1:15).
우리 안에 죄의 호랑이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경고한다. 그처럼 지금도 사단은 우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이런 때에 죄의 호랑이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죄는 결코 경시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호랑이와 같은 혈기가 있다고 느껴지면 하루라도 빨리 내쫓아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가만히 놔두면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하여 패가망신 당하게 될 것이다. 가정의 풍파, 교회의 분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다 이 호랑이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온무사할 때에는 양과 같고 비둘기 같이 순하지만 비위가 틀리는 일이 생기면 성질을 부린다. 눈에는 불이 나고 이를 갈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 모양은 꼭 마귀 화상이다. 혈기를 부리고 신경질을 내는 것은 호랑이의 충동이다(엡 4:31, 눅 9:51-56).
6. 돼지
돼지의 형상은 탐욕의 영이다.
사람들 중에 돼지라고 놀림을 받는 자들이 있는데, 대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돼지는 앞으로 나온 주둥이가 있는데 음식을 아주 잘 먹는다. 썩은 음식을 비롯하여 무엇이든지 잘 먹고, 정말인지는 몰라도 돼지가 먹으면 죽는다는 새우젓도 잘 먹는다. 한 여름에 돼지우리는 썩은 냄새로 가까이 갈 수가 없는데, 돼지는 천연덕스럽게 그곳에 누워 낮잠을 즐긴다. 덩치와 얼굴 크기에 비하여 돼지의 눈이 너무나 작다. 송곳으로 뚫어 놓은 것처럼 구멍 2개만이 있는데 그것이 돼지 눈이다. 소나 말이나 토끼나 다른 동물에 비하여 눈이 아주 작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인 사자 호랑이 고양이(사람을 포함하여)등은 눈이 얼굴 앞에 있고, 잡혀 먹는 동물들은 모두 눈이 얼굴 양쪽에 있는 것이 통례인데 이 돼지는 예외인 것 같다. 잡혀 먹는 운명인데도 먹는데 너무나 바빠서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이 돼지 눈의 또 다른 특징은 눈이 항상 땅으로 향했다. 돼지는 거의 눈을 위로 향하는 일이 없다. ‘땅을 보고 걷자’가 일생 표어일지 모른다. 항상 먹는 것에 관심이 있기에 얼굴이 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작은 눈 때문에 하늘이 안 보일지도 모른다. 돼지가 하늘을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목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목이고, 어디까지 몸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목이 몸처럼 두꺼워서 구부릴 수가 없으며 목을 들어 하늘을 볼 수가 전혀 없다. 옆으로나 뒤로나 목을 움직일 수 없고 돼지 고집(자아)으로 앞으로만 달린다. 인간 중에 대부분이 이 돼지처럼 세상만을 위하여, 먹을 것만을 생각하며 땅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많다.
7. 자라
자라의 형상을 묘사하는 짐승은 게으른 영이다.
자라는 해타(懈惰)의 성질이요 물러가는 마음이다(잠 26:13-16).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 하였는데, 이놈의 자라는 편안할 적에는 목이 한 발만치 나오다가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쑥 들어가고 만다. 무슨 칭찬이나 영광 받을 일이 생기면 ‘나가 보자’하고, 큰일을 낼 것처럼 덤비다가도 무엇이 잘 안 되고 어려운 일 당하면 ‘아이고, 난 모르겠다.’하고 쥐구멍을 찾는다.
한국 사람에게 이 자라 모가지가 제일 많다. 그래서 아무 것에도 성공 못한다. 옳은 일이면 목이 잘리고 뼈가 부서져도 용기 있게 나가 보지 못하고 불여의(不如意)하면 다 물러가고 마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용두사미(龍頭蛇尾)격이다(히 10:38-39).
그리스도 정병의 무장은 앞에만 시키는 것이요 뒤에는 안 시킨다. 이는 돌아서지 말라는 것이다.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기독도를 따르던 연약이란 사람은 한참 가다가 절망 속에 빠져 기독도를 원망하면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 돌아갔는가? 기독도를 따라가면 좋으리라 생각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니 그렇게 된 것이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까불어 보아야 안다. “아, 물러가는 마음을 고쳐 주소서.”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이들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아니하므로 언젠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 25:26)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8. 박쥐
박쥐는 부간부담(附肝附膽)하는 기회주의자를 말한다.
