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 가는 말
이태석 신부는 1962년 10월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나 2010년 1월 향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했으며 형 이태영 씨도 성직자인 신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2001년-2008년 까지 수단 톤즈에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했으며, 수단 현지에서 쫄리(John Lee)로 불렸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가 톤즈로 가겠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왜 하필'이라고 묻는 말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향기에 이끌려서...”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수녀들의 사랑, 자갈치 시장에서 고생하며 10남매를 키운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자신을 이끈 아름다운 향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톤즈로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진흙과 대나무로 움막 진료소를 짓는 것이었으며, 전쟁과 전염병, 굶주림에 찌든 마을 주민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하루 2~3백 명씩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2. 아프리카 수단 톤즈로 가게된 배경
수단은 아랍어로 흑인의 땅이라는 뜻이며, 아프리카 대륙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국가이다. 1956년에는 이집트와 영국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독립국이 되었다. 영국은 수단을 남부와 북부로 나눠 운영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남부는 농토, 석유 등 비교적 자원이 풍부하고 흑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북부는 주로 이슬람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와 경제적인 괴리는 남북전쟁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2차에 걸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2011년 남수단이 공식 독립하며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 이태석 신부가 성직자의 길을 택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보여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Damien de Veuster: 1840-1889) 신부의 일대기를 보고 신부의 삶을 그려왔으며, 신부가 되기전 1987년 의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 신부의 꿈을 안고 먼저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전역하여 광주가톨릭대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고 한다.
2) 그는 1999년 로마 교황청에서 세운 살레시오 대학교 유학 중 케냐 탄자니아로 선교체험을 간적이 있었는데 내전중인 국가인 수단의 톤즈를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지 신부의 안내로 최고 오지인 톤즈를 가보고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가난한 실상을 목도(45도가 넘는 참기 어려울 만큼의 무더운 더위, 습기가 많아 외지인들이 머물기가 너무나 어려운 곳이라는 점) 등 현지의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후 1주일 동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단의 톤즈는 빈곤과 가난의 극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루에 한 끼 조차 먹기가 힘들었고, 학교 건물은 흔적조차 없었으며 병원 건물에는 의사는 없고 약만 있었다고 한다.
3) 한센병 환자 마을을 방문한 후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이후 살레시오회 본부에서 모집하는 선교사에 지원했고 1년 후 이태석 신부는 가난과 폐허의 땅 수단의 톤즈로 향하게 되었다.
3. 이태석 신부의 활동과 업적
.그는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케냐로 향했다.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린 이 신부는 2001년부터 내전이 끊이지 않은 아프리카 수단 톤즈 마을에 한센병(나병)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어릴적 풍금을 다루고 성가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 실력도 남달랐다.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로 끝나는 성가 '묵상’은 중학교 3학년 때 작사·작곡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 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되살려 남수단 초유의 35인조 밴드를 창단하게 된다. 이들 밴드는 남수단 대통령의 행사 때 환영 연주로 맞이하여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으며, 특히 내전에 시달려온 학생들에게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서 인성의 씨앗을 심어준 예수의 실천 그 자체였다. 이태석 신부는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한편 난센병 환자들을 위해서 발에 맞게 신발을 특수 제작하여(전쟁으로 인하여 발가락이 없거나 발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음) 선물하는 등 남수단에서 예수의 행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2008년 10월 휴가차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말기암 선고를 받은 이후에도 톤즈에서 우물을 파다가 완성을 보지 못한 것을 걱정하며 다음과 말했다.
故 이태석/신부 : "집도 없었고, 아이들도 다 헐벗고 다니고, 굶는 아이들도 하루에 겨우 한 끼 먹는 애들도 많았었고..." 라며..... 투병 중에도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하다 “Everything is good”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고 한다.
그는 톤즈의 수단에서 활동하면서 ‘예수님은 학교를 먼저 세우셨을까? 성당을 먼저 세우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종교를 초월한 인류에 사랑을 실천으로 옮긴 예수이자 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4. 그의 제자들의 동향
이태석 신부가 2008년 귀국해 투병하면서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자, 대신 톤즈의 아이들을 한국으로 불렀다. 그 이유는 대학에 보내 공부를 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이태석 신부를 보조했던 토마스 타반 아콧(33세)입니다.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고, 2년 전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제 83회 의사국가시험). 한국에 온지 9년 만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아콧은 깊은 감사의 뜻으로 이 신부의 동상에 자신의 학사모를 씌웠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마스 타반 아콧 : "외과 공부를 하면서 레지던트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에 돌아가서 이태석 신부님의 정신을 갖고 봉사 활동을 할 생각이 있습니다."
