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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성김씨 대종택 답사
안동의성김씨 대종택 개요.
안동의성김씨 종택
개호송 숲과 백운정
사빈서원
백하구려
영양 봉감모전오층석탑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영양 서석지
영양 조지훈 생가
울진 월송정
영덕 괴시리 전통마을
영덕 해맞이 공원
청송 주산지
낙화 - 조지훈
안동의성김씨 대종택
이곳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3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오는 수난을 겪었다.
내앞종택은 조선선비의 기개가 전해져 오는 집이다
안동의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가다보면 고풍어린 기와집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 500년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 김진의 다섯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서 부터이다. 다섯아들이 모두과거에 합격하였다하여 붙혀진 이름이 오룡등과택 이다. 또한 오룡지가 라고도 한다
청계의 다섯아들은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 이다.
청계 김진의 자녀교육은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 안된다 ,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100여명에 달한다. 또한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명에 이른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은 벼슬은 정2품 이상을 하지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을 하지마라는 것이였다
내앞사람들의 구한말 독립운동이야기는 별도의 책으로 써도 남는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백하 김대락은 만삭인 손부와 손녀까지 데리고 간도로 망명한다. 내앞사람 22가구 50여명이 함께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일송 김동삼이다
일송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은 인물이다. 이때 부의장이 안창호와 윤해였다
일송이 향년 60세로 서대문 형문소에서 옥사했을 때 만해 한용운이 유해를 수습하여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
월송 김형식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안동 협동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부친과 만주로 망명햇다. 참고로 안동 협동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곳이다
월송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사회를 맡았다
의성김씨 내앞종택은 풍수적인 조건들은 흠 잡을 것이 없으나 수구가 너무 넓다는 것이다
수구가 넓으면 마을이나 집터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내앞종택은 수구가 터진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수구막이를 인위적으로 조성했다
바로 비보를 한 것이다. 자연에다 인위를 가미하여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비보이다
내앞종택은 내앞 동네앞을 흐르는 반변천 가운데 인공적으로 소나무숲을 조성해놓았다
개호송이라 불리는 이소나무숲이 전형적인 비보풍수의 사례다
참고로 선교장 뒤 소나무숲과 호랑이상 경주최부자집의 괴목숲 도 같은맥락의 비보이다
내앞종택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산실이다. 태실이라고도 한다
오룡지가의 오룡들과 수많은 인물들이 이방에서 태어났다. 이방은 이집에서 가장 정기가 강한 방이다.
고성이씨 종택 산실 의성김씨 종택 산실
산실의 영험함은 다른 명문 고택들에서도 발견된다
경주 양동마을 손중돈고택에도 세명의 인물을 배출한 산실이 남아있고 고성이씨종택 즉 독립운동가 이상룡의고택에도 조선조 재상 세 명을 배출한 이야기가 전한다.
오죽헌의 이이가 태어난 산실도 유명하다
참고로 조선시대 택리지로 유명한 이중환이 뽑은 우리나라4대 길지로는 경북 예안의 도산 , 하회, 천전, 닭실을 꼽았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安東 義城金氏 宗宅
의성 김씨의 종가로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고 형태는 一자 형이다.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안채는 ㅁ자형이고 다른 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가옥 구성이 巳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행랑채에서 안뜰로 통하는 중문이 없어 외부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 사상의 남녀유별, 내외사상을 건물구성에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랑채 출입은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로 직접 갈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이어주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서재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2층 구조는 다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훗날 추가로 연결한 서쪽 끝의 대청문은 지붕이 커, 집 전체 겉모습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은 간략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드문 주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민가 건축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성 김씨 종택, 독특한 설계의 비밀”
학봉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과 예학에 뛰어나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조 10년(1577)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선조 23년(1590)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여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의성 김씨 종택은 그 배치나 구조에서 독특한 점이 많다. 그 이유는 김성일이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 받아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직접 설계도를 그려 귀국 후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조선과는 다른 장점과 매력이 있는 중국 상류층 주택을 모델로 해서 종택을 구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명칭 ; 안동 의성김씨 종택 주소 ; 경북 안동시 임하면 경동로 1949-9 (천전리)
종목 ; 보물 450 자료제공 ; 문화재청
개호송(開湖松) 숲과 백운정(白雲亭)
의성김씨 후손들이 문중의 흥망을 걸고 400여 년 동안 지켜왔다는 이 숲은 후손들의 결의가 그대로 담겨 있다.‘이 숲이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다’는 개호송은 임하댐 아래 반변천 일부에 300m 정도 펼쳐져 호수 가운데 신비한 숲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후손들이 이 숲을 지키는 데 목숨을 다한 것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개호송은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물길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곳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는것)로 만들어진 숲으로, 완사명월형으로 알려진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부족 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됐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개호송 숲을 보호해 온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개호송과 더불어 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백운정白雲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5호) 역시 눈에 띈다. 백운정은 귀봉 김수일(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 김진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년(1568)에 세운 정자로, 전통적 유교문화의 경관을 그대로 담고 있는 정자로 내앞마을과 함께 50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백운정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이 다섯 형제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정자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흰구름 바라보며 登高山望白雲
어버이 그 아래 계신가 그리워 하노라 思親在其下
‘백운’이라는 이름은 세상을 떠난 부친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시구에서 따 왔습니다.