박쥐는 짐승으로 4개의 다리와 날개를 가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앞다리와 뒷다리 그리고 꼬리 사이에 막이 있을 뿐이다. 이 막을 날개라고 하는데, 사실 새의 날개와 구조상 완전히 다르다. 다리가 4개이며, 어미 뱃속에서 낳고, 젖을 먹으며 자라니까 분명히 짐승이라는 것이다.
■ 부간부담(附肝附膽 / 붙을附, 간肝, 붙을附, 쓸개膽)이란 사자성어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라는 말이다. 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날아다니는 새들과 4발 달린 짐승들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항상 싸우기만 했다. 박쥐는 새 팀이 이길 때는 “나는 비록 짐승들과 비슷한 생김새이지만 날개가 달렸으니 새다.”라고 하면서 새 팀쪽으로 가서 충성을 다하고, 육지동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육지동물 팀이 이기면 “나는 비록 날개가 달렸지만 4발이 달렸으니 짐승이다.”하면서 새 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랜 시간 싸움이 계속 되자 두 팀의 대장은 생각했다. “이렇게 싸울게 아니라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어떨까?” 그때마다 박쥐는 양쪽 팀에 가서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 팀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다.”하며 화해를 못하게 하였고, 이에 두 팀 사이는 더 나빠졌다. 하지만 결국 두 팀은 화해를 하게 되고, 그 동안에 박쥐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새 팀은 박쥐를 4발 달린 짐승이라고 하여 축출하고, 짐승 팀에는 날개 달린 새라고 하여 축출하였다. 결국 박쥐는 동굴 속으로 쫓겨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박쥐처럼 형편에 따라 하나님께 붙었다가 마귀에게 붙었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 중간지대란 없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세상에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중간지대가 없을수록 우리 신앙은 순결해진다(눅 16:13).
9. 곰
힘만을 앞세우는 미련함을 상징하는 곰이다.
여기서 곰은 팔레스틴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곰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매우 사나운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잠 17:12, 호 13:8). 즉 후새는 다윗과 그 종자들을 사나운 시리아의 갈색 곰에다 비유함으로써 지금 심히 약화된 다윗의 실제 전력(戰力)을 압살롬이 직시하지 못하도록 꾀하였다(삼하 16:14).
●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잠언 17:12)
1. 격정에 사로잡히는 자는 야수같은 사람이다. 지혜가 다소 번뜩이는 때가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는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이다. 그 가슴에는 분노가 잠자며 그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있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사람을 놓치면 곰과 같이 되며 ‘새끼 빼앗긴’ 성난 ‘암곰’같이 된다. 그는 곰이 자기 새끼를 귀여워하듯 자기 정욕과 격정의 충족을 좋아하며, 곰이 잃어버린 새끼를 찾을 때 모양으로 자기 격정의 추구에 열심이고, 그 노력이 실패하게 되면 열화 같은 분노로 가득 차게 된다.
2. 그는 위험한 사람이다. 그는 도중에 방해가 되는 자라면 앞뒤를 생각지 않고 무고한 자든 친구든 할 것 없이 무조건 충돌한다. 그것은 마치 새끼 잃은 암곰이 맨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을 강탈자로 보고 덤벼드는 것과 같다.
10. 여우
여우는 거짓 선지자 혹은 교활한 것을 상징한다.
팔레스타인의 황야에는 많은 여우들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이 동물은 언제나 포도농사를 망치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다(아 2:15). 꽃피는 봄이 되면 여우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 포도원에까지 땅을 파고 들어와서는 심지어 포도 줄기까지도 갉아먹는 일들을 예사롭게 한다. 그래서 포도원의 무법자 혹은 파괴자들이라고 지칭을 한다. 은유적 표현으로 본다면 신앙생활을 해(害)하는 어떤 불순한 요소가 있는데, 이 불순한 요소를 꼭 제거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받을 수 있다. 또 이 말씀을 개인이나 가정 또는 교회에 적용하여 본다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우와 같은 세력 즉 교활한 사단의 권세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개입하여 성도의 삶에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세력을 지칭한다(겔 13:3-4).