토마스와 함께 입국해 공부해온 존 마옌 루벤씨도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 신부의 대학 후배가 2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 신부의 권유를 받고(한국에 가서 의사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 수단 어린이 장학회 도움으로 2009년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또 다른 등장 인물인 아순타 아조크는 이태석 밴드의 단원이다. 이 신부의 도움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아조크는 2012년 한국을 방문해 동료 단원 28명과 함께 이 신부의 묘소에 진혼곡을 바쳤다고 한다. 연주를 채 끝내기도 전 이 신부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흐느끼다 끝내 목 놓아 울어 주위를 숙연케 하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공부한 이들은 고국인 수단으로 돌아가 고 이태석 신부의 삶과 정신을 이어 받아 고국의 의료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이끌어 나가는데 선도자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5. 현재 진행중인 사안들
1) ‘제2의 이태석’을 꿈꾸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 있다. 올해 ‘이태석 봉사상’을 받은 외과 의사 박세업 씨는 15년째 몽골,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모리타니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2007년 출범한 수단어린이장학회는 후원국을 확대해 동티모르 등 10여 개 나라를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태석 신부의 짧은 삶을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있다.
3) 비극의 땅에서 사랑의 씨앗을 틔운 그의 삶은 수단 교과서에 수록됐다고 하며, “나를 위해 울지 마, 네 이웃을 위해 울어 줘"라는 그의 마지막 가르침 역시, 책 속에 남아 그가 말한 아름다운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다.
6. 울지마 톤즈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 인류에 사랑을 몸소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멧세지이고, 그가 한 행동은 보살도의 實現(실현) 이라고 판단된다. 어찌 이런 아름다운 삶과 실천을 몇 글자로 표현할 수 있으리요.
7. 맺는 말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수단은 남수단과 북수단으로 나누어져 같은 종족끼리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였다. 의사이자 성직자였던 신부인 그가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보여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Damien de Veuster: 1840-1889) 신부 일대기를 보고 신부의 삶을 동경해 오게 되었던 것 같다. 살레시오 대학교 유학 중 케냐 탄자니아로 선교체험을 간적이 있었는데 내전중인 국가인 최고 오지중에 오지인 수단의 톤즈를 방문하게 되면서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한 실상을 목도(45도가 넘는 참기 어려울 만큼의 무더운 더위, 습기가 많아 외지인들이 머물기가 너무나 어려운 곳, 하루 한 끼 조차도 먹기가 힘든 생활, 교육여건이 전무한 상태, 병원은 있으나 의사가 없는 현실 등) 하고 이태석 신부는 1주일 동안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수단의 톤즈라는 곳은 빈곤과 가난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이런 상황을 접한 이태석 신부의 마음은 너무나 암울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가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드는 일을 솔선수범으로 앞장서서 이끌어 갔던 것이다. 오랜 내전으로 인하여 눈물이 매말랐고 오히려 상대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이 수치로 여겼던 이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을 감동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인지, 교육은 왜 필요한지, 사람으로서의 성품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앞장서서 ①특히 나병 환자들을 격의 없이 접근하여 치료하고, ②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③악단을 만들어 가르치는 등.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사랑과 인성의 씨앗이 싹틀 수 있었고, 마음속 깊숙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부모이고, 예수님이며, 보살이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종교를 초월한 인류에 사랑을 실천으로 옮긴 예수이자 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이렇게 어둡고 낮은 곳에 사랑과 정열을 쏟느라 자기 몸에 암세포가 퍼지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비록 4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사랑의 씨앗, 그들에게 심어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인성의 씨앗은 영원히 세상을 밝게 하리라고 여겨진다. 널리 알려진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를 그린 다큐로 그의 일대기를 그린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리얼한 작품이다. 시즌 2도 10주기에 맞추어 개봉했다고 한다. 매우 희망적인 사안은 이태석 신부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의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선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긍정적이고 고무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을 접한 독자들은 꼭 “울지마 톤즈”를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찌 몇 줄의 글로 그의 공적을 표현할 수 있으리요. 머리숙여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8. 참고사항
1) 영화 울지마 톤즈는 2011년 바티칸 교황청 내 비오 10세 홀에서 공식 상영되기고 했으며, 구수환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4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감동적인 영화이다. 이는역대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4번째로 많은 관객을 기록했으며 종교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미국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그의 업적을 그리기 위해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으며, 2018년 남수단 대통령 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3) 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톤즈에서는 신부님을 기리는 가두 행진을 벌였는데 군인이나 민병대원들까지도 이태석 신부를 추모하는데 함께 했다고 한다.
참고)https://news.kbs.co.kr/news/故이태석신부10주기…‘울지마톤즈’의후예들,2020.1.14.
https://johigashi.tistory.com