사빈서원(泗濱書院)
사빈서원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후손들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변천] ; 1709년(숙종 35) 동구 밖 사수(泗水)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임하리로 옮겼다가 2005년에 중창 사업 계획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황] ; 2005년 시작된 중창 사업에 따라 임하면 임하리에 남아 있던 강당과 주사를 현 위치로 이건하고 사당,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 등을 새로 짓는 계획이 수립되어 완성되었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 지역의 평면 양식인 ‘ㅁ’자 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사빈서원은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김창균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안동문화재대관』(안동시, 2007)
백하구려(白下舊廬)
[개설] ;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1885년 4월 19일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이다. 당호는 김대락의 호인 백하(白下)에서 따 온 것이다. 김대락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 계몽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변천] ; 1907년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로 변경하였다. 협동학교는 당시 안동 지방의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형태] ;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 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에 방이 1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 아랫방, 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앞채의 아랫방에 접하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격을 높였다. 면적은 1,547㎡이다.
[현황] ;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김종승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사랑채에는 향유(鄕儒)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 사후에 ‘백하구려’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 백하구려는 협동학교를 출범시킨 산실이라는 점과 건축주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을 위해 활약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비록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었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김대락의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안동문화재대관』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종 목 국보 제187호 명 칭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英陽 山海里 五層模塼石塔)
지정(등록)일 1977.08.22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391-6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에 대한 설명입니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 붙여졌었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경북 영양의 선바위와 남이포는 영양군 입안면에 있는 강변 경승지이다. 멀리 일월산에서 발원해 영양을 가로질러 안동으로 흘러드는 반변천은 이 남이포에서 청계천과 만난다.
청계천은 보통 동천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석지 앞을 지나 연당리에서 반변천에 합류해 그대로 반변천이 된다.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남이포이다.
그리고 남이포 절벽 앞에 거대한 촛대처럼 서 있는 바위가 선바위(신선바위라도고 함)이다.
이 선바위와 남이포는 두 강이 만나고 강변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절벽 건너편으로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옛날부터 경승지로 널리 알려져왔다.
옛날에 용의 아들들이 이곳에서 역모를 꾀해 남이장군이 토벌하며 선바위를 만들어 놓았다는 조금 황당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영양 서석지 (英陽 瑞石池 ) - 중요민속문화재 108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정자이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지훈 생가 趙芝薰生家 - 시도기념물 78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조지훈은 경상북도 영양 출신으로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선생은 박목월·박두진과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 주로 민족사의 맥락과 고전미 세계에 대한 찬양과 선(禪)세계를 노래하였는데, 유교 도덕주의의 격조높은 자연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가옥은 몸체와 관리사로 나뉘어 있으며 몸체는 앞면 7칸·옆면 7칸 규모에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전형적인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대문과 중문에는 태극기를 조각하여 채색한 것을 끼워두었고 집 주위는 고풍스러운 담을 둘렀다. 이 집은 이 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조선 중기 인조(재위 1623∼1649) 때에 조정형이 지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3년 복구하였다. 이곳은 조지훈 선생 외에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조승기 선생과 선생의 조부인 조인석 선생 등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분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울진 월송정(越松亭)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고려시대 정자.
1326년(충숙왕 13)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다. 충선왕 때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갑을이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1349년(충정왕 1)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평해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의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옛 군지의 기록에 신라 때 영랑(永郞)·술랑(述郞)·남석(南石)·안상(安祥) 등 네 화랑이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이라 하였다 하며,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월송(越松)이라고 하였다 한다.