성도들은 이러한 세력들을 대적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벧전 5:8-9). 만일 깨어 있지 못하면 신앙을 도적질 당하여 형식적인 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여우는 사람이 보면 숨고 보지 않으면 머리를 내미는 동물로서 속기 쉽고 살며시 들어오기 때문에 감지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이 작은 여우와 같은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는 작은 사단의 요소가 우리의 심령에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결국은 그 독소에 오염되어 쓰러지고 만다.
제1도에는 짐승만이 아니라 그 외에 여러 가지가 있다.
11. 마귀
사람 같으나 중심에는 사람 아닌 돼지와 개 모양 같기도 한 것이 마귀이다. 악의 괴수 흉악한 마귀는 창을 잡고 주인이 되어 있다(엡 2:2). 모든 인류는 다 이놈의 지배와 정치 하에서 종노릇하고 있다. 이놈은 죄를 범하는 자(요일 3:8), 욕심의 아비(요 8:44), 살인한 자요, 거짓말하는 자도 되고 거짓말 하는 자의 아비도 된다. 또한 꾀는 자요 참소하는 자며(계 12:9-10), 가라지를 뿌리고(마 13:39), 장래 멸망할 자니라(마 25:41). 이 마귀는 하나님과 원수요 정의의 반역자이다. 아담과 하와를 떨어뜨리고(창 3:1), 욥을 시험하고 예수를 시험하다가 실패하고,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 유다를 망하게 하였다(눅 22:3). 이 악마는 지금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기에 있는 수단과 방법 그리고 능력을 다하여 개인으로, 가정으로, 교회로, 국가로,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간을 붙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을 붙인다. 눈 밝혀 이놈의 정체를 살펴 속지 말아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12. 별
별은 양심을 가리킴이니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심이다(벧전 3:21). 또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니 이 세상 율법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사람은 이 양심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된다(롬 2:15). 우리가 불의한 일을 할 때 책망하고 심판한다. 양심을 따라 순종하면 의롭고 선하게 되나, 죄악의 사람은 마귀의 지배 아래서 그 양심이 둔해지고 약하여 선악을 잘 분별치 못하고 또 안다고 하나 불의한 일을 버리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고전 8:7).
양심은 인간이 마음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며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뱅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후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갈 6:3, 딤전 4:2, 딛 1:15).
13. 눈(창 3:7)
눈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즉 육안, 지안, 영안인데 이 눈은 육안도 아니요 영안도 아니요 지안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 실과를 따먹고 밝아진 눈이다. 세상에 과학 지식은 많으나 그것을 마귀가 사용할 때는 교만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바벨탑을 쌓으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잘 보고 흉보는 눈이남의 눈의하루살이는 걸러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키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데,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마귀 새끼를 양성시키는 기관이라 하였다. 지안을 잘 사용하여라. 네 눈이남바로만 보고 곧게 살펴라(잠 4:25 / 네 두 눈은 진실만을 보아라. 네 눈은 올곧은 것만 응시하여야 한다).
‘눈이 성하면’에서 ‘눈이 성하다’는 ‘아플로스’라는 말로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한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한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단순하게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아 눈을 새롭게 하여 바로 보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빛으로 밝게 비춰야 한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눈을 뜨게 하고 그리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이 감화 감동할 때 사물을 밝게 볼 수가 있다.
세상이 달라지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내 감각의 눈이, 내 영적인 눈이, 내 시각이 바로 되어야 한다. 새로워지려면 바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된다. 눈이 흐려지면 만사가 잘못된다. 아무리 힘써도 소용이 없다. 유명한 삼손도 눈이 빠지고 나니 그 힘이 소용이 없다. 눈이 어두우면 힘도 돈도 자유도 소용이 없게 된다. 우리는 심령의 눈이 밝아야 한다. 주께서 주신 빛을 통하여 초점을 바로 하고 주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고 흡수하고 소유하라.
14. 상투(엡 4:22)
머리의 상투는 옛날 구습을 가리킨다. 술 상투, 담배 상투, 노름 상투, 우상 섬기는 상투 등 이 모든 불의한 것이 곧 죄악의 상투가 되나니 마귀의 손잡이요 죄악의 꼭지이다. 외부로 내부로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죄악으로 빚어진 인간을 그 누가 무엇으로 구원할 것인가? 인간의 도덕으로도, 수양으로도, 노력으로도, 어떠한 세력으로도 도저히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은 여기서 구원받아 정결해 보려고 매우 애를 쓰나 불가능하다. 그러나 감사하게 천사가 찾아왔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옛사람’이란 것은 범죄의 근성을 인격시(人格視)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6:6, 골 3:9 참조). 하지(C. Hodge)는 말하기를, 이것은 ① 중생하기 전 사람임으로 옛 사람이고 ② 타락하여 파상되었고 또 부패한 인간성임으로 옛 사람이라고 하였다.
15. 천사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선한 천사들은 종이다(히 1:14). 하나님은 그 천사들을 봉사 혹은 성도를 ‘돕는 것(diakonian)’을 위해 보내셨다. 천사의 하는 일은 대략 이렇다.
1. 구원 얻을 자 섬기는 일(히 1:13-14)
2.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드는 일(왕상 19:5-8, 눅 22:43)
3. 하나님 자녀들의 길을 호위하는 일(시 91:11-12)
4. 하나님의 종을 원수의 손에서 보호하는 일(왕하 6:15-17, 마 26:53) 유대인들은 각 사람에게 천사가 있다고 믿음(행 12:15)
5. 하나님의 종들을 위태한 곳에서 구원함(행 5:19. 단 6:22)
6. 하나님의 종들을 위험한 곳에서 위로하는 일(행 27:23-24)
7.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일(눅 1:11-13)
8. 하나님의 종들에게 행할 바를 보임(마 2:13-20, 행 1:20, 8:2)
9.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으로 데려감(눅 16:22)
10. 인자가 올 때 택한 자를 보호함(마 24:31)
11. 인자가 재림할 때 함께 옴 (마 25:31-32, 살후 1:7-8)
12. 말세에 죄를 범한 자들을 풀무불에 던짐(마 13:24-30)
하나님은 심판의 명령을 시행하는 집행자로서 천사들이 묘사되어 있다(창 3:24, 민 22:22-27, 마 13:39-49, 24:31, 막 13:27, 창 19:1, 삼하 24:16, 왕하 19: 35, 행 12:23). 문자 그대로 천사는 사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예고, 경고, 지시, 격려, 계시를 나타내신다. 그리고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착한 사람을 보호한다.
16. 비둘기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마 3:16). 성령이 공중의 왕이지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잔인한 새인 독수리와 같은 형체로 내려오지 않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오셨다. 특히 노아 홍수 때에 물이 감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였듯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전달된다.
막 1:10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했다. 여기 ‘비둘기 같이’가 무엇을 수식하는가가 중요하다. ‘성령’을 수식하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 된다. 이때는 예수님에게 임한 성령의 온유함과 평화를 강조하는 의미일 것이다. ‘비둘기 같이’가 ‘내려온다’는 동사를 수식하면 ‘비둘기 같이 임했다’로 된다. 이것은 성령이 천천히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시는 모습을 상징화 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예수님의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나왔다. 예수님께 임하셨던 성령님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향하여 ‘후’ 불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실 때 성령님은 이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임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다.
17. 이마의 표
성경에 보면, 이마에 인을 친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어 계 7:3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해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계 9:4에도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씀도 있다. 또 계 14:1에는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이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하였다.
반면에 짐승의 표 666도 이마나 손에 받는 것으로 나온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것.”이라고 계 20:4에서 말씀하셨다. 이마의 표는 소유권을 나타낸다.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신 6:6-9, 출 28:38).
제2도 회개하는 심령의 각성
영적 각성이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짧은 기간 안에 중생의 경험을 통해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죄로 물든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입기 때문에 많은 경우 사회개혁이 영적 각성과 함께 병행해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결단한 것을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단순한 영접 결단과 참된 중생은 별개의 일이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삶에는 급격한 변화가 수반된다(고후 5:17-19).
위키백과는 회개는 <기독교>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요건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여 죄인임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일을 말한다.
회개는 신에 대한 인간의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서, 죄에서 벗어나 신을 향하는 인간 심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내적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을 배반하여 죄적 존재(罪的 存在)가 된 데 대한 슬픔과 그 죄의 고백과 죄로부터 회복되려는 염원이 있어야 한다.