월송정은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낡아서 무너지자 1933년 이 고을 사람 황만영(黃萬英)·전자문(全子文) 등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일본군이 강제로 철거하여 터만 남았다. 1969년 울진 출신의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金剛會)의 김정문(金正門)·박선규(朴善奎)·김익만(金益萬)을 비롯한 80여 명이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과 너무 달라 해체하고 1980년 지금의 정자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썼다. 월송정은 2008년 마루 부분의 보수공사를 마쳤다.
[형태] 월송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 약 86㎡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의의와 평가] 경치가 아름다워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과 더불어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 출처 ; 울진군 >
영덕 괴시리전통마을
영덕(盈德)의 북쪽인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으로 1㎞를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고색창연한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전통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목은 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서 원(元)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이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고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金氏, 목은 선생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入住)한 이래,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金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仁祖)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처음 정착하였다. 그 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문벌(門閥)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은 동해안의 3대 평야인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地形)에 맞추어 대부분의 고택들이 서남향(西南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마을을 가로지르는 기와 토담 골목길을 중심으로 2~3백여년 된 '口'字形 구조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어, 영남(嶺南) 반촌(班村)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괴시전통마을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들의 주택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傳承)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와 전통고가 30여 호가 남아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민속마을이다. 해마다 학자들과 학생,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며, 격년제로 마을에서는 "목은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 출처; 영덕관광포털 >
물소와 고택 괴시파 종택
영덕 해맞이공원 - 출처 ; 영덕관광포털
64km 청정해역이 펼쳐지는 강축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전면의 푸른 바다와 뒷면 넓은 초 지, 해송조림지로 열린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해맞이공원 전면에는 야생꽃 2만 3천여 포기와 향토수종 꽃나무 900여 그루가 심어져 아름다움을 더하고 1천 500여개의 나무계단이 파고라와 파고라를, 해안도로와 바다까지를 얼기 설기 엮어 멋진 산책로를 이루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도중에는 전망 테크가 두군데 설치돼 동해바다를 한눈에 관망하면서 사진을 촬영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며, 자연경관과 조화롭게 랜드마크적인 등대 - 창포말 조형등대가 1개소 있고, 특히 가장 선명 하고 멋진 일출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새해에는 물론 평일에도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성배경 / 1997년 산불로 버려진 땅, 희망과 보람의 땅으로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국토공원화사업과 공공근로사업의 하나로 강구면과 축산면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 는 해안도로변 10ha면적에 조성한 해안형 자연공원으로 1997년 화재로 인해 해안변 뿐만 아니라 인근 산 전 역이 불타버리자, 황폐한 전역을 복구하고 「자연 그대로의 공원」조성을 목표로 친환경소재를 이용 바다 접근이 용이한 것에 주안점을 두어 만들었다.
해맞이 공원 창포말등대 강구항
청송 주산지 - 출처 ; 위키백과
주산지(注山池)는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에 위치한 저수지이다. 주산천의 지류의 발원지이며, 주왕산국립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2013년 3월 21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1720년)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경종원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주산지 입구 바위에는 영조 47년(1771년) 월성이씨 이진표(李震杓)공 후손들과 조세만(趙世萬)이 세운 주산지 제언(堤堰)에 공이 큰 이진표공의 공덕비가 있다.
저수지는 그리 작지는 않지만 입구가 협곡이며, 축조 당시 규모는 주위가 1천1백80척 수심 8척이라고 전하며, 수차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제방길이 63m, 제방높이 15m, 총저수량 105천 톤, 관개면적 13.7㏊이다.
주산지 맑은 물은 주산현(注山峴) 꼭대기 별바위에서 계곡을 따라 흘러 주산지에 머무르고 주왕산 영봉에서 뻗친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물위에 떠있는 듯한 왕버들과 어우러져 별천지에 온 것 같이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한동안 속세를 잊고 휴식을 취하기에 그지없는 곳이다.
또한 이 호수는 준공 이후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고 호수에는 고목의 능수버들과 왕버들 20여 그루가 물속에 자생하고 있어 그 풍치가 호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주산지는 비온 뒤의 청아(淸雅)한 풀잎과 별바위를 지나가는 낮은 구름과 안개, 가을 단풍과 저녁노을이 어우러져 신비롭고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준다.
[편집] 문화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우름 뒤에 /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