회개는 신앙에 들어서는 최초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으며, 기독교 교회는 이것이 인간을 구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 보고 항상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빛이 그 마음에 임할 때 애통하며 회개하니 모든 죄악은 물러간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죽은 시체처럼 차가왔던 마음이 뜨거워짐으로 말씀을 깨닫게 되고, 의심으로 인하여 불신했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게 되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지옥에 간다. 회개는 구원의 기초요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성령을 받는 조건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주신 성령을 받으리라. 회개하는 한 사람을 보시고 하늘에서는 큰 잔치를 베푸신다(눅 15:5-6).
여기에 나오는 천사는 한 손에 사람의 해골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것은 한 번 죽고 그 후에 심판받는 사실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다(히 9:27). 죽음의 엄연한 사실을 등한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나 누구든지 죽는 문제를 깨달을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요구하게 된다. 한 손의 칼은 심판의 칼날, 징계의 칼날이다. 발람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가지 않을 길을 가다가 천사의 칼날을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죄 값은 사망이니 심판의 두려움을 알아야 죄를 회개할 수 있다(히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넘칩니다.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가르고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합니다.)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곧 이 말씀으로만 된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좌우에 날선 칼을 들고 싸우려는 용사 모양으로, 수술하려는 의사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눈을 밝혀 징계의 칼날을 보라(계 2:12, 16).
제3도 중생한 사람
마귀와 모든 죄악의 성질은 다 밖으로 쫓겨 나가고 밖에 있던 성령은 그 마음속에 들어와서 점령하신다. 성령의 빛으로 어둡던 마음이 광명하게 되매 추악하던 그 마음이 정결해지고, 복잡하던 그 마음이 잠든 동산같이 고요해지고, 패역한 성질이 온유한 심성으로 변화된다. 고통과 수심이 변하여 평화로 충만하여지고 외부적인 상투가 달아났으므로 과거의 불의한 것은 흉내도 내지 않는다.
바울의 권면과 같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되었다. 이제는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그는 과거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이 되었다.
➊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며
➋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잊어버리고 냉정을 되찾게 되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않는다.
➌ 악담을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 말만을 하며
➍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아니하며
➎ 심술궂고 불쾌한 태도와 성내는 버릇과 싸움과 가시 돋친 말과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➏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용서한 것 같이 서로 용서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기뻐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이 명료해 졌다. 그 마음에는 하늘나라 지점이 건설되었다.
이 땅에 오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할렐루야! 성령 받은 사람은 천사의 손에서 성경을 받아 애독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쓰여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데 유익한 책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신다.
이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방패가 되며, 마귀의 적진을 전멸시킬 폭탄이다. 또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치료하며, 더러운 자를 정결케 하며, 모든 죄와 마귀 손에서 해방을 주신다. 그 가운데 영생이 있는 줄 앎으로 금보다 더 사모하고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보다 더 달고, 꿀송이보다 더 달게 여긴다(시 19:10).
제4도 거룩한 성도
성령이 우리 마음에 내주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십자가가 그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서게 된다. 하나님께서 넘쳐흐르는 영광으로 성령을 통하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져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 높은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도 커서 끝을 볼 수도 없고 또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엡 3:16-19).
❶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영적인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이 영적인 힘은 그들이 부름을 받고 종사하기 위하여 위임받은 일과 의무를 위한 힘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아버지 하나님께서 넘쳐흐르는 영광으로 성령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16)”라고 기도하였다.
그 풍성함은 하나님 안에 있는 권능과 자비와 은혜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으로 곧 그의 영광이 된다. 그리고 이 풍성함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 가운데 은혜로서 직접적인 역사를 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런 모든 일을 살펴 볼 때 인간의 속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강함은 가장 최선의 바람직한 힘이며, 영원 안에 있는 힘 곧 믿음과 모든 은혜의 힘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봉사하게 하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게 하며, 활력과 즐거움으로 그리스도인의 해야 할 바를 수행하게 해주는 힘이다.
❷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가 거하실 것을 기원하였다(엡 3:17). 그리스도는 은혜로운 역사와 영향력을 통해 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항상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 안에 거하시라고 바울은 기원하였다.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이 가장 바람직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법도가 마음에 새겨져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거기서 흘러넘치면 곧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기독교인들의 영혼을 거주지로 삼으신다. 거기 주의 성령이 거하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그곳에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있는 마음에 거하시며 그 믿음을 끊임없이 훈련시키신다. 믿음은 영혼의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하며 그에게 순종하게 한다. 또한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유업을 얻게 된다.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십자가와 구속의 도리를 절실히 깨닫고 그 흘리신 피에 젖은 마음은 항상 정결할 것이다. 날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성결의 능력, 사랑의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생긴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하루하루 자기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수님이 가신 자취를 따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이 철두철미해지고, 그 피가 마음속에 늘 증거 되어 종의 마음으로 주를 봉사할 것이요, 십자가의 지극한 사랑에 녹아져서 살든지 죽든지 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것이다.
제5도 핍박을 받는 성도
성도에게 핍박이 오는 이유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기준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다(요 15:18-19).
교회 안에서 마음 편하게 성도들끼리 만나는 것은 괜찮은데, 어쩌다 교회울타리를 벗어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는 것이 불편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의 삶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였기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도 핍박을 당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고난의 동지가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과 세상은 충돌한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갈 때 반드시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이제 성도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믿고 증거하는 것이다. 마귀가 지배하는 증거를 통해 세상을 깨는 방법이 바로 ‘복음의 증거’이다(요 15:26-27). 복음을 믿고 전할 때에 혈육과 먼저 적대자가 된다(마 10:21-22).
이와 같이 영적 갈등 곧 정신적 갈등이 혈육 간의 관계를 적대시하는데 이르기까지 만들어놓는 것이 복음을 믿고 또한 복음전파로 오는 파장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는 복음전파를 의무로 여겨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에(마 8:44)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을 대적하여 죽게 하려고 달려든다(갈 4장).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여긴다.
이와 같이 가정으로부터 오는 핍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서는 시발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시련을 넘지 못하여 포기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냥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이라면 상관이 없어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타인으로부터 필연코 당하여야할 수모이다. 그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제5-1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마 5:10-12)
예수님이 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들은 2천 년 전의 갈릴리 사람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다. 사도 베드로가 한 이 말씀을 들은 2천 년 전의 소아시아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다. 주기철 목사님이 전한 이 말씀을 들은 70년 전의 그리스도인들도 아멘으로 응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아멘’으로 응답할 것인가? 침묵으로 응답할 것인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보통 생각으로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받아드리기도 힘들다.
보통 생각으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대신 환대를 받고, 욕을 먹는 대신 칭찬을 받고, 반대를 당하는 대신 지지를 받고 악한 말을 듣는 대신 선한 말을 듣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다.
물론 기독교가 고행주의나 염세주의는 아니다. 일부러 반대를 당하고, 일부러 욕을 먹고, 일부러 매를 맞고, 일부러 죽임을 당하기를 원하는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인 종교는 아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정상적인 종교이고 사회적인 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과 사회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종교다.
예루살렘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지만(행 2:47) 극심한 핍박도 받았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행 16:2) 사도 바울과 함께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복 있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당하고, 고난당하고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인지? 남한에서 예배만 참석하면서 칭찬을 받고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인지? 생각하게 한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되는 복이 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천국에 속하고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순수해지고 성숙해지고 강해진다(롬 5:3, 4). 반면 칭찬과 대접을 받으면 받을수록 신앙과 인격이 타락하고(눅 6:26),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신앙과 인격이 순수해지고 성숙해 지고 강해진다(고후 4:8-10). 사도 베드로도 같은 말을 했다(벧전 1:6-9).
제5-2도, 식어지고 변하고 물러가는 마음(엡 6:24)
믿음을 끝까지 굳게 잡아 풍성한 은혜를 얻은 자가 있는가 하면 그만 끝을 보지 못하고 타락하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나오미와 룻과 함께 동행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오르바처럼 말이다. 저는 십자가는 있는데 예수가 없는 빈 십자가요 형식과 의식적 신앙이기 때문이다(계 3:1, 14-17).
그렇게 하다 보니 하나님 생각은 없어지고 세상 물욕이 들어옴으로 내세 관념에 등한해진다. 미끄러져 가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예수를 사모하는 처음 사랑이 없어지고 경우와 이론만 따지고 이웃 사랑이 다 식어져 간다. 반성이 없고, 밀실기도가 없고, 예배 참석에 게을러지고, 교제를 근신치 않고, 언어에도 조심이 없으며, 작은 죄를 가볍게 여겨 솔잎상투를 다시 튼다. 끊었던 주초를 조금씩 맛을 보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자유주의 신앙으로 나아간다.
그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기 좋아하고 남의 비평을 예사로 한다. 처음 믿고 교회에 나올 때에는 겸손하고 은혜가 충만하더니 차차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고 교회 직분을 맡아 교회의 신망을 얻게 되었을 때 자만심이 들어 목사나 장로도 특별한 인간은 아니라고 자기와 목사를 비교하여 교만하게 된다. 나중에는 성령의 빛은 떠나게 되고, 심령이 어두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을 때에 마귀의 유혹과 시험이 조수같이 몰려들게 된다.
그때에 천사는 안타가운 심정으로 경고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예수 배반하겠소?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 모든 행동은 무신론자의 생활이다(히 3:12, 잠 29:1).
계 2장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4절),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신 그들의 죄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의 사랑과 열심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사랑과 열심 그 자체에서 떠났거나, 그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음에 나타내었던 사랑의 강렬한 정도를 잃었다는 것 즉 열의가 전보다 식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태해지며, 당신께 대하여 냉정해지는 것을 볼 때 그의 백성들에 대해 애통해 하시며 슬퍼하신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시며 그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하신다.
제6도 배교자 타락의 상태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고 천사의 경고를 듣지 않고 자기 고집과 강퍅한 대로 나가니 성령은 근심하여 떠나고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아가 돌아다니다가 이전 있던 곳에 와 보니 주인이 없는지라. 곧 가서 저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오니 그 사람의 후환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마 12:43-45).
빈 집은 위험하다.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 놓아도 얼마 가지 못한다. 인생에 주인이 없으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 타락한 자는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된다. 가룟 유다가 그러한 자이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그런 경우다(히 6:4-6).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속된 물건으로 여기고 또한 은혜 베푸는 성령께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뇨.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죄악이란 죄는 고루 짓고 그 양심은 마비되고 단 쇠에 화인 맞은 것 같아서 강퍅하고 완악하여져서 회개하려 해도 회개가 안 된다.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으며 정의의 원수요 외식과 가면과 허위로 죽는 데 이르는 죄를 짓는다(요 5:16, 딤전 4:1-2).
어떤 경우에도 귀신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귀신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놓은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우리 주위에도 귀신들려서 귀신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막 5장에서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5:3-5 / 이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는데, 누구도 그를 매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도 보았으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끊어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5) 그는 밤이나 낮이나 무덤과 산기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뾰족한 돌로 자기 몸을 짓찧어 상처를 내곤 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서 살지도 못했다. 귀신이 그를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무덤 사이에서 살게 만들었다. 밤이고 낮이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온 산을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댔다. 돌로 자기 몸을 상해하는 ‘자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정신도 제 정신이 아니다.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러나 힘은 대단히 세다. 아무도 그를 이길 장사가 없다.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한 가닥 실처럼 끊어버린다.
이게 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이다. 귀신이 우리의 인생과 삶에 주인이 되면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된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 자기 생각을 자기가 통제할 수가 없다. 주인인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귀신의 종노릇했던 배신자 유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실 것이다. 유다는 나중에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귀는 그에게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는 나무에 목을 매여 자살하도록 하여 그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말았다. 이게 마귀를 주인으로 삼은 자의 결말이다.
제7도 배교자의 말로
제7도는 타락하여 망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육신은 병들어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신음하고 영혼은 공포와 불안으로 악마의 위험을 당한다. 마지막 악마들은 무수히 달려들어 십계명을 가지고 정죄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일생 동안 타락 중에 지은 죄의 사슬에 얽매어 벗어날 길이 전혀 없어 몸부림을 치지만 소용이 없다. 한편 형벌의 두려움은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악마들의 아우성을 들을 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며 발악을 한다.
구원을 바라지만 회개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 불쌍하고 원통하게도 실낱같은 목숨이 마침내 끊어지니 유명을 달리한다. 악마들의 쇠사슬에 결박되어 지옥으로 내려간다. 혹시 회개할까 하여 전도자가 회개를 권면하나 그 말은 귓등으로 듣고, 온 가족까지도 더욱 강퍅하여 미신의 행위는 골고루 하면서도 하나님께로는 돌아오지 않으니 천사는 성령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고 말았다.
막무가내라. 무신론을 주장하고 지옥 불을 부인하다가 지옥 불에 빠졌으니 이제부터 지옥을 시인할지라도 때는 벌써 늦었다.
악만 남은 곳이요, 영원히 불타는 곳이요, 물 한 방울을 청구해도 응답 없는 그곳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제8도 장성한 성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인을 잊어버리고 사는 그들에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보내셨다. 그런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두움인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신 주인을 외면했다. 영접하지 않았다(요 1장). 그러나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1-13).
1.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자신 안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 2:5)는 말씀은 ‘네 빈 집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라’는 말씀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좌정하시면 우리는 그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가득 품고 그분을 닮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간다. 온전히 예수님처럼 되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예수로 살게 된다.
2.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예수의 영인 성령을 모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전 3:16).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성전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시면, 우리의 삶도 거룩한 삶으로 바뀌고,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뀐다. 죽음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생명의 자리가 된다. 절망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희망으로 바뀐다. 거짓과 미움이 지배하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사랑의 풍성한 자리가 되고, 불안과 근심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기쁨과 환희의 자리가 된다.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면 모든 게 바뀐다.
제8도는 계속하여 성실하게 주를 위해 봉사하고 철두철미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을 가지고, 성결의 생활로 죽으신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신 주 예수를 그 마음속에 모시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았다는 장성한 신앙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매순간 주로 호흡하고, 한걸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임재의 생활이다(창 5:22-24). 그의 눈앞에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니 즉 성결의 영(요 17:17), 유화(宥和)의 영(마 11:29), 사죄의 영(마 6:12), 희생의 영(갈 2:20),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절대 복종하는 영이다(마 26:39). 또한 진리의 영, 능력의 영,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여 온전히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 변화하는 것이다(고후 3:18).
그렇다고 그 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쇠를 불에다 넣으면 불은 불인데 쇠이고, 쇠는 쇠인데 불인 것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의 감정, 그의 품성, 그의 정신, 그의 생활, 그의 인격이 모두 그리스도로 화할 때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끌어 올리신다.
이제 그는 세상에 사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있는 자이며, 육의 사람이 아니요 영의 사람이다. 예수는 나의 생명, 나의 소망, 나의 지혜, 나의 기쁨, 나의 영광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있고 그는 나의 안에 존재하신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에게도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산 예수 그 안에 내주하사 그가 승리하도록 해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김을 얻고도 더욱 남음이 있느니라(롬 8:37).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에 돌 5개를 가지고 나가서 1개로 죽이고 4개가 남은 것처럼, 성도의 생활은 겨우 1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기고 남는 여력이 있는 것이다.
사면으로 둘러싸임을 당해도 눌린 바 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함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권능이 심히 큰 것이요, 예수의 죽으심과 사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고후 4:7).
바울은 잘 싸웠다. 죄로 더불어 싸우고, 마귀와 더불어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자기와 싸우고, 이단과 싸우고, 속화로 더불어 싸웠다. 바울은 잘 달려갔다. 예루살렘으로, 아라비아로, 소아시아로, 바다로, 육지로, 로마 단두대에까지 달려갔다. 세상의 것 다 잃어버려도 금보다 귀한 참 보배 되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면류관 받아 영복을 누리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볼 것이다.
제9도 성도의 죽음
거룩한 자의 죽음은 그 눈앞에 보배로(시 116:15) 사람이 한 번 죽는다(히 9:27). 의의 면류관은 맡겨진 사명을 다하고 믿음의 경주를 마친 자에게 주신다(딤후 4:7-8).
하늘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나타나 위로하시고 천사는 와서 그 영혼을 영접하신다. 마귀들은 그림자도 없고, 교인들은 최후로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 .”란 찬송으로 임종예배를 드린다. 가족과 친척들은 인정의 울음이 있지만 소망의 작별로 가는 이에게 위로를 준다. “사망아, 이기는 것이 어디 있으며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 하루를 위하여 지금까지 싸워 왔노라. 죽음은 내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요, 죽음은 참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약속이다.” 아내에게 굳게 맹약하여 천국에서 만날 것과 복음을 위해 살라 부탁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정을 합하여 주님께 온전히 바치라 권한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외로운 어머니에게 효도할 것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과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 되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교회 신자들과 친구들에게 전하는 말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밖에는 영원함이 없다고 눈물로 부탁하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멀리 뵈던 천성문이 가까